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역사적인 첫 좌파 대통령의 향방은?

전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 대원들의 환멸은 사라질까

2022-08-01     레아 가스케 외

정부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평화협정을 체결한 지 5년 반이 흘렀다. 하지만 표적 암살, 정치적 분열, 빈곤 확산으로 전 게릴라 대원들 사이에는 실망감이 만연하다. 한편, 콜롬비아 역사상 최초로 좌파 대통령 선출과 중도좌파 연합 집권으로 희망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다. 

 

2022년 3월 7일,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생명과 평화를 위한 순례 행진’이 열렸다. 전국에서 모인 옛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인민군(FARC-EP) 전투원 200여 명은, 전설적인 고무장화와 카키색 전투복 대신 흰 티셔츠 차림이었다. 일부는 꽃으로 장식한 이 ‘유물들’을 손에 들고 있었다. 행진 관계자는 참가자들을 향해 “교통에 방해가 안 되게 주의하세요!”라고 외쳤다. ‘순례자들’은 보고타의 주요 대로 7번가를 질서 있게 행진했다. 옛 게릴라 대원들은 합법 시위와 평화주의를 준수했다. 

행진대의 손에는 살해당한 동료들의 흑백 초상화가 들려 있었다. ‘마누엘 안토니오 곤살레스 부엘바. 1988-2019’. 31년의 삶 중 12년을 게릴라로 보낸 인물이다. “내 아들은 살해당하기 전 오토바이 택시 기사로 일했고, 막 딸을 얻은 참이었다”라며, 마누엘의 아버지가 아들의 사진을 손에 든 채 이야기했다. 갸름한 얼굴에 콧수염을 기른 50대의 그도 27년간 무장투쟁에 참여했다. 지금 그는 거주지역에서 코무네스(Comunes, 정식 명칭은 공동대안혁명군) 대표를 맡고 있다. 코무네스는 평화협정 체결 이후 FARC 출신 게릴라 단원들이 세운 정당이다. 

 

국가는 옛 전투원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FARC는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2010~2018)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2016년 11월 이 협정이 최종 비준된 이후, 320명의 옛 FARC 대원이 암살당했다. 재편입 과정에 동참한 협정 서명자 1만 3,000명의 2.5%에 달하는 수치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 암살사건들 중 단 한 건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이처럼 대규모 암살이 자행되자 콜롬비아 헌법재판소는 2022년 1월 ‘위헌 상황’을 선언했다. “전직 게릴라들의 기본권이 지속적으로 대거 침해당하고 있으며 관계 당국이 이를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을 인정한 것이다. 당국은 전국보호연합에 경호원 1,800명을 모집했다. 이들은 주로 전쟁이 끝난 후 경호 훈련을 받은 옛 게릴라 단원이다.

하지만 이런 콜롬비아 헌법재판소의 드문 결정 자체가, “국가가 무장 해제한 전직 전투원 보호에 실패했다”라는 사실을 인정한 셈이다. “경호원 한 명씩 배치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정부가 평화협정을 준수했다면 이 모든 것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불법무장단체는 해체되지 않았다. 코카 잎 재배 전면 대체도 진척이 없다.” 평화의 순례 행렬이 의회와 법원이 있는 볼리바르 광장 인근에 다다랐을 때 훌리오 세사르 오르후엘라(일명 페레리코 나리뇨)가 설명했다. FARC 사령관 출신 오르후엘라는 쿠바에서 진행된 평화협정 협상에 참여한 FARC 대표단 일원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5년이 넘었다. 콜롬비아 사회는 진보의 길을 가고 있을까?  2021년,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킬 위험이 있는 세제개혁에 반대해 전국적인 총 파업 운동이 벌어졌다. 2022년 3월,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처벌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얼마 전인 6월 26일, 공산주의에서 중도좌파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정치 동맹 ‘역사적 협약’의 후보 구스타보 페트로와 프란시아 마르케스가 각각 콜롬비아 역사상 최초의 좌파 출신 대통령과 최초의 흑인 여성 부통령으로 선출됐다. 

