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하지만 채워야 할 삶의 색깔…

<시그마 폴케 : 미지의 세계에서 온 음악>展

2008-12-30     김지연 | 미술평론가

  "미국 사람들은 완벽하게 끝난 작품들을 좋아한다. 비록 그것이 추상일지라도. 잭슨 폴록이나 도날드 저드, 팝아트도 그와 같은 사례들이다. 그러나 유럽의 작가들은 다르다. 그들은 작품을 끝내는 것보다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을 좋아한다. 요셉 보이스나 시그마 폴케는 좋은 사례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면서 보지 못하는 것을 작품에 나타내려고 한다."
<루디 푹스 | 미술사학자, 큐레이터>

 

   
▲ 시그마 폴케, <숯을 한 덩이 집어넣으면 꽃병의 물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종이에 구아슈, 1996

하얀 종이 위로 물감이 흐른다. 그 물감이 채 마르기 전에 또 다른 색의 물감이 겹쳐 흐른다. 색과 색 사이로 선, 혹은 점으로 이루어진 익숙한 이미지들이 끼어들고 다시 그 위로 낯선 색의 물감이 흘러내린다. 어디에서 온 어떤 것이 먼저인지,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인지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좀 더 알고 싶어 가까이 다가서면 그나마 형체를 이루고 있던 선과 점마저 흩어져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어디로 어떻게 흐를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붓 끝에 맺힌 물감 한 방울과 우리의 삶은 같은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되새길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앞을 내다보는 능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늘 불확실한 미래를 앞에 두고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하려고 하지만, 뜻밖의 일 앞에서는 그것마저 무력해지곤 한다.
준비하지 못한 현실 속에서 당황하고 헤매고 있는 사이에, 바로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았던 미래는 어느새 지난 일이 되어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곤 한다. 앞날과 지난 날은 단지 찰나의 차이일 뿐이지만 생생한 지난 날과 달리 앞날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겉으로는 안정된 듯해 보이는 삶 속을 부유(浮遊)하고 있다.

 3년만에 다시 한국 찾은 '폴케'
불확실하게 흔들리는 우리의 삶과 꼭 닮은 이미지를 그려내는 이가 있다. 바로 2005년 아라리오 갤러리를 통해 한국을 찾은 후 3년여 만에 돌아온 독일 작가, 시그마 폴케다. 폴케는 2차대전 이후 격변하는 현대 독일 사회의 모습과 그것에 대한 비판들을 작품의 주제로 삼았다. 또한 추상 표현주의나 팝아트와 같은 다른 장르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시대와 장르를 타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양식을 구축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생존 작가 중 한명으로 꼽히며, 데미언 허스트 등과 함께 미술 시장에서 가장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번에 한국을 찾은 40여점의 구아슈 작품들에도 역시 대립하는 가치의 충돌과 그로부터 빚어진 갈등, 그리고 앞날이 불확실한 개인의 삶들이 폴케만의 양식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삶'의 형상
미술관 벽을 가득 메운 화면들 속에서 다양한 색상의 물감들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춤추듯 흐른다. 화면 위에 어지러이 흩어진 물감들은 화가의 의도가 아니라 다분히 자의적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들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 지는 붓을 들고 있던 폴케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우리의 삶이 어디로 흘러갈 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또한 그가 사용한 불투명한 수채화 물감 구아슈는 각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며 유화 물감처럼 완전하게 불투명하지도, 수채화 물감처럼 완전하게 투명하지도 않은 자신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물감 아래의 사실적인 이미지들은 겹겹이 흐르는 색의 농담에 따라 무자비하게 가려지기도 하고 그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도 하지만, 투명하지 못한 그 색깔들 탓에 결국 어느 하나 뚜렷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점을 하나하나 찍어 그려낸 강렬한 이미지들 역시 그나마 멀리서 볼 때에 어렴풋한 형체가 보일 뿐, 더 알기 위해 가까이 다가 갈수록 원래의 형태는 해체되어 보이지 않는다.
그의 이미지들은 그렇게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마치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자신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더 흐릿해져 알아볼 수 없는, 혹은 그 삶의 한 치 앞조차 불투명하여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자화상 같기도 하다. 삶이라는 넓은 화면 앞에서 계획한대로 멋진 그림을 그리고자 갖은 준비는 다 한 채 붓을 쥐고 있는 우리이지만, 정작 스스로가 떨어뜨린 물감 한 방울이 지금 당장 어디로 흐를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지 않은가. 앞 뒤 문맥도 없이 뜬금없이 붙여진 그림의 제목들은 우리의 삶이 계획한대로, 혹은 준비한대로 차곡차곡 이루어져 가는 듯 보이지만, 사실 삶에 있어서 소설의 문맥과 같이 정해진 흐름은 없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시그마 폴케, <특히 고귀하게 여겨지는 여인네들. 그들의 향기는 불과 몇 센티미터 내에서만 풍기고 아주 가까이 다가가야만 겨우 느낄 수 있다>. 종이에 구아슈, 1996

