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무능을 파고든 초국가적 민간기구
20세기 서구사회가 상상한 국가는 경찰 모자를 쓰고, 간호사 가운을 걸치고, 설계자의 양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교육수준과 많은 인력을 갖춘 국가는 융단 장갑 속의 무쇠 같은 손으로 통치를 했다. 하지만 통치수단을 모조리 빼앗긴 지난 20년, 국가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즉흥 안무를 선보였다.
국가는 2020년에 코로나19 유행 방지 명목으로 국민에게 통행금지령을 내라고, 공급망에 대한 경찰 수색을 명령하고, 국경을 폐쇄했으며, ‘비용을 개의치 않고’ 예산을 낭비했다. 국가는 마스크와 간호사를 맘대로 동원하여 보건 통행증 도입을 강제하기도 했다.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 때 국가는 민간은행을 국유화했고, 2012~2015년 유로화 위기 때는 유럽연합(EU)의 재정과 금융 의무에 전혀 구애받지 않은 채, 유럽중앙은행이 통화를 계속 찍어내도록 해 통화 안정성의 성역마저 짓밟았다. 국가는 재판 없이 테러 용의자를 감금하고, 사전 사법 검토 없이 수색을 강행하며, 2018년에는 ‘노란 조끼’ 시위대에 맞서 샹젤리제에 장갑차를 배치했을 뿐 아니라 러시아 기업을 국영화하기도 했다. 국가는 칼레에 있는 아프가니스탄이나 시리아에서 온 난민들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면서도, 우크라이나인들은 두 팔 벌려 환영하기도 한다. 친 러시아 언론의 활동을 금지하기도 하고, 미국의 전쟁 범죄를 폭로한 줄리언 어산지에 대한 박해에는 동조하기도 한다.
국가가 뭐든지 할 수 있나?
국가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정말 그럴까? 실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980년대 중반부터 국가는 어리석고, 망가져서, 진퇴양난에 빠진 채 무능을 자처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1) 국가는 계획 수립 기능을 무너뜨리고, 효율적인 행정(군수품과 세관 등)을 어지럽혔으며, 1985년 이후 직원이 100만 명이 넘는 약 1,000여 개의 공기업(은행, 보험, 중공업, 통신, 에너지 등)을 민영화해서 산업정책을 포기하다시피 하지 않았던가?(임금 총액에서 공공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1985년 10.1%에서 2016년 4.9%로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2)
국가는 유럽중앙은행의 편에 서서 통화 주권을 포기하고, 법인세율을 50%에서 절반 수준인 25%까지 인하하고, 1985년~2022년에는 최고 한계 소득세율을 65%에서 3분의 1에 해당하는 45%까지 줄이지 않았던가? 경쟁을 신성시하는 유럽 조약에 서명해서 시장 법칙의 수호자로 국가의 격을 스스로 낮추지 않았던가? 독자적인 외교를 포기하고 외교 기능을 미국의 우선순위에 맞추면서, 1966년에 드골 장군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탈퇴해 사수한 군사 지휘권을 도로 내주면서 NATO에 순순히 복귀하지 않았던가? 정말 그렇다. 정치 지도자들은 최근까지도 이런 결과에 매우 흡족해했다.
