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행 바캉스가 품은 다의성

알제리 이민사를 비추는 거울

2022-08-01     제니퍼 비데 l 파리 시테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

매년 여름, 수십만 명의 알제리계 프랑스인이 부모의 고향에서 휴가를 보낸다. 알제리의 친지들과 교류하거나 저렴한 비용으로 해변 도시에 머무는 등, 이들의 알제리행 바캉스는 시대와 방문객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의미를 지닌다.

 

2022년 봄, 파리 수도권 지역에서 와르다는 자매들과 다가올 알제리 방문을 의논했다. 이들은 1960~1970년대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1950~60년대 프랑스로 건너온 이민자다. 자녀들은 ‘고향에서 보내는 바캉스’에 익숙지 않다. 와츠앱으로 알제리에 있는 사촌들과 연락하고 있지만, 부모님의 고향을 방문했던 일은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이들은 1년 전 코로나 바이러스로 사망한 어머니, 파티마를 위해 지중해를 건너기로 마음먹었다. 프랑스에서 60년 살았던 파티마는 6명의 자녀와 11명의 손자녀를 둔 채, 알제리 고향 마을에 묻혔다. 파티마보다 몇 년 앞서 세상을 떠난 남편 곁에 잠든 것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와르다 자매들은 어머니의 유해를 직접 모실 수도, 묘소 앞에서 알제리 친지들과 추모를 드릴 수도 없었다. 코로나19 사태로 2년간 국경이 봉쇄됐다. 국경이 열린 후에도 팬데믹 때문에 항공과 해양 교통은 혼란에 빠졌다. 오래전부터 비판 대상이었던 국영 교통 공사(특히 에어 알제리)들의 경영난도 한몫했다. 알제리를 향한 막대한 교통 수요는 장애물에 가로막혔다. 프랑스 거주 알제리인, 혹은 알제리계 프랑스인들의 휴대폰에는 파리와 마르세유 등지 여행사 앞에서 패닉 상태가 된 군중과 끝없는 대기줄을 담은 영상이 떠돌았다.

2010년대에 알제리 국경 경찰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매년 약 70만 명의 해외 거주 알제리인이 고향을 방문했다. 그중 대부분이 프랑스에서 왔다. 프랑스로 이주한 알제리인, 그리고 속인주의에 따라 알제리 국적을 받은 그들의 자녀다. 이들은 알제리 여권으로 입국할 수 있다. 국가통계에 따르면, 프랑스 인구의 약 100만 명이 알제리계다. 이 중 이민자는 약 40만 명, 이민자의 자손은 약 60만 명이다. ‘알제리행 바캉스’ 수요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고향 방문에 제동이 걸렸다. 2020년에는 해외 거주 알제리인의 8만 명만이 입국할 수 있었다. 2021년 방문객은 6만 명도 되지 않았다. 2022년 여름, 그동안 가지 못한 바캉스를 떠나려는 이들의 수는 어마어마하다.

알제리는 모로코나 튀니지처럼 유명 관광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알제리에서 여름을 보내고자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7월 왕복 비행기 표 가격은 800유로 내외, 예년 가격은 400유로대였다)도 감수하며 애타게 비행기 표를 구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프랑스에 거주하는 알제리계 인구의 다양성은 식민지와 이민의 역사로 얽힌 두 국가 간 몇십 년의 교류를 그대로 보여준다. 

 

알제리행 바캉스, 프랑스 이민사를 비추는 거울 

우선,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이민자 2세가 있다. 이들은 이제 성인이고, 부모가 된 이들도 있다. 논문을 쓰려고 온 알제리 유학생, 혹은 프랑스 병원에서 인턴 중인 의사도 있다. 북아프리카 출신에 나이든 이민자를 일컫는 ‘시바니(Chibanis)’ 중엔 알제리에 있는 아내, 아이들과 떨어져 평생을 프랑스에서 보낸 이들도 있다. 가족과 가깝게 지내려고 알제리에 별장을 마련한 알제리계 프랑스인 아내와 알제리인 남편 부부도 있다. 이민자 2세와  손자로 구성된 ‘프랑스의 청년들’은 알제리가 익숙하다. 이들은 친구들과 유료 해변으로 놀러 가거나, 할머니 댁에서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할 날을 고대한다. 알제리행 비행기 표에 몰리는 수요는 알제리행 바캉스가 지난 관행이나 향수가 아님을 보여준다.(1)

