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 서사를 다시 채워라!

포스트-포스트모더니티의 멋진 목표는?

2022-08-01     에블린 피에예 l 문화평론가

1980년대 초, ‘거대 서사의 종말’에 대한 담론은 공동의 역사를 이해하고 역사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든 시도를 환상으로 간주했다. 이데올로기와 진보에 대한 믿음의 종식은 거대 서사의 종말이라는 주제의 다양한 변형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미래를 제시하기 위한 거대 서사가 다양한 방식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우리에게는 거대 서사(모든 역사적 사건들에 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거대한 ‘서사의 틀’-역주)가 절실하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페이스북 게시물 관리에 허술하기로 유명하다. 이 게시 글은 한때 독일 신문에 실린 본인의 인터뷰(1)를 발췌해 다시 올린 것이다. 그런데 2021년 10월 26일, 그는 개신교 주요 경제인 모임인 샤를 지드 서클(Cercle Charles Gide) 연례 만찬에서도 좀 더 길고 세련되긴 했지만 같은 발언을 되풀이했다. 

“포스트모던 민주주의 사회는 세속화된 사회가 아니다. 종교적인 거대 서사에서 유래한 사회다. 20세기에는 해방과 전체주의라는 거대 서사 이후에도 다른 거대 서사가 많이 존재했다. 우리는 전체주의 종말과 더불어 거대 서사도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 나는 더 이상 거대 서사가 없는 우리가 매우 불행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인들은 보잘 것 없는 작은 서사들에 직면했기 때문이다.”(2) 

마크롱이 단순히 반복을 즐긴 것만은 아니다. 그는 ‘트렌드’를 따랐다. 발레리 페크레스 공화당 대선후보는 “국가적 거대 서사”(<레제코>, 2022년 2월 11일자)를 만들겠다고 한다. 스토리텔링(3)의 인기를 주도한 크리스티앙 살몽은 유럽생태녹색당의 상드린 루소가 “포괄적이고 통합적인 거대 서사를 이끌어내고 (...) 처음으로 좌파에게 거대 서사의 신뢰성을 입증한”(<슬라트>, 2021년 9월 30일 자) 공로를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거대 서사’라는 모호한 개념

더 예를 들지 않더라도 거대 서사가 유행인 것은 사실이다. 한편, 이 용어가 다소 모호한 것도 사실이다. 이 개념은 1980년대 초 철학자 장프랑수아 리오타르가 한 에세이에서 사용한 후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특히 큰 인기를 얻은 후 프랑스에서도 대표적인 문헌으로 인정받은 『포스트모던의 조건. 지식에 대한 보고서』(미뉘 출판사, 1979)라는 제목의 이 저서는 포스트 모더니티와 메타 서사(서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다룬 서사-역주)의 개념을 지식 및 미디어를 배경으로 풀어냈다. 이를 좀 더 간단하게 부르는 용어가 바로 ‘거대 서사’다. 달리 표현하면 역사 속의 인간에 대한 관점, 미래에 의미를 부여하는 과거 사건들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말한다. 리오타르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진실과 정의에 대한 담론이 역사적, 과학적 거대 서사에 뿌리내린 사회를 근대 사회로 부른다. 물론 여기에는 많은 변종이 있을 수 있다. 프랑스 자코뱅 당원은 헤겔처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공정과 선은 진보주의 대장정의 화두다.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진실과 공정의 정당성이 결여돼 있다. 그런데 공포정치 실시와 스탈린주의 혹은 마오주의 추종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이 두 개념 덕택이었다.”(<르몽드>, 1979년 10월 15일 자)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선을 정당화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무엇을 대신해, 무엇을 위해 이 개념을 정립하는가? 영원하지도 않고 논쟁의 여지도 있는 이 개념은 권력과 사회적 관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하고 변화한다. 역사학자 요한 샤푸토의 간추린 설명처럼 리오타르는 “지식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지식을 옹호하는 서사”,(4) 특히 “진보주의 대장정” 서사의 정당성을 약화시켰다. 

