핀란드·스웨덴, 스스로 무너뜨린 북유럽의 이상

나토 가입으로 막내린 진보적 국제주의

2022-06-30     헤이키 파토마키 l 헬싱키 대학 국제관계학・국제정치경제학 교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이하 ‘나토’) 가입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몇 개월 전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에서 대다수 국민들이 중립주의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음에도, 이를 저버림으로써 자국을 대표하는 정체성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 시기 당시 북유럽 국가들은 반(反)군사적인 문명사회의 표본으로 널리 알려졌다. 현대사의 두 극단, 즉 미국과 소련에 비해 높은 도덕적 수준을 갖추고 진정한 사회적 정의를 추구하는 국가로 여겨진 것이다. 특히 이 역할을 가장 두드러지게 구현해온 국가로는 스웨덴과 핀란드를 꼽을 수 있다. 두 국가 사이의 역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왔다. 핀란드는 수 세기 동안 스웨덴 왕국에 속한 영토였는데,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나면서 스웨덴은 이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다. 이후 1814년부터 스웨덴은 대부분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거나, 1864년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의 경우처럼 중립을 고수해 왔다.

핀란드는 1906년, 유럽 국가 중 최초로 보통 선거를 실시한 지역(당시 핀란드는 독립 국가가 아닌 러시아 제국에 속한 자치 영토였다)이었음에도, 그 역사는 스웨덴에 비해 평화롭지 못했다. 1917년 핀란드는 러시아 혁명을 거쳐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18년 적위대(사회민주진영)와 백위대(보수진영)로 분열되는 위기에 처했다. 이후 백위대가 독일의 군사지원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결국 핀란드는 러시아 내전에 휘말렸고 불안정한 상황은 1920년 타르투 조약(러시아로부터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의 독립이 인정된 조약. 에스토니아 타르투에서 체결)으로 갈등이 일단락될 때까지 계속됐다. 

1920년대에는 예상과 달리 민주주의가 복원되면서 사회민주진영이 다시 선거와 연립정부 구성에 참여할 수 있었다. 스웨덴의 경우 이 시기부터 1930년대까지 사회민주주의가 힘을 얻었으나, 핀란드는 점차 혼돈에 접어들었고 1930년에는 파시즘 세력의 반란 시도로 갈등이 정점에 달하기도 했다. 반면 스웨덴의 사회민주당은 1932년부터 1976년까지 무려 44년 동안 단독 혹은 연합 형태로 정권을 유지했고, 강력한 사회개혁과 윤리적인 정부 운영을 구사하며 국제적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꽃을 피운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는 마침내 북유럽 모델의 표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동안 핀란드는 1939년과 1944년, 소련과 두 번의 전쟁(두 번째는 나치 독일의 동맹군으로 참여)을 거치며 사회민주당은 물론 신생정당이었던 핀란드 인민민주동맹이 우세하는 등 격변의 시대를 겪고 있었다. 1944년, 핀란드는 전쟁에서 벗어나고자 총구를 독일로 돌리고 소련에 영토를 내줘야 할 처지에 처했다. 1948년에는 비공산주의 국가로서는 유일하게 소련과 ‘우호 협력 및 상호원조 조약’을 맺는 한편, 마셜 플랜을 통한 미국의 원조를 거부하며 사실상 중립을 선언했다.

 

‘새로운 시대’의 요구

1952년, 당시 핀란드 총리였던 우르호 케코넨(1956~1982 핀란드 대통령)은 평화에 대한 중요한 연설을 남겼다. 이 연설에서 케코넨은 핀란드의 중립성과 북유럽의 정체성을 연결지었다.(1) 핀란드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북유럽 전역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주도권을 쥐고 있던 상황에서, 노동자 운동 등의 사회적 투쟁을 결합한 케코넨 대통령의 비동맹주의 정책으로 핀란드는 스웨덴 모델을 따라 민주적이며 보편적인 복지국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나아가 이 시기의 핀란드는 경제성장, 기술발전, 도시화, 불평등 해소 등 발전을 거듭했다.

