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돌아오는 레위니옹 청년들

운명 공동체의 상징으로서의 크리올어

2022-08-01     마르고 에므리슈 외

아프리카 남동부 인도양에 위치한 섬, 레위니옹의 인구는 1946년 프랑스의 해외 데파르트망(道)이 된 후 4배로 늘어났다. 프랑스 정부는 이 섬의 증가하는 인구 압박을 줄이고 사회적 폭발을 피하기 위해 줄곧 레위니옹 주민들이 프랑스 본토로 이주할 것을 장려해왔다. 레위니옹 주민들이 예전 식민지 권력에 의존하면서, 그들의 재능도 이주를 통해 프랑스 본토로 유출돼왔다. 그러나, 이제는 레위니옹에 남아 모국어로 말하며 살기를 희망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

 

레위니옹 섬 둘레를 따라 조성된 210㎞의 일주도로는 해안을 따라 들어선 주요 도시들을 연결한다. 운전자가 차를 몰고 주도 생드니에 들어가면 ‘신 드니(Sin Dni)’라 적힌 표지판이 보인다. 프랑스어 “생 드니(Saint-Denis)” 아래 이 크리올어 글자가 표기된 것은 2010년부터다. 이 시책은 레위니옹이 이중 언어 공용헌장을 채택한 데 따른 것이다. 이중 언어 사용을 장려하는 단체 ‘로피스 라 랑 크레올 라 레위니옹(Lofis la lang kréol la rényon)’의 회장을 맡고 있는 작가 악셀 고뱅은 “이 법안은 매우 상징적”이라며, “일례로 크리올어로 결혼식을 올릴 가능성, 지방의회에서 의사를 표현할 가능성 등이 이에 포함된다”라고 설명했다. 10년 동안 이 섬의 24개 코뮌 중 11개 코뮌이 이 헌장을 채택했다. 이 주제에 관한 책을 집필한 악셀 고뱅은 “이는 언어를 해방시키는 한 방법이며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한 작은 발걸음”이라고 강조했다.(1)

햇살이 한 지역단체 건물에 설치된 커다란 표지판을 비춘다. 두 개의 언어로 설명이 적혀 있는 “가옥들”의 사진은 전통적인 레위니옹 가옥의 역사를 보여준다. 현관문 앞 층계참에서, 정원사가 인근 관광안내소 직원과 크리올어로 대화 중이다. 길 건너편에서는 한 무리의 인부들이 스낵 테이블에서 수다를 떨고 있다. 크리올어를 잘 몰라도, 프랑스어를 안다면 그들의 대화 내용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북부 크리올어는 남부 크리올어보다 프랑스어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평가절하되고 파괴됐던 크리올어

 

레위니옹 인구 중 프랑스어만 사용하는 이들은 10%에 불과하다. 나머지 90%는 크리올어만 사용하거나, 두 언어를 함께 사용한다. 레위니옹 인구의 80% 이상이 자신의 모국어는 ‘레위니옹 크리올어’라고 생각한다. ‘레위니옹 크리올어’는 프랑스의 지역어 중 가장 널리 사용되지만, 사회적으로 평가 절하돼 오랫동안 개인이나 가족의 영역으로 밀려나 있었다. 

교사인 기욤 아리보는 5~6세학급 아동들을 위한 아침 의례를 위해 의자를 동그랗게 배열하면서 “크리올어를 파괴하는 작업이 장기간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프랑스 정부는 1946년 레위니옹을 프랑스의 해외 데파르트망으로 편입하고 정치적 동화정책을 펴면서, 크리올어를 공식 언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오늘날 공공영역에서 크리올어가 회복되고 있지만, 아직 사회 곳곳에 파괴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키사 누 레(Kisa nou lé, 우리는 누구인가)>의 작가 세바스티앙 클랭(35세)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인도양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했다. 클랭은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제가 우리 섬의 역사에 눈을 뜬 것은 학업을 위해 레위니옹을 떠났을 때였습니다. 섬을 떠난 후에야 제 자신을 재발견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악셀 고뱅의 책은 제가 우리 언어를 구사하며 느꼈던 수치심의 근원을 찾아, 우리 문화와 화해하게 해줬습니다.”

