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혁명 순교자들, 여기 잠들다

2022-08-01     니콜라 도퓌야르 외

베이루트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혁명 순교자 묘지’가 있다. 팔레스타인의 주요 인물들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를 지지했던 해외 조직원들의 유해가 1960년대 중반부터 묻혀 있는 곳이다. 

 

‘혁명 순교자 묘지(공식 명칭)’는 레바논 중심부에 있는 작은 팔레스타인 구역으로, 베이루트 국제공항으로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따라 자리 잡고 있다. 혁명 순교자 묘지에는 다양한 종교, 국적을 지닌 이들이 묻혀있다. 이곳에 안장될 자격은 단 하나, 팔레스타인 국민의 대의를 위해 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은, 먼 나라의 위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창립된 1960년대 후반부터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베이루트에서 무장세력을 철수하기로 결정한 1982년 여름까지, 그 잊힌 시대에 살았던 남성과 여성들이 그곳에 잠들어 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요구했지만, 복지·구호·군사·예술 관련 망명 기관을 설립해서 난민촌 인구를 움직였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민족주의적이고 혁명적이며 제3세계적인 이상을 가졌다. 레바논 공산당(LCP)과 협력해서 레바논 좌파와 유대 관계를 맺었다.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가 이끄는 파타(Fatah: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중 최대조직, ‘팔레스타인 민족해방운동’-역주)와 팔레스타인 좌파는 그들 진영으로 레바논과 아랍을 비롯해 수많은 해외 조직원들을 끌어들였고, 그들 중에는 방글라데시, 일본, 라틴 아메리카에서 온 해외 조직원들도 있었다. 

파타의 해외업무부서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단일 국가 ‘민주 팔레스타인’ 설립이라는 혁명적 목표로(1)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부인 엔리코 베를링구에르(1922~1984), 루이지 롱고(1900~1980) 등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는 팔레스타인의 지식인 무니르 샤피크(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계획수립센터 전 간부)가 최근 발표한 회고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2)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소속 ‘팔레스타인 순교자 및 부상자 가족 지원재단’이 1965년 설립됐다. 해당 재단은 샤틸라 난민촌 인근 토지를 레바논 정부로부터 임차해, 팔레스타인 국립묘지인 ‘혁명 순교자 공동묘지’를 만들었다. 임차한 토지의 일부는 1985~1987년 시리아의 지원을 업은 레바논 시아파 정당 ‘아말 운동’과 이에 맞선 팔레스타인 간 전쟁 때 파괴됐고, 팔레스타인 수용소로 쓰였다. 1990년 레바논 내전이 끝난 후 묘지 부지는 고속도로 재정비 계획으로 없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도시 재개발 계획으로 면적이 줄기도 했다. 

‘혁명 순교자 공동묘지’는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추모소’ 두 곳과는 다른 장소다.(3) 두 추모소 중 하나는 난민촌 남쪽 입구에 있는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 희생자들의 추모비 겸 공동 묘혈이다.(4) 다른 하나는 난민촌 중심에 있는 샤틸라 이슬람 사원이다. ‘파타’와 ‘아말 운동’ 간 충돌로 사망한 약 500명이 이곳에 묻혀 있다. 그리고 ‘혁명 순교자 공동묘지’는 난민촌의 동쪽, 자말 압델 나세르 거리 옆에 있다. 

 

종교, 국적, 시간을 초월한 순교자들

혼잡한 도로 옆 ‘혁명 순교자 공동묘지’는 레바논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운전자들에게 잘 보이지도 않는다. 쓰레기장, 철공소, 나무, 검문소 등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묘지 입구에는 담장 위로 팔레스타인 국기와 노란색과 흰색의 파타 정당기가 걸려 있다. 오래된 돌벽 가득 아라파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입구 안으로 들어서면 소나무와 종려나무 가지가 둥글게 하늘을 가리고 있고, 갑작스레 평온한 분위기로 바뀐다. 베이루트 남쪽 외곽지역을 따라 나 있는 고속도로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희미해진다.

