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실천이 세계를 변화시키는가?”
2022년 바칼로레아 철학 문제를 풀어볼까요? - 문제 1
기술과학의 폭주시대에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어쩌면 시간낭비일 수 있겠지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고향인 프랑스의 대학입시에서는 아직도 삶의 소소한 문제에 대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2022년 바칼로레아 일반계열 철학문제 2개에 대한 모범답안을 게재한다. 모처럼 한때 우리가 격렬하게 논쟁하고 사유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두 나라 입시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필로소피 매거진(Philosophie Magazine)에 게재된 아이다 은자이 철학교수의 논술풀이는 언제까지 모범답안일 뿐, 정답은 독자 여러분의 고민과 사유에 있을지 모를 일이다. |
서론/문제 설정
예술은 생산 활동이 아닌, 창조 활동이다. 유용성에서 존재 의미를 찾는 공작품과는 달리, 예술의 소명은 여기서 자연의 의미로 이해되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다(첫 번째 파트). 하지만 ‘세계’란 있는 그대로, 혹은 어느 정도 기술에 의해 이미 변형이 된, 외재적인 자연적 현실과는 또 다른 것을 의미한다. 세계란 우리가 끊임없이 우리 외의 것들과 맺고 있는 관계들의 총합이다.
가령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연뿐 아니라, 다른 인간존재, 이미지, 언어 등과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 실천’은 특수한 종류의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통상적인 도구적 관계를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결국 세계를 변화시킨다(두 번째 파트). 더욱이 예술적 실천은 스스로도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화들을 겪는다.(세 번째 파트)
1) 예술은 자연을 변화시키거나, 일상의 현실을 변형시키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창조 활동이다.
예술적 실천을 이끄는 힘은 기술적 효율성에 대한 추구가 아니다. 이 점은 예술적 실천이, 유용한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동일시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락시스(Praxis, Pratique(실천)의 어원)’, 즉 주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행위란 것을, ‘포이에시스(Poiesis)’, 즉 주체에 대해 외재적인 성격을 띠는 작품의 생산과는 서로 구분했다.
물론 예술 창조에는 다양한 기술이 활용된다. 그러나 이때의 기술은 노동 혹은 생산의 경우와 달리, 인간이 최대한 제어할 수 있는 형태로, 자연에 일정한 형태(Transformation(변형)이란 한 형태(Form)가 다른 형태로 이행(Trans)하게 하는 것을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연을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인류의 이익을 위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농업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2) 예술적 실천은 세계와의 또 다른 관계 가능성을 제공하며, 우리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변화시킨다.
그럼에도 ‘세계’란 결코 자연, 다시 말해 우리 정신의 바깥에 외재하는 현실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일단 이 단어는 어느 정도 막연한 의미에서, 우리가 생각하거나, 상상하거나, 삶에 투사하는 방식 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세계는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혹은 집단적으로, 타인, 생명체, 자연 등과 맺고 있는 다양한 관계들과 별도로 존재할 수 없다.
생각의 반경을 조금만 넓혀보자. 우리가 다소 모호하게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이런 관계들의 총합이 빚어내는, 언제나 한시적일 수밖에 없는, 어떤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중에는 우리가 학문이라고 부르는 객관적 지식의 추구도 포함된다. 하지만 그 밖에도 예술적 관계 등 다른 수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 실천은 우리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를 변형시킴으로써 세계를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그송이 『사유와 운동』에서 예술가란 사진학 용어로 ‘현상하는 자’의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 구절과도 일맥상통한다. “예술은 무엇을 겨냥하는가? 명확하게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들을 자연 속에서나, 정신 속에서, 우리의 외부에서나 내부에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면? (...) 위대한 화가는 비로소 모든 인류의 보편적 관점이 되거나 혹은 미래에 보편적 관점으로 간주될 일정한 세계관의 기원이 된 이들이다. 몇 명을 예로 들어보자면, 프랑스의 코로 혹은 영국의 터너 같은 화가들은 자연 속에서 우리가 이전에 미처 인식하지 못한 면모를 발견해낸 인물들이었다.”
3) 예술적 실천이라는 개념을 작품의 수용 및 전파 방식으로까지 확대해본다면, 결국 예술은 직접적으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1세기 남짓한 과거부터, 예술 작품의 전파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더 이상 예술은 사회적 특권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예술 교육이나 예술 입문 과정 역시 진정한 민주화를 거론해도 될 정도로 상당한 진보를 이루었다. 매년 뮤직페스티벌이 열릴 때마다 여실히 살펴볼 수 있듯이 말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출신의 평론가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술적 실천의 역사성에 천착해 입증해보인 바와 같이, 예술적 실천은 그 자체로 ‘세계’의 일부에 속하기 때문에, 수많은 진화를 겪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진화들은 현실 자체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영화관의 발명과 대중화로 인한 변화를 들여다보면, 단순히 관객 수 증가 이상의 다양한 결과들을 살펴볼 수 있다.
물론 긍정적인 결과도 있고, 부정적인 결과도 있다. 가령 벤야민이 말한 바와 같이, 영화관은 창조나 표현의 자유를 진보시키고, 대중의 문화 향유를 활성화하는 순기능을 지니는 동시에, 때에 따라 흑색선전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적 실천이 ‘세계’의 한 단면에 해당하는 정치를 변화시키는 데도 기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
오스카 와일드는 『거짓의 쇠락』(Intentions, 1928)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연이란 대체 무엇인가? 자연은 우리를 낳아준 어머니가 아니다. 자연은 우리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다. 바로 우리의 두뇌 속에서 자연은 비로소 생명에 눈을 뜬다. 사물은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 우리가 그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예술에 의해 좌우된다.”
다시 설명하면, 세계란 다름 아닌,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현실에 대해 품는 다양한 이미지들의 총합이다. 이런 경험들은 제각기 주체와 현실 간의 관계가 빚어낸 결과들이다. 따라서 세계는 내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선행해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세계는 오히려 내 시선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예술적 실천은 세계를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글·아이다 은자이 Aïda N’Diaye
프랑스 철학 교수
번역·허보미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