매년 2,000여 명의 학생, ‘데소 라 메르(Désot la mèr)’ 학사학위 소지자의 20%에 해당하는 학생들이 레위니옹을 떠난다. 이 학생들은 이 지역의 레지옹과 데파르트망 의회의 재정 후원을 받는다. 특히 해외이주국(LADOM)은 프랑스 본토 또는 다른 해외 데파르트망으로 공부하러 가는 26세 미만 학생들에게 항공료를 지원한다. 레위니옹에서는 사회사업이나 준의료 분야 교육기관은 포화 상태다. 또한 정치학, 심리학, 농업공학 같은 분야의 교육기관이 전무하므로, 이 분야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섬에서 교육을 받기 어렵다. 

섬에 남아 공부하는 학생들도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장학금은 연간 최대 4,600유로까지 지급 가능하며, 5년 동안 갱신될 수 있다. 학생 지원 외에도 레위니옹 주민들이 프랑스에서 훈련을 받거나 직업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 LADOM은 “고용 가능성을 높이고자 하는” 구직자들을 위한 이주교육 과정의 일부로 그와 같은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하지만 레위니옹에는 두 가지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다. 높은 인구밀도와 실업률이다. 지난 20년 간 일자리 수는 급격히 늘었지만, 섬의 인구밀도는 프랑스 본토의 3배에 달하며, 실업률은 2배가 넘는다(맞은편 페이지의 ‘주요 지표’ 참조). 2019년에는 15~29세 인구의 40%가 실업상태인 것으로 파악됐다. 레위니옹 전체 인구에서 25세 미만 인구의 비율이 프랑스 전체에서 가장 높은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가 이 섬 주민들의 이주를 장려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크뢰즈의 도둑맞은 아동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레위니옹은 1946년 프랑스의 해외 데파르트망이 됐다. 그 후 몇 년 간 레위니옹은 세계 최고의 출산율(1951년 51%)과 인구 증가율(1954년 연간 3.5%)을 보였다.(2) 1950년대 여성 1인당 7명이었던 출산율은 오늘날 2.4명으로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프랑스 본토의 출산율(1.8명)보다 높다. 일찍이 1952년에 라파엘 바벳 의원은 마다가스카르의 농업 식민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63년, 프랑스 총리직을 사임한 미셸 드브레가 의원 선거(부정으로 얼룩졌던)에서 레위니옹의 자치를 옹호하는 공산당 지도자 폴 베르제를 누르고 이 섬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됐다. 드브레는 “레위니옹에서 프랑스 대도시로의 강제 이주”라는 아이디어를 실현할 해외영토 이민개발국(BUMIDOM)을 설치했다.

1963~1981년, 프랑스 정부는 서인도와 레위니옹 주민 16만 300명이 프랑스로 이주해 정착하도록 지원했다. 같은 기간에 아동사회지원국(ASE)이 돌보고 있던 아동 2,015명이 프랑스 시골로 강제 이주됐다. 일명 ‘크뢰즈의 도둑맞은 아동들’ 사건의 희생자들은 2000년대에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지만, 소멸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2018년 정보역사연구위원회가 조사 결과를 내놓았음에도, 피해자들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사회학자 뤼세트 라바슈는 “당시 그와 같은 정치적 의지는 사회적 규제에 대한 세 가지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라며, “그 세 가지란 우선 데파르트망의 인구 증가를 줄이는 것, 다음으로 불완전 고용으로 인한 사회적 폭발과 정치적 요구를 억제하는 것 그리고 병원, 우편통신, 대중교통 같은 본토의 특정 산업 분야에 대규모 인력을 공급하는 것”(3)이라고 설명했다. 1972년 레위니옹 사회당을 창립한 지리학자 윌프리드 베르틸은 “그런 조치는, 레위니옹의 자치 요구를 막으려는 장치”라고 주장했다.

1991년 생드니의 쇼드롱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난 후, ‘이주’의 개념은 점차 ‘이동’의 개념으로 대체됐다. 뤼세트 라바슈는 “사회적 상황이 급박한 만큼 (...) 의사 결정권자들은 레위니옹 청년들의 이동을 확대할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동’은 ‘이주’에 비해 거부감이 적은 단어였다. 이 논리에 따라, BUMIDOM은 해외근로자통합진흥청(ANT)으로 개편됐다가 2010년에 다시 LADOM으로 개편됐다. 그리고 “저기에서 일자리를, 여기에서 미래를”이라는 역설적인 구호가 새겨진 대형 표지판들이 섬 내 주요도시에 세워졌다. 레위니옹에 특화된 또 다른 조직, 즉 ‘레위니옹 이동 주민들을 위한 안내 및 지원 국가위원회(CNARM)’가 한 일이다. 