낮은 무덤들 사이로 조그만 길이 이리저리 나 있다. 흰 돌 위에 검은 글씨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어떤 무덤은 어수선하고, 어떤 무덤은 정돈돼있다. 무덤 옆 나무줄기와 황토벽에는 팔레스타인 조직원들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무덤 위에는 고인의 가족들이 놓은 올리브 가지들이 놓여 있다. 묘지 관리인 가족은 정문 옆집에 산다. 아버지와 아이들은  골목길에서 나뭇가지와 낙엽을 태우고, 어머니는 물청소를 한다. 찾는 무덤이 있으면, 그들에게 확인해야 한다.

묘지의 골목길은 시간을 초월한다. 이곳에는 주로 이스라엘의 공격이나 레바논 내전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묻혀 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지도부의 주요 인물인 카멜 나세르, 카말 아드완, 무하마드 유세프 알나자르의 무덤이 줄지어 있다. 이들은 1973년 4월 9일 모사드의 작전으로 베이루트 베르됭 지역의 건물에서 처형됐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 <뮌헨>(2005)에서 이 사건을 다뤘으나, “역사적 진지함이 부족하다”라며 팔레스타인에서 혹평을 받았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의 대변인이자0 『태양 속의 남자들』(프랑스 학자 고 미셸 쇠라가 1985년 새롭게 번역해 악트 쉬드(Actes Sud) 출판사에서 펴냄-역주)의 저자 가산 카나파니의 무덤이 있고, 그 옆에는 조카 라미스의 무덤이 있다. 라미스는 1972년 7월 8일 베이루트에서 있었던 모사드의 공격에 휘말려 17세로 사망했다. ‘붉은 왕자’ 알리 하산 살라메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파타’ 지도부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팔레스타인 중앙기구와 미 정보부 간 관계 책임자였으며 1971년 미스 유니버스 우승자인 조지나 리즈크(레바논 출신)의 남편이었던 살라메는 1979년 1월 22일 베이루트에서 모사드의 공격으로 인한 자동차 폭발로 사망했다.

샤틸라 순교자 묘지에는 팔레스타인, 아랍인, ‘외국인’이 국적도 종교도 무관하게 공존하고 있다. 시리아의 시인 카말 케르 베크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베크는 시리아사회민족당(SSNP) 당원이자 전설적인 레바논 문학잡지 <알시르(Al-Shi’ir)>를 창립했다. 베크 옆에는 시인 아도니스가 잠들어 있다. 그는 「현대 아랍 시의 모더니즘 운동」이라는 획기적인 박사 논문을 썼지만, 1980년 11월 베이루트에서 암살당했다. 시리아의 시인 니자르 카바니(1981년 12월 15일 레바논 주재 이라크 대사관 공격으로 사망)의 아내이자 뮤즈였던 발키 알라위도 이곳 묘지 입구에서 몇 미터 거리에 잠들어 있다. 

묘지에는 아시아인들도 있다. 무덤뿐 아니라 기념비, 추모 작품도 있다. 유해는 없지만 일본 적군파(JRA) 투사들을 추모하는 추모판이 땅에 설치돼 있다. 야스다 야시유키와 오쿠다이라 쓰요시, 오코모토 코조 등은 1972년 5월 텔아비브 공항에서 무장공격을 주도해 약 20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중 현재 오코모토 코조만 생존해 있다. 일본 적군파는 당시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과 연계돼 있었고, 2001년에 해산 발표가 있었다.

카말 무스타파 알리 기념비도 있다. 이를 통해 수많은 방글라데시 출신 조직원들이 팔레스타인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민전선-총사령부(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의 친시리아 분파)의 조직원인 무스타파 알리는 보포르 성(남레바논의 유명한 전략적 장소로 12세기에 십자군에 의해 건설됐고 1982년 여름부터 이스라엘이 점령함)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2004년 레바논 헤즈볼라와 이스라엘군 사이에 포로 교환이 있은 뒤에야 송환돼 가족에게 돌아갔다. 

