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의 귀환

2022-08-01     아가트 멜리낭 l 극작가

뱀파이어는 현대사회가 창조해낸 몇 안 되는 신화적 인물 중 하나다. 뱀파이어는 19세기의 일부 소설에도 등장하며, 이전에도 트란실바니아에 악명 높은 드라큘라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본격적으로 성적, 사회적 타락의 상징으로 알려진 것은 1800년대 말부터였다.

 

1895년 5월 25일, 대영제국-아일랜드 연합왕국과 캐나다의 여왕이자 인도의 황제였던 빅토리아 여왕이 최초로 배우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이날 기사 작위를 받은 헨리 어빙은 연출가 겸 런던 라이시엄 극장의 소유주였다. 

다음날 극장에서는 파티가 열렸다. 정계와 문화계의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 다 모였다. 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전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 엘런 테리, 어빙과 24년을 함께한 영국의 배우 사라 베른하르트, 무대장식가 조셉 하커, 평론가이자 극작가인 조지 버나드 쇼, 드라마로도 제작된 소설 『타임머신』의 작가 허버트 조지 웰스, 아서 코넌 도일, 서머셋 모옴, 토마스 하디, 그리고 단골 공연 관람객들이 참석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 혐의로 강제노동형 선고를 받는 바람에 이날 오지 못했다.

파티 참석자들 중 키가 크고 붉은 머리칼을 가진 한 남자가 있었다. 라이시엄 극장의 관리자이자 어빙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친구였던 그는 2년 후 『드라큘라』를 낸 작가 브램 스토커다. 그날에 모인 사람들 중, 이 붉은 머리 남자가 무려 27년 동안 라이시엄 극장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왕립극장에서 만난 평생의 친구

브램 스토커는 1847년 11월 8일, 태어나자마자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7세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곳곳에 죽는 사람이 넘쳐났던 시절이었다. 노균병이 돌면서 5년 만에 인구의 1/8이 사망했다. 스토커의 어머니 샬롯은 1832년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는 관마다 시체들이 넘쳐나고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뒤엉켜 아비규환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가족의 죽음을 알려주는 요정 밴시의 울음소리를 떠올렸다. 

어머니 샬롯은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고 미혼모를 도왔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유일한 취미는 연극 관람이었다. 유년기에 병을 회복한 스토커는, 성인이 된 후 더블린 성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운명은 왕립 극장에서 스토커를 기다리고 있었다. 1867년 8월 28일에 스토커는 호리호리하고 마른 체형의 천재 배우 헨리 어빙에게 첫눈에 호감을 느끼게 됐다. 둘은 곧 친구가 됐고 어빙도 스토커를 좋아했다. “사랑의 모든 형태가 그렇듯, 그들의 우정은 죽는 날까지 이어졌다.”(1)

그들은 여러 차례 함께 식사하고, 아일랜드를 여행하면서 우정을 키워갔다. 스토커는 극장 리허설에도 참석했고, 1855년에 『풀잎』을 출간한 미국의 유명 시인 월트 휘트먼의 작품도 읽었다. “오늘은 남자들의 사랑에 관한 노래만 부르겠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한 시선 『창포(Calamus)』에 대해, 미국 평단과 사교계는 “외설 덩어리”, “동성애를 향한 예찬론에 불과하다”라고 혹평했다. 그러나 스토커는 휘트먼을 지지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신혼여행까지 포기하고 극장 관리자로

1878년, 스토커는 자신의 운명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라이시엄 극장의 소유자인 친구 어빙이 관리자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스토커는 과거 오스카 와일드의 청혼을 받기도 했던, 미모의 플로렌스 발콤브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스토커는 이 제안을 받자 급히 결혼식을 올린 후, 신혼여행도 포기하고 런던으로 왔다. 

당시 런던은 거대한 산업 도시이자 만국박람회를 두 번이나 치른 당대 최고의 도시였다. 온 사방이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느라 난리였다. 화려한 궁과 슬럼가, 가난과 부가 공존했다. 윌리엄 터너의 작품 ‘비, 증기 그리고 속도’ 속의 풍경 그대로였다. 남편을 잃은 빅토리아 여왕은 검은 옷을 입고서 세계에서 가장 큰 제국을 통치했다. 수도인 런던은 끝없이 확장됐고, 그에 따라 증기와 냄새도 확산됐다. 으르렁거리는 세계, 인구 6백만의 도시, 끝나지 않는 전쟁. 아편 전쟁, 보어 전쟁, 페르시아와 아프간을 상대로 한 전쟁, 크림 전쟁…

19세기 말에 극장들이 밀집해있던 웨스트엔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귀족들이 즐겨 찾던 이 구역은 쓰레기, 안개, 마차, 파이 장수, 고함소리, 불평, 웅덩이, 음악가, 왕진 의사, 창녀로 가득 차 있었다. 곱게 화장한 댄디 보이가 사륜마차에서 내리면 페티코트가 진흙탕에 젖었다. 하수도 시설이 이제 막 갖춰졌을 때다. <이코노미스트>는 공공 자금으로 하수도 시설을 건설하는 것에 반대했다. 