해당 위원회는 데파르트망 의회로부터 자금 일부를 지원받으며, 자격증이 없는 이들에게 대도시의 케이터링·건축·운송 부문 취업이나 견습 교육을 알선해준다. 또한 1963년 미셸 드브레의 주도로 설립된 CNARM은 지역적 고립으로 인한 불편함을 보완하며, 한 국가 내 영토들 간의 결속 강화를 목표로 하는 공공 서비스 원칙, ‘영토 연속성’을 구현하는 기관 중 하나다. 2015~2019년 1만 1,084명의 구직자가 CNARM의 이동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CNARM 측은 “취업을 위한 이동을 통합정책의 우선순위로 삼는다”라고 강조했다.

 

“그들은 다른 곳에 대한 꿈을 팔았어요”

과연 그 ‘이동’은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것일까? “어머니는 파리 병원으로, 아버지는 SNCF로, 이모들은 경찰서로 일하러 떠났어요. 그분들은 BUMIDOM을 통해, 우리는 CNARM을 통해 떠났지요.” 올리비야 알릭스가 우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4년 동안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조국을 배신한 느낌이 들었다”라고 덧붙였다. 1960년대 이뤄진 레위니옹 주민들의 이주는 많은 가족들의 의식 속에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안느시 브와이에는 17살에 독일어를 배우러 렌느로 떠났다. 레위니옹 섬에는 대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 중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저뿐입니다. 두 형은 섬에 남기를 원했어요. 한 형은 어부 겸 소방관이 됐고, 다른 형은 요리사가 됐지요. 저는 성공하려면 프랑스에 가야 한다고, 중학생 때부터 생각했어요.” 피카르디 쥘 베른 대학 사회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인 사회학자 플로랑스 이다덴은 “교육기관부터 구직센터에 이르기까지, 기관들은 레위니옹의 청년들을 섬 밖으로 유도한다”(4)라고 지적했다.

니콜라스 브룅도 그런 경우다. 프랑스 출신 아버지와 레위니옹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니콜라스는, 2020년 학사학위를 취득한 후 앙제에 있는 공학학교에서 1년 동안 공부했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외부 인사들이 줄곧 찾아와서 프랑스나 퀘벡의 교육을 소개했어요. 그들은 우리들에게 다른 곳에 대한 꿈을 팔았어요.” 고향인 탐퐁으로 돌아온 니콜라스는 레위니옹 역사 교육의 부재를 개탄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제 많은 청년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화해하러 돌아옵니다. 전화위복이지요.”

 

“크리올어가 미숙한 프랑스어라고요?”

 

생드니에서 20km 거리의 마을, 르포르에 사는 스테판 마르시는 예비과정(우리나라 초등학교 1학년에 해당)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활짝 핀 꽃무리에 다가가며 말했다. “어릴 때 눈과 눈사람이 있는 크리스마스를 상상했습니다. 그런데, 교육에서는 사물이 보편적인 방식으로 제시됐지만 그게 우리의 현실에는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서양식 모델만으로 우리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38세의 이 교사는 2014년부터 크리올어를 가르치고 있다. 현재 레위니옹에서 크리올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전체 교사의 약 5%에 불과하다.

레위니옹의 언어 및 문화 교육을 촉진하는 협회 ‘랑탕 LKR(Lantant LKR)’의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는 마르시는 강화된 우선교육 네트워크(REP+)에 속해 있는 학생들에게 학업 및 사회 진출 수단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마르시는 학생 시절 그런 수단을 제공받지 못했다. “지금은 아동이 학교에서 크리올어를 했다는 이유로 맞지는 않지만, 일부 교사는 그 아동에게 ‘제대로 말하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저는 이런 언어적 불안의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프랑스어는 제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저는 프랑스어로 의사 표현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프랑스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적응한 후에도 그 불안은 남아 있었습니다.”

보르도 대학의 공법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의 지역 언어에 관한 논문을 펴낸 베로니크 베르틸르는 말했다. “혁명 후 프랑스는 언어 통일을 국가 통일의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편협한 자코뱅주의는 지역 언어와 정체성을 분리주의적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아리보에게는 이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레위니옹 동쪽 가난한 해안마을 생앙드레에서 옥시타니아인 아버지와 튀니지 출신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리보는 30세에 교사가 됐다. 교사를 지원한 이유에는,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한 설욕의 다짐이 있었다. “저는 크리올어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옛 프랑스어라고 주장하는 선생님들에게 배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우리의 언어 크리올어는 실재하고 저항하는 언어입니다. 또한, 제가 활동하는 지역에서는 수많은 코모로와 마호라이 출신 아동들의 사회화를 위한 매개체입니다.”