하지만 게릴라와의 협상을 거부했던 알바로 우리베 전 대통령의 충실한 후계자인 이반 두케(민주중도당, 우파)가 집권했던 지난 4년 간 평화 프로세스는 중단됐다. 쿠바에서 협상한 평화협정의 규정을 적용하는데 필요한 107개의 법률 중 두케 대통령 임기 동안 공포된 법률은 5개에 불과하다. 콜롬비아는 여전히 폭력과 무력 분쟁으로 신음하고 있다.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조사에 따르면 적어도 4건의 무력 분쟁이 남아있다. 비정부 단체인 민족해방군(ELN), 인민해방군(EPL), FARC-EP의 분파들 그리고 마약 카르텔인 걸프단(AGC)이 여전히 정부군과 대치 중이다.(1) 2021년, 유엔(UN)은 콜롬비아에서 7만 3,300명의 강제이주민과 150명의 대인지뢰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집계했다.(2) 

익명을 요구한 한 분쟁 전문 역사학자는 “최근 분쟁이 가장 잠잠했던 2017년 이후,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불법무장단체는 줄었지만, 실상 세력은 더 커지고 있다. 폭력이 다시 대두될 모든 조건이 충족됐다. 이미 시작됐을 수도 있다”라고 분석했다. 이제 무장투쟁의 목적은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정치적 이상 실현이 아니라 국가가 포기한 지역들을 통제해 코카 잎 재배, 마약밀매 등 해당 지역들에서 성행하는 경제활동에 세금을 부과하기 위함이다. 민간인으로 복귀한 옛 전투원들은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들의 사회 복귀는 쉽지 않다.

보고타의 테우사키요 지구에 있는 주점 ‘루비안카(Lubyanka; 구소련의 모스크바 중심부에 있는 비밀경찰 본부)’에서 파스토르 알라페를 만났다. 다소 도발적인 이름의 이 주점은 전직 전투원들이 운영한다. FARC의 군대는 7개 사단으로 구성되며 각 사단 휘하에 십여 개의 부대가 존재했다. 알라페는 이중 한 사단인 마그달레나 메디오 진영의 사령관이자 FARC의 최고위 기관인 사무국의 일원이었다. 지금 그는 정부와 FARC의 대표가 동수로 구성된 재편입국가위원회(CNR)에서 코무네스당의 대표를 맡고 있다. 

 

