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킨지는 돼지처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컨설팅 회사가 공공정책에 손을 뻗칠 때

2022-08-31     프레데리크 로르동 l 경제학자, 철학자

“단언컨대, 그들은 돼지처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웠다.” 

여기서 ‘그들’은, 맥킨지를 가리킨다. 정부 수뇌부의 누군가가 한 말이다. 누가 말했는지는 몰라도, 누가 들었는지는 분명하다. 논설위원 장도미니크 메르셰(1)다. 보도자가 메르셰, 언론인들 특유의 어리석음과는 거리가 먼 인물임을 고려하면, 이 발언을 그저 음모론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질 르장드르나 <프랑스 앵테르> 채널의 음모론 전문가가 으레 하는 보도와는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명백히 확신할 수 있다. 그들(맥킨지)은 돼지처럼 먹어치웠다고 말이다.

맥킨지는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를 내세운 전형적인 돼지우리의 일례일 뿐이다.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에서 사회는 ‘자본’이라는 미명 아래 모인 소수의 돼지가 한껏 누릴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여기서 일이 조금 복잡해진다. 특히 국가와 자본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렇다. 고전적인 자유주의 관점에서 보통 국가와 자본은 대립 관계에 있다. 국가 고유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와 모순되기 마련이다. 국가는 제도와 규제, 법제화를 통해 자본을 저지한다. 자본은 국가가 사라지길 바란다. 한편,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와는 다른 방식의 교묘함을 보인다. 신자유주의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국가에 맞서지 않고 신자유주의 방식 그 자체로 원하는 바를 이룬다. 그렇게 돼지들은 맘껏 제 배를 채운다.

 

‘기업’의 실험대상 

이제 한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국가와 자본은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하지만 두 개념이 서로의 경계를 심각하게 침범해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면? 은행가가 대통령이 되고, 같은 인물들이 정·재계 요직을 구분 없이 자유롭게 오간다. 그 결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컨설팅 회사가 공공정책에 손을 뻗칠 때, 이는 자본인가, 국가인가? 아니면 국가자본? 극신자유주의?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렵다.

맥킨지의 별칭은 잘 알려져 있다. 바로 ‘기업’이다. ‘기업’이라는 명칭을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라는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단어는 찾기 어렵더라도, 맥킨지의 별칭은 잘 알려져 있다. 바로 ‘기업’이다. 2017년, 마크롱을 둘러싸던 성가신 뾰족구두 집단에 붙은 별명도 이와 같았다. 물론 우연이 아니다. 언뜻 보면 정·재계 인사들의 슬플 만큼 빈약한 상상력이 낳은 이름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더하다. ‘기업’이라는 명칭을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꿈꾸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라는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기업형’ 사회에 대한 실험은 몇몇 엘리트 공동체 내에서 먼저 진행됐고, 이제 사회 전체에 적용하려 한다.

마크롱의 연설에서 느껴지는 공허함, 혹은 ‘이데올로기의 부재’는 오랫동안 논의된 주제다. 이는 위험하고도 잘못된 진단이다.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마크롱의 모습은 기이했지만, 그의 말이 속 빈 강정은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소개할 만한 대목을 찾기는 어렵지만, 의미 없는 단어로나마 요지를 전하려 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어차피, 무의미한 말 늘어놓기는 시앙스포나 파리 고등경영대학원(HEC)을 나온 뾰족구두들의 습성 아니던가. 그에게 계획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국민을 ‘기업형’ 사회의 실험대상으로 만들려는 계획 말이다.

삶이 힘겨울 땐 몽프시(MonPsy) 앱을 다운받는다. 대학교 입시 플랫폼 파르쿠르쉽(Parcoursup)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몇십 장씩 지원동기서를 쓴다. 무슨 활동을 하든 매번 QR코드를 찍는다. 기계에 대고 말하는 데 익숙해진다. ‘기업형’ 사회에서 실험대상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자본의 두 가지 길