레위니옹 크리올어는 18세기 식민화의 맥락에서 다양한 민족들 간의 만남이 이뤄지면서 생성된 언어다(박스 기사 참조). 이 언어는 오랫동안 법으로 사용이 금지됐다. 하지만 이제 이 언어의 사용은 점점 늘고 있다. 부모들도 자녀들이 이 언어를 사용하기 원한다. 레위니옹 부모들 가운데 학교에서 크리올어 사용을 지지하는 부모가 2009년에는 61%였으나, 현재 81%에 달한다. 또한 크리올어가 프랑스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2009년에는 74%였던 데 반해 지금은 85%에 이른다.(5) 이 고유어는 2000년에 “공식 지역어”로 인정받았으며, 2001년 중등교사임용시험(CAPES)이 실시되기 시작된 후로 중학교에서 심화과목으로 채택되는 경우도 점점 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레위니옹 초등학교 교사 8천여 명 중 크리올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는 450명에 불과하다. 또한 크리올어는 병원 같은 많은 전문기관에서 여전히 사용이 금지돼 있다.

시인이자 전직 언론인인 프랑키 로레는 42세에 첫 크리올어 교수 자격자가 됐다. 최근 로레는 자신의 분야에서 전례 없는 발전이 일어난다며 기뻐했다. “디글로시아(Diglossia), 즉 공적 영역에서 인정받는 ‘고급 언어’와 비공식 언어로 치부되는 ‘저급 언어’ 간의 차별에 점차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생드니의 시장이 크리올어로 연설하는 것을 들을 때, 제가 저의 교수자격 논문을 크리올어로 방어할 수 있을 때, 시청 입구에 ‘미 코즈 크레올(Mi koz creol)’이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자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기관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2020년 8월부터 레위니옹의 교육감으로 재직하게 된 샹탈 마네스-보니소는 초등학교 교사 연수와 중고등학교 정규 과정에 레위니옹의 역사를 도입하는 문제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어를 마스터한다는 목표 내에서 크리올어의 유용성을 강화하자는 입장이기 때문에 더욱 받아들이기 쉬운 측면이 있다.

역설적으로 이 주제가 탈정치화되면서 크리올어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 ‘랑탕 LKR’ 창립자이자 회원인 교사 아리보는 “문화적, 언어적 투쟁은 종종 자치권을, 심지어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 세력에 의해 주도됐으며, 특히 1950년대에는 공산당이 그 바통을 이어받기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언어 사용권 주장의 배후에 숨은 분리주의의 유령은 이제 2021년에 와서는 허상이 돼 버렸다. 2012년 레위니옹 공산당과 결별하고 출범한 ‘푸르 라 레위니옹(Pour la Réunion)’ 당의 위게트 벨로 여사가 이끄는 레지옹과 프랑스 데파르트망의 지위에 만족하며 우파의 가치를 더 지지하는 데파르트망은 현재 손을 맞잡고 협력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25일부터 28일까지 이 섬에서 개최된 ‘해외 영토의 다국어 사용 일반 현황’ 회의에서 두 기관은 레위니옹 사회에서 크리올어의 위상을 ​​인정하는 언어 협정을 맺기로 합의했다. 지난 11월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자 세바스티앙 르코르뉘 해외영토부 장관은 해외 영토의 자치권에 관한 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레위니옹에서는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되지 않는다. 레위니옹은 프랑스에서 가장 빠른 인구 증가세를 보이고 있고 주민들 간 빈부 격차도 가장 크지만, 선출직 관료들과 시민들 가운데 아직도 프랑스 본토에 대한 선망을 품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 

그러나 레위니옹은 노란 조끼 운동에서는 놀라운 참여율을 보였다. 노예제 및 식민 역사 전문가인 레위니옹의 역사가 프랑수아즈 베르제는 레위니옹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섬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분쟁을 해결하면서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공화주의 모델을 기반으로 건설된 곳이라는 이론이 정립돼 있습니다. 이 이론은 신화와 현실에 모두 바탕을 둔 것입니다.” 1646년까지 레위니옹은 사람이 살지 않고 유럽인, 아프리카인, 마다가스카르인, 인도인, 심지어 중국인까지 거쳐 가는 교차로 같은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레위니옹에서는 카리브해 특유의 흑백 변증법이 작동하지 않는다”라고 필리프 비탈르 사회학 연구원은 분석한다. 반면, 서인도 제도에서는 백인 정착민들의 후손인 베케스(Békés)와 대지주들, 그리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흑인 주민들 간의 분열이 잔혹하고 가시적인 투쟁으로 이어졌다. 

