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 재생산에 봉사하는 공교육

2022-08-31     피에르 수숑 l 언론인

예전에는 학교에서 열등생들에게 당나귀 모자를 씌우거나 매질을 하면서 읽기 등을 가르쳤다. 학교는 모욕과 체벌을 통해 학생들의 욕망을 박살내는 곳이었다. 다행히, 이제는 학교에서 그런 식의 폭력을 쓰지는 않는다. 하지만 폭력은 그 형태만 바뀐 게 아닐까? 이 질문에 답하고자, 4대에 걸쳐 학교실태를 조사한 한 보고서는 ‘열등생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들려준다. 

 

때는 20세기, 그리고 내 할머니의 삶이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마지막 침대에 몸을 붙인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1차 세계대전과,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할머니의 삶 초반에 대해 완벽한 기억력으로 회고했다.

“학교에서 오크어를 말하면 선생님들한테 엄청 혼나곤 했어.”

할머니는 매를 맞아가며 프랑스어를 터득했다. 자급자족하는 소작농의 딸이었던 할머니는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고자 열심히 공부했고, 전교 1등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대전 시기였다. 할머니는 학교에 작별을 고하고, 땅으로 돌아가 송아지, 소, 돼지, 병아리 등을 길러야 했다. 

이런 시련의 역사가 마치 받아쓰기처럼 할머니의 머릿속 양피지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었다.

 

잘못이 있다면, 분명히 사회에 있었다

할머니의 마지막 받아쓰기는 완벽했다. 잘못이 있다면, 분명히 사회에 있었다.

그 불합리한 시대를 살아낸 어른들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할머니는 땅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농촌경제와 가족경제의 제단 위에, 태양에 약속을 바친 결과 내가 태어났다. 쥘 페리 전 총리의 영향으로 세워진 초창기 학교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이제 막 교육받은 서민 출신 ‘공화국의 검은 경기병단’(1)이 언어통일의 임무를 띠고 농촌 학교에 파견됐다. 당시 우리의 역사 선생을 자처하던 멍청이는 “시대가 바뀌면 풍속도 바뀐다”라고 강변했다.

“늘 그렇듯, 수숑은 형편없는 답안지를 제출했다. 수숑에게는 펜이 없거든. 농부들이 그렇지 뭐! 그래서 수숑은 곡괭이로 글을 쓴다. 자, 수숑! 이제 네 곡괭이를 보여주렴. 어서! 그렇지! 좋아! 더 높이 들어올려!”

내 아버지가 6학년이었을 때, 그의 프랑스어 선생은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차별교육을 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내 아버지는,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던 프랑수아즈 돌토의 첫 작품들을 읽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교실에서 손찌검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며 규율을 잘 따르던 순종적인 소년이었다. “나는 손끝으로 만년필을 조금씩 들어 올렸어. 어머니가 학교에 다시 가라고 한 달 전에 선물로 사주신 만년필이었지. 어머니는 그 만년필을 내게 보물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럽게 건네주시며 조심해서 써야 한다고, 5프랑이나 주고 샀다고 강조하셨지. 당시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어.”

이런 가정환경 때문인지, 나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뤄진 첫 번째 주요 교육개혁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장 베르투앵 장관(1954~1956년, 1958~1959년 교육장관 역임) 덕분에, 프랑스의 의무교육은 14세까지에서 16세까지로 바뀌었고, 진보적 교육을 제공하는 일반교육중학교가 설립됐다. 그 덕분에 우리 아버지도 16세가 될 때까지 일반교육중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학교를 마친 후에도 졸업장을 받지 못한 채 17세에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잘못이 있다면, 분명히 사회에 있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농부의 아들인 아버지 친구들의 대다수는, 아버지가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CNRS)에서 누린 연구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했다. 그들도 부모 세대와 마찬가지로 평가 절하된 땅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영광의 30년’이라 불리는 프랑스 전후 경제호황기에 활짝 열려있던 노동시장은 그들을 받아들였다. 그들 대부분은 정부기관이나 회사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불운을 상쇄할 수 있었다. 

 

차별은 교사들의 일이었다

 

당시에 우리를 가르치던, 역사 선생을 자처하던 멍청이는 “시대가 바뀌면 풍속도 바뀐다”라고 말했다.