이로써 우리는 계몽주의 서사의 토대, 진실을 확립하는 이성에 대한 신뢰, 인류 해방을 위해 과학과 비판적 사고에 의지하는 진보에 대한 믿음에 더 이상 기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인본주의와 보편주의의 계획은 더 이상 필요 없다. 진리는 건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주요 표적이 돼 미끼를 흔든다. 전체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이 모든 환상이 사라진 세계가 우리를 환영한다. 이제 우리는 개인의 선택과 각자의 감수성을 되찾았다. 자신들이 추정하는 진실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소박한 ‘작은 서사’가 주목받을 차례다. 미래를 가리키는 이정표 따위는 없다. 

 

열렬히 환영받은 거대 서사의 종말

이성의 이상에 대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으며 인간의 개선 가능성은 여전히 입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1949년 철학자 테오도어 W.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라는 글을 남겼다.(5) “신앙이 사라진 자리”(6)를 “세속종교”(공산주의)가 차지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꿈은 ‘동구권’의 붕괴로 무산됐다. 레이건 행정부의 고문을 맡았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인류의 이데올로기적 진화의 종점”(7)인 자유민주주의 모델이 전 지구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며 ‘역사의 종말’을 예언했다. 

후쿠야마의 예언은 곧 허구로 드러났지만 이 예언의 이론적 변종인 포스트 모더니티와 가설들은 더욱 발전해 보편화된 의심의 꽃을 피웠다. 공동의 이상이라는 위험한 거짓말이 종말을 맞자 시민들이 환멸과 외로움을 느끼는 시대가 시작됐다. 모든 가치들이 상대적이라면 어떤 가치를 보호해야 하는가? 어디에 기반을 두고 가치의 변형을 모색해야 하는가? 어떤 진실을 선호해야 하는가? 역사 교육이 진화하고 ‘국가적 서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이와 같은 문제 제기의 대표적인 예다. 

세바스티앙 르두 연구원이 주요 단계별로 설명했듯 “프랑스는 1789년 혁명 이후 자유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행진하며 보편적인 역사를 실현”하는 단계에서, “기억할 의무”에 근거해 “감춰진 진실을 폭로”하는 단계로 진화했다. 권력에 의해 도구화된 낙관적인 서사는 더 이상 없다. 이제 “미래는 인류의 진보를 향해 뻗어 있는 기대의 지평선으로 인식되지 않고, 폭력적인 과거의 반복을 막는 노력으로 대변된다. 단순히 과거의 참화를 기억하고, 이 참화를 다시는 허용하지 않고, “공동의 위험을 피하는 것”이 목표다.(8)

총체적인 서사들에 대한 이 불신은 공허함으로 느껴진다. 작가 알랭 다마시오의 서정적인 설명처럼(9) 오늘날에는 “기업, 운동단체, 반동적인 싱크탱크 또는 개발유예구역(ZAD) 내부 곳곳에서 ‘새로운 서사가 필요하다’라는 외침”이 들린다. 명백히 “거대 서사”는 “자멸했거나 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주도권을 쥔 통찰력에 의해 과거의 거대 서사가 모조리 산산조각 났다고 간주하는 것은 조금 성급한 추정이다. 마르크스주의의 서사는 대부분 허구로 전락했지만 미국 정치평론가 월터 리프먼(1889~1974)이 수립한 신자유주의 서사는 여전히 유효하다. 1929년 대공황의 원인인 야만적인 자본주의에 반기를 든 리프먼은 1937년 유럽의 독재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The Good Society』를 발표했다. 리프먼은 최악의 폭정은 국민, 국가,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여론의 이름으로 자행된다고 간주했다. 인간 자체가 결함이 있고 스스로 만든 조건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필요를 충족시켜야 한다. 우선 보편화된 경쟁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 질서의 변화에 인간과 제도가 영구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조건을 정비해야 한다(노엄 촘스키는 리프먼의 ‘동의 조작’이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차용했다). 다음으로는 민중의 열정에 좌우되지 않는 유능한 엘리트에게 권력을 위임해야 한다. ‘리더’와 전문가에게 힘이 실리고 매스 미디어와 교육 등이 여론 조작을 주도한다. 유동성, 유연성, 새로운 경제 정세 적응에 필요해진 선택에 동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사회적 다윈주의가 추구하듯 가장 유연하고 가장 반응력이 뛰어난 자들이 살아남길!(10)

