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포그래피적 공상
인쇄된 텍스트를 구성하는 기술인 타이포그래피는 엄격한 분야, 즉 하얀 종이 위에 검은색 잉크로 그리는 깔끔한 윤곽을 중시하는 진지한 세계에서 유래된 분야로 유명하다. 또한 영원한 트집가들이 종사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검열·라인 등에 관한 타이포그래피스트들의 몇 가지 논리만 따라가도, 그들은 유머가 없고 깐깐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구나 타이포그래피는 극도의 은폐 기술이다. 오죽하면 타이포그래피에서는 눈에 띄지 않을수록 성공한 작업이라 하지 않는가. 타이포그래피스트들이 말하는 컬러란 정성스럽게 타이포그래피가 적용된 텍스트가 안정되고 일괄적인 회색 톤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을 뜻한다. 회색일수록 타이포그래피스트는 재능 있는 전문가로 대접받는다. 타이포그래피스트들이 회색 벽 같고 유머도 없고 끊임없이 자기검열 환상에 빠져 있는 성격임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타이포그래피스트들도 가끔은 지나친 구속에서 벗어나 상상이 들어올 수 있게 잠시 문을 열어놓는다. 그러면 장벽은 무너지고 창작의 불꽃이 솟아오른다.
눈이 호강할 책 두 권이 출간됐다. 우선 한 권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키에로 출판사가 재발행한 기 레비 마노의 <지긋지긋해하는 세 명의 타이포그래피스트들>. 이 책에선 필리프 모로와 사뮈엘 오텍시에가 훌륭하게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했다. 모로와 오텍시에는 여러 가지 활자의 폰트, 컬러, 케이스, 종류를 끊임없이 유쾌하게 뒤죽박죽 섞는 것을 즐긴다. 기 레비 마노의 시(1)를 특이한 타이포그래피 방식으로 꾸민 모로와 오텍시에는 마노의 유언을 그대로 따랐다. 마노는 자신의 책을 기존에 나온 판과 똑같은 방식으로 재편집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 바 있다. 그러니 모로와 오텍시에는 작가의 유언을 존중해 멋진 책으로 만들어낸 셈이다. <지긋지긋해하는 세 명의 타이포그래피스트들>에서 세 명의 타이포그래피스트들은 커피를 흡입하듯 마시고, 담배를 들이마시듯 피워대며, 밤늦게까지 작업실에서 일한다. 이들은 종이를 거울 삼고 활자를 친구 삼아 산다. 독자에게 타이포그래피의 세계는 아주 정돈된 듯한 느낌이지만, 사실 타이포그래피의 세계는 커다란 활자, 작은 활자, 뚱뚱한 활자, 날씬한 활자, 호리호리한 활자, 짧은 활자 등 다양한 개성을 지닌 활자가 이뤄가는 뜻밖의 세계다.
또 한 권의 책은 마크 팡타넬라의 저서(2)다. 이 책에서는 마치 타이포그래피가 바캉스를 떠난 것 같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진정한 타이포그래피스트 고수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활자들이 해학적 즐거움을 준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활자의 독립적인 세상이 펼쳐진다. 글자 e는 약해지고 ?는 비대해진다. j는 마치 말더듬이를 위한 것처럼 끊긴다. 언뜻 아무 쓸모 없어 보이는 글자이지만, 자신의 조상인 글자 하나하나가 활자의 굵은 선과 가는 선을 자유자재로 다루던 위대한 타이포그래피스트들에 의해 디자인됐다는 것을 은근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위대한 대가들이 주는 교훈처럼 멋지고 재미있는 교훈을 준다.
활자에는 타이포그래피스트라는 존재가 촘촘한 텍스트 뒤에 자신을 묻어버린 최악의 적이지만, 또 한편으로 각 활자의 진정한 본질을 되살려준 이들은 바로 용매제 냄새를 맡으며 작업실에서 일에 몰두한 타이포그래피스트라는 교훈이다. 결국 타이포그래피스트는 뛰어난 시인이자 예술가라는 의미다.
글 / 필리프 드 종크에르 Philippe De Jonckheere
번역 / 이주영 ombre2@ilemonde.com
(1) 기 레비 마노, <지긋지긋해하는 세 명의 타이포그래피스트들>, Quiero, Forcalquier, 2011.
(2) 마크 팡타넬라, <각종 인쇄물을 작성하고 만드는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 안 되는 특이한 타이포그래피>, L’Oiede Cravan, 몬트리올/르부스카,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