 

죽음이 삶을 사로잡는 곳

마지막으로 유럽인 차례다. 프랑수아즈 케스트망은 1950년 5월 2일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났다. 묘지 관리인은 케스트망의 무덤이 있는 묘지 안쪽을 가리키며 ‘프랑스 여자’라고 말했다. 케스트망은 무정부주의적 노동조합주의자의 손녀이자 공산주의자의 딸이다. 그녀의 어머니 이네스는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국제 여단(좌파 인민전선 정부를 돕기 위해 구성된 국제적인 좌파 연대 의용군-역주)에 참여했다.

마르세유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케스트망이 처음 레바논 땅을 디딘 것은 1980년이다. 다음 해인 1981년, 케스트망은 팔레스타인 적십자에서 일하기 위해 이스라엘 국경 인근 남레바논 티르에 위치한 라시디야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찾았다. 그해 프랑스로 돌아갔던 그녀는 1982년 여름, 이스라엘이 침공을 감행하자 다시 레바논으로 향했다. 시리아와 베이루트를 거쳐 티르로 간 케스트망은 “돌아가는 길은 황폐하다”라고 일기에 썼다. 이 일기의 일부를 발췌해, 1985년 12월 파브르 출판사에서 『팔레스타인을 위해 죽다』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다.(5) 

1981년 1월부터 1982년 9월까지 레바논에서의 여정을 기록한 이 책에는 1948년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이 겪은 피해와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실종된 이야기가 담겨있다. 케스트망은 격앙된 표현과 차분한 어투를 번갈아 쓰며 장기화된 전쟁 속 라시디야 난민촌의 상황을 묘사했다. 난민촌에서 무기 훈련도 받았던 그녀는 프랑스로 다시 돌아갔지만, 1984년 9월 23일 이스라엘에서 무장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4명의 파타 조직원들과 함께 보트를 탔다.

당시 점령 상태였던 사이다 마을 근해에서 이스라엘 해군과 첫 번째 충돌이 발생했고, 그들은 전투를 계속하기 위해 육상으로 피신했다. 피신 과정에서 전투원 2명이 생포됐고, 3명이 사망했다. 사망자 3명 중 케스트망도 있었다. 향년 34세, 프랑수아즈 케스트망은 그녀 자신의 바람대로 순교자 묘지에 묻혔다. 약 3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이슬람교로 개종한 그녀에게는 종교적으로도, 군인으로서도 영예로운 장례식이었다.

매년 프랑스 조직원들은 1982년 9월에 일어났던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을 추모하기 위해 레바논을 찾는다. 그러나, 이들 중에는 같은 프랑스인으로서 이곳에서 죽은 프랑수아즈 케스트망에 대해 아는 이들이 드물다. 프랑스 조직원들은 북미나 남미, 아시아에서 온 친팔레스타인 활동가들 곁에서 팔레스타인 백파이프 소리를 들으면서 난민촌 입구에 있는 옛 쿠웨이트 대사관 옆 공동 모혈에 꽃다발을 내려놓는다.(6)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겨우 100미터 정도 떨어진 혁명 순교자 묘지의 존재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해당 지역에서는 추모행사가 매년 열린다. 샤틸라 순교자 묘지는 ‘국제적’인 곳이었지만, 이제는 팔레스타인인들만 머물고 있다. 죽은 자의 공간은 얼마 남지 않았고, 산 자들은 이제 그들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불과 몇 제곱미터의 땅에 엄청난 금액을 지불하고 있다. 샤틸라 순교자 묘지는 죽어가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잊혀졌다고 하는 제3세계적이고 혁명적인 시대의 목격자인 샤틸라 순교자 묘지의 역사는 때때로 현재의 사건과 교차한다. 