6개의 코린트 양식 기둥과 황금색 돌이 있는 라이시엄 극장은 주변의 혼란스러운 환경과 대비되는 피난처 같은 곳이었다. 빨간색과 황금색으로 된 좌석 2,000여 석은 인상적이면서도 마음을 안정시켰다. 오늘 저녁, 헨리 어빙과 엘런 테리는 햄릿 공연으로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것이다. 어빙은 평생에 걸쳐 햄릿을 연기했다. 스토커는 미친 사람처럼 일에 몰두했다. 기획자, 비서, 홍보 담당자, 그리고 때로는 놀림의 대상으로 일인다역을 소화했다. 쉴 때는 고딕풍으로 장식된 극장의 방 한 개를 빌려 ‘비프 스테이크 모임’을 주최했다. 어두운 색 가구와 스테인드글라스, 성당용 의자가 있는 방이었다.

스토커의 아내 플로렌스가 출산하자 아이의 이름을 어빙 노엘이라 지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부부 사이는 소원해졌다. 스토커가 극장 일과 클럽에 빠져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이다. 1881년, 스토커는 첫 저서를 출간했다. 아동을 위한 8개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 『Under the Sunset』이다. 출간 후 반응이 좋았고, 스토커는 뒤이어 장편 소설 12편과 중단편 소설 30여 편을 냈다.

 

가장 높은 곳에 앉은 가장 낮은 사람들

1880년대에는 매일 밤 극장에서 공연이 열렸다. 공연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으나, 관객의 좌석 위치가 달라졌다. 노동자와 서민들은 1층 입석에서 밀려나 가파른 맨 꼭대기 좌석을 차지했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Londres la nuit 런던의 밤』(Payot-Rivage, 2013)에서 이런 좌석들을 “다이빙대의 공간”에 비유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그 아래 좌석에, 귀족들은 2층 정면 좌석이나 칸막이 좌석에 앉았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계층 간 격차가 심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영국 노동자들의 평균수명은 28세를 넘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맨 꼭대기, 가장 높은 좌석에 앉은 노동자와 서민들의 목소리는 높았다. 그들은 쉽게 흥분했으며 파업과 시위를 벌이고, 참정권을 요구했다. 그들은 결국 참정권 획득에는 성공했다. 1884년 제정된 세 번째 선거법으로 성인 남성의 60%가 투표권을 얻었다. 

독일에서 추방돼 런던으로 간 칼 마르크스는 영국국립도서관에서 온종일 시간을 보냈고, 마르크스의 친구이자 작가인 윌리엄 모리스는 수공업의 부활을 꿈꾸며 ‘미술과 공예 운동’을 조직했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새로운 사회를 꿈꿨다. “앞으로는 아무도 악취가 풍기는 누추한 곳에 살지 않고 냄새나는 누더기를 입지 않는 세상이 올 것이다.”(2)

이 모든 시대적 변화로부터, 브램 스토커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오직 극장 일에만 주력했으며, 믿을만한 사람들만 곁에 뒀다.

1885년에 어빙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 역을 맡아 연극 무대에 올랐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부터 영국식 전원주택에 이르기까지 네오고딕 건축 양식이 크게 유행했던 시기였다. 프랑스에서는 건축가인 외젠 비올레르뒤크가 카르카손 지역을 재건하고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을 작업했다. 그러나 ‘고딕’ 소설 독자들은 점점 줄었다. 1830년도부터 지하 예배당, 성, 묘비, 잠옷을 입은 영웅 등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들었다. 

 

“피에 굶주린 괴물이 런던 거리를 배회한다”

그래도 현대적이고 환상적인 세계와 공상과학의 세계를 보여주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은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1819년에는 존 폴리도리의 『뱀파이어』 속의 모험에, 1872년에는 쉐리단 르 파누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카밀라』의 절망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뱀파이어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뱀파이어는 낭만적이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뱀파이어 이야기를 읽었다. 

당시 런던은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새로운 종족의 피에 굶주린 괴물이 거리를 배회했다.” ‘잭더리퍼’는 창녀들의 목을 조르고 배를 갈랐다. 희생자가 속출했지만 수사는 더디게 진행됐고, 온 사방에 살육의 냄새가 진동했다. 범인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2년 전에 등장한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가 환생한 것일까? 여왕의 의사, 인상주의 화가, 폴란드의 이발사일까? 경찰은 범인의 서명이 포함된 100여 통의 서신을 받았지만, 진짜와 가짜를 가릴 수 없었다. 범인은 어느덧 유명 인사가 됐고 영국 최초의 연쇄살인범으로 기록됐다. 경찰은 희생자들의 목에 물린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창녀 두 명은 고객이 자신들의 목을 물고 도망갔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1890년 1월 1일, 기묘하고 퇴폐적인 예술이 지배하는 ‘외설스러운 90년대(The naughty nineties)’가 시작됐다. 빅토리아 여왕이 재위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빅토리아 시대는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스토커는 리처드 버튼 경을 만났다. 동양 여행가이자 인류학자인 버튼 경은 여러 언어에 능통한 매력적인 인물로, 『카마수트라』 무삭제 버전을 최초로 번역했으며 인도설화집 『비크람과 뱀파이어』를 각색했다. 버튼 경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버튼 경이 말할 때면 윗입술이 말려 올라가, 긴 송곳니가 마치 단검의 날 같았다.”(3) 