 '삶'이라는 그림, 멈출 수 없어
그렇게 의도한 흐름도 없이, 일정한 문맥도 없이 폴케의 그림 위에 흘러내린 물감들은 불안하고 흔들리는 삶에 대한 눈물 같기도 하고, 혹은 그 사이를 비집고 흘러 나온 작은 기쁨의 노래 같기도 하다. 강렬한 색의 물감들과 그 사이에 중첩된 다양한 삶의 편린들은 한 화가가 만들어낸 화면속에서 한데 뒤섞여 녹아내리면서 하나의 선율을 자아낸다. 각각의 화면이 빚어낸 선율은 그 이미지에 따라 때로는 강렬하고 매혹적이며, 때로는 쓸쓸하고 연약하다.
한 편의 교향곡에도 강하고 약한 리듬이 교차하듯, 그림과 삶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나 밝은 빛깔로 아름다운 이미지만 반복해서 그려내고 싶지만, 삶이라는 그림을 완성해 가다 보면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지게 마련이다. 가끔은 짙고 어두운 물감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로는 우리가 흘린 물감 한 방울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서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우리를 당황하게 할 때도 있다. 그러한 예측 불가능함은 불안감을 낳고 결국 우리는 그 순간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이 두려워 몸을 움츠리곤 한다.
그러나 각자 완성해야만 할 화폭 하나씩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불확실함과 그에서 오는 불안감에 부딪혀 멈추지 않고, 그 위에 다시금 새로운 색의 물감을 입힐 수 있어야만 한다. 그림 연습과 달리 여분의 종이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에 중간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쉽게 멈출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가능한 한 최고로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야 하기에, 우리는 잠시 어두운 중간의 모습에 연연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작품을 완성해낼 수 있도록 또 다른 색의 물감을 덧입히고 소소한 일상의 모습들을 계속해서 더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불확실함, 그것은 불행이자 희망
지금 눈앞이 불투명하고 흐릿해 보인다고 해도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불확실함이 곧 불행을 말하는 것은 아니므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 순간이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불확실함은 가능성, 혹은 희망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성을 앞에 둔 우리에게는 어떤 종류의 불행이나 행복에 대한 완벽한 준비보다, 어떠한 것이 앞에 오더라도 담담히 다음 색깔을 고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만이 필요할 것이다.
이미 어지러이 흩어진 빛깔과 이미지들 위에서 또 다른 불확실함과 마주하게 될지언정 아직 우리에게는 채워야만 할, 혹은 더 아름답게 채울 수 있는 많은 공간이 남아 있다. 폴케의 그림 위에 남겨진 여백들 역시 그런 의미일지도 모른다.
<10.27-12.26 / 경북대학교 미술관 (☎053-950-7968)>

이달의 풍경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 - 화가들의 천국
08.11.22-09.03.22 / 서울시립미술관
문의 www.pompidou2008.kr / 02-325-1077~9
-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인 퐁피두센터에서 온 피카소, 마티스, 샤갈, 미로 등 20세기 거장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굧 서양미술거장전 - 렘브란트를 만나다
08.11.07-09.02.26 /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문의 www.artist2008.co.kr / 02-2113-3400
- 서양미술의 찬란한 황금기인 바로크 시대의 대표 작가인 렘브란트를 비롯, 이탈리아, 프랑스, 플랑드르 등 유럽 화파의 대가 50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굧 사진의 힘, 21명의 프랑스 현대 사진가들
08.10.30-09.01.11 / 성곡미술관
문의 www.sungkokmuseum.com / 02-737-7650 
- 프랑스 현대 사진을 대표하는 사진가들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회화 못지않은 다양한 주제와 기법으로 사진이라는 장르의 저력을 보여준다.

굧 프랑스 그림책 원화전
08.11.15 - 09.2.15 / 헤이리 네버랜드 픽처북 뮤지엄
문의 cafe.naver.om/neverlandmuseum / 031-948-6685
- 마티유 루셀, 막스 뒤코스 등 현재 프랑스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원화를 통해 텍스트의 보조 역할이 아닌 그 자체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알아본다.

굧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예술적 유산
08.11.14-09.02.14 / 서울대미술관
문의 www.snumoa.org / 02-880-9504
- 영국의 낭만주의 예술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화가, 판화가였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과 함께 그가 당대와 후대에 끼친 예술적 영향에 대해 추적해 본다.

굧 인간풍경 - 2008 서울국제사진페스티벌
2008.12.13-2009.01.15 / 구 서울역사
문의 asyaaf.chosun.com / 02-724-5337~9
- 미술관으로 새롭게 바뀐 구 서울역사에서 '인간'을 주제로 한 세계 각국 50여명의 사진가들의 작품 및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굧 Merry Christmas & HappyNewYear :
Light & Celebration
2008.12.11-2009.01.15 / 두산갤러리
문의 www.doosanartcenter.com / 02-708-5050
- 빛을 매체로 사용하는 작가의 작품들을 통하여 빛의 조형적 특성을 보여준다. 또한 빛이 만들어내는 밝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관람객들이 보다 즐거운 연말을 보내길 바라는 의미 역시 포함되어 있다.

굧 모던타임즈 2008
08.11.15-09.01.11 / 갤러리 한길
문의 http://www.galleryhangil.com / 031-949-9786
- 유망한 세계 현대미술작가 5인의 작품들을 통하여 현대를 살아가기 위한 인간의 기본 조건에 대해 재조명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