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한 마르코스 가문의 귀환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필리핀

2022-08-31     프랑수아자비에 보네 l 지리학자

2022년 5월 9일, 필리핀 국민 5,500만 명 이상이 투표소를 찾았다. 대통령과 부통령부터 시의원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정치인을 뽑기 위해서다. 대선 후보 10명, 부통령 후보 9명이 경합을 벌인 가운데 83%라는 기록적인 투표율을 보였다.

페르디난드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는 3,100만 표(득표율 약 60%)를 얻어, 강력한 대선 후보였던 마리아 ‘레니’ 로브레도 전 부통령(1,400만 표, 28%)을 누르고 압승을 거뒀다. 이번 승리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2016년 부통령 선거에서 로브레도 후보에게 패배한 것에 대한 설욕이다. 둘째, 가문을 위한 설욕이다. 그의 아버지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시니어가 축출된 지 36년 만에 마르코스 가문이 다시 권력을 잡은 것이다. 독재자였던 마르코스 시니어 전 대통령은 1986년 ‘EDSA 시민혁명’으로 축출된 이후 하와이 망명 중 1989년에 사망했다. 

그로부터 3년 후, 마르코스 일가는 필리핀으로 돌아와서 다시 정치에 뛰어들었다. 마르코스 주니어는 가문의 염원을 대표해서 지역구(일로코스노르테 주지사)와 전국구(상원의원, 하원의원)에 성공적으로 입성했다. 이후 가문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국가수반에 오르길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마르코스 가문은 1972~84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권침해, 고문, 실종, 공금횡령(최소 100억 유로)을 자행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마르코스 아들과 두테르테 딸의 동맹이 거둔 승리 

 

이번 대선 출마가 불가했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마르코스 일가와 가까운 사이지만, 정작 마르코스 주니어에 대해선 못마땅해 했다. 자신의 딸인 사라 두테르테가 그와 동맹을 맺을 때도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그를 ‘나약한 리더’, ‘코카인 사용자’라고 지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코스-두테르테 연합은 필리핀 북부와 남부(민다나오)의 결속을 주장하며, 선거운동 내내 ‘국가의 단결’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1) 그 결과 사라 두테르테 역시 62%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부통령에 당선됐다. 

마르코스 일가의 귀환이 필리핀 외교정책과 국제무대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마르코스 주니어는 선거운동 기간에 TV토론과 인터뷰를 최대한 피했다. 언론이 로브레도 후보에게 유리하게 편향됐다고 판단한 탓이다. 그 결과, 마르코스 주니어의 선거정책에 대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그가 발언을 아꼈던 만큼 교묘하게도 미국, 중국과의 향후 관계도 모호한 상태다. 

2016년 7월 12일, 네덜란드 헤이그에 소재한 상설중재재판소는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을 두고 필리핀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이를 인정하지 않자, 마르코스 주니어 신임 대통령은 판결이 “효력이 없다”고 DZRH 라디오 채널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2)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미국을 개입시키면 중국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필리핀은 중국과 합의할 수 있다. 사실 중국 대사관 직원들이 내 지인이라서, 우린 이 문제를 계속 논의해왔다.”(3)

그런데 불과 며칠 만에 입장을 번복했다. 필리핀의 영해권을 인정한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은 대단히 중대하며, 자국 영해가 단 1제곱미터라도 ‘침해’당하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물론 필리핀은 ‘단호한 목소리’로 중국과 ‘지속적인 대화’를 이어나가겠다고 덧붙였다. 또한 자국의 이익과 필리핀 어부를 보호하기 위해 해안경비대와 해군을 파견하겠다고 했다.

신임 대통령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와 1951년 체결한 상호방위조약(어느 한쪽이 적에게 공격당하면 서로 보호해주기로 약속)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만든 쿼드(QUAD) 가입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그 문제는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협의가 이루어질지, (...) 다른 파트너 국가들이 필리핀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4)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의 반대파는 그를 중국의 허수아비라고 비난하지만, 그의 외교정책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훨씬 복잡하다. 물론 지정학적 상황은 그때와 다르다. 마르코스 시니어는 ‘아메리칸 보이’, ‘미국의 꼭두각시’라는 별명과 달리,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미국에 반하는 외교정책들을 비밀리에 추진했다. 그는 1960년대 말부터 소련, 베트남 중국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5) 참고로 그는 1972년 계엄령을 선포하기 이전, 1965년과 1969년에 민주적으로 선출됐다. 

필리핀은 1933년부터 스프래틀리 군도를 자국 영토로 인식했다. 1968년에 이곳에 군대를 파견했고, 1976년에 군도 전역에 대한 영유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했다.