 

정체성을 지우는 ‘백인화’과정 

1950년에 발간돼 유명해진 저서 『식민주의에 대한 담론(Discours sur le colonialisme)』의 저자인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출신의 정치인 에메 세제르는 세계 곳곳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레위니옹의 언어학자, 시인, 언론인이자 크리올어권 최초의 공산주의 투사 보리스 가말레야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프랑수아즈 베르제는 “프랑스 본토인들뿐만 아니라, 일부 레위니옹 주민들로 이뤄진 지역 중산층은 크리올어를 탄압하고 사회적, 문화적 해방에 대한 요구를 억압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법학자 베로니크 베르틸(전직 공직자 윌프리드 베르틸의 딸)이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두려움, 버림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미셸 드브레 시대에 시작된 것입니다. 레위니옹은 항상 프랑스 공화국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을 보여 왔습니다.”

“웰컴 투 조리랜드!” 호텔과 소규모 디자이너 부티크가 늘어서 있는 에르미타주 해변 인근에서 일하는 레위니옹 사람들은 이처럼 아이러니한 표현을 쓴다. 생드니에서 남서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이 해변 휴양지에는 ‘조레이유(Zoreille)’라 불리는 프랑스 본토인들이 거주해 ‘생질(Saint-Gilles)’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이곳에는 동쪽의 생앙드레보다 평균 2배, 내륙의 살라지보다 평균 5배에 달하는 본토인들이 산다.

이처럼 레위니옹은 프랑스 본토인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2012년에서 2016년 사이 매년 평균 1만 1,400명이 이 섬을 떠나 프랑스 본토에 정착했다면, 반대로 프랑스 본토에서 레위니옹으로 들어온 사람은 레위니옹에서 태어난 3,000명을 포함해 1만 300명에 이른다. 이 섬에서 공무원, 자유직업인, 대기업 임원, 비즈니스 리더 등의 존재는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된다. “대부분의 주정부 관련 직종은 여전히 프랑스 본토인들이 맡고 있다”라고 프랑수아즈 베르제가 지적했다.

하지만 레위니옹 주민들의 자격 수준이 높아지면서 상황은 서서히 변하고 있다. 1990년에 레위니옹의 관리직 종사자 중 원주민 출신의 비중은 33%에 불과했지만 2020년 말에는 그 비중이 관리직 종사자 3만 1,000명 중 47%인 것으로 파악됐다. 반면, 레위니옹의 자유직업인 중 백인 크리올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에 불과하며(개인 개업의사 및 치과의사 중 19%가 레위니옹 출신이다), 특히 고위직 인사 가운데 이들의 비중은 34%에 불과하다. ‘랑탕 LKR’의 사무총장이 유감을 표하며 말했다. “통합으로 가는 길은 때로는 이동을 통해 이뤄지지만 이는 여전히 레위니옹의 정체성을 지우는 ‘백인화’ 과정과 함께 진행됩니다.” 

 

현지인 우선 고용이 시급한 과제

 

농업 고등기술 자격과정(BTS: brevet de technicien supérieur) 2학년 학생은 면접에서 '본토인'을 만나면 두렵다며, “주변에서 같은 학위를 갖고 있다면 레위니옹 사람을 선택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봤다”라고 털어놓았다. 이 19세의 학생은 섬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걸 항상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직도 많은 주민들이 레위니옹 섬을 떠나지만, “섬에서 살며 일할 권리”를 행사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그동안 이동정책의 사각지대에 있던 귀환수요가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 본토로의) 이동은 삶의 프로젝트인 동시에 배우고, 경험을 쌓고, 기술을 강화하고, 더 나은 성과를 거둘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2018년 9월 CNARM 회장과의 대화에 배석한 시릴 멜키오르 CNARM 본부장은 말했다. 

공법학 및 헌법학 부교수 베로니크 베르틸은 “(레위니옹으로의) 귀환 문제 이면에는 지역 선호도라는 까다로운 문제가 있다”라며, “이 용어는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현지고용 우선이라는 표현으로 대체했으면 한다”라고 제안했다. 분명한 것은 일자리가 생겼을 때, 현재의 주민에게 우선순위를 부여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르틸은 말한다. “이는 실업에 대항할 해결책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가장 주변부에 있습니다. 유럽연합법에 따르면 우리의 고립된 위치, 영토의 협소함, 섬나라 지형을 감안한 조치의 시행이 가능합니다. 뉴칼레도니아나 프렌치 폴리네시아에는 이미 현지고용 우선 정책이 시행 중입니다.”