위기를 활용한 통치가 국가 힘의 근원
하지만 이토록 무력한 국가가 어떻게 그토록 많은 일을 해 낼 수 있었을까? 스스로 팔다리를 잘라 내 아무런 통치 수단도 남아 있지 않은 국가가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이 마법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 힘의 근원은 다름 아닌 위기를 활용한 통치다. 위기에 의한 통치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국가는 긴급사태를 선포하고 강권적 개입을 일삼았다. 2008년, 미국의 공공 당국은 규제 완화로 파산한 금융계를 구제하려고 국민의 고혈 같은 세금을 쏟아부어 7,000억 달러의 부실 채권을 사들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유럽연합은 2009~2015년에 유럽연합의 경제 법칙을 깨도록 유럽 각국을 압박했다. 공공 부채 공동부담이나 중앙은행의 차환 대출, 중앙은행의 무분별한 화폐 발행, 금융시장에서 파산 위기에 처한 회원국에 대한 구제금융, 그리스와 키프로스에 대한 자본 통제로 마스트리흐트 조약(유럽의 정치통합과 경제, 통화 통합을 위한 조약. 1991년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유럽공동체 정상들 간에 합의되었다-역주)의 기준이 무너졌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아이러니로 냉전의 빙하기가 종결되자 엉터리 지식인들이 확언했던 ‘행복한 세계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격동이 이어졌다. 일부 국가들은 지난 30년 동안 꼬리를 무는 격변에 시달려야 했다. 구소련권 국가에서 있었던 충격 요법과 대량실업, 1998년 러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금융 붕괴, 2000년 인터넷 거품 붕괴, 2001년 9월 11일 테러, 같은 해 아르헨티나의 파산, 2008~2009년의 ‘경제 대공황’, 아랍의 봄, 2012~2015년의 유럽 채무 위기, 코로나19 팬데믹, 기후 재해, 소말리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등의 국가에 대한 서방의 군사 개입은 말할 것도 없다.
경제, 화폐, 사회, 지정학, 환경이나 보건과 관련된 위기는 공공 당국이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게 만든다. 우유부단하기로 이름난 독일 연방정부도 지난해 4월에 100억 유로의 공적 자금을 선뜻 투입해 러시아 가스 회사의 독일 지사인 가스프롬 게르마니아(Gazprom Germania)를 신탁 관리하기로 하고, 러시아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제재로 인해 불안정해진 가스 공급 사업자들을 구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나섰다. 이렇듯 위험이 닥치면 규제의 끈은 다소 느슨해진다. 경제 일간지 <레제코(Les Échos)>(2022년 5월 24일자)는 긴축 재정을 권고했던 유럽연합의 재정협약이 2023년에도 유예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유럽위원회는 “전쟁의 충격을 완화하고 러시아에 대한 화석연료 의존에서 벗어나도록 각국에 충분한 자유를 부여하겠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위기를 맞은 정부가 행동을 이행하려면 개입에 관해 스스로 세운 걸림돌을 애써 비껴가야 한다. 그 첫 번째 걸림돌은 긴축과 끊임없는 조직 개편으로 뼛속까지 병이 든 행정부다. 행정부는 공무원 증원보다는 투자 은행이나 컨설팅 회사에 의존한다. 프랑스 전력 공사 자본 재편 검토도 컨설팅 업체에서 진행했다.(3) 2021년 2월에 프랑스 퓌드돔주 게르자에 있는 의료용 산소 실린더 공장의 구매처를 물색한 것은 누구였던가? 경제재정부가 아니라 PwC라는 기업이다. 2020년 12월 백신 물류는 누가 운영했던가? 공공 기관이 아니라 시트웰(Citwell)이라는 기업이다.