점점 늘어나는 알제리행 바캉스는 알제리인의 이민사, 아울러 1962년 독립한 신생 국가 알제리의 역사를 투영하는 거울이다. 알제리인의 프랑스 이민사는 오래전, 1830년 시작된 프랑스 식민지배로부터 출발했다. 이후 1950~60년대 프랑스 경제성장기에 특수한 법적 신분을 지닌 알제리 노동력이 대거 동원됐다. 이들은 오랫동안 외국인이 아닌 프랑스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완전한 프랑스 시민의 신분은 아니었다. 

알제리 독립(1962년 7월 - 역주) 후 이민사는 크게 세 가지 시기로 구분된다. 알제리 사회학자 압델말렉 사야드는 1970년대 이민자들의 ‘이중 부재’를 조명한다.(2) 고향에서의 물리적 부재, 그리고 그들을 일시적인 노동력으로 여기던 프랑스 기업 내에서의 상징적 부재다. 프랑스와 알제리 정부 모두 이민자들의 프랑스 체류가 ‘임시적이라 착각’했고, 이민자들도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귀향에 대한 환상은 ‘고향에서 보내는 바캉스’로 변했다.

1970년대에 자란 이민자 자녀들 세대에게 이 바캉스는 어떤 의미였을까? 70년대는 실업자가 늘어나면서 프랑스 이민정책의 방향이 바뀌던 시기였다. 노동력 유입을 위한 이민이 중지됐고 ‘귀국 지원’ 정책이 도입됐다. 알제리 정부도 해외 이주를 식민지배가 불러온 불행한 결과로 간주하며 이민자들이 알제리에 재정착하도록 장려했다. 프랑스에 온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이민자의 아내와 아이들은 곧 돌아갈 날을 꿈꿨다.

1958년 알제리에 태어난 칼리다는 십 년 후 어머니, 남매들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다. 이민자로 먼저 건너온 아버지는 이미 15년 전부터 프랑스에 살고 있었다. 어릴 적 알제리에 가는 일은 드물었다. 어머니가 부모님을 만나러 종종 갔지만, 칼리다는 집에 남아 동생들을 돌봤다. 아버지의 급여로는 6남매 가족의 항공요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 체류는 일시적이라는 생각에, 칼리다의 부모님은 고향 방문을 바캉스처럼 여길 수 없었다. 알제리에 가면 가족을 만나는 일만으로 시간을 보냈다.

“특별할 게 전혀 없었어요. 집에서 가족을 만나는 게 전부였어요.” 칼리다의 둘째 딸 나시마가 회상한다. 언젠가 귀국한다는 믿음은 가족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 잡았고, 진로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다. 나시마는 “부모님 머릿속엔 알제리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늘 있었어요. 학업도 알제리에서 유망한 분야로 고르셨죠”라고 설명한다. 나시마는 미용사 자격증 교육과정에 등록했다. 칼리다는 비서직 직업교육을 수료했다. 부모님의 야망이 어떻든, 프랑스 교육 시스템은 다양한 세부과정으로 나뉘고 이주노동자의 자녀들을 다양한 진로로 이끌었다. 

 

2세들이 경험한 알제리와 프랑스의 격차 

칼리다가 알제리에서 보낸 시간은 적었지만, 그곳에서의 삶을 계획하기에는 충분했다. 1970년대 말, 알제리 정부는 학업을 마친 이민자 2세 청년들을 알제리 공기업에 영입하려고 했다. 부모님의 귀국 계획을 들으며 자란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사회주의 개발모델을 추진했다. 칼리다는 20세 무렵, 알제리로 떠나 어느 공기업에서 비서로 일했다. 그리고 알제리에서 결혼을 했고, 자녀도 낳았다. 그런데 1980년대 말 알제리 정치·경제 상황이 악화되자, 칼리다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요컨대, 알제리행 바캉스 그 첫 번째 시기에 귀국 계획은 구체적이었고, 바캉스로서의 체류는 드물었다.