레위니옹에서 대학교육을 받기 어려운 현실은, 오랫동안 프랑스 본토 출신의 프랑스인 고용이나 레위니옹 청년들의 이동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필요한 제안을 하기보다는, 레위니옹 사람들을 떠나게 만들고 있다”라며, 레위니옹 제2선거구 의원 카린 르봉(좌파민주당 및 공화당 소속)은 개탄한다. 교사 출신인 르봉 의원은 1년 전부터 수출 상품 및 서비스가 전체 수입의 5%에 불과한 레위니옹의 상황을 감안해 지역적 필요에 따라 특정 대학과정을 추가로 개발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축산, 해양 등 레위니옹에 없는 특정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지속가능한 농업, 농업 공학, 생물 다양성, 열대성 생태계의 생태학 등 여러 분야에 대한 수요가 있다. 

레위니옹에서는 2015년부터 “바다의 고등학교” 프로젝트를 구상해왔다. 이 프로젝트가 르포르 시장의 승인을 받은 지 5년이 넘었지만, 아직 적합한 실행 장소를 찾지 못해 묻혀있다. 이 과정에 관심 있는 학생들은 당분간 두 개의 길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 선원이 되려면 도시의 해양견습학교로 가야 하고, 어업이나 해양 관광을 공부하려면 르아브르, 마르세유, 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떠나야 한다. 

이런 현실에 대해, 아리보는 “문제는 이동 그 자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다. “우리의 발전은 항상 유럽 대륙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인도양 국가들로 시선을 돌리지 않을까요?” 2020년 의회 보고서는 “연안 해역 시장에 그들의 경제를 통합시킴으로써, 그들의 영토의 지리적 고립을 감소시키고 (...) 항구의 경쟁력을 제고할 것”을 권고했다.(6)

아보르 강에 접해 있는 탕퐁벨 공원의 언덕에서 가파른 길을 따라 카프르 평원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360도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이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섬의 중심부에 있는 산들에는 초목이 무성하다. 반대편을 봐도 시야에 걸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안선 너머로는 모리셔스, 마다가스카르, 남아프리카 공화국, 스리랑카의 해안까지 가닿는 대양이 보인다. 1970년대에 이미 언어 운동가들을 길러낸 레위니옹은 결코 폐쇄된 섬이 아니었다. 그래서 보리스 가말레야의 시 구절은 여전히 ​​큰 울림을 낳는다. 

“여기 밤의 어둠을 잊게 만들 멋진 노래가 있어요. 바로 당신들이 부르는 노래죠. 귀를 막지 마세요.” 

 

 

글·마르고 에므리슈 Margot Hemmerich
기자
클레망틴 메테니에 Clémentine Méténier
기자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


(1) Axel Gauvin, 『Du créole opprimé au créole libéré―Défense de la langue réunionnaise 억압받는 크리올어에서 해방된 크리올어로―레위니옹의 언어 지키기』, L'Harmattan, Paris, 1977.
(2) Jean Fourastié, ‘La population de la Réunion 레위니옹 인구’, <Population 인구> 3호, Paris, 1955년.
(3) Lucette Labache, ‘La mobilité des jeunes réunionnais 레위니옹 청년들의 이동 현황’, <Agora Débat/Jeunesses 토론의 광장/청년> 50호, Paris, 2008년.
(4) Florence Ihaddadene, ‘Les pratiques des professionnels face aux freins à la mobilité des jeunes ultramarins: l’exemple de La Réunion 해외 영토 청년들의 이동 제약에 대한 전문가들의 대처: 레위니옹의 사례’, <Cahiers de l’action> 40호, Paris, 2017/2.
(5)  ‘로피스 라 랑 크레올 라 레위니옹(Lofis la lang kréol la rényon)’의 의뢰를 받아 사지스(Sagis) 사가 2021년 3월 25일부터 4월 13일까지 실시한 설문조사. 
(6) ‘Rapport d'information n° 3638 sur le coût de la vie dans les Outre-mer 해외 영토에서의 생활비에 관한 정보 보고서 제3638호’, 해외영토 의회사절단, Paris, 2020년 12월 3일.