민간구제위원회에 밀려난 대중의 분노
두 번째 장애물은 공공 활동을 시장 규칙(긴축 재정, 진입 장벽이 없는 공공 계약)에 종속시키는 과도한 프랑스 내부와 유럽 연합 차원의 법률이다. 만약 평상시에 국가 지도자가 이런 규칙을 어긴다면 무책임한 포퓰리스트라는 낙인이 찍힐 것이다. 하지만 긴급 상황에서는 냉혹하고 주도면밀한 자들만 살아남는다. 경쟁입찰은 공공 조달법에 따른 신성한 의무이지만, 2020년 3월부터 2021년 5월까지 시트웰과 JLL사는 경쟁입찰 없이 총 800만 유로에 달하는 사업 18건을 수주했다. 민간으로 가는 돈은 마법처럼 어디선가 솟아난다. 여러 사회부처에서 보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과 조직컨설팅에 대한 지출을 20배나 늘렸다.(4) 맥킨지(McKinsey)사가 예방접종 캠페인 준비를 포함해 1,230만 유로 규모의 사업을 추진하는 데 드는 컨설턴트 비용은 하루 평균 2,708.26유로로, 고위 공무원의 하루 평균 임금 362유로의 7배에 달한다. 영국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2016년 국민투표를 치르고 2019년 4월 사이에 브렉시트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컨설팅 업무에 무려 1억 1,500만 유로를 지출했다.(5)
위기에 처한 국가는 화학적으로 순수하게 신자유주의 국가와 시장 개입주의를 표방함에도 일시적으로 행동 방침을 조정해 기능을 중앙에 집중시킨다. 하지만 국가의 목적은 한계를 극복하는 것일 뿐이다. 2020년 3월부터 시행된 공공지원과 경기부양책에 들어간 비용은 1,570억 유로에 달한다. 2019년 교육·생태·국방·경찰·사법 예산의 총합보다도 많다. 재무부는 프랑스 급여 생활자의 최대 절반 인구 앞으로 지원금을 지급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이고, 국가적인 조처의 목적은 공공부문이 경제를 원활히 운용하게 돕는 것이 아니라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 민간 부문으로 돈이 흘러가게 만드는 것이다. 보건 위기 때 정부가 조성한 연대기금은 2곳 중 1곳이 넘는 기업의 현금흐름을 확대한 것으로 밝혀졌다. 부분적 실업 제도, 매출 손실에 대한 보상 등의 조처와 세수 감소로 정부 부채가 급증했지만, 국가는 70만 개 처 이상의 민간 기업 융자액 1,450억 유로를 보증할 여력이 있다.(6)
기업을 구제하려고 시장을 등지는 것은 민간 부문을 위협하는 불길을 공적 자금으로 진압하는 소방 국가의 좌우명에 걸맞을 것이다. 은행에 대한 조건없는 구제금융으로 긴축정책이라는 대가를 치렀지만, 서브프라임 위기가 시작된 지 약 15년이 지난 지금, 금융 규제 완화 논리가 다시 횡횡한다. 공적자금조달로 2020년에 민간 부문의 소규모 호텔·음식점업과 공업 산업을 구제했지만, 공립 병원과 그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죽을 지경이다. 일상으로의 복귀하면 행정부는 긴축 재정 정책을 실행하겠지만, 기업 경영자들은 여전히 행정부를 구슬려서 이익을 얻을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2014~2015년 재무부 장관 시절에 노동법 같은 공정 경쟁 규칙을 무시하고 중앙 정부의 자원을 동원해 미국 기업 우버(Uber)의 프랑스 설립을 추진하지 않았던가?(7)
2020년 봄에 아시아에서 극심한 공급·물류대란이 확산하자 정부는 재고를 확보하고 일시적으로 유통을 통제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2020년 4월 13일 프랑스 대통령의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약속에는 제약 부문 이전이나 주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공공 통제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이후 러시아에 대한 유럽의 제재로 발생한 에너지 위기로 정부의 속내가 드러나고 말았다. 7월 초,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복권사업자(Francaise des Jeux) 지분을 매각해 민영화한 후) 부채에 허덕이는 프랑스전력공사(EDF)를 국유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었는데, 유럽위원회가 돌연 공공 보조금에 대한 견해를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27개국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를 줄일 것을 촉구하면서 “에너지 위기로 손해를 입은 기업 지원을 위한 새로운 국가 지원 임시 프레임워크의 필요성과 범위에 대해 회원국들과 협의할 것”이라고 밝혔다.(8)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30년이 지난 지금, 지배계급이 조성한 ‘민간 구제위원회’가 대다수 서방국가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 이런 정부 붕괴 형태는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분석한 ‘영구적인 예외 상태’와는 다르다.(9) ‘정부 붕괴’와 ‘영구적인 예외 상태’ 둘 다 법보다 정치를 우선시하도록 하고 규범을 무력화한다. 하지만, 아감벤의 ‘정부 붕괴’는 경찰의 권력과 보안 강박관념에 초점을 맞추지만, ‘민간 구제위원회’는 코로나19 범유행 동안의 화장지 공급과 ‘노란 조끼’의 탄압에 관해 무분별한 법령을 제정했다.