1970년대에 태어난 이민자 자녀들은 경제적 상황이 개선되는 것을 지켜봤다. 이들은 1960~70년대 생겨난 대규모 빈민가가 철거된 후 조성된 공공임대주택가에서 자랐다. 당시만 해도 다양한 사회계층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부모님의 프랑스 체류가 길어졌고, 이들은 알제리 방문을 ‘바캉스’로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귀국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알제리 정부는 이민자 가족에게 에어 알제리 표를 할인가에 판매하는 등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현지의 삶은 프랑스에서의 삶과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서민층이 소비사회에 참여하는 프랑스와, 물자가 귀한 데다가 도시화가 되지 않은 알제리 사이의 격차는 아이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혔다. 해변가에서 휴가를 보내는 경우는 더욱 드물었지만 그들은 그 특별한 순간을 오래도록 기억했다.

 

평등과 반인종차별을 외친 1983년

프랑스 사회에서 이민자 2세 청년들의 존재감은 점점 커졌다. 대중매체나 정치인의 연설에서 이들은 소도시 범죄와 연관된 ‘문제아’로 등장했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온전히 프랑스에 기반한 삶을 살았으나 프랑스 사회와 분리된 집단으로 취급받았다. 다양한 계층이 섞인 동네에 거주했으며, 의무교육이 도입되자 공교육 각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중견직이나 관리직에도 진출했다. 이들은 프랑스 사회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요구하며 시위했다. 알제리 정부도 이주민 가족, 특히 프랑스에서 태어난 2세들의 프랑스 영구 정착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1983년은 평등과 반인종차별을 외치며 행진한 해다. 또한, 이중국적을 가진 청년들이 한 국가에서만 병역을 하도록 허용하는 알제리-프랑스 조약을 체결한 해이기도 하다. 1968년생 자멜은 형제자매 중 여섯째이자 프랑스 땅에서 태어난 두 번째 아이였다. 자멜의 아버지는 1958년부터 프랑스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했지만, 나머지 가족은 1966년에야 건너와 리옹 근교에 자리 잡았다. 가족들은 처음 몇 년 동안 알제리에 가지 않았다. 알제리에 집을 지으려고 아버지가 저축해둔 돈을 다 써버렸기 때문이다. 

자멜은 14살 때 ‘알제리인 유럽 교우회’가 주최한 여름 캠프를 통해 알제리를 방문했다. 프랑스에서 알제리 정부의 중개 역할을 하던 단체였다. 교우회 회보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이주민 자녀들이 고향의 문화를 배우도록” 돕는 것이 캠프의 목표였다. 이 같은 행사는 1980년대 초 귀환을 장려하던 알제리 정부 이데올로기의 잔재였다. 알제리에서 태어난 자멜의 누나들은 프랑스에서 중등교육을 마친 뒤 알제리로 돌아갔다. 귀국을 원했던 부모님의 꿈이 이뤄졌다. 공기업에서 비서로 일하는 누나만 빼고, 나머지는 형제자매들은 알제리에서 교사가 됐다.

 

알제리행 바캉스, 자신의 뿌리를 이해하는 법

1980년대에 접어들자 고향에서 떠나는 바캉스는 잦아졌다. 자멜은 청소년시절 매년 알제리에 갔다. 쭉 프랑스에서 살았던 막내들은 의무교육의 혜택을 받기 시작했다. 가족 중 처음으로 대입자격을 취득한 자멜은 알제리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언어 장벽에 부딪혔다. 교육과정은 아랍어로 진행됐다. 생활방식도 너무 달랐다. 어린 시절 바캉스를 보내던 알제리가 아니었다. “잘 적응할 줄 알았어요. 바캉스로 알제리에 자주 갔고, 8월의 알제리를 겪어봤으니까요. 하지만 1월, 2월, 9월의 알제리가 어떤지 몰랐죠. 완전히 달랐어요!” 

형과 누나들은 정치적, 경제적 호조와 맞물려 부모님이 품고 있던 귀국의 열망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반면, 자멜처럼 프랑스에서 태어난 막내 세대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알제리행 바캉스 두 번째 시기는 고향 방문이 더욱 주기적으로 이뤄지고, 영구 귀국은 점점 요원해지는 전환점이다. 1980년대 태어난 이들에게 귀국은 가족 모임에서 손위 형제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알제리에 정치×경제 위기가 닥쳤고, 1990년대에 내전으로 이어지면서 귀국길은 막혀버렸다. 게다가 부동산 매입 같은 물질적 요인도 프랑스 영구 정착을 공고히 했다. 