스웨덴은 진보적 가치에 기반해 적극적 국제주의를 모색했고, 이는 외교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비록 노르웨이와 덴마크는 나토에 가입했고 핀란드는 소련과 우호조약을 맺었지만, 이런 북유럽식 사회모델이 이성적·계몽적·평화적인 우수한 사회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북유럽 지역의 군사적 긴장도가 중앙유럽만큼 높지 않았던 덕택이기도 했다. 이후 1955년에는 핀란드도 3년 전 노르웨이·스웨덴·아이슬란드·덴마크가 결성한 북유럽협의회에 가입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1950년대 이래로 회원국 국민의 자유로운 국경 이동을 보장하고, 노동시장 및 사회보장시스템 규정을 공동으로 수립해오고 있다.

 

소련의 붕괴, 북유럽 모델에 의문 일어 

하지만 소련이 붕괴하면서, 북유럽 모델의 적합성에 대한 새로운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 의문이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견줄 법한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이 존재할까?”라는 것이었다.(2) 사실 이런 의문은, 이미 1970년대부터 일어난 다양한 변화들로 깊어지고 있었다. 스웨덴에서는 다국적 기업들의 부상과 임금노동자기금에 대한 갈등이 있었으며, 석유 파동 때문에 사회민주당이 44년 만에 처음으로 선거에서 패하기도 했다. 1982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에 재집권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이때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절충안으로서가 아닌,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절충안으로서의 ‘제3의 길’이 논의되고 있었다. 

스웨덴 정부는 거시경제정책을 위해 ‘자유화’라는 도구를 선택하고, 국제수지와 금리에 대한 자본시장의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금융시장의 규제도 철폐하고 나섰다.(3) 핀란드와 노르웨이도 1980년대 중반부터는 스웨덴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탈(脫)규제는 호황-불황의 굴레를 작동시켰고, 1990년대 초 대규모 은행·금융위기로 이어지고 말았다. 특히 핀란드의 경우 소련의 붕괴와 함께 소련과의 경제교류도 붕괴돼버린 탓에 타격이 더욱 컸다. 

냉전이 일단락되자 신자유주의 진영은 ‘핀란드화’에 비난을 쏟아냈다. 북유럽 각국에서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사회 문제의 해결에 긴축재정, 감세, 민영화, 위탁계약, 경영론 적용 등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스웨덴이 냉전 시기에 나토와 비밀리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1990년대에 밝혀졌다. 이후 스웨덴은 북유럽식 사회 모델과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 북유럽의 선두국가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핀란드는 다시 한번 스웨덴을 따라 1992년 유럽연합에 가입 의사를 밝혔고, 이 선택은 2년 후 국민투표에서 가결됐다. 노르웨이도 가입 신청을 했으나, 1994년 국민투표에서 부결돼 무산됐다. 1995년, 핀란드와 스웨덴은 마침내 유럽연합에 가입했다. 핀란드와 스웨덴의 정체성이 북유럽식 중립주의에서 유럽과 서구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물론 이 두 정체성은 과거에도 공존했고, 어쩌면 지금도 공존하고 있을지 모른다. 같은 시기, 두 국가의 나토 가입 가능성에 대한 첫 논쟁이 촉발됐다. 사실 이 두 국가는 1994년부터 나토와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Partnership for Peace)’를 유지해왔다. 특히 핀란드군의 경우 나토의 군사 시스템에 부합되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최근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미국산 전투기 F-35를 총 64기 구매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또한 핀란드와 스웨덴은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걸쳐 나토의 ‘평화 유지 작전’에 협력해왔으며, 나토군이 자국 영토에서 주둔 및 이동 시 군수품을 지원하는 협정을 맺기도 했다.

 

