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도 오랜 저항

2011-12-12     에블린 피에예 | 작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자본주의는 정확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기준과 가치에 따라 사는 것을 거부하는 일은 더욱 새로운 일이 아니다. 1914년에 막을 내린 19세기에는, 1/3에 해당하는 기간이 혼돈과 격동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도 프랑스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프랑스가 공화국으로서 한 약속에 의문이 일었다.

혼란스러운 지금의 시대와 댄디한 데카당스로 상징되는 19세기 말을 비교하는 일은 학문적 분야는 아니다. 하지만 주류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시위는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모든 것이 실망스럽고 참기 힘들 정도가 되어 시위가 일어나는 것이다. 세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항복하고 파리 코뮌이 해체된 이후, 프랑스 정치권은 불안정·부패·억압으로 얼룩진다. 파업이 잇따르고, 프랑스노동총연맹(CGT)이 생겨나고, 일부 아나키스트들이 피에르 크로토브스키가 내세운 ‘미래는 폭발 직전이다’를 읊으며 과격한 행동에 나서고, 식민 지배가 이루어지고, 드레퓌스 사건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동시에 과학과 기술이 발전해 전화기·전보·축음기·비행기·영사기·지하철이 발명되고, 방사선과 뉴론이 발견돼 정신적·물질적으로 상황을 바꾸게 된다.

시대 모순의 폭로를 사명으로 하는 작가들이 나서 사회의 변화를 가속화한다. 이 작가들은 기존 것을 파괴하는 행동가로 변신하는데, 그중 한 명이 레옹 블로아(1)다. 이들은 고상한 예술과 부르주아의 미덕을 더 이상 믿지 않고 대신 유머러스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기존 질서가 붕괴돼가는 상황에 맞게 문학도 고리타분함을 벗고 새로운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 사회를 뒤엎으려는 이 작가들은 연대하거나 단독으로 나서는데, 대표적으로 알퐁스 알레, 빌리에 드 릴아당, 알프레드 자리, 펠릭스 페네옹 등이 있다. 이들은 사회의 부당함(‘통속어’를 무시하는 풍조를 포함한 모든 사회 부조리)에 맞서기 위해 문학으로 스캔들을 일으킨다. 다니엘 그로즈노브스키와 베르나르 사라쟁의 선집(2)은 변혁을 꿈꾸던 작가들이 탐미주의와 니힐리즘 사이에서 방황하던 작가들과 달리, 사회의 안정을 교란시키는 세력이 아니라 가식적 발전에 분노하고 거부하던 인물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장인, 지식인, 샐러리맨을 포함한 수천 명의 용감한 사람들이 벌인 기존 사회에 대한 거부 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모든 것을 떠나 코르시카나 브라질 혹은 아르덴산맥에 평등과 형제애를 내세운 공동체를 새로 세운다. 이들은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노동 조직을 위한 기금 마련처럼 구체적인 면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장크리스티앙 프티피스(3)의 저서가 이런 면을 설명해준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회에 반항하는 두 가지 운동은 저항이 지닐 수 있는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샤를 보들레르는 이미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의 넋은 이카리아섬(이상향 같은 미지의 세계)을 찾는 세 돛대 범선.”(4)

 

/ 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번역 / 이주영 ombre2@ilemonde.com


(1) 레옹 블로아의 짧지만 잊을 수 없는 저서 <바보들을 성가시게 하려면>(Fata Morgana, Saint-Clément-de-Rivière)을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2) 다니엘 그로즈노브스키와 베르나르 사라쟁의 선집 <장난: 근대 유머의 탄생>, Omnibus, Paris, 2011.
(3) 장 크리스티앙 프티피스, <19세기 유토피아 공동체>, Pluriel, Paris, 2011.
(4) 샤를 보들레르, <악의 꽃> 중 ‘여행’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