지네 엘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의 축출에 큰 역할을 한 튀니지 총 노동조합(UGTT)은 1988년 4월 26일 남레바논에서 사망한 움란 킬라니 무카다미의 유해를 2012년 4월 튀니지 카르타고 공항에서 맞이했다. 벤 알리 정권은 그전까지 가프사 광산 분지 출신으로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에 참여했던 무카다미에게 국가적 헌사를 표하지 않았고, 무카다미의 유해는 샤틸라 묘지에 묻혀 있다가 24년이 흐른 뒤에야 튀니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2012년 4월 튀니지에 혁명이 일어나자, 무카다미의 유해는 순교자 묘지를 떠나 가스파로 되돌아갔다.(7) 

2021년 5월, 레바논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폭격을 받던 가자 지구와 식민 지배를 받았던 셰이크 자라 지역의 예루살렘 주민들과 연대해 순교자 묘지 근처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2022년 5월 30일,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은 묘지 골목에서 시게노부 후사코의 석방 축하식을 열었다.(8) 

샤틸라 순교자 묘지에서는, 여전히 죽음이 삶을 사로잡고 있다. 

 

 

글·니콜라 도퓌야르 Nicolas Dot-Pouillard
정치학자(베이루트)
피에르 토나첼라 Pierre Tonachella
영화인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Le Fatah, la révolution palestinienne et les juifs 파타, 팔레스타인 혁명과 유대인들』, Présentation de Alain Gresh, Éditions Libertalia et Orient XXI, Paris, 2021.
(2) Mounir Chafiq, 『Min-Jamar ila Jamar. Safahat min Dhikriyat Mounir Chafiq (De la braise à la braise. Pages des souvenirs de Mounir Chafiq) 숯불에서 숯불로. 무니르 샤피크의 기억의 페이지』, Centre d’études pour l‘unité arabe(아랍통합연구센터), Beyrouth, 2021(아랍어).
(3) Laleh Khalili, ‘Lieux de mémoire et de deuil. La commémoration palestinienne dans les camps de réfugiés au Liban 추억과 애도의 장소. 레바논 난민촌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추모식’, in Nadine Picaudou, 『Territoires palestiniens de mémoire 기억 속 팔레스타인 영토』, Éditions Karthala et Ifpo, 2006.
(4) Sabra and Shatila massacre, 1982년 9월 16일 18시부터 9월 18일 8시까지 레바논의 기독교 우익(팔랑헤주의)정당인 카타이브의 민병대가 팔레스타인인 및 시아파 레바논인 민간인 최소 460명, 최대 3,500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사브라는 학살이 일어난 베이루트의 동(洞) 이름이며, 샤틸라는 그에 인접한 샤틸라 난민촌을 의미한다. 이 사건,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이스라엘의 방조(또는 협조) 책임을 잘 묘사한 작품으로 아리 폴만(Ari Folman)의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Vals Im Bashir)>(2008)이 있다.
(5) Françoise Kesteman,『Mourir pour la Palestine 팔레스타인을 위해 죽다』Favre, 1985년 12월 1일.
(6) Coline Houssais, ‘Des Highlands au Proche-Orient, un instrument en héritage. L’épopée militaire de la cornemuse 전쟁에 얽힌 스코틀랜드 악기 ‘백파이프’의 서사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21년 11월호.
(7) Serge Halimi, ‘Soudain, la révolution 갑자기 혁명’, <마니에르 드 부아르> n° 160, 2018년 8~9월호 ‘Le défi tunisien 튀니지의 도전’편.
(8) 시게노부 후사코(重信房子, 1945~) 극좌 성향의 테러리스트, 혁명가. 적군파의 한 분파인 일본 적군(JRA)의 수반으로 ‘적군파의 여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저서로는 자서전 격인『사과나무 아래서 너를 낳으려 했다』가 있다. 2009년, <한겨레21>에서 복역 중이던 그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http://h21.hani.co.kr/arti/world/world_general/2555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