마르코스 시니어가 추진한 비밀작전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한 예로 말레이시아 사바 지역에 침투할 목적으로 비밀 특공대를 육성했다. 사바에 개입할 빌미를 만들어 영토를 침범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계획이 발각되는 바람에 말레이시아와의 관계가 단절됐고, 술루 제도와 민다나오 지역에 무슬림 반군이 봉기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미군기지 2곳을 폐쇄하고 미군 1만 명을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했다. 

 

“난 친중국파. 미국과 뭘 할 수 있나?”

1974년, 마르코스 주니어와 그의 어머니 이멜다 마르코스는 중국을 방문해서 마오쩌둥(당시 81세)을 만났다.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1년 전이었다. 마르코스 주니어가 친중국 성향을 갖게 된 시점도 이때다. 중국이 2007년에 마르코스 가문의 영지인 일로코스노르테의 주도 라오라그에 첫 영사관을 설립한 일은, 마르코스 일가와 중국의 관계가 얼마나 공고하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마르코스 일가는 관광,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양국 관계를 발전시키고, 투자를 촉진하고, 의료지원을 유치하겠다는 사명을 품었다. 

2021년 6월, 이멜다 마르코스는 중국 대사관으로부터 ‘양국 우정과 이해관계를 촉진 및 개선했다’는 명목으로 상을 수여받았다. 이런 관계는 안보문제와도 상충한다. 2022년 1월, 루손섬 북부 카가얀의 마누엘 맘바 주지사는 해당 지역에서 진행 예정이던 미군과의 합동군사훈련에 반대했다. 이유인즉슨 중국 투자자들만 카가얀 주를 도와줬으며, 실사격 훈련이 중국 당국의 심기를 거슬러서 투자가 위축될까봐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난 진정한 친중국파다. 미국과는 뭘 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투자하는 건 중국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6)

마르코스 주니어는 전임자의 친중국 노선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2016년 10월 중국 방문 당시 자신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난 중국의 이념적 흐름을 따르기로 했다. 러시아에 가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나면 세계에 맞서 싸우는 건 중국, 러시아, 필리핀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7)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과의 외교, 상업, 투자 관계를 정상화하겠다는 것이다.

두테르테는 중국으로부터 90억 달러의 공적 지원을 받는 대가로, 상설중재재판소의 2016년 판결을 보류하기로 했다. 이 기세를 몰아서 미국과 체결한 방문군협정(Visiting Forces Agreement, VFA) 폐기를 통보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미군은 1999년부터 필리핀에 교대로 주둔할 수 있다. 또한, 상호방위조약마저 종결시키려 했다. 

그로부터 4년 후, 두테르테 정부는 남중국해에서 법적 승리를 인정하며 전환점을 맞이했다. 두테르테는 2020년 9월 23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상설중재재판소의 판결은 ‘국제법의 일부’이므로 어떤 정부도 문제를 제기해선 안 된다고 단언했다. 또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미국, 호주, 영국, 프랑스, 독일 등 공식적으로 이 결정을 인정해준 나라에 감사한다고 덧붙였다.(8) 2020년 6월, 두테르테는 VFA 폐기를 철회하고, 미국과 필리핀의 안보·방위협력을 추구하겠다고 약속했다.

필리핀의 외교적 태세 전환에 중국은 씁쓸함을 드러냈다. 두테르테가 야심차게 추진한 ‘빌드 빌드 빌드(Build Build Build)’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는 중국으로부터 지원금과 저금리 차관을 공여받기로 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났는데도 약속한 금액의 10%만 지불됐고, 계획했던 프로젝트 14건 중 다리 공사 2건만 완공됐다. 필리핀 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벤자민 디오크노 경제부 장관에 따르면, 중국은 많은 걸 약속했지만 큰 도움을 주지 않았다.(9)

 