언론인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의 주장처럼 정부가 자본주의 개혁과 제국 전쟁을 이끌 속셈으로 잇따른 재앙에 넋을 잃게 만드는 이른바 ‘충격 전략’도 아니다. ‘민간 구제위원회’는 이미 신자유주의화 된 세계에 개입해 혼란을 초래하는 경제질서의 모순을 가리려 한다. 하지만 ‘충격 전략’과 마찬가지로, 그런 행동은 대규모 언론 동원을 전제로 한다. 목표는 당면 사안을 ‘주요 위기’의 단계로 격상하고, 긴박감을 심어줘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긴급 정책 결정을 합리화하는 것이다. 이런 권력 형태의 원천은 철학자 피에르 다르도(Pierre Dardot)와 크리스티앙 라발(Christian Laval)이 2008년 금융 위기에 관해 주장한(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몰락을 가져왔어야 마땅한) 격변과 같은 급진적인 신자유주의 논리가 아니다.(10) 이런 형태의 권력은 더 이상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쌓아 올린 사회 복지 성과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에 일시적으로 걸린 제동을 해제할 리도 없다.
공황 시기의 정부는 행동에 명분을 심어 준 효과(폭동이나 자연 현상을)가 수그러들고 나면 분명히 한 시대, 즉 세계화 시대의 승자로 각인될 것이다. 그런 국가는 국민을 희생해 경쟁 시장, 강력한 통화, 긴축 재정, 그리고 해외 이전의 혜택을 제도화하는 초국가적 기구를 대변하는 시대착오적인 지위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지정학적 긴장의 고조로 전 세계 공급망에 야기된 혼란은 정치의 역할, 주권 의식, 그리고 대중의 분노에 불씨를 지핀다. 하지만 대중의 분노는 아직도 강력한 정치적 힘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민간 구제위원회에 밀리고 만다.
글·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부편집장
그레고리 르제프스키 Gregory Rzepski
고위 공직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Laurent Bonelli, Willy Pelletierdir, 『L’État démantelé 망가진 국가』 , La Découverte-Le Monde diplomatique, Paris, 2010.
(2) 국립통계연구소(Insee), ‘Tableaux de l’economie française 프랑스 경제 연표 2020년; 프랑스 감사원’, ‘L’État actionnaire 주주국가’, 2017년 1월.
(3) ‘EDF와 기타 사업자를 위해 국가가 130억 유로를 동원’, <La Tribune>, Paris, 2022년 7월 7일.
(4) Éliane Assassi, ‘Un phénomène tentaculaire : l’influence croissante des cabinets de conseil sur les politiques publiques 확산하는 현상: 공공 정책 부문에서 증가하는 컨설팅 기업의 영향력’, 컨설팅 기업에 관한 특별 조사 위원회 상원 보고서, Paris, 제578호, 제1권(2021~2022), 2022년 3월 16일.
(5) National Audit Office, ‘Departments’ use of consultants to support preparations for EU Exit‘, 2019년 6월 7일.
(6) 감사원, ‘La Situation et les perspectives des finances publiques 재정 상황 및 전망’, 2021년 6월; Hind Benitto, Benjamin Hadjibeyli, Matéo Maadini, ‘Analyse des prêts garantis par l’État à fin 2021 국가 보증 대출 분석(2021년말) ’, Trésor-Eco, Paris, 제303호, 2022년 3월.
(7) ‘경제재정부에서 있었던 마크롱과 우버 간의 비밀 ‘거래’ 폭로’, <르몽드>, 2022년 7월 12일,
(8) ‘REPowerEU: action européenne conjointe en faveur d’une énergie plus abordable, plus sûre et plus durable 더 저렴하고 안전하며 지속 가능한 에너지를 위한 유럽 공동 행동’, 유럽위원회, 2022년 3월 8일.
(9) Giorgio Agamben, 『Etat d’exception 예외 상태』, Seuil, Paris, 2003.
(10) Pierre Dardot, Christian Laval, 『Ce cauchemar qui n’en finit pas 이 끝나지 않는 악몽』, La Découverte, Paris,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