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노체트에게는 아량, 어산지에게는 처벌?

2022-08-31     닐스 멜저 l 유엔 인권위원회 고문 특별조사관

나는 유엔 인권위원회 고문 특별조사관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고문과 가혹행위 금지원칙이 준수되는지 감시하고, 위반사례를 조사하며, 세부조사가 필요한 개별사례에 대해 해당 국가에 질의와 권고사항을 전달하는 일을 한다. 줄리언 어산지(Julian Assange)의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박해와 사법적 전횡, 고문과 고의적인 가혹행위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다. 하지만 당사국들은 국제법에 따른 조사절차에 협조하지 않았다. 

어산지 사건은 전쟁범죄, 고문, 부패 등 권력자들의 비열한 비밀을 폭로했다는 이유로 박해받고 학대받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인권의 본보기임을 자부하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의도적인 사법 전횡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관련국 정보기관들이 국회와 국민 뒤에 숨어 악의적으로 결탁한 사건이기도 하다. 특정 개인을 고립시키고, 악마화하며, 파멸시키려는 의도로 주류 언론에서 허위, 날조 보도를 일삼은 사건이다.

법치 국가에서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 이 말은 근본적으로, 유사한 사건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다뤄야 한다는 뜻도 담고 있다. 오늘날의 줄리언 어산지처럼, 전 칠레의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는 1998년 10월 16일부터 2000년 3월 2일까지 영국에 억류됐다. 스페인,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는 고문과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피노체트에 대한 기소 의사를 밝혔다. 오늘날 어산지처럼 피노체트는 자신이 ‘영국 내 유일한 정치범’이라고 주장했다.

 

어산지와 달리 피노체트는 고문과 살인, 부패에 관한 ‘증거를 입수하고 공개’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어산지와는 달리 영국 정부는 피노체트를 국익을 위협하는 인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냉전 시대에, 더 결정적으로는 포클랜드 전쟁(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벌인 전쟁) 당시에 영국을 지원한 전우이자 동맹으로 여겼다. 영국 재판부는 피노체트가 면책특권이 없다고 판단했지만, 곧 판결이 뒤집혔다. 판사 한 명의 편향 가능성이 이유가 됐다. 해당 판사가 재판의 공동원고였던 인권단체 국제사면위원회(Amnesty International)의 지역 모금에 자원한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산지 사건 때는 어떻게 했을까? 엠마 아버스넛(Emma Arbuthnot) 판사의 남편은 여러 번 위키리크스로부터 비난을 산 인물이다. 그런데도 아버스넛 판사는 2018년에 어산지에 대한 체포영장 발부를 판결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판결 거부 요청에도 불구하고 2019년 여름 버네사 바레이처 판사에게 사건을 인계할 때까지 줄곧 범죄인 인도 절차를 주재했다. 아버스넛 판사의 판결은 단 한 건도 번복되지 않았다.

피노체트는 수만 건의 심각한 인권침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공개법정 공판에서 영국 법관들로부터 모욕이나 굴욕, 조롱을 당하지 않았다. 최고 보안 교도소 독방에 감금되지도 않았다. 피노체트가 억류됐을 때 블레어 총리는 “영국에서는 아무도 법 위에 있지 않다”라며 안도감을 드러내지 않았고, 정부가 전 독재자를 송환 요청국으로 인도할 것을 거세게 촉구하는 의원 70명의 공개서한도 없었다. 

대신 피노체트는 런던 외곽의 빌라에서 호화로운 가택연금 생활을 하면서 성탄절에 칠레 신부의 사적인 방문부터 마거릿 대처 전 총리 방문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제약 없이 방문객을 맞기도 했다. 반면, 고문과 살인이 아니라 언론 행위로 불편한 진실을 밝혔다는 혐의를 받은 줄리언 어산지는 그의 집이 아닌 독방에 갇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어산지와 마찬가지로, 피노체트도 건강이 결정적인 문제가 됐다. 피노체트 본인이 비록 인도적인 사유의 석방을 단호히 거부하긴 했지만, 영국 내무장관이었던 잭 스트로(Jack Straw)가 직접 개입해서 피노체트가 건강검진을 받도록 했다. 그리고 결국 군부 쿠데타를 주도했던 전 독재자 피노체트가 기억상실증과 집중력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러자 송환을 요청한 일부 정부에서 다른 의사의 이차소견서를 요구했지만, 영국 정부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스트로 내무장관은 피노체트가 재판받기에 적합한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해 즉각적인 석방과 송환을 명령했다. 