중국과의 스프래틀리 군도 분쟁이 당면 과제

2020년 2월 17일,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필리핀 해군 초계함 ‘BRP 콘라도 얍’(한국 해군에서 공여받은 함정)이 스프래틀리 군도의 코모도르 산호초를 순찰하던 중이었다. 그때 중국 군함의 사격통제레이더가 자신을 조준하고 있다는 신호를 포착했다. 다행히 두 군함은 추가적인 충돌 없이 각자의 항로를 따라 계속 항해했지만, 이는 일반적인 군사 관행에서 절대 용납될 수 없는 행동으로 간주된다. 자칫 계산 착오라도 발생하면, 긴장이 고조되어 결국 정면충돌로 이어질 수 있다. 중국 군함이 처음으로 필리핀 군함에 공격성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한편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두테르테 정부는 중국, 미국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외교원칙을 ‘위험분산(hedging)’ 전략으로 바꿨다. 필리핀은 두 강국의 백신 외교의 중심에 섰다. 두테르테는 2022년 5월 선거 전에 백신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서 성인 접종률 90%에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고 목표달성을 위해 중국에게 우정 카드를 내밀고, 미국과 다른 선진국들이 백신을 독점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동시에 필리핀 국방부, 외교부 장관은 미국을 뒷배 삼아, 1951년 상호방위조약을 개정해서 대중 압박 도구로 쓰겠다고 중국을 협박했다. 그 결과 2012년 4~10월에 중국 백신(시노박, 시노팜), 11월부터는 미국 백신이 필리핀에 대량 유입됐다.

클라리타 카를로스 전 필리핀대 정치학 교수이자 현 국가안보실 고문은 마르코스 주니어가 아버지와 두테르테 정권처럼 중국에 대해 ‘비판적 관여’ 정책을 고수해야 한다고 권고했다.(10) 엔리케 마날로 외교부 장관은 상설중재재판소 판결 6주년 행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필리핀의 권리, 역사, 유산을 침해하고 근절시키려는 어떠한 시도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11) 마르코스 주니어는 국정연설에서 자국 영토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도, “필리핀은 모두의 친구이며, 어느 누구의 적도 아니다”라며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12) 

세계 가스시장의 긴장 고조와 말람파야(팔라완섬 부근) 가스전의 고갈 문제로 리드뱅크 가스 매장지(스플래틀리 군도)가 필리핀-중국 관계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를 것이다. 현재 말람파야 가스전은 루손섬 전력수요의 40%를 공급하고 있다.

스티븐 제임스 로빈슨 필리핀 주재 호주 대사에 따르면, 마르코스 주니어 신임 대통령은 중국과의 분쟁문제에 ‘매우 신중하고 균형 있게’ 접근할 것이다.(13) 아버지가 고이 물려준 스프래틀리 군도를 1인치라도 뺏기는 건 용납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글·프랑수아자비에 보네 François-Xavier Bonnet
지리학자, 현대동남아연구소(IRASEC) 객원 연구원, ‘Philippines. Covid-19 An II’ 저자(Christine Cabasset, Jérôme Samuel, 『L’Asie du Sud-Est 2022: bilan, enjeux et perspectives 동남아시아 2022년 결산, 쟁점 및 전망』IRASEC, 2022년)

번역·이보미
번역위원


(1) Antoine Hasday, Nicolas Quénel, ‘L’avenir sourit à l’Organisation de l’État islamique(한국어판 제목: 필리핀에서 IS의 미래가 꽃피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20년 4월호.
(2) Cf. François-Xavier Bonnet, ‘Quand Manille manœuvr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5월호.
(3) Frances Mangosing, ‘Marcos presidency a boon for China, awkward for US’, <Philippine Daily Inquirer>, 마카티, 2022년 5월 12일.
(4) Leila Salaverria, ‘Marcos supports security dialogue with US, 3 other countries’, <Philippine Daily Inquirer>, 2022년 2월 16일.
(5) 호세 알몬테 장관과의 인터뷰 내용. 그는 라모스 정권(1992~98년) 시절 국가안보실장을 지냈으며, 비밀리에 외교작전을 수행한 인물 중 하나다.
(6) Frances Mangosing, ‘Pro-China governor opposes PH-US live-fire drills’, Inquirer.net, 2022년 1월 13일.
(7) ‘Duterte: its Russia, China, PH against the world’, ABS-CBN.com, 2016년 10월 20일.
(8) ‘Duterte affirms arbitral win vs China before UN: It’s now part of international law’, Inquirer.net, 2020년 9월 23일.
(9) ‘Diokno: China fell short of vow to help finance ‘Build, build, build’‘, <GMA>, 2022년 5월 28일, www.gmanetwork.com.
(10) ‘Clarita Carlos advises ‘critical engagement’ with China on West Philippine sea’, Philstar.com, 2022년 6월 9일.
(11) ‘Statement of foreign affairs secretary Enrique A. Manalo on the 6th anniversary of the award on the South China Sea arbitration’, 필리핀 외교부, 2022년 7월 12일.
(12) Daniza Fernandez, ‘Bongbong Marcos stands firm on protecting PH waters’, Inquirer.net, 2022년 7월 25일. 
(13) Catherine valente, ‘Marcos will ‘tread carefully’ in sea row’, <The Manila Times>, 2022년 6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