공동사업도, 개인사업도 어려운 현실

장갑차 4대와 8명의 경호원이 입구를 지키는 루비안카 2층에서는 알라페의 이름을 딴 맥주 알라파스가 제조된다. 테우사키요 지구에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옛 게릴라 대원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양조장과 술집이 많이 들어섰다. 루비안카 인근의 카사 알테르나티바는 로하(적)맥주, 카사 데라 파스는 트로차(오솔길) 맥주를 주조한다. 쿠바 아바나에서 평화협상을 진행할 때 FARC가 대부분 농민 출신인 부대원들의 경제적 재편입을 위해 계획한 것은, 양조장이 아니라 농축산 협동조합이었다.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옛 FARC 대원들이 소규모 개인사업을 할 가능성도 열렸다. 평화협정에 서명한 이들은 협동조합이든 개인사업이든 800만 페소(약 2,000유로)의 초기 자본금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알페스는 “2021년 말, 3,855명의 서명자가 참여하는 공동사업 116건이 CNR의 승인을 받았다. 이중 80%가 농축산분야의 사업이다. 총 사업비용은 435억 페소로 이중 27.5%의 출처는 국제협력기금이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개인사업의 경우, 정부기관인 국립재편입청이 약 4,000건의 사업을 승인했다. 전직 FARC 대원의 절반 이상이 사업을 시작한 셈이다. 제36부대 옛 부대원들이 안티오키아에서 제작하는 라몬타냐 백팩을 비롯한 몇몇 대표적인 사업은, 콜롬비아 당국의 훌륭한 평화 프로세스 홍보수단이다. 비정부기구 콩코디아(Concordia)가 뉴욕에서 개최한 정상회의에서 억만장자 워런 버핏은 티에라 그라타(Tierra Grata, 세자르주)의 전직 게릴라들이 만든 노란 부츠를 신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이 신발을 버핏에게 선물한 사람은 두케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낙관하기는 이르다. 알라페는 “공동사업 중 지속가능성을 인정받은 사업은 아직 한 건도 없다. 개인사업의 상황은 더 나쁘다. 추적 조사에 따르면 개인사업의 90%가 실패하고 있다. 800만 페소로 가능한 세탁기 3대짜리 세탁소 정도다”라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정부 기관은 공동사업보다 실패가 예고된 개인사업을 우선적으로 지원했다. 이 때문에 전직 전투원들이 주축을 이뤄 협동조합 지원용 보조금을 관리할 예정이었던 멕시코 사회연대경제(ECOMUN)의 활동 역량이 크게 축소됐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의 협동조합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보조금 지급이 늦어졌기 때문이다. 경작 가능한 토지에 대한 접근성도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제34부대 사령관 출신으로 야노그란데(안티오키아주)의 무장 해제자 재편입 교육 지역(ETCR)에서 코무네스당 대표를 맡은 에리카 몬테로는 “1964년 전쟁이 시작된 이래 상황은 나아진 게 없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북서부 진영 사령관 출신인 남편 이사이스 트루히요와 함께 산다. 그들 부부의 집 테라스에서는 파라미요 산악지대 분지의 야노그란데 ETCR이 한눈에 들어온다. 트루히요는 “FARC가 쟁취한 농촌개혁은, 농민들이 소유권 없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 700만 헥타르를 합법화하고 경작지가 없는 농민(전 FARC 대원 포함)에게는 국가가 300만 헥타르의 토지를 분배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토지 대장은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또한  <엘에스펙타도르(El Espectador)>에 실린 조사에 따르면 40만 헥타르를 재분배 했다는 국립토지청의 발표와 달리, 실제 재분배된 토지는 3,000헥타르에 불과하다.(3)

메데인에서 어지러운 도로를 7시간 달려 도착한 야노그란데 ETCR은 모든 면에서 콜롬비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다른 ETCR과 유사하다. 금속 골조에 양철 지붕과 석고벽을 덧댄 이 캠프는 6개월만 운영될 예정으로 세워졌다. 아직도 거주 중인 주민들은 밝은 색으로 벽을 칠하고 베고니아와 유카를 심었다. 건물 뒤편 가파른 산비탈에는 닭장과 텃밭이 있다. 이 캠프의 농축산 협동조합 ‘아그로프로그레소’는 소를 사육할 목적으로 캠프에서 차로 2시간 떨어진 곳에 있는 땅 250헥타르를 최근 획득했다. 사육할 소는 아직 사지 못했다. 얼마 전에는 커피 원두를 올해 첫 수확했으며 앞으로는 레몬도 재배할 예정이다.

이 협동조합은 생태관광 개발도 추진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제동이 걸렸다. 하지만 이미 과거 게릴라 캠프를 재건해 가이드 투어를 진행하고 있으며 작은 숙소도 열었다. 가끔이나마 이 숙소를 찾는 고객은 파라미요 자연보호구역을 찾는 박물학자들이다. 현재로서는 이 활동들만으로 야노그란데 ETCR 주민들의 생활을 유지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최저수입’(최저임금의 90% 혹은 215유로) 지원과 식량 배급도 주기적으로 변동되며, 전쟁 후 재결합, 출산으로 늘어난 가족들을 부양하기에는 부족하다. 2021년 기준 콜롬비아 국민 38%가 빈곤 상태다.(4) 야노그란데의 전직 게릴라 대원 320명 중 여전히 이 캠프에 거주하는 인원은 100명 미만이다. 나머지는 대규모 농장의 일용직이 대부분인 일자리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사라진 공동생활, 이제는 ‘각자도생’

협동조합 발전에 진척이 없자 전직 게릴라들의 일상을 구성했던 공동생활이 사라지고 있다. 이제 야노그란데에서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같은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더 이상 공동식사를 조직하지 않는다. 폰도레스(라과히라주) ETCR에서는 화장실 문마다 달린 작은 자물쇠가 화장실 청소가 더 이상 공동 작업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산 호세 데레온(안티오키아주)에서는 악천후로 훼손된 마을 도로를 보수하기 위해 토요일 아침마다 열리던 ‘콘비테(convite, 식사 대신에 봉사를 하는 노동자들의 모임-역주)’가 봉사자 부족으로 중단됐다.