북유럽식 진보적 국제주의, 나토 가입으로 막 내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이들의 반응도, 이 같은 점진적 변화와 연관이 있다. 사회적 합의, 미디어 속 표상, 정치적 수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통해 정치 스펙트럼 전체의 우경화를 위한 기반이 마련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크라이나 전쟁 자체의 여파와, 그것이 유럽 내 여론에 미치는 영향은 사실 오래전 시작된 나토와의 통합과정을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준 것뿐이라고 봐야 한다.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은 그들 스스로에게 중대한 결과를 안겨줄 뿐만 아니라 유럽, 나아가 전 세계의 국제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나토 가입과 함께 북유럽식 진보적 국제주의가 막을 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핵심적인 국가 정체성으로 스웨덴은 중립주의를, 핀란드는 실용주의 노선과 정치적 현실주의를 꼽는다. 과거 핀란드는 냉전의 극복을 위해 한층 적극적이고 독창적인 외교정책을 구사해야 했다. 1975년 유럽안보협력회의가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렸다는 사실도 이를 잘 보여준다. 케코넨 핀란드 대통령은 자국이 동과 서를 이어줄 가교 역할을 하리라고 확신했다. 두 진영이 통합될 때를 대비한 규범적 기반 마련, 신뢰 구축, 무장해제를 통해 안보 딜레마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냉전 시기 북유럽 국가들이 다자간 안보협의체를 구축해 대외관계에 대한 공동의 이해관계 및 연대성을 추구했던 것과, 오늘날 나토 가입을 신청한 것에는 차이가 있다. 이번 결정은 사회를 군사화하고, 나아가 무력을 통해 전쟁을 예방할 수 있을 거라는 새로운 신뢰 체계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토의 확대는 분쟁 당사국들이 합리적 판단을 내릴 거라는 막연한 전제를 토대로 억제 이론(특히 핵 억제력)에 근거를 두고 있다.

여기서 ‘공공의 이익’이라는 개념은 자리를 잃고 말았다. 오로지 억제력을 통해 안정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만 남았다. 억제력이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 우리를 두려워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궁극적으로는 ‘공포의 균형’을 잡겠다는 것이다. 냉전 시기에는 인류를 위협하는 국제적 갈등을 무너뜨릴 대안으로 중립주의가 손꼽혔던 것과 달리, 오늘날의 전략은 상호확증파괴(MAD)라는 편협한 시각에 갇혀 있다. 게다가 그 상대는 러시아다. 그런 만큼, ‘악의 제국과 자유의 영웅 간 대립’이라는 단순화된 구도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다.

 

군사적 재앙 시나리오 배제 못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공격을 가함으로써, 핀란드와 스웨덴을 나토에 안겨주는 역설적인 결과를 도출했다. 그리고 두 국가의 나토 가입은 러시아와 나토, 나아가 러시아와 유럽연합 간의 적대감을 더욱 격화하고 말았다. 1990년대부터 시작된 나토의 동진은, 현재 벌어지는 갈등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단언컨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이래, 세계가 이토록 핵전쟁에 근접했던 적은 없었다. 이대로 더 나아가는 것은 위험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토가 핵 억제력을 약속한다는 건 꽤나 놀라운 일이다. 핀란드와 스웨덴이 가까운 미래에 신뢰 구축이나 무장해제 같은 정책을 다시 구사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북유럽식 이상도 이제는 과거가 됐다.

또한 이들의 나토 가입은 서방과 러시아 간의 대립을 심화시킬뿐더러, 유럽연합을 미국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두 진영으로 갈라지고, 국가들 간 상호의존관계는 더욱 군사화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토의 확대는 러시아만이 아닌, 남반구 및 아시아에 위치한 대부분의 국가들에게도 불안한 일이다. 이 불안감은 솔로몬 제도와 중국이 안보협정을 맺자 호주나 미국이 느꼈던 우려와 다르지 않다. 이런 흐름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이끌었던 일련의 과정을 떠오르게 한다. 지금으로서는 전 세계가 군사적 재앙을 맞는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4) 단기간 내에 결과가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지금의 사건들은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벌어질 위기의 배경이 될 것이다. 

다만, 비동맹주의 국가들이 변화를 일으키는 등 세계적 흐름의 방향을 바꾼다면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핀란드와 스웨덴은 나토 가입을 결정함으로써 역사의 그릇된 측면에 서고 만 꼴이 됐다. 

 

 

글·헤이키 파토마키 Heikki Patomäki
헬싱키 대학 국제관계학 및 국제정치경제학 교수

번역·김보희
번역위원


(1) Urho Kekkonen, Neutrality. The Finnish Position, Heinemann, London, 1970.
(2) ‘Beyond Nordic nostalgia : Envisaging a social/democratic system of global governance’, Cooperation and Conflict, no.35(2), London, 2000.
(3) Magnus Ryner, Capitalist Restructuring, Globalisation and the Third way. Lessons From the Swedish Model, Routledge, Abingdon (UK) - New York, 2002.
(4) The Political Economy of Global Security : War, Future Crises and Changes in Global Governance, Routleldge,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