그렇다고 알제리행 바캉스를 중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귀국이라는 환상은 점차 정기적 고향 방문으로 대체됐다. 이민자와 그 자손을 둘러싼 정치적 상황은 알제리와 프랑스 양쪽에서 크게 변했다. 이제 프랑스에서는 이민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거나 사회 통합, 특히 무슬림 신앙을 가진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 자녀들을 프랑스 사회에 통합하는 데 쟁점을 두지 않는다. 1980년대부터 이민자 가족들과 프랑스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극에 대한 우려가 커졌다. 

국민 전선에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이 점점 늘었다. 이제 계급 간의 투쟁이 아니라 프랑스 사회 내에서 이민자와 그 자녀들의 자리를 놓고 선거구의 편이 갈렸다. 2000년대에는 극우 사상의 확산과 동시에, 인종차별 문제를 인정하고 맞서는 차별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맥락에서 알제리 체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닌다. 알제리행 바캉스는 이제 영구 귀국을 위한 전주곡이 아닌, 프랑스에서 겪은 인종차별 경험의 반동으로 자신의 출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됐다. 

1988년생 파이자는 1975~1997년 사이 태어난 7남매 중 다섯째다. 파이자는 자신이 언니들과는 다른 세대라고 느낀다. 파이자가 프랑스와 알제리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언니들의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언니들은 알제리에 주기적으로 방문하던 시기에 자랐고, 귀국한다는 생각이 늘 머리에 남아있었다. 점점 불확실해지는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반면, 파이자는 가족이 공공임대주택을 떠나 매입한 주택으로 이사 가던 시기에 자랐다. 가족의 내 집 마련은 큰언니의 말을 빌리자면 “귀국이라는 환상에 마침표를 찍는” 사건이었다. 

내전 때문에 파이자는 12세가 돼서야 알제리에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파이자는 프랑스에서 느꼈던 감정들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파이자는 항상 ‘자신의 국가’로 돌아가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알제리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었는데 말이다. (“머릿속에서 나는 다른 곳에서 왔다고 말하곤 했어요”) 언니들의 어린 시절 속 시골 같던 알제리와는 달리, 파이자는 시장경제와 여가산업이 발달한 알제리를 겪었다. 도시의 집은 편리했고, 해수욕장으로 놀러가기도 했다. 은퇴 후 알제리에 정착하려고 떠난 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고향과의 관계가 단절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알제리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렸다.

1990년대에 내전이 터지고 알제리 정부의 입장이 변하면서 정부는 귀국 장려정책을 완전히 포기했다. 더 숙련된 노동력을 갖춘 이주자들이 늘자, 정부는 현실성 없는 재정착을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제리 개발에 재정적인 도움을 받고자 ‘재외국민 공동체’라는 형태로 관계를 유지했다. 부테플리카 대통령 집권(1999~2019) 초기에 알제리는 평화와 경제적 여유를 되찾았다. 유가 상승으로 국고가 채워져, 주거시설과 도로, 대학을 건설할 수 있었다. 원유 소득을 국민에게 (극히 일부) 재분배하면서 사회적 긴장도 완화됐다. 2000년대 알제리의 번영은 당시 고향을 찾은 재외국민의 뇌리에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이후 불경기와 정치적 혼란은 2010년 말 ‘히락(hirak)’으로 불리는 정치 운동으로 번졌다.

영구 귀국과 알제리행 바캉스 사이의 관계는 몇십 년이 흐르면서 변했다. 1980년대 초까지는 가까워보였던 귀국의 꿈은 점점 멀어졌다. 알제리는 이민자 자손들이 휴가차 왕래하거나, 은퇴한 부모 세대가 좀 더 길게 체류하는 곳이 됐다. 재정착할 생각이 사라졌다고 부모님의 고향과 인연을 끊은 것은 아니다. 국립 인구통계 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1992년, 알제리에서 태어난 부모님을 둔 프랑스 출생 이민자 2세의 약 25%가 알제리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2008년에 이 수치는 12.5%로 줄었다. 오늘날 칼리다, 자멜, 파이자의 알제리행 바캉스는 저마다 다른 의미를 가진다. 프랑스 사회에서 그들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 그리고 알제리에 있는 재산의 차이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칼리다는 모스타가넴에서 지낼 비용을 마련하려고 경비, 학생식당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며 저축한다. 모스타가넴은 매년 방문하는 알제리 서부 도시다. 칼리다는 그곳에서 사촌들과 만나고 아이들을 해변에 데려가길 좋아한다. 프랑스에서 버는 수입은 많지 않지만 알제리에선 사회적인 대우를 받는다. 칼리다는 이미 알제리에 땅을 사서 집을 올리기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를 삶의 터전으로 선택해 아이들을 키우고 있지만 공공임대주택에서 살고 있다. 그는 가족과 친척 덕분에 알제리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부동산을 구입하는 등 더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인 것도 있다.