 

 

용광로 언어 크리올어 

 

‘레위니옹 크리올어’(프랑스의 해외 영토인 동아프리카의 섬 레위니옹에서 사용되는 프랑스어 기반의 크리올어)는 전 세계에서 파악된 127가지 언어 체계(공통점이 없는 두 언어가 섞이면서 생성된 일종의 임시적 언어인 ‘피진어’를 포함해) 중 하나로, 그 유래는 식민화에서 찾을 수 있다. 크리올어 전문가 프랑키 로레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크리올어 생성에는) 세 단계가 있다. 먼저 한 쪽 편의 주인들과 다른 쪽 편의 노예들이 만나면서 크리올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명령을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로, 농장이 산업화된 후 새로 들어온 노예들은 더 이상 주인의 언어와 접촉하지 않고 사령관의 언어를 주워들어 익힌 1세대 노예의 언어와 접촉하게 된다. 이 같은 접촉으로 일종의 ‘교통어’가 형성된다. 마지막 단계는 원주민화 단계로, 이 단계에서 ‘교통어’는 섬에서 태어난 아동의 모국어가 된다.”

‘레위니옹 크리올어’는 ‘랑그 도일(Langue d’oïl)’, 특히 프랑스 북서부 지방의 방언에서 유래한 언어로, ‘레위니옹 프랑스어’와 동일한 고어, 신조어, 차용어를 사용한다. 이 언어는 주로 마다가스카르어, 인도-포르투갈어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부 타밀어의 영향도 받았다. 원주민이 없는 레위니옹 섬의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는 이 언어는 마치 언어의 용광로 같다.

또한 ‘레위니옹 크리올어’는 노예제 시대부터 있었던 레위니옹 섬의 토속음악 말로야(Maloya)의 가사에도 쓰였다. 다니엘 와로(Danyèl Waro)나 피르민 바이리(Firmin Viry)가 대표적인 말로야 음악가다. 1980년대 이전에는 이런 음악이 라디오나 TV 프로그램에 소개되지 않았다. 2001년에 완전히 크리올어로만 된 주간지가 처음 ‘텔레 레위니옹(RFO)’의 전파를 탔다.(1) 

문헌자료 중 크리올어를 사용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법률 문서, 혁명 선언문, 선교사의 글 등에서 발견된다. 1970년대에 보리스 가말레야(Boris Gamaleya)는 레위니옹 구전 기록을 파악하는 방대한 작업을 수행했다. 지난 50년 간 레위니옹에서 출판된 전체 출판물 중에서 크리올어 출판물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그 분량은 레위니옹이 프랑스의 해외 데파르트망으로 편입되기 전에 출판된 모든 크리올어 출판물보다 훨씬 많다. 

프랑키 로레는 “크레올어로 가장 많이 출판된 분야는 시(詩)다. 희극 분야의 출판도 꾸준히 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글·마르고 에므리슈 Margot Hemmerich & 클레망틴 메테니에 Clémentine Méténier 
번역·김루시아 


(1) Bernard Idelson, "Le créole dans les médias réunionnais 레위니옹의 언론 매체에 쓰인 크리올어", 『Les Essentiels d'Hermès 에르메스의 핵심』, CNRS-Éditions, Paris, 2003.

 

데이턴 협정에서 서구 보호령까지

 

치열한 협상 끝에 보스니아 종전 협정이 미국 데이턴에서 개최됐고, 1995년 12월 14일에 파리에서 체결됐다. 해당 협정에 따라, 구(舊)유고슬라비아 공화국에서 독립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권력조직에 민간부문이 포함됐다.(1) 민주적 절차를 통해 새로운 법안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헌법원칙이 여전히 기본법 역할을 한다고 부칙4(영어로 작성됨)에 명시돼 있다. 그 결과 지나치게 복잡한 여러 기관이 생겼고, 그 기관들은 국가의 분할을 승인하고 롬족을 비롯해 소수민족인 ‘다른 이들’과 달리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대에 ‘구성원’으로 인정됐던 보스니아계(이슬람교), 세르비아계(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계(천주교) 이 세 민족에게 구체적인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중앙 국가의 존재를 보존해야 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데이턴 협정에 의거해서 세르비아계 스르푸스카 공화국(RS)과 이슬람계와 크로아티아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BiH)으로 구성된 1국가 2체제가 됐다. 스르푸스카 공화국은 전체 영토의 49%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은 51%를 차지하게 됐다(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은 총 10개의 주로 이뤄져 있다). 브르치코는 1999년에 행정구로 승격돼서 자치지역의 지위를 갖게 됐다. 각 조직마다 독립된 행정부가 구성됐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총 14개의 정부가 만들어졌다. 