스토커는 헝가리 출신의 동양학자로 아랍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전문가이면서 여왕의 첩자였던 아르미니우스 방베리와도 교류했다. 그는 스토커에게 요한 크리스티안 폰 엥겔의 『몰도바와 왈라키아 공국의 역사』를 가져다줬다. 왈라키아 공국은 트란실바니아의 알프스 산맥 기슭에 위치한 국가로, 블라드 드라큘(드라큘라)의 아들인 가시 공작 블라드가 다스리는 왕국이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라이시엄 극장은 6번째 미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지쳐버린 스토커는 휘트비로 휴가를 떠났다. 휘트비는 요크셔에 있는 작은 고기잡이 항구로, 성녀 힐다가 세운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수도원으로 유명했다. 선원들이 묻혀 있는 묘지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해변에는 선원 전원이 사망한 러시아의 배가 정박했었다는 말도 돌았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카르파티아 산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4) 스코틀랜드의 크루든 베이에 도착한 스토커는 스테인즈 성에서 묵었다. 성주 에롤 백작은 이 성에서 상류층 인사들과 교류했다. 밤이 깊어지자 개들이 울부짖었다. “내가 드라큘라다.”

 

상류층을 위협하는 외국인, 드라큘라

지금으로부터 125년 전인 1897년 5월, 스토커는 뱀파이어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드라큘라』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뒀고, 스토커를 저명한 추리소설가인 에드가 앨런 포우에 비견할 만한 작가로 끌어올렸다. 이 작품의 서간체를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었으나, 스토커의 다른 작품들이 묻혀버릴 만큼 인기를 끌었다. 스토커는 어빙이 드라큘라 백작을 연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작품을 읽어본 어빙의 첫 마디는 “끔찍하군!” 이었다. 이후 둘은 이 작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빙은 드라큘라에게서 자신과 닮은 점을 발견했을까? 뱀파이어의 포로였던 조너선 하커가 스토커였다는 사실을 눈치챘을까? 뱀파이어의 키스가 성적인 행위, 욕망, 쾌락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엘런 테리가 루시, 스토커의 부인, 그리고 뱀파이어의 키스에 중독된 현명한 미나에게 영감을 줬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최면 상태, 몽유병, 강경증, 기억상실증… 스토커는 장 마르탱 샤르코의 강의를 참고했음이 틀림없다. 조셉 브로이어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연구’도 2년 전에 발표됐다. 

스토커는 드라큘라 작품을 통해 자신의 꿈, 욕구불만, 열망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남성 간의 동성애, 여성 간의 동성애, 쓰리썸, 오럴 섹스, 소아성애 등이다. 뱀파이어는 음탕한 것을 좋아한다! 뱀파이어는 포로의 피를 오염시킨다. 뱀파이어에게 물린 사람은 뱀파이어처럼 해롭고 타락한 존재로 변한다. 뱀파이어는 외국인이다. 아일랜드인 또는 아랍인 또는 동유럽의 공산주의자가 트래펄가 광장에서 망토를 휘날리며 영국의 상류층을 위협한다. 그는 야만적이고 정체불명의 대상이며, 폐허 속에 살면서 휘파람 소리를 내는 박쥐다. 그는 죽음과의 키스이고, 과거에는 매독을 오늘날에는 에이즈를 의미한다. 그는 예수의 수난상을 무기로 휘두르는 적대적인 사회에 반기를 드는 유일한 존재다. 

1905년 10월 13일, 헨리 어빙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는 도중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했다. 브램 스토커는 청교도주의, 매독, 폐렴을 겪으면서 살다가 1912년 4월 20일 사망했다. 그리고 10년 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2년, 역사상 최초의 드라큘라 영화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가 개봉했다. 이 영화의 제작에 대해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플로렌스 발콤브 스토커는 재판을 통해 모든 복제 필름의 폐기처분 결정을 받아냈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드라큘라의 신화를 창조한 것은 브램 스토커가 맞지만, 드라큘라의 이야기에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한 것은 무르나우와 토드 브라우닝을 비롯한 여러 뛰어난 감독들이기 때문이다. 

 

 

글·아가트 멜리낭 Agathe Mélinand
극작가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2) Personal reminiscences of Henry Irving, Bram Stoker, Heinemann LTD, London, 1906.
(2) Oscar Wilde, L’âme de l’homme sous le socialisme 사회주의 하에서의 인간의 영혼, Fayard/ Mille et Une Nuits, Paris, 2013.
(4) Dracula, Bram Stoker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J’ai lu, Paris, 2012. Archibald Constable 1897. 이후의 인용 문구도 이곳에서 발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