자멜은 알제리에서 성장한 여성과 결혼했다. 아내의 가족 대부분이 알제리에 있다. 부부는 2년에 한 번 정도 여름에 알제리를 방문한다. 알제리에 가지 않는 해는 프랑스 도시 세트나 르캅다드에서 휴가를 보낸다. 알제리행 바캉스를 통해 아이들은 프랑스에서 볼 수 없었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시간을 보낸다. 부부는 기분 전환 삼아 알제 주변 해수욕장이나 알제 동쪽에 있는 대형 워터파크 키판 클럽에 아이들을 즐겨 데려간다. 

자멜은 바칼로레아를 취득하고 4년의 학업(Bac+4)을 마친 후 B 카테고리 공무원으로 일한다. 아내는 알제리에서 고등교육 학위를 취득하고 프랑스에서 교직원으로 일한다. 그들은 리옹 근교에 아파트를 장만했다. 향후 아내의 알제리 본가와 가까운 곳에 집을 매입할 계획이다. 부부는 프랑스에서 안정적인 주거와 직업을 갖춘 중산층에 속한다. 게다가 자멜의 처갓집, 그리고 중등교사로 일하는 누나들 덕분에 알제리에서 부부의 사회적 지위는 중상층에 가깝다.

 

알제리 상류층과 프랑스 이민자 2세, 이들 간의 경계선

마지막으로 파이자의 경우, 알제리행 바캉스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관리직이 되고자 프랑스에서 고등교육 과정을 밟고 있는 파이자는 알제리에서 보낸 시간을 자신의 ‘뿌리’에 대해 고민해볼 기회로 여긴다. 다른 휴가객들은 해변도시의 신식 시설을 선호하지만, 파이자는 알제리에 대해, 목가적이고 가족적인 생활방식이 무엇인지 배운다. 파이자 같은 이민자 후손은 알제리에서 보내는 시간을 자신의 기억과 성찰에 집중하며 이를 가족의 과거와 연결짓고자 한다. 구체적인 관계가 거의 없는 경우에도 말이다. 프랑스에서 더 인정받는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음에도, 파이자 같은 ‘계층 탈주자’는 자신의 출신에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출신이 사회, 가족, 국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앞서 사야드가 조명한 이중 부재의 연장 선상으로, 알제리행 바캉스는 오늘날 이민자 2세들의 이중 존재에 대한 다양한 양상을 드러낸다. 먼저 이들은 법적으로 이중적 존재다. 속지주의에 의해 프랑스인인 동시에 속인주의에 의해 알제리인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알제리에 가면 실질적 이중 존재가 된다. 알제리행 바캉스는 현지에서 이들의 존재를 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프랑스 사회에서 겪는 인종차별적 낙인에 맞서는 같은 처지라 여기는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종류의 인식이 생겼다. 알제리에서 국경 경찰, 상인, 혹은 친척들이 ‘이민자’라고 부르는 것은 국가 공동체에 소속되지 않는다는 부정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 단어는 곧 ‘신흥 부자’라는 양면성을 띤 사회적 지위를 일컫는 새로운 구분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특히 관광지 소비시설의 경우가 그렇다. 베자이아 동부 카빌 해안에 위치한 관광단지 카프리 투어에 가면, 두 부류가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임대 아파트(2011년, 분리형 원룸 아파트의 1주일 임대료가 450유로였음)에서 지내는 알제리계 프랑스인 청년들은 가족을 며칠간 떠나 태닝하고, 제트 스키를 타며 즐기러 왔다. 이들은 프랑스 서민층 출신으로, 유적을 방문하거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걸 선호하는 ‘지식 계층’ 이민자 자녀들과는 여가활동 취향이 다르다. 