법으로 중앙권한을 외교와 교역, 관세, 금융 및 통화 정책, 이민, 교통 등의 몇 가지 분야로 제한했다. 스르푸스카 공화국에서는 세르비아계 대통령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에서는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 대통령을 각각 선출해 세 민족 구성원이 돌아가며 대통령직을 맡게 됐다. 상원이나 하원은 각 민족이 자신들의 ‘핵심 이익’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했다. 유일하게 규정된 국가 사법기관은 헌법재판소이며, 재판관 9명 가운데 3명은 유럽인권재판소장이 선출한 외국인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위와 같은 기관들이 제대로 기능을 하는 데 타협이 부족했기 때문에 평화 교섭을 이끌었던 여러 주체는 ‘고위 대표(데이턴 협정에 따라 국정 운영을 감시하는 역할을 함-역주)’의 특권을 확대함으로써 국정 운영이 마비되는 상황을 바로잡기를 원했다. 협정 서명국들과 유엔에 의해 임명된 고위 대표는 원래 임기 없이 ‘민간 측면에서 효과적인 평화 정착 이행을 보장하는 것’이 임무였다. 50여 개 국가와 여러 국제기구로 구성된 평화협정이행이사회는 1997년 12월 독일 본에서 열린 회의에서 ‘데이턴 협정’에 대한 매우 광범위한 해석을 내렸고, 그 결론은 유엔총회와 그 후 안전보장이사회로 총회에서 지지를 받았다.(2)

‘본에서 결정된 여러 권한’은 고위 대표를 궁극적으로 행정·입법·사법적으로 최종 결정권을 가진 준(準)국가원수로 변화시켰다.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돼 있고 실질적인 통제권이 없었음에도 고위 대표는 평화협정 이행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할 경우, 선출직 위원과 판사, 공무원들을 해임할 수 있었다. 또한 당사자들이 평화협정 이행을 할 의사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할 경우, 구속력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렇듯 고위 대표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크게 확대하고 많은 선출직 공무원들을(심지어 고위직 공무원들까지도) 해임하고 관련 조직에 헌법 개정을 강요했다. 최고행정법원 설립과 형사소송법, 국기, 은행권 도안, 퇴직연금, 전기공급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수십 개의 법률을 개정하거나 포고했다. 

2005년 베니스 위원회는 “해당 조치는 근본적으로 국가의 민주적 성격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주권과 양립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문제가 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3) 2021년 7월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발렌틴 인스코 고위 대표가 사임 발표를 한 이후 러시아는 평화협정이행회의에서 유일한 운영위원회가 크리스티안 슈미트를 후임으로 임명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러시아는 고위 대표라는 직위가 ‘시대착오적’이라며 임명을 할 때 보스니아와 다른 관련국들의 모든 당사자들의 동의를 얻고 안정보장이사회의 승인을 받았어야 했다고 말했다. 중국은 러시아의 의견에 동의했다.

안전보장이사회는 2021년 11월 안정화를 위한 다국적군(Eufor-Althea)의 연간 파병 연장에 대한 투표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권 행사를 피하기 위해 크리스티안 슈미트 고위 대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슈미트 고위 대표는 초대되지도 않았다).(4) 슈미트 고위 대표는 최근 보고서에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 내전 이후 가장 큰 실존적 위협에 직면해 있고” 스르푸스카 공화국 당국이 ‘국가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으며, 이로 인해 “평화협정이 무효로 이어질 수 있다”고 밝혔는데 그와 관련해서 자신의 의견을 변론할 수 없었다.(5) 26년 전 설립된 고등 대표부가 폐쇄된 것은 이론적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기능을 ‘정상화’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 범위는 너무 광범위하다.  

 

 

글·Ph. D, A. O.
언론인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Accord cadre général pour la paix en Bosnie-Herzégovine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평화를 위한 일반 기본 협정’,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표부 홈페이지(www.ohr.int)에서 확인할 수 있음.
(2) 유엔총회 결의 52/150호 및 안보리 결의 1144호.
(3) ‘Avis sur la situation constitutionnelle en Bosnie-Herzégovine et les pouvoirs du Haut représentant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헌법 상황과 고위 대표의 권한에 대한 의견’, 법을 통한 민주주의 유럽위원회(베니스위원회), 유럽평의회, 2005년 3월 12일.
(4) 안보리 결의 2604호.
(5) ‘60th Report of the High Representative’, 2021년 11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