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중국정부가 내 이름을 삭제하다

중국유명작가의 코로나 투쟁일기

2022-08-01     팡팡 l 작가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지 2년여, 코로나19의 근원지로 지목돼 세계 최초로 봉쇄됐던 지역, 중국 우한은 어떻게 됐을까? 매일 ‘봉쇄 일기’를 썼던 작가 팡팡을 포함해 900만 명의 우한 시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과거 중국의 유명작가였으나, 이제는 기피 인물(Persona non grata)이 돼버린 팡팡이 증언한다.

 

2020년 1월 23일, 중국 정부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폐렴 전염병’을 이유로 우한을 봉쇄했다. 중국 중부의 대도시 우한에 사는 나는 다른 수백만 명의 시민들과 함께 도시 안에 갇혀 버렸다. 두려움과 공포가 빠른 속도로 우리를 엄습했다. 도시 전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병원 시스템은 붕괴 직전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별안간 우리의 삶은 완전한 불확실성 속으로 내던져졌다. 

나는 감염됐을까? 나의 지인들은 감염됐을까? 만약에 감염이 됐다면 과연 병원이 우리를 받아줄까? 우한만 고립되는 것이 아닐까(생화학 부대가 우한을 둘러싸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잔인하고 끔찍했다. 이 병에 걸리는 것은, 곧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우리는 도시 안에 갇힌 채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때 (상하이의) 한 잡지사에서 나에게 연락이 와 ‘봉쇄 일기’를 써 볼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나는 봉쇄 3일째부터 코로나19의 상황과 우한 시민들의 생활에 관한 글을 인터넷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때가 2020년 1월 25일, 음력 정월 초하룻날인 춘절이었다.

나는 온라인 웨이보(微博)에 글을 올렸다.(1) 손이 가는 대로 쓴 일종의 짧은 보고서였다. 나는 구조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글을 썼다. 나중에 가져다 쓸 수 있는 글감 정도로만 여겼다. 처음부터 매일 글을 올릴 계획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봉쇄기간이 이렇게 길어질지 몰랐고, 더군다나 이 전염병이 전 세계로 확산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작가 정신을 발휘해 상황을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현장에 있었고, 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얻어낸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보고하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2020년 3월 24일 코로나19가 진압됐다고 발표된 날까지, 어쩌다 보니 나는 글을 60편이나 썼다. 그로부터 2주 뒤에 우한 봉쇄 조치가 공식적으로 해제됐다. 봉쇄기간은 총 76일이었다. 우한시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2년이 지났다. 올해 봄에 나는 ‘우한 일기’를 수정하려고 다시 한번 일기장을 펼쳤다.(2)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긴장의 순간, 끝없는 투쟁, 무거운 공기, 혼란, 비탄, 외침, 구조 요청, 이름과 얼굴, 사랑과 분노, 피와 눈물. 이 모든 것을 매일 기록할 수 있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이 글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상세한 글이 없었더라면, 많은 것들이 그대로 잊혔을 것이다. 요즘에 늦은 밤 우한 거리의 화려한 조명을 보면, 그리고 신문을 읽고 24시간 자유롭게 인터넷에 접속하는 시민들을 보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고작 2년이 지났을 뿐이다.

중국에 오래된 속담이 있다. 지도자가 강가에 서서 말하기를, “모든 것은 저 물처럼 흘러가리니! 낮에도 밤에도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물처럼.”(3) 그는 시간의 흐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수에 젖어 이야기한다.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마음대로 노닐든 빠져 죽든, 고통에 대해 가벼운 마음을 가지든 비통한 마음을 가지든, 불행에 짓눌리든 행복으로 가득 차든, 시간은 우리와 상관없이 흘러간다. 우리를 넘어선다. 마치 물처럼, 시간은 기억을 마모시켜 마침내 사라지도록 만든다. 마치 바람처럼, 시간은 돌에 새겨진 흔적을 마모시켜 사라지도록 만든다.

 

지워지지 않는 우한 시민들의 깊은 상처

우한이 변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모든 것이 이전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답한다. 그렇다, ‘어느 정도’ 비슷하다. 도시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일 뿐이고, 그만의 방식으로 시간 속에 녹아들어 독자적인 길을 걸어간다. 재앙이 닥치든 닥치지 않든 간에, 변해야 할 운명인 것은 변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 새로 짓는 건물이 다소 줄어들었고, 일부 상점은 파산했으며, 도로는 정비됐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코로나19가 아니었어도 일어났을 일들이다. 전쟁이 발발해 도시에 가시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의 오늘은 다른 평범한 날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이 전염병으로 바뀐 것은 사람들이다. 우한에 살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

인터넷상에서 ‘눈물 짓는 영혼’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던 한 여성을 기억한다. 한 아이의 엄마였던 그녀는 봉쇄기간에 외동딸을 잃었다. 그녀에게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웨이보 계정을 통해 그녀는 책임자들을 향해 그들이 취한 조치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딸의 죽음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잊혀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외쳤다. 그러나 검열, 그리고 각종 금지 조항과 위반자에 대한 계정 중지 조치 때문에 그녀와 같은 의견을 듣기는 쉽지 않았다. 이 여성의 비탄의 목소리도 이제 더는 들리지 않는다. 

