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동성과 변증법, 그럼 유토피아는

2011-12-12     박재현

우리는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지만 놀랍도록 유사한 형태로 살아간다. 삶을 꾸려가는 기쁨, 특히 소비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모양새다. 크게 다를 것 없는 집에 살며 두세 군데에서 만든 평평한 텔레비전 중 하나를 골라 거실에 들인다. 마트에 가보라. 대개 별 구분이 가지 않을 수집품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간다. 한편 불행은 느닷없이 찾아와 삶의 독특한 일면을 일깨운다. 불행은 하필 준비 없는 자들이 치명상을 입기 딱 좋을 때를 골라 찾아오는 것이다. 병원에 가야 하는데, 집을 구해야 하는데, 그리고 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좀더 저축이 있었다면 하는 식이다. 불행의 내용보다 좀더 저축이 없는 이유가 특별하며, 이해받지 못한다. 복잡한 매듭에 묶인 단순한 삶을 갑갑하게 여기며 <르 디플로> 11월호를 읽은 이야기를 하려 한다.

뤼시앙 세브는 이윤의 명령 아래 놓인 인류의 미래를 묻는다. “재화와 서비스 생산은 재앙의 시기를 제외하면 ‘인간의 생산’이라는 더 높은 차원의 고민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30면) 우리는 상품을 소비하고 노동을 통해 생산하면서 임금을 받는다. 체제는 상품의 생산과 소비의 순환에서 노동자로 하여금 “자본가들에게 일정한 무상 노동을 제공”하게 한다. 인력파견회사를 통해 일손이 부족한 프랑스로 와서 돼지를 잡는 루마니아 노동자의 상황은 이렇다. “가령 몇몇 파렴치한 인력업체들은 현지 주거비용에다 본국에서 프랑스까지 가는 데 드는 교통비와 통역비 등 온갖 명목으로 노동자 임금을 ‘공제’한다. ”(8면) 지금 아르바이트 정보 사이트에 접속해보라. 다양한 직종을 구하는 몇 안 되는 인력파견업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상품인 노동을 “수요에 맞춰 자유자재로 조절”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한국 경제인구의 3분의 1을 점하는 자영업자의 경우, 사장이지만 대부분 생계형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신용카드에 붙는 수수료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29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의 일면은 어떤 상품을 선택할지 결정하는 소비의 자유로 나타난다. 거의 모든 것이 상품화된 사회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 소득이라는 여력이 필요하다. 의식주·의료·교육은 ‘인간을 생산’하기 위한 필수 항목이다. 이를 충족하고도 남을 소득만이 소비자의 왕도다. 그런데 지난 10여 년간 우리가 배운 것은 빚을 지는 방법이다. 지난 12월 4일 문화방송 뉴스에선 ‘현재 추세라면 2013년에는 가계 부채가 1천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1천만 명이 1억원의 빚을 지는 것이다. 행운이 우리와 함께한다면 빚을 빚으로 청산하며 영원히 유예할 수 있을 것이다. 유례없는 행운을 잡기 위한 역사적 도전을 할 시점이다. 이 도전의 귀결을 살피기 위해 4면을 보자. 유럽의 부채 위기에 유럽중앙은행(ECB)은 국가의 지출을 포기하고, 역설로 보이지만 빚 갚을 능력을 제한할 소득 감소를 구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제안한다. ‘증세’와 ‘임금 인상’이라는 대안은 포기됐다. 한국은 이 프로그램을 1997년에 받아들였다. 사태에 책임이 있는 은행에는 막대한 유동성을 퍼주었다. 12면에서는 이에 대해 분노하는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을 소개한다. 하지만 운동이 과녁으로 삼는 것은 “은행과 기업들 관점에서 보면 어떤 전략적 역할도 하지 못하는 학생이거나 젊은 실업자(또는 임시 직원)”이다. 영향력을 가진 노조연합과 운동조직은 방어적이며, 민주당은 월가가 지배하는 돈과 언론의 구조에 종속돼 어떤 실질적 조처를 취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정치와 민주주의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 11월호는 ‘좌파, 분열과 재구성’이라는 특집을 통해 이를 전망한다. 진단은 뼈아프다(10면). 유럽과 미국에서 보여준 위기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대처는 모두 사민주의 혹은 진보적 집권세력이 동의해준 결과다. 남미에 들어선 사회주의 정부가 개혁에 난항을 겪는 이유인 글로벌 경제 체제 내부에 위치한 국가의 한계를 탓할 수도 있다(14면). 미국노동총연맹(AFL)은 급진적 변화를 위한 장기적 투쟁에 지쳐 당장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편을 택한다(13면). 급박한 필요에 함몰된 채 노동자와 젊은이들은 정치와 멀어진다. 정당은 더 이상 정치적 경험의 교육장이 아니다(16면). 대신 정치는 정치적 전문인의 고유 영역이 되어간다. 민주당이 월가에 종속된 원리다. “정당이 기능하기 위해 의원이 필요하고, 의원들은 전문화된 활동을 추구하기 위해 정당이 필요하게 된다. 이런 정치활동의 전문화 메커니즘은 빠른 속도로 사회적 선택과 맞물리게 된다. 독자적 신분상승 정책의 부재로, 극빈층은 정치 고위층에서 배제되고 있다.”(11면) 필리핀의 챔피언 출신 의원 파퀴아오는 자신의 “이례적인 인기와 막대한 재력으로도 필리핀의 막강한 과두지배 체제에 맞서기엔 역부족이란 사실을 깨달았”고 기존 유력 가문과의 정치적 합종연횡을 선택했다(24면).