고전적으로 자본이 어떻게 공급되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노동자 착취를 통해서다. 신자유주의는 여기에 강렬한 한가지 요소를 추가한다. 국채 소유자의 붕괴다. 착각하면 곤란하다. 여기서 붕괴는 새로운 방식의 자본화, 그 서두일 뿐이다. 이제 자본 앞에 두 가지 길이 놓였다. ‘주주’들을 위해 노동자의 고혈을 짜내는 직접적 방식, 그리고 ‘투자자’들을 위해 국채 소유자를 저버리는 간접적 방식이 그것이다. 공공 부채를 매입해 우리의 무능함을 기꺼이 메워주려 했던 은인들에게 감사를 표할 날은 오지 않을 듯하다. 오히려 우리는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돼버린다. 그들 모두를 만족하게 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가의 분에 넘치는 소비’와 ‘대부호’ 같은 습관을 바꿔야 한다고 주지시킨다. 학교와 병원, 탁아소, 우체국, 법원을 닫음으로써 말이다. 그야말로 대부호의 변덕이다. 나머지는 합리성을 앞세운 혹독한 단일 논리의 지배 아래 놓인다. 바로 신(新)관리주의의 논리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투자자’의 이런 합리성이 ‘주주’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합리성의 논리는 국민을 향한 지출을 줄이라고 주문한다. 주주들은 구조 조정, 생산 이전, 노동자 규제 철폐를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 한편, 투자자들은 경제 계획, 시설 폐쇄, 그리고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많은 것을 생산하라고 종용하는 생산주의 채찍을 휘두른다. 자본이 회수할 수 있는 현금 유동성을 최대화하는 것이 목표다. 배당금을 통한 직접적인 방식이든, 금리 시장에서 공공 부채를 평가절상하는 간접적인 방식이든 말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두 방식 모두 금융 자본이라는 하나의 종착역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금융 자본은 ‘기업형’ 사회에 존재하는 유일한 결정기관이자, 실험대상을 관리하는 유일한 위탁 관리자로서 합리성의 논리를 따른다. 이 논리 아래 컨설팅 회사는 공공 서비스 운영을 장악한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이런 방식은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아직 기업화되지 않은 사회라면, 노인요양원 운영기업 오르페아-코리앙(Orpéa-Korian)에서 터진 노인학대 스캔들은 언론이 주목할 만한 불쾌한 사건이다. 그저 특이한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공공 양로원의 상황을 규탄하며 마크롱이 외치던 ‘프로젝트’의 진실을 대서특필할 사건이다. 그리고 뾰족구두 무리가 당당하게 외친다. “잘 보세요, 이 사건은 민간 자본과 무관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관련이 있다. 국가와 자본이라는 두 길 끝에 놓인 것은 단 하나, 사람을 갈아 넣어가며 남긴 돈을 맘껏 쓸어가는 돼지우리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던 국가와 자본은 이제 그 구분이 모호한 ‘국가자본’의 방식에 따라 서로 완전히 융합될 때까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공공부문이 빈곤(붕괴)해지면서 민간 자본이 들어올 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국가’의 태만 때문에 기업은 본질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놓인다. 어렵지 않은 추론이다. 사립 병원, 사립 학교가 나선다. 게다가 사립대학교, 기회를 놓치지 않는 파르쿠르쉽 입시 코칭, 온갖 종류의 ‘플랫폼’, 자본화된 은퇴 연금 등, 주주들의 합리성을 신관리주의적 합리성으로 대체하는 경탄할 만한 제안들이 실현될 날이 머지않았다. 이 두 합리성은 결국 하나다. 물론, 목록의 저 끝에 맥킨지가 있다. 맥킨지는 기업형 사회에서 자본에 의한, 자본을 위한 사회구조를 나타내는 표상이다.

베랑과 마크롱, 해로운 알렉시 콜러와 우스꽝스러운 가브리엘 아탈까지, 국가 수뇌부에 있는 인물 모두가 국가에 대한 일말의 믿음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 편에 설지 마음을 정했다.

구조를 논하는 것이 과언은 아니다. ‘기업’의 비전이 불러오는 논리적인 결과일 따름이다. 정부는 실패하고, 민간은 성공한다. 이것이 ‘국가자본’이 추구하는 유일한 길이다. 올리비에 베랑은 의료시설로 개조한 TGV 열차를 두고 컨설팅 회사의 능력을 치하한 첫 타자다. 하지만 실제로 작업을 수행한 장본인은 철도원, 그리고 파리병원연합 소속 공무원들이었다. 그들의 반응은 그저 반사적 행동이다.

베랑과 마크롱, 해로운 알렉시 콜러와 우스꽝스러운 가브리엘 아탈까지, 국가 수뇌부에 있는 인물 모두가 국가에 대한 일말의 믿음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어느 편에 설지 마음을 정했다. 국가를 해체하고, 국가의 역할을 민간에 환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민간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자본의 활동영역을 전례 없는 규모로 확대하고 적절한 자본 공급로를 구축한 공로를 인정받을 것이다. 돼지도 은혜는 안다.

 

‘기업’과 시민권

그런데 이 ‘기업’에 대한 여론은 어떤가? 일반적인 시기라면 기업가들은 마치 파워포인트로 발표를 처음 할 때처럼 대중의 반응을 신경 쓸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대선 캠페인 기간이다. 어리석은 민중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흥분한다. 그러므로 기자회견을 열고 ‘공공부문 전환 범부처 관리국(DITP)’의 후견인 아멜리 드 몽샬랭을 내보내 급한 불을 끄려 했다.(2) 정부 내에서 ‘기업’의 동력원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타고난 천성이 나와 버렸다. “많은 사람에게 상원 의회 보고서 읽는 법을 가르칠 겁니다.” 늘 그렇듯 겉치레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적어도 우리는 누구에게 화살을 돌려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덧붙여 마크롱의 경우, 표적은 늘 전 보좌관 베날라다.(“형사재판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짐승들이 운영하는 ‘기업’에서 그 어떤 민주주의 정신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알려줄 엄청난 정보가 남아있다. 정부가 컨설팅 회사에 ‘시민 협의 체제’ 구축을 의뢰했다는 사실이다. 이쯤 되면 그저 원점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행위예술에 가까운 경지다. 처음엔 이게 꿈인가 싶어서 스스로 따귀를 두어 번 때려봐야 현실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젠 뭐가 무엇이 진정 기괴한지, 무엇이 핵심인지, 무엇이 중요한지 알 수 없게 돼버렸다. 어쨌거나 일관성이 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이들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려 한다는 일관성 말이다. 맥킨지 게이트를 공공부문 규제나 세금 포탈 사건으로만 치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파시스트, 파시스트 제조기, 좌파 후보