몬테로는 위계적인 조직에서 노동자 자주관리 체제로의 전환이 쉽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우리는 이런 전환에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과거 게릴라 시절에는 FARC가 모든 것을 책임졌다. 비록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백팩, 무기, 의복, 식량, 실력 있는 간호사 등 ‘모든 것’을 FARC가 제공했다.” 예상과 달리 ETCR는 공산주의자 자주관리 마을이 되지 않았다. 탄야 네이메이어는 외부의 예측을 경계했다. “물론 예전 같지 않다.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숲 속에서 공동생활을 할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는 이제 좋든 싫든 자본주의 사회에 속해 있다.” 

네덜란드인인 그녀는 2000년대에 동부 진영의 역사적인 지도자 모모 호호이 사령관 휘하에 합류해 FARC 게릴라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칼리 산맥 기슭에서 살고 있다. 게릴라 생활을 접은 후 그녀는 학업을 재개하고, 온라인에서 영어 강의를 하고, 네덜란드에서 자서전을 출간했다. FARC에 붙잡힌 미군들의 통역을 담당했다는 이유로 여전히 인터폴 적색리스트에 올라있기 때문에 그녀는 콜롬비아를 떠날 수 없다. 이제 그녀에게 콜롬비아는 ‘멋진 감옥’이 돼버렸다. 그녀의 남편 보리스 게바라는 그래픽 디자인과 투쟁을 회고하는 다큐멘터리 제작에 착수했다. 가족들의 금전적 도움으로 두 사람은 사냥개 세 마리가 지키는 작은 집을 짓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났을 때 ‘각자도생’을 추구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공동생활의 가치들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점차 공동체가 부화할 것으로 생각한다. 나조차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었다. 지금은 직업도 생겼고 집도 지었다. 이제 협동조합에 참여하고 싶다. 나는 많은 희망을 품고 있다!” 네이메이어는 남편과 함께 온라인 쇼핑몰 제작에 착수했다. 동료들이 운영하는 농축산 협동조합의 생산품을 팔기 위해서다. 콜롬비아 국토 정반대편 카르타헤나 인근에 사는 오드레 밀로는 FARC의 유일한 프랑스인 전투원으로 15년간 게릴라에 몸담았다. 그녀 역시 사회적 연대 경제의 부상을 믿으며 “지금은 그 과정을 구축 중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경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치러야할 유일한 전투다”라고 털어놨다. 

네이메이어와 밀로가 전망하는 ‘낙관적인 미래’에도 갈등이 끝나리라는 환상은 없다. “무기를 인도했을 때 우리는 너무 순진했다. 무기 인도를 ‘협상’했을 때, 우리는 일정 수의 변화, 토지 개혁, 제도의 민주화, 코카 재배 대체 계획 등의 보상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합의들을 어떻게 지키게 할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 시각에 동의한다. 연장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칼리 시내의 지독한 더위를 피해 1층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미구엘 파스쿠아스는 거침없이 의견을 피력했다. “마누엘 마룰란다, 하코보 아레나스, 알폰소 카노가 여전히 FARC를 이끌었다면 우리는 평화는 받아들여도 무기를 인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신 무기를 치워두고 감독했을 것이다. 오늘날 정부는 협정을 준수하지 않는다. 게릴라로 복귀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이유다.” 

81세의 파스쿠아스는 FARC 창설자 중 최후 생존자다. 이 노령의 사령관은 자신을 돌봐주는 두 딸 옆에 앉아, 다소 주저하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과거를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때는 게릴라가 되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도적떼들이 난립해 무질서하기 짝이 없고, 서로 총질을 해대고, 무고한 민간인을 죽이는” 지금의 무장단체들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파스쿠아스는 “나는 전쟁에 진지했던 만큼 평화에도 진지하고 싶다”라고 반복했다. 