우한에 어머니나 아이를 잃은 ‘눈물 짓는 영혼’이 얼마나 더 있을까? 불과 며칠 사이에 가족 여러 명을 떠나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다. 2020년 한 해가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에 남긴 깊은 상처는, 도시가 변하든 변하지 않든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한에서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초기처럼 죽음을 몰고 다니지 않지만, 시민들은 생활 속에서 각종 예방 수칙을 지키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생활 방식, 우리의 습관,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모든 사람들이 휴대폰을 소지하고 다니며 녹색 QR 코드를 인증해야 하고, 마스크도 써야 한다. 줄을 서서 PCR 검사를 받아야 하고, 때로는 2일이나 3일 연속으로 검사를 받아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녹색 QR 코드가 회색으로 바뀌고, 공공장소의 접근이 차단된다. 버스, 지하철, 학교, 쇼핑몰, 은행, 우체국 등 일상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모든 장소는 이 녹색 QR 코드 없이는 입장이 불가하다. 고속도로조차 이용할 수 없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렇게까지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든 적은 없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나의 운명도 바뀌었다. 2020년 4월 8일 우한 봉쇄 조치가 해제된 바로 그날에 내가 쓴 일기의 번역본이 미국과 독일에서 인터넷을 통해 특별 판매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는 이 소식이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나를 향해 모욕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갑자기 사람들이 온갖 이유로 나를 비난했다. 나의 ’일기‘는 한 중국 잡지사의 의뢰로 시작됐지만, 사람들은 이 일기가 미국의 사주를 받아 쓰인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작가의 입장에서 흔치 않은 일인 해외 출판이 “이례적으로 빠르게” 진행됐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모든 것은 내가 봉쇄기간에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생각의 변화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데만 급급한 채 코로나19 발생 초기에 뒤늦게 대응에 나선 당국을 비판하고, 바이러스에 감염돼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동정을 표하고, 무엇보다도 책임자들에게 그들이 취한 조치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계속해서 촉구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현실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고 출간해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나는 서구의 반중 세력에 ‘칼자루를 쥐여준’ 사람, ‘반역자’, ‘매국노’가 됐다.

나는 1년 넘게 인터넷상에서 심한 공격을 받았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에서 욕설과 비방이 이어졌다. 집단으로 우한에 몰려와 나를 살해할 것이라며 욕을 퍼붓는 사람도 있었고, 무술 단체에서 사람을 보내 나를 두들겨 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한시 곳곳의 벽면에 나를 비난하는 내용의 포스터를 붙인 사람도 있었다. 나를 치욕스러운 모습의 조각상으로 만들자고 제안한 사람도 있었다. 내가 미국으로 도망갔다가 도착하자마자 미국 정부로부터 추방됐다는 소문이나, 미국에서 체포 영장이 발부돼 내가 또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는 소문도 있었다.

나를 무너뜨리려는 영상, 노래, 그림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이런 공격 앞에서 나는 반박을 할 수도 반격을 할 수도 없었다. 나에 관한 모든 것은 검열 대상이었다. 인터뷰나 해명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삭제됐다. 언론에서 나의 이름은 금기시됐다. 지금은 별표로 표시된다.

 

아직 내게는, 국가 폭력에 맞설 용기와 힘이…  

중국 당국은 나의 책 『우한, 봉쇄된 도시』의 내용에 기반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는커녕, 발췌된 문구들만 본 일부 악의적인 네티즌의 편향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여 나를 맹목적으로 억압하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제재는 터무니없었다. 이제 나는 중국에서 어떤 작품도 출판할 수 없고, 문학적인 시위나 공익을 위한 시위에도 참여할 수 없다. 언론이 내 이름을 언급할 수 없게 됐을 뿐만 아니라, 학자들이 나의 작품을 대학 자료로 활용하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됐다.(4) 

독립 언론이 용감하게 나서서 나의 발언을 실으려고 했을 때도 기사가 즉시 삭제되거나 사이트가 폐쇄됐다. 이게 다가 아니다. 고위 공직자들이 나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으름장을 놓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나는 도청당하고 감시당하고 있다. 내가 외출을 하면 ‘걱정스럽다’는 핑계로 나의 위치를 확인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지난해 6월에 친구들이 나에게 고대 도시로 유명한 쓰촨성의 리장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다.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했다. 중간쯤 갔을 때 친구들의 직장에서 전화가 와서는 지금 당장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경찰은 친구들을 몇 차례나 불러서 심문을 벌였다. 내가 리장에서 묵기로 돼있었던 호텔은 나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그저 친구들끼리의 소소한 여행이었을 뿐인데...

이런 상태로 살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진다. 나는 당국의 억압을 ‘국가의 냉정한 폭력’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정부와 악의적인 시민 세력이 의기투합해 협력한다 해도, 나는 계속해서 침묵할 것이다. 슬픈 현실이지만, 나와는 관계없는 슬픔이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열망하는 자유,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개방, 우리가 원하는 삶은 저 멀리에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그 어떤 낙관적인 존재의 이유도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아직 차분하게 그에 맞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이 있다. 

 

 

글·팡팡 Fang Fang
작가. 최신작으로 『Wuhan, ville close 우한, 봉쇄된 도시』, Stock, Paris, 2020과 『Funérailles molles 무기력한 죽음』, L’Asiathèque, Paris, 2019가 있다. 북경어 번역은 프레데리크 달레아스(Frédéric Dalléas)가 맡았다.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중국의 페이스북에 해당하는 소셜네트워크 플랫폼(-편집자 주) 
(2) 『Wuhan, ville close 우한, 봉쇄된 도시』, Stock, 2020의 제목으로 출간됨. Martine Bulard, Fang Fang, une accusatrice à la chinoise 팡팡, 중국의 고발자, Planète Asie, 2020년 11월 6일, https://blog.mondediplo.net
(3) 공자. 대담, IX-16.
(4) 팡팡은 80여 편의 소설과 수필을 쓴 작가로, 모두 중국에서 출간됐고 작품 중 일부는 문학상을 수상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