여기서 1981년 대선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당선되자 공산주의의 도래를 전망했던 이들도 있고, 어둠이 끝나고 국민의 삶을 바꿀 빛의 시대가 왔다고 점친 이들도 있다. 여러 ‘사회모델’ 중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 뒤는 역사에 잘 알려진 바와 같다. 하지만 사회모델과 상관없는 보편적인 문제가 생겼다. 국민이 원하던 사회에서도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선택의 강도는 그때보다 더하다. 지난 40년간 악몽은 상당히 구체화했기 때문이다. 마크롱 덕택에 문제는 전과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명확해졌다. 돼지우리가 우리 모두를 파괴할 것이다. 그들을 지지하는 광기 어린 계층, 그리고 동업자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환상을 끝까지 믿고 싶은 이들이다.

‘기업’에 반항하는 세력은 자리를 얻고자 굴종할 생각도, 그럴 의무도 없는 이들이다. 맥킨지가 보좌하는 민주주의는 ‘놀랍게도’ 이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돌아갈 처사는 뻔하다. 전지전능한 경찰, 과도한 감시, 사소한 항의에 대한 법적 대응이다.(3) 언론은 흔히 ‘양극단은 서로 맞닿아있다’라고 표현하지만, 이 표현의 대상이 되는 국민연합(RN)과 불복하는 프랑스당(FI, 방향을 잃고 우경화돼 ‘극좌파’라기에는 무리가 있다)은 현재 해당 사항이 없다. 한편, 극단적인 기업주의와 극단적인 파시즘, 두 부류의 돼지들은 상호보완을 위해 맞닿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파시즘은 기업화된 사회의 부수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는 사회를 원자화하고 완전히 고독한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로써 정체성주의가 만들어낸 가공의 생존방법을 확산시킬 이상적인 환경이 구축된다. 인종차별에 집착하고 이슬람을 혐오한다. ‘기업’에서 실제 벌어지는 일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고 공개 토론에서 강한 발언으로 토론을 극단으로 몰고 간 정부 인사만 몇 명인가? 대선의 삼각 구도는 가속화됐다. 

대선이 끝나면서 상황은 명확해졌다. 끝까지 남았던 후보는 파시스트, 파시스트 제조기, 그리고 좌파 후보였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마크롱주의 방식은 스타트업의 방식과 견줄 수 있다. 우파 주간지 <발뢰르 악튀엘(Valeurs Actuelles)>과 인터뷰하며 잡지를 치켜세운다. 심한 말을 들은 우파 정치인 에릭 제무르를 위로한 일화를 알린다. 이민에 대한 그의 관점에 귀를 기울인다. 오만한 태도로 필리프 페탱(비시정부의 수반-역주)과 샤를 무라스(반혁명주의자 작가-역주)가 역사에 남긴 공로를 숙고한다. 환심을 사려고 노골적으로 파시즘을 표방하는 언론제국 건설을 묵인한다. 이 모든 것이 뾰족구두들이 사는 세련된 세계와 완벽한 모순을 이루지만, 실제 그의 계획과 절대적인 일관성을 이룬다. 물론 이 같은 간접적인 일관성은 단호하게 부인된다. 하물며 관용과 열린 태도에 있어서 우위를 차지해야 할 대선의 막바지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기업’이 실질적으로 어떤 정치 안정책을 지지하는지, 그리고 ‘국가자본’이 진흙탕을 뒹구는 뾰족구두 집단을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면 2022년에 ‘사회 선택’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당성을 인정하는 모든 수단 중에서도 선거는 가장 불완전하고 속기 쉬운 수단이다. 하지만 솔직히, 초라한 수단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다.

대선이 끝나면서 상황은 명확해졌다. 끝까지 남았던 후보는 파시스트, 파시스트 제조기, 그리고 좌파 후보였다.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경제학자, 철학자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Jean-Dominique Merchet, 일간지 <L’ Opinion> 소속의 군사문제 전문 언론인. 라디오와 TV쇼, 특히 <TV5>의 ‘C’est dans L’air’에 해설자로 종종 출연한다. (-편집자주)
(2) 공공부문 전환 범부처 관리국(DITP)은 이름이 나타내듯 지속적인 ‘전환’, 그리고 지속적인 ‘변화로의 인도’를 약속한다. DITP은 사르코지 정부 시절 시행된 공공정책 전면개정(RGPP)과 나란히 국가를 신관리주의 합리성으로 전향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3) ‘Feu sur les libertés 자유를 향한 공격’, <마니에르 드 부아르> 프랑스어판, n° 182, 2022년 4~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