베네수엘라 국경에서 멀지 않은 폰도레스 ETCR에 잠시 머물고 있는 베네딕토 곤살레스는 전 FARC 지도부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했다. 청년시절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제41부대에서 교육과 프로파간다를 담당했다. 그는 협상 대표단이 아바나로 향했을 때 콜롬비아에 남아 더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우리는 기준선을 설정했었다. 유엔의 무장해제, 군대 해산, 사회복귀 모델에 근거한 분쟁 종식 프로세스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무기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무기를 내려놓는데 동의했다는 뜻이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경우처럼 말이다. 우리는 해산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재집결했다. 우리는 사회에 복귀할 필요가 없었다. 사회로부터 단절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우리가 반대했던 일들이 현실이 됐다. 사람들은 속았다고 느낀다. 지도부가 책임져야 한다.” 

 

탈자본주의? 자본주의 발전이 시급해 

대(對)정부 강경 노선을 지지했으며 아바나 협상 대표단 일원이었던 FARC의 지도자 헤수스 산트리치는 2021년 5월 용병에 의해 사살됐다. 의회에서 산트리치의 자리를 임시로 메꿨던 곤살레스는 코무네스의 중앙위원회를 탈퇴했다. 당이 자신의 정체성과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환경에 따라 담론을 조정하는 카멜레온 전략에 밀려 집권을 해야 한다는 목표가 사라졌다. 공약의 내용조차 뒷자리로 밀려났다. 예를 들어 다국적기업에 대항하거나 토지 접근성을 보장하는 조치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의회에 진출한 이후 콜롬비아대안혁명군(영문 약어는 여전히 FARC로 동일)으로 이름을 바꾼 FARC는 2021년 다시 한 번 정당명을 변경했다. 당대표 로드리고 론도뇨(일명 티모첸코)는 2021년 1월 25일 FM 라디오 인터뷰에서 “내가 정당명 변경을 제안했다. FARC는 분쟁, 전쟁, 비탄의 기억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FARC가 무장투쟁 전략과 역사적인 이름을 포기했더라도 옛 대원들은 여전히 혁명적인 공산주의 계획을 신봉할까? 

라 솔레다드 지구에 있는 코무네스 본부 내, 밋밋한 벽으로 둘러싸인 사무실에서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사다(일명 훌리안 갈로)를 만났다. 동부 진영 사령관이자 FARC 사무국 위원이었던 그는 “코무네스라는 이름은 이 이데올로기적 개념과 연관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얼마 전 상원의원으로 재선출 된 로사다는 몇 주 전 까지만 해도 일요일을 맞아 파크웨이(Park Way)에 녹음을 즐기러 나온 산책객들에게 전단지를 돌리며 선거운동에 한창이었다. 이 전단지에는 평화의 상징인 흰 비둘기가 붉은 장미위에서 날갯짓을 하는 코무네스의 새 로고가 찍혀있었다. 코무네스는 평화협정에 의해 자동적으로 의회에서 10석(상원 5석, 하원 5석, 4년 임기 2회)을 할당받았지만 코무네스의 운동가들은 2026년 선거를 대비해 유권자를 설득하고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 선거운동을 벌였다. 

로사다 상원의원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우리는 콜롬비아 사회의 민주화를 추구한다. 이는 유럽과 달리 콜롬비아에서는 매우 혁명적인 목표”라며 말을 시작했다. 그는 콜롬비아의 경제상황에 대한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덧붙였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콜롬비아의 발전은 전근대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다. ‘봉건적 모델’인 라티푼디움(latifundium, 광대한 토지라는 뜻의 라틴어로 고대 로마의 대토지 소유제를 말함-역주)을 기반으로 하는 토지 소유권 현황이 그 증거다. “탈자본주의 사회를 말하기 전에 자본주의부터 발전”시켜야 한다. 로사다 의원은 “이것이 우리의 변함없는 목표지만, 현재로서는 실현 불가능하다.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몽상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2022년 3월 총선에서 거둔 초라한 성과(5만 2,000표 득표, 득표율 0.15%)에 대한 코무네스의 변명도 동일한 맥락이다. 코무네스는 이미 의석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지지자들 사이에 역사적인 협약의 후보 페트로와 마르케스에 기회를 주자는 심리가 발동했다는 분석이다. 이처럼 코무네스 의원들은 이번 총선 결과를 불신임 투표로 받아들이길 거부한다.