 

알제리 상류층 가족이 머무는 (일부는 VIP용) 빌라의 일주일 임대료는 600유로다. 한편, 알제리인의 평균 월급은 230유로다. 가족이 빌라의 소유주인 경우도 있다. 같은 엘리트 부류끼리 지내려고 마련한 투자의 일환이다. 서로 다른 두 부류가 잘 지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친근함과는 거리가 먼 말이 오간다. 상류층 알제리인들은 휴가 온 ‘이민자들’이 상스럽고 시끄럽다며 가차없이 평한다. ‘이민자들’은 그들대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현지인’에 놀란다. “카프리 투어에는 알제에서 온 사람이 많아요. 이들이 이민자라고 오해를 받죠. 알제 사람들은 다른 도시에 비해 프랑스어를 잘하거든요. 옷차림도 우리랑 비슷해요. 왜인지 모르겠어요. 우리랑 그들이 뭐가 다른지도 모르겠고요.”

프랑스 볼썽블랑(Vaulx-en-Velin)에서 성장한 18세 수피안이 놀라움을 표한다. ‘이민자’, 혹은 ‘현지인’이라는 카테고리 이면에 사회 계층의 경계선이 존재한다. 알제리 상류층은 두 국가 간 구매력 차이 덕분에 일시적으로 ‘과대평가’된 프랑스 서민층 때문에 자신들의 체면이 위협받는다고 느낀다. 성별에 대한 규범도 문제다. 여성 이민자 2세들은 현지에서 겪은 이동의 제약에 관해 얘기한다. “어릴 때 알제리를 좋아했어요! 친구도 많았고 항상 밖에서 놀았죠. 그런데 갑자기 충격을 받았어요. 친구들을 더 이상 밖에서 볼 수 없었죠. 이제 성인이 됐으니 마음대로 외출할 수는 없다는 말을 들었어요.” 36세의 야스미나가 회상했다. 

바캉스의 성격에 따라 이런 제약은 다르게 적용된다. 젊은 여성들끼리 해변에서 ‘이민자들’끼리 파티를 벌이려면, 유료시설을 이용해야 안전하다. 남자들의 경우 좋은 교통편, 휴가용 숙소, 혹은 집 공사를 믿고 맡길 만한 장인을 찾는 방법을 모른다. 알제리 경제활동의 상당 부분이 비공식적인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알제리에서 남성 역할 수행에 어려움을 겪는다.

아미나는 2010년 남편과 두 자녀와 함께 떠난 휴가에서 안 좋은 기억을 안고 돌아왔다. 간호사로 일하는 아미나는 일 년 내내 휴가를 모아 고용주와 협상한 끝에 4주의 바캉스를 얻어냈다. 현지에 도착한 이후 휴가는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남편에게 실망했어요. 3년 전 휴가와는 다를 거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남편에게 렌트카를 알아보라고 계속 이야기했어요. 렌트카 비용을 마련하려고 추가 근무까지 했어요. 해변 근처에서 차를 인수하려고 했는데, 알제리에서는 이런 일들을 여자가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남편 하비브는 아미나처럼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알제리가 익숙지 않은 그는 해변가 숙소를 구하거나 해안 도로의 교통체증을 피할 방도를 몰랐다.

알제리행 바캉스는 국경을 초월한 사회적 공간이 무엇인지 재고할 여지를 남긴다. 

 

 

글·제니퍼 비데 JenniferBidet
파리 시테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 『Vacances au bled. La double présence des enfants d’immigrés, Raisons d’agir 알제리행 바캉스. 이민자 자녀의 이중 존재, 행동에 나서야 하는 이유 』(Paris, 2021)의 저자.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해당 기사는 사회학 박사학위 연구의 일환이며, 1950~1970년 사이 프랑스로 이민 온 두 이민자의 1958~1992년생 자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인터뷰는 익명으로 진행됐다. 
(2) Abdelmalek Sayad, 『La double absence: des illusions de l’émigré aux souffrances de l’immigré 이중 부재 : 이주민의 착각에서 이민자의 고통까지』, Éditions du Seuil, Paris,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