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몫인가?”

2022년 바칼로레아 철학 문제를 풀어볼까요? - 문제 2

2022-06-30     아이다 은자이 l 철학 교수

‘정의(Justice)’는 공동생활에서 필수적인 개념이자, 개인들 간에 극명한 견해 차이가 존재하는 주제다. 한 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역할은 누가 맡아야 할까? 지배집단이 이 역할을 맡으면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할 위험이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각자의 몫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최약자 집단이 이 역할을 맡아야 할까? 이 집단은 그들이 옳다고 여기는 원칙을 관철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최대다수에 이 역할을 맡겨야 할까? 다수도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으며, 소수집단에 해로운 결정을 옳다고 믿거나 나아가 소수집단의 권익을 침해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딜레마 때문에, 이 역할을 국가에 일임하고 싶은 유혹이 존재한다. 국가는 국민 모두의 삶과 관련이 있는 ‘초월적’ 제도로서 최선의 형태로 사회를 조직할 사명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가는 행정, 질서 유지, 공공 서비스 제공 기능도 가지고 있다. 즉 국가는 시민을 통제하는 만큼 시민을 섬기기도 해야 한다. 아이다 은자이 교수가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내는지 살펴보자.

 

정의란 무엇인가?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모두가 동의하는 답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일 것이다. 그만큼 대답하기 어려운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질문이다. 재산세와 근로소득세를 인상하는 것은 옳은 일인가? 어떤 처벌을 내렸을 때 이 처벌이 정당한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올바른 결정이란 무엇인가? 아마 각자 나름의 답을 제시할 것이다.

무엇이 옳은지 결정하는 것이 이처럼 의견이 분분하고 어려운 일이라면 이 일을 국가에 일임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사회 구성원들끼리’ 수평적인 방식으로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의 개념을 정립할 수 없다면 이 임무를 국가에 맡기는 것이 실제로 해결책이 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공동생활을 조직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부의 분배에서 사회적 정의를 보장하는 것이다. 모든 이가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게 되는 형평성을 말한다. 게다가 우리는 사법기관, 즉 국가는 정의를 ‘실현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의는 사회적 정의와 형평성의 문제로 축소될 수 없다. ‘옳은 것’이란 특히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지 결정하는 특권을 어떻게 국가가 가로챌 수 있는가? 무엇이 옳은지, 바람직한지는 개개인이 각자의 영혼과 양심에 근거해 개별적으로 결정할 문제 아닌가? 또한 정의는 국가가 사회를 지배 및 통치하는 제도의 집합체로서 내리는 수직인 결정이 아니라, 시민들 간의 수평적 합의의 대상이어야 하지 않는가?

 

정의는 국가의 고유한 특권 중 하나

국가란 일정한 영토 안에서 사회를 이끌고, 조직하고, 규제하는 역할을 하는 제도의 집합체를 지칭한다. 따라서 국가는 ‘초월적’인 형태를 띠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국가는 사회 외부에 존재하며 사회보다 높은 위치에 있으며 사회를 평화롭게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국가가 사회에 권한을 행사할 때 (사회를 조직하는 국가의 역할은 완수하면서)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면서도 자유를 침해하지 않을 수 있는지 (시민의 자유를 해치지 않기 위해 국가의 권한 행사를 어떻게 제한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다양한 수단을 활용해 국가의 권한을 제한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국가가 합법적으로 권한을 행사할 영역을 제한하는 것이다. 국가가 권한을 독점한 (오직 국가만이 개입할 수 있는) 이런 영역을 국가의 특권 영역이라고 부른다. 이 중 필수적인 영역이 국가가 정의를 실현하고, 사법부를 구성하고, 사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다.

국가는 실제로 사회 외부에 존재하는 중립적 기관이다. 따라서 정의실현을 통해 시민들 간 갈등을 객관적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국가의 사회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도, 분쟁을 해결하고 사회적 계약을 실행하는 역할은 국가가 맡아야 한다고 인정한다. 미국 철학자 로버트 노직을 비롯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다. 따라서 국가는 사회를 지배하는 중립적인 기관으로서 직권을 발휘해 무엇이 옳은지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가 실현하는 정의가 항상 정의로운가? 국가가 그저 직권을 휘둘러 무엇이 옳은지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 국가가 개입할 수 없는 도덕적인 차원도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정의는 개인의 도덕적 양심의 영역

국가는 실제로 사회를 통치하고 규제하며 권한 행사를 통해 사회 구성원 간 분쟁을 해결하는 기능을 하지만 이 기능은 정치적·사회적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정의의 개념은 이 두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의에는 도덕의 영역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은지 결정하는 것은 무엇이 바람직한지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 즉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실천철학(행동철학)으로 부르는 도덕의 영역에 국가가 개입해 우리에게 무엇이 옳은지 강요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거나 도덕적 원칙 및 규칙을 수립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 아니다. 사법기관은 도덕적 기준이 아니라 판사가 적용한 법과 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사회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현한다. 

심판의 대상인 ‘행위’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판결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게다가 자녀에게 유산상속 시 일정 부분을 공제해야 하는 것처럼 법으로 규정된 내용이 도덕적으로는 부당하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반대로 불법체류 이민자나 난민을 돕는 일처럼, 법으로 금지된 일이 도덕적으로는 옳은 일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가 『도덕 형이상학』에서 법과 도덕의 영역을 명확하게 구분했듯, 우리도 우리의 자유를 보존하기 위해 도덕의 영역에서 국가를 배제해야 한다. 국가는 우리에게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지 강요할 권한이 없다.

그렇다면, 정의는 순전히 개별적인, 나아가 주관적인 방식으로 결정되는가? 만일 개인과 사회 전체를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옳은지 결정하는 역할을 국가가 맡지 않는다면, 저마다 각자의 기준을 적용해 각자의 이익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지 않을까? 이런 맹목적인 가치 상대주의를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국가의 직권 행사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정의에 대한 공통된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인가? 

 

정의는 국가가 사회를 대표할 때만 국가의 몫이다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는 누구인지, 국가의 정당성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앞서 우리는 사회를 지배하고 사회에 권한을 행사할 자격이 있는 제도의 집합체로 국가를 정의했다. 따라서 국가는 사회와의 관계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다. 국가가 사회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사회와 국가를 공통점이 전혀 없는 두 개의 본질로 대립시킬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실 국가는 대표성을 띤다. 다시 말해 국가는, 사회로부터 유래했으며 사회를 통치할 뿐만 아니라 대표할 자격이 있는, 즉 사회를 대표해 권한을 행사하고, 사회의 이익을 보장하고, 공공의 이익을 도출하는 제도의 집합체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국가의 정당성은 사회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국가는 더 이상 사회에 권한을 행사하는 지배적인 권위가 아니라 사회와 국민이 스스로 규제할 수 있게 하는 수단(제도와 행정부의 집합체)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정의에 대한 개별적 혹은 도덕적 이해를 뛰어넘어 공동의 정의를 건설하기 위해 직접 혹은 대표자를 통해 옳고 그름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은 시민의 몫이다. 정의는 이처럼 특히 (철학자 존 롤스가 중첩적 합의라고 부른) 토론의 과정을 통해서 혹은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처럼) 각자의 주관성과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때 확립된다.

따라서 무엇이 옳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 아니다. 도덕의 영역인지 사회의 영역인지에 따라 개별적으로 혹은 공동으로 개인이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일반 의지와 공동의 이익을 대표하고 실행하기 위해 정의를 확립하는 수단일 뿐이다. 

 

 

글·아이다 은자이 Aïda N’Diaye 
프랑스 철학 교수 

번역·김은희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