그러나 50년 넘게 극빈층 보호를 위해 투쟁한 FARC의 이름은 표심을 얻지 못했다. 카리브해 연안에 인접한 인구 7만 명 도시 투르바코는 2019년 지방선거 당시 게릴라 출신 훌리안 콘라도를 시장으로 선출했다. 비슷한 규모의 도시에서 FARC 출신이 시장으로 뽑힌 곳은 투르바코가 유일했다. 당시 콘라도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인간적인 콜롬비아’당(중도좌파) 후보로 출마했으며 과거 동료들이 외치던 ‘평화와 사회 정의’ 대신 ‘우리는 사랑으로 승리한다’라는 보다 공감하기 쉬운 슬로건을 내세웠다. 

본질적으로 농촌에 기반을 둔 FARC는 반세기 동안 지속된 전쟁의 참상, 자신들을 마약 테러리스트로 매도하는 담론을 퍼트린 언론, 도시-시골 간 인구 이동으로 일부 국민들과 단절됐다. 위계적인 조직이 해체되자 게릴라들 사이에서도 정치적 분열이 심화되고 다양한 목소리가 표출됐다. FARC 사령관 출신인 두 의원 빅토리아 산디노와 이스라엘 주니가는 2021년 코무네스와 별개로 ‘아반사르(Avanzar)’라는 이름의 운동단체와 ‘재편입자치회의’라는 기관을 설립했다. 평화협정 서명자 중 코무네스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늘고 있는 가운데, 두 의원은 정부와 직접 대화하는 통로로 ‘재편입자치회의’를 제시했다.

 

전쟁 중에만 존재했던 성평등

분쟁 종식 이후 옛 FARC 조직이 겪은 또 하나의 격변은 성평등의 후퇴다. 남녀평등이 필수적이었던 소규모 사회에서 생활했던 게릴라 1만 3,000명의 민간 사회 복귀는 성평등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였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폰도레스 ETCR의 여성 부회장 유디스 카르타헤나는 “복종에 너무 익숙한 민간인과 결혼한 일부 동지들은 FARC 내에서는 전투도 집안 일도 모두 남녀가 똑같이 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라고 분노했다. 카르타헤나는 혼자서 아버지, 장애가 있는 딸 그리고 손녀까지 부양하고 있다. 여성 게릴라들은 가부장적이고 남성우위적인 사회에 복귀하면서 큰 대가를 치렀다. 그녀들의 손에는 ‘총 대신 냄비’가 들렸다.

‘평화의 베이비 붐’과 함께 수백 명의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남녀의 사회적 역할이 재할당됐다. 숲 속에서 생활할 때는 출산은 상상도 못했으며, 금기사항이었다. 평화협정 체결을 앞둔 2016년부터 폭격과 장거리 숲속 행군이 중단됐다. 여성 게릴라 사령관 출신 산디노 상원의원은 “여성 게릴라들이 무기를 인도하기 위해 ETCR에 도착했을 때, 상당수가 임신 중이거나 이미 출산한 상태였다. 그런데 탁아소도 없고, 아이들을 돌볼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았다. 결국, 육아도 교육도 여성들이 떠안았다”라고 회상했다. 