같은 아르데슈 지방의 같은 학교지만, 이야기는 이제 내 시대로 접어든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 나는 마을 아이들과 어울리며 자랐다. 판잣집, 강, 나무, 껌, 부서진 타일… 이런 것들 사이에서 어린 우리들은 형제자매처럼 똘똘 뭉쳐 지냈다. 우리들은 학교에도 같이 입학했다. 나와 뤼디, 쥘리앙, 마리, 니코는 항상 붙어 다녔다. 우리는 학교에서 교장 선생님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우리 수학 ‘선생님’은 그 지역에서 꽤 유명한 분이었다. 도의원을 겸하고 있어서 종종 신문에도 나왔던 그는, 1971년 사회당의 에피네 전당대회 때부터 사회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아주 멋진 차와 아주 큰 열쇠 꾸러미를 갖고 있었는데, 수업시간마다 그 열쇠 꾸러미를 있는 힘껏 뤼디의 머리 쪽으로 집어던졌다. 뤼디가 그 열쇠 꾸러미를 간신히 피하면 모두들 깔깔 웃어댔다! 우리들은 뤼디가 어느 정도 기초학습을 달성할 수 있도록 머리를 짜냈고, 우리의 노력은 어느 정도 결실을 거뒀다. 나의 오두막 형제자매들은 5학년을 마치자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그 친구들은 소위 ‘제4의 기술’을 쫓아서 갔다. 그건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용어였다. 그 뒤로는 그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분명히 사회에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빈민구제 시설에서 온 아이들이었다. 섬유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해고되면 고아원에 맡겼던 아이들을 다시 돌보러 간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들을 차별하지 않았지만, 교사들은 차별했다. 차별은 교사들의 일이었다. 노동시장만 달라졌을 뿐이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우리 세대로 넘어오면서 교육은 실업만큼이나 대중적인 것이 됐다. 땅도, 정부도, 회사도 뤼디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16세에 학교 교육을 마친 뤼디는 딱 자신만큼의 교육을 받은 다른 친구들과 함께 강도짓을 했다. 감옥은 어떤 이들에게는 교육의 장이 되기도 한다. 감옥에서 받은 교육은 더 많은 것을 파괴했다.

제법 성실한 학생이었던 나는, 어릴 적 친구들이 북적대는 감방과는 거리가 먼 대학의 강의실에서, 역사 ‘교수님’이 창밖으로 세​벤 산맥의 푸른 능선을 바라보며 “오 시대여! 오 세태여!(O tempora! O mores!)”라고 외쳐대는 수업을 들었다. 키케로는 이 말로 라틴 군중을 향해 시대의 변화를 읽을 것을 촉구했을 것이다.

그렇다, 시대가 변했다.

 

아르데슈 지방에서 이뤄진 지난 한 세기의 교육은 분명 흥미롭지만 농촌대학의 논문 한 편에서나 다뤄질 만한 주제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는 더욱이 나라 전체로 확대 적용할 수 있는 사례도 아니고, 특히 인구의 80%가 바칼로레아 세대이며, 우선교육지대 정책, 새 교수법 등이 적용되는 현 시대에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없다. 

시대가 변했으니 삶도 그에 맞춰 변해야 할 것이다. 파리 교외에 위치한 공립 어린이집. 어린 뤼카는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다. 주위가 산만하고, 종종 하마 소리를 질러 급우들의 주의를 흐트러뜨린다. 지시를 거의 따르지 않으며, 배우는 것을 습득하지 못한다. 결국, 어린이집 분위기를 흐린다. 교사들은 이 아이를 주의 깊게 본다. 나는 뤼카의 어머니와 여러 차례 만났다. 불안정한 주거환경, 불안정한 비정규직 노동자 부모. 그의 어머니는 뤼카를 혼자 키운다. 이 어머니는 모자보건센터(PMI)(2)의 학업부진 학생들을 위한 특별지원 네트워크(RASED)(3) 등 ‘학업부진아’들을 돌보는 모든 기관들과 면담했다. 이곳의 전문가들은 한 목소리로 뤼카를 특수학교에 보낼 것을 제안했고, 뤼카의 어머니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취합한 정보에 따르면, 이런 시설은 ‘인지적 결함이 아닌, 사회적 결함이 있는 아이들’만 받는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어린 뤼카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인지적 문제가 있는 아이는 아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처한 환경으로 인해, 단체생활의 규범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뤼카는 5세라는 어린 나이에 사회적 부적응아들 그룹에 합류하게 될 것이며, 이 그룹은 아마도 뤼카를 개선시킬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시설을 거친 후 전통적 학교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예는 매우 드물다. 이 사실은 이 시설들의 활동보고서를 무색하게 만든다.