어산지의 범죄인 인도 재판에서 미국은 항소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피노체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한 국가들은 항소할 기회조차 없었다. 어산지의 경우, 독립적인 의학보고서를 비롯해 고문 관련 유엔 고문 특별조사관으로서 공식적으로 진행한 조사결과까지 전부 무시됐다. 어산지가 법정에서 자기 이름만 간신히 말할 수 있는 상태였을 때도, 건강 악화 우려나 재판받기에 부적합한 상태임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재판은 그대로 진행됐다.

어산지에 대한 범죄인 인도 요청은 그래도 처음에는 피노체트와 마찬가지로 건강을 이유로 거부됐다. 피노체트의 경우, 바로 석방돼 칠레로 보내졌다. 송환을 요청한 국가에서 행사할 법적 수단은 다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 어산지는 바로 독방에 갇혔고, 보석 석방도 거부됐다. 미국이 항소 의사를 밝히면서 어산지는 앞으로 진행될 범죄인 인도 절차에 따라 향후 여러 해에 걸쳐 시련과 침묵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이 두 사건을 비교해 보면, 영국 당국이 적용하는 ‘이중 잣대’와 영국에서는 결국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피노체트 재판의 목표가 과거의 독재자이자 충직한 동맹국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강력한 면책특권을 주는 것이었다면, 어산지의 재판 목표는 바로 이런 종류의 처벌에 도전하는 ‘위키리크스’라는 단체의 불편한 반체제 인사를 침묵시키는 것이다. 두 접근 방식 모두 오직 힘의 논리만 작용하며, 정의와 법치는 찾아볼 수 없다.

미국과 영국, 호주의 기성 언론은 줄리언 어산지의 재판이 언론의 자유, 정당한 절차, 민주주의, 법치주의에 끼치는 실질적인 위험을 미처 깨닫지 못한 듯하다. 어산지에 대한 박해에 내일 당장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영미권의 주류 언론기관의 결정에 달려있다. 이것이 안타까운 진실이다.

공직자 비리 폭로를 전문으로 하는 러시아의 탐사 전문 기자 이반 골루노프의 경우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2019년 여름에 골루노프가 느닷없이 마약밀매 혐의로 체포되자 러시아 주류 언론은 즉각 상황을 간파했다. 러시아 3대 신문사 <베도모스티(Vedomosti)>, <RBC>, <코메르산트(Kommersant)>는 일제히 “우리가 이반 골루노프다”라는 헤드라인으로 1면을 장식했다. 세 신문사 모두 골루노프의 체포의 적법성에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그가 언론 활동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으로 의심하며 엄정한 수사를 촉구했다. 

러시아 당국은 빌미를 잡혀 자국 언론의 주목을 받자, 며칠 뒤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골루노프의 석방 명령과 함께 내무부 고위 관리 두 명에 대한 좌천 처분을 내렸다. 이런 조처를 통해 골루노프의 체포가 몇몇 무능한 경찰관의 만행이 아니라 최고위급 차원에서 철저히 계획됐다는 점이 증명된 것이다. 

<가디언>, <BBC>,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가 이에 버금가는 연대 행동에 나선다면 줄리언 어산지의 박해가 즉각 종식될 것이라는 데는 의심할 나위가 없다. 정부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와 비판적인 조사다. 하지만 영국, 미국, 호주 주류 언론의 대응은 너무도 미약하며 너무도 늦다. 늘 그렇듯 언론은 자신들이 목도하는 광경이 그동안 어렵게 이룩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서 권위주의에 기반한 통치제도인 절대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암흑기로 넘어가는 거대한 사회적 퇴보의 부작용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 채, 무미건조하고 나사가 풀린 듯한 문체로 법정에서 벌어지는 매일의 사건을 비판의식 없이 그저 기록할 뿐이다. 

밋밋하고 소극적으로 어산지의 송환을 비난하는 <가디언>과 <뉴욕타임스>의 몇 안 되는 사설과 칼럼만으로는 설득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두 신문사에서는 어산지에게 간첩죄를 선고한다면 언론의 자유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주장을 조심스레 내놓았지만, 적법한 절차와 인간의 존엄성, 법치 국가라는 가치가 재판 과정 전반에 걸쳐 훼손됐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주류 매체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그 어떤 언론도 정부를 겨냥해 국가 범죄와 부패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정치 지도자들에게 불편한 질문을 할 용기를 내지 않았다. 

오늘날의 언론은, 한때 ‘제4권력’이라 불렸던 과거의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다. 

 

 

글·닐스 멜저 Nils Melzer
유엔 인권위원회 고문 특별조사관. 출간 예정인 저서로 『어산지 사건 정치적 박해의 역사L’Affaire Assange, Histoire d’une persécution politique』(Éditions critiques, Paris, 9월 15일 출간 예정)가 있음.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