산디노 의원은 게릴라 시절 남녀 전투원이 평등한 대우를 받았던 이유는 사회주의적 평등주의 이상에 동조해서라기보다, 전시 상황에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인정했다. 가족 재결합 과정에서는 전통적인 농촌 사회의 영향과 사회적 압력도 작용했다. 이 역시 성평등이 역행한 원인이다. “성평등이 얼마나 퇴보했는지 아직 정확히 측정할 수는 없지만 학업에 미친 영향은 명백하다. 여성 게릴라들은 육아를 위해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가사와 학업, 협동조합 업무 간 균형 유지에 성공한 이들도 일부 있지만, 그러기에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산디노 의원은 지난 3월 8일 보고타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날 기념 행진에 네이메이어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참가했다. 화려한 오렌지색 펠트 모자 덕분에 빽빽하게 모인 유쾌한 군중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띠었던 산디노 의원은 왼쪽 손목에는 낙태 합법화 운동의 상징인 녹색 스카프를, 오른쪽 손목에는 ‘아반사르’의 상징인 형광 오렌지 스카프를 맸다. 그녀가 입은 티셔츠에는 여성 게릴라 최초로 2000년대 FARC 중앙 참모본부에 합류한 마리아나 파에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비록 전직 단원들 사이에서는 성 평등이 후퇴했지만 산디노 의원은 아바나 평화 협상 이후 여성 게릴라와 시민사회 단체 간 젠더위원회 내부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이 강화됐다고 평가했다. 아바나에서 진행된 평화협정 협상은 여성 게릴라들이 자신들의 조직 내 평등의 한계를 (고통스럽지만) 인식하는 계기이자, 젠더에 대한 횡적 관점을 협정문에 포함시키는 계기가 됐다. 

여성 농민의 토지 소유권에 대한 차별적 접근, 분쟁 피해자 지위 인정, 성차별과 젠더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을 말한다. 산디노 의원은 “물론 이는 사회적 변화의 산물이지만, 감히 말하면 우리가 쿠바에서 제시한 젠더 관점은 젊은 여성들이 이끄는 새로운 형태의 페미니즘 운동의 물결을 일으켰다”라고 자부했다. 아프리카계 페미니스트 마르케스가 부통령으로 선출된 이번 대선 결과를 보면, 산디노 의원의 주장은 사실인 듯하다. 

 

옛 전투원들에게 더 이상 환상은 없어

전직 게릴라 진영은 페트로 후보와 역사적 협약의 승리를 대놓고 축하했다. M19 출신 전직 게릴라와 가정부 출신 여성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1948년 대통령 후보 호르헤 엘리세르 가이탄 암살 이후의 콜롬비아 정치사에 전환점이 열렸다. 콜롬비아 최초로 사회적 불평등과 토지 접근성 문제를 거론한 정치인 가이탄의 죽음은 내전을 촉발했다. 이 내전의 출발점이 바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게릴라, FARC이다. 페트로 대통령과 마르케스 부통령은 진정한 사회 변혁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 저녁, 페트로는 변화와 평화를 약속했고 총파업 당시 체포된 시위대의 석방을 검찰에 요구했다. 그리고 ‘조작된 게릴라들’의 어머니 한 명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조작된 게릴라들’은 정부군에 처형당한 젊은 농민들로 정부군은 게릴라 사살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무고하게 살해당한 이 민간인들을 ‘전사한 게릴라’로 조작했다. 50.44%의 득표율로 선출된 페트로 대통령은 “우리는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좋아서가 아니라 봉건적인 제도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역설했다. 

이 발언은 코무네스가 주창하는 이론을 보강하고, 특히 선거 유세 내내 베네수엘라를 내세워 위협을 가했던 재계의 부르주아들을 안심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우파와 극우파가 의회 다수파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 정부의 운신의 폭에는 제한이 따르고 향후 개혁은 많은 장애물을 맞닥뜨릴 것이다. 옛 FARC 전투원들은 앞으로 닥칠 어려움을 감안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환상은 없다. 다만, 정부가 평화협정을 존중해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글·레아 가스케 Léa Gasqu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기자
피에르 카를르 Pierre Carle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영화감독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Cinco conflictos armados en Colombia ¿qué está pasando?’,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제네바, 2018년 12월 6일.
(2) ‘Colombia, Impacto y tendencias humanitarias entre enero y diciembre de 2021’,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 제네바, 2021년 12월 31일.
(3) David Franco Mesa et Milton Valencia-Herrera, ‘El futuro sin tierras para los campesinos’, <El Espectador>, 보고타, 2022년 2월 20일.
(4) 출처 : 콜롬비아 국립통계행정국(DA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