쥘 페리의 세벤 산맥에서부터 장미셸 블랑케 장관의 파리 교외에 이르기까지, 잘못이 있다면, 분명히 사회에 있다. “시대가 바뀌면 풍속도 바뀐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2021년 프랑스의 교육제도는 유치원 때부터 서민계층을 거부한다. 이 프랜차이즈가 형성되는 데는 꼬박 한 세기가 걸렸다. 이 프랜차이즈는 이 나라에서 마침내 수료증, “제4의 기술”, 대학 졸업장을 치워버렸다. 실제로 뤼카에게 손을 내미는 것은 디지털 노동시장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역동적인 ‘신(新)경제’ 분야에서 경력을 쌓는 것은 아니다. 사실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모두가 멀리 가야 하는 것처럼 학교 교과 과정을 설계할 수는 없다.”(4) 그렇지 않다고 말할 사람은 뤼카가 아니다. 하지만 뤼카는 10대 때부터 우버 자전거를 타고 스파게티와 초밥을 배달하러 갈 수 있는 세대다.

더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결코 혁명적이지 않은 예들이다. 오늘날 가장 명망 있는 교육 이념가들조차도 부인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프랑스의 공교육은 거듭된 개혁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을 사회의 상승 동력으로 통합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양 진영 정치인들에서부터 학계에 이르기까지 널리 공유돼있다. 그런 만큼, “학교의 위기”라는 수십 년간의 주장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학교는 항상 노동계급을 강등시키는 과제를 떠맡았고, 학교 시스템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고용주의 요구사항이 이런 과제를 방해한 적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입증됐다. 

우리 할머니, 아버지, 뤼디, 뤼카는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다. 교육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계급 재생산을 가장 가까운 시일 내에 예측할 수 있는 분야다. 계급 재생산은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이게 바로 우리가 교육에 요구하는 바다. 학교의 위기라고? 학교 시스템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영감을 주는 인물들 중 한 사람인 프랑수아 뒤베는 다음과 같이 핵심을 언급한다. “기회 균등과 성과 추구는 필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가지는 개인의 평등과 사회적 불평등을 조율할 책임이 있는 민주사회에서는 바람직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5) 

프랑스의 학교는 그 설계자들이 인정하듯 신화에 바탕을 둔다. 사실, 모든 뤼디들은 오랫동안 그 신화를 믿지 않았다. 쁘띠부르주아 계급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거주지별 학교 배정제를 교묘히 피해 최고의 학교를 선택하고, 자녀의 사교육에 선뜻 자금을 댄다. 이런 식으로 공교육은 죽어가고 있다. 뤼디는 우리가 프랑스 혁명에 대해 배웠던 초등학교 역사 시간을 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대혁명 200주년이 되던 해 생쥐스트는 역사 교사의 목소리로 우리를 괴롭혔다. “가난한 이들은 지상의 주권자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무시하는 정부에 주인으로서 말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뤼디가 이번만은 그 자리에서 바로 복종하기를 기도했다. 열쇠 꾸러미가 뤼디의 얼굴에 정면으로 던져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피에르 수숑 Pierre Souchon
언론인. 저서로 『Encore vivant, Babel 아직 살아있는 바벨탑』(Paris, 2019년)이 있다.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


(1) 1882년, 학교 내 모든 종교교육을 금지하는 법안인 ‘쥘 페리 법’이 통과된 후 농촌으로 파견된 젊은 교사들
(2) Protection Maternelle et Infantile
(3) Réseau d’Aides Spécialisées aux Élèves en Difficulté
(4) OECD, “What future for our schools?”, 『Education Policy Analysis』, Paris, OECD, 2001.
(5) François Dubet, 『L’École des chances. Qu’est-ce qu’une école juste? 기회의 학교. 공정한 학교란 무엇인가?』 Paris, Seuil,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