“최근 사회당 대선후보 경선 1차 선거에서 아르노 몽부르와 대부분 의견이 일치하는 브누아 아몽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의견이 상이한 마르틴 오브리를 지지하고, 아르노 몽부르가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견을 보이는 프랑수아 올랑드와 연대한 것을 이해하려면 상당한 지식이 필요했다.”(11면)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노동자의 정당과 그들과 맞섰던 정당의 합당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나꼼수>가 자아내는 서사를 빌려오는 편을 택한다(27면). 제도권 정치에 대한 좌절은 평범한 유권자만의 몫은 아닌 듯하다. 35면 <신자유주의의 탄생>의 서평에서 국가 주변을 배회하는 좌파가 정작 그들의 기반인 생활 세계의 정치를 놓쳤다고 지적한다. 선거에는 좌파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제도정치와 이별을 고하고” 급진화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지키는 길을 권한다(25면). 그가 지적하는 바깥세상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그가 발견한 ‘역동성’이 이끄는 곳은 유토피아일까.

좌파들이 별다른 대안을 생산하지 못하는 동안 소규모 대안 공동체들이 나타났다. “소비사회 및 제도권 정치와 단절”하는 공동체다. 그곳에는 생태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양식이 있는데다 멋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피할 수 없다(18면). ‘마이크로 소사이어티’(Micro Society)라는 이름은 그들의 지향점과 함께 한계도 보여준다. 공동체가 존재하는 ‘현실의 틈’은 자본주의와 제도정치가 장악한 현실의 작은 공극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공동체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은 특별한 것임을, 그리고 현실 바깥의 공동체는 안전하게 기존 체제와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매력적인 생활 방식은 체제의 예외적인 아름다움으로 포장돼 평범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한편, 가혹한 체제의 압력을 각자의 상상력 부족 탓으로 돌릴 수도 있다. 소비사회에서의 자유와 이 특별한 삶의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에 일정한 ‘경제적 지위 확보’라는 공통의 숙제가 있다는 의혹을 버릴 수 없다.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공통적인 기획, 공통적인 정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평범한 이 세계의 일상이 좌파의 기획에 난관을 부여했듯이, 그 외부의 특별함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무기력 속에서 좌파의 길을 묻는 세르주 알리미는 프랑스 인민전선의 대파업 승리 역사를 떠올린다. “선거와 사회운동, 공장과 투표소 사이에 존재하는- 드물긴 하지만- 성공적 변증법을 발견한다.”(10면) 체제 외부에서 발견한 ‘역동성’과 마찬가지로 체제 내부에서 발견한 ‘변증법’도 명확한 상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글을 맺었을 것이다. “아직은 자신의 분노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거리로 나서기 시작할 때 좌파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끝으로, ‘알 수 없음’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