이런 발상은 불공정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공격받을 수 있지만 기만적인 거대 서사라고 비난받는 경우는 많지 않다. 마치 자연스러운 ‘상식’의 표방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비록 이런 정치적 비전이 내세우는 가치를 내면화 한 상식에 지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 발상은 또한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프랑스 철학자 바르바라 스티글레르가 강조하는 사회적 다윈주의는 거의 주장하지 않으며, 전문가는 단지 기술자로 간주된다). 하지만 위대한 원칙이 아니라 실용주의를 주장하는 이 발상은 적응하는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세상을 다시 써내려가는 서사

거대 서사가 부족하다? 그러면 같이 써내려가 보자! 다보스 포럼으로 더 잘 알려진 세계경제포럼의 창시자 클라우스 슈밥은 2021년 11월 11~12일 두바이에서 ‘거대 서사(The Great Narrative)’라는 이름의 회의를 개최했다. 철학자, 미래학자, 과학자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가 한데 모여 “공동의 미래에 대한 보다 회복력 있고 포괄적이고 지속 가능한 비전 수립에 기여할 수 있는 서사를 같이 창조”하기 위한 자리였다.(11) 슈밥이 ‘이야기’라고 부른 이 서사는 ‘좋은 삶’을 만들겠다는 결의에 찬 대부분의 지도자 및 의사 결정자들에 의해 한창 활용되고 있다. 옛날 옛적에 상냥하고 ‘정치’를 완전히 배제하고 불굴의 도덕심을 가진 상냥한 신자유주의가 살았다는 식이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 즉 세상을 다시 쓰는 서사도 있다. ‘음모론자’와 천년지복설(모든 것이 변화한 뒤 큰 사회적 변화가 올 것이라는 종말론의 한 갈래-역주)을 믿는 지하디스트의 서사가 그것이다. 우리 모두가 기여한 몫이 있는 ‘소비자 운동 체제’를 비난하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환경 위기의 서사도 있다. 그중 가장 독특한 것은 단연코 ‘메타버스’를 선보이는 서사다. 메타버스는 한 공상과학 소설에서 처음 등장한 용어로 이제 메타로 이름을 바꾼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소니, 알리바바, 애플, 아마존 등의 거대 IT기업에서 사용되고 있다. 메타 최고경영자 마크 저커버그에 의하면 메타버스는 물리적 현실과 디지털 세계의 병합 이상이다. 

각자가 선택한 아바타의 형태로 존재하는 가상 세계에서 우리는 가상현실 헬멧과 다른 보형물을 사용해 3차원의 삶을 살 것이다. 저커버그의 표현에 따르면 마침내 ‘구현된’ 인터넷상에서 대화하고, 자기 계발을 하고, 생활하며, 구매하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낡은 현실 속에서 살 필요가 없다. 이제는 가상이 현실이다. 사람들이 재해로 황폐해진 지구의 실제 삶 대신 거대 기업이 통제하는 메타버스 속에서의 삶을 선호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에서처럼 말이다. 

메타버스가 실행되기 전까지는 수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미 메타버스 상에서는 ‘실제로’ 부동산 구매가 이뤄지고 있다. 브랜드들은 메타버스에 자리를 잡고 기존 화폐가 아닌 암호화폐로 돈을 벌고 있다. 메타버스에는 국가도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다.(12) 오직 욕망과 돈이 지배하는 평행 세계다. 바로 이것이 모두 혹은 거의 모두를 위한 해방을 자처하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의 ‘거대 서사’다. 

그 밖에도 다른 새로운 서사들이 존재한다. 이 (다소) 새로운 관점들은 갈등을 분산시키거나 위장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이제 계급투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공정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를 굴복시키는 것에 맞서는 대신,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추구하면 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성의 활용이나 더 많은 진보가 아니라 상상력의 힘이다. 혁신, 가상 혹은 알랭 다마시오의 표현처럼 “독특함으로 꿈틀거리는 픽션”(13)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지금 시대의 놀라운 점 중 하나일 수 있다. 실제로 다양한 논평가들이 미래에 대한 묘사로 문학, 특히 공상과학을 꼽는 일이 늘었다. 상당히 신선한 일이다. 

하지만 상상력의 산물과 그것의 수용은 이데올로기의 틀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에 대한 해석에 영양분을 제공할 때에만 힘을 얻는다. 현실에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는 해석 말이다. SF에 심취한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설명을 좀 더 발전시켜보자. 상상력의 산물과 그것의 수용이 자본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좌파가 (...) 공동의 해방을 추구하는 관점에 대한 생각을 지금 시대에 맞게 조정”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14)

해방에 대한 욕망을 되살리는 이야기들로 거대 서사를 다시 채우는 것이 포스트-포스트 모더니티의 멋진 목표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문화평론가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Der Spiegel>, Hambourg, 2017년 10월 14일.
(2) <Réforme>, Paris, 2021년 10월 27일. 
(3) Christian Salmon, 『Storytelling, la machine à fabriquer des histoires et à formater les esprits, 스토리텔링, 이야기를 만들어 정신을 포맷하는 장치』, La Découverte Paris, 2007년.
(4) Johann Chapoutot, 『Le Grand récit. Introduction à l’histoire de notre temps, 거대 서사, 우리 시대의 역사 입문』, PUF, Paris, 2021년.
(5) Theodor W. Adorno, 『Prismes, Critique de la culture et société, 프리즘, 문화·사회 비평』, Rivages, Paris 2003년. 그는 1966년 이 과거의 주장을 정정하는 글을 썼다(“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단언한 것은 잘못일 수도 있다”,『Dialectique négative, 부정변증법』, Payot, Paris, 2003년). 하지만 이 정정문은 앞선 인용문만큼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6) Raymond Aron, ‘L’avenir des religions séculières, 세속종교의 미래’, 1944년 7월 기사로, 위 (4)번 각주에서 소개한 Johann Chapoutot의 저서에 인용됐다.
(7) Francis Fukuyama, 『La Fin de l’histoire et le dernier homme,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 Flammarion, Paris, 1992년.
(8) Sébastien Ledoux, 『La nation en récit, 서사로 보는 국가』, Berlin, Paris, 2021년.
(9),(13) Alain Damasio, 『Relions-nous. La Constitution des Liens. L’an 1, 서로를 연결하자. 관계의 설립. 제 1년』, Les Liens qui Libèrent, Paris, 2021년.
(10) Walter Lippmann, 『La Cité libre, 자유도시』, Les Belles Lettres, Paris, 2011년. / Pierre Dardot, Christian Laval, 『La Nouvelle Raison du monde. Essai sur la société néo-libérale, 세상의 새로운 이성.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에세이』, La Découverte, Paris, 2009년. / Barbara Stiegler, 『Il faut s’adapter. Sur un nouvel impératif politique, 적응의 필요성. 새로운 정치적 필요성에 대하여』, Gallimard, Paris, 2021년. / Noam Chomsky, & Edouard Herman, 『La fabrication du consentement. De la propagande médiatique en démocratie, 동의 조작. 언론의 프로파간다에서 민주주의로』, Agone, Marseille, 2008년. / François Denord, ‘Un art de gouverner 지배의 예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7년 11월호.
(11) 세계경제포럼 웹사이트. Klaus Schwab, Thierry Malleret, 『The Great Narrative, for a better future』, Schweizer Büchänder und Verleger-Verband, Zurich, 2022년.
(12) Frédéric Lemaire, ‘Paiera-t-on bientôt sa baguette en bitcoins?, 이제 곧 빵도 비트코인으로 살 것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2월호.
(14) Vincent Chanson, ‘Fredric Jameson, Totalité, postmodernité et utopie, 프레드릭 제임슨, 총체성, 포스트모더니티와 유토피아’, <Contretemps>, Paris, n° 6, 2010년 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