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지 않은 글에 거는 작은 희망
[1월의 ‘르 디플로’ 읽기]
‘위기’의 원인을 지목하는 좌파의 손가락은 언제나 신자유주의를 가리키고 있었다. 적확했다. 국제 금융자본은 물론 국민국가의 정치권력조차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그 장치들을 고안하고 실행하는 데 열을 올려왔음을 부인할 근거는 없다. 문제는 전 지구적 금융·경제 위기가 닥치고도 현실의 역학관계는 요지부동이고, 그럴수록 신자유주의를 규탄하는 목소리는 손가락 끝에 매달린 ‘지당한 말씀’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또 있다. 어느덧 신자유주의는 의인화되어, 도덕 감정(만)을 격발한다. 악인은 현상될 뿐, 그의 기원과 전개는 편집에서 누락된다. 우리에게 남은 의무는 다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투쟁인가.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전개를 감안한다면, 그 힘이 여전히 기세등등한 것은 아직 신자유주의가 달성되지 않은 현실의 역설적 방증이다. 엄밀히, 신자유주의 시장경제가 완성된 국가 체제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올해 한국의 양대 선거에서는 수구정당마저 ‘복지 확대’를 외칠 것이다. 그들이 빈말으로든 상징조작으로든 표심을 사려고 나서는 행위 자체가, 남루하지만 민주주의의 일부이며, 그것은 취약할지언정 신자유주의의 완성을 무한히 유예시키는 고정 변수다. 시장은 자신의 욕망과 달리, 홀로 설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시장과 민주주의의 모순적 요구가 끝없이 줄다리기를 하는 운동장인 것이다.
그 역학관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온 것이 ‘민주자본주의’ 체제의 역사다. 이번호 볼프강 스트리크의 글(1, 4∼5면)을 보면,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의 변형된 연장임을 알 수 있다(그는 1990년대 이후 공공부채의 민간부채로의 전환을 ‘민간 케인스주의’라 부른다). 민주자본주의의 모순에 따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인플레이션, 공공부채, 민간부채가 순차적으로 동원됐다. 그러나 그것은 모순의 지양(止揚)이 아니라 폭탄 돌리기였고, 그 과정에 주류 좌파도 적잖이 동력을 보탰다. 쓸 수 있는 카드는 아직 남아 있는가. 이제 탐문은 도덕 감정이 아니라 익숙한 체제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해야 한다.
남북관계도 다르지 않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죽음 이후 벌어진 백가쟁명의 정세 전망은 어느 정도 탄착점을 형성해가는 듯하다. 하지만 ‘북한 급변 사태는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안도감과 동시에 익숙한 공허감을 준다. 남북한 주민들의 정서 구조가 빠져 있는 탓이다. 전망은 주로 북한 최고 권력층 내부의 구성력과 역학관계에 초점을 맞춰왔다. 이번호 한국판은 조금 다르게 접근했다. 북한 주민들의 의식과 정서 구조를 분석했다. 북한발 긴급 속보를 듣자마자 주가 그래프부터 들여다보는 남한의 호모에코노미쿠스도 살폈다. 만약 변화가 일어난다면 바로 그들로부터 시작될 것이기에.
201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의 목표도, 굳이 말하자면, 크게 다르지 않다. 힘있는 자가 주어가 아닌, 그렇지 못한 다수가 주어가 되는, 익숙지 않은 시선의 글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가고자 한다. 또한 우리의 희망도 조금 보태자면, 그런 우리의 손을 여러분이 좀더 굳세게 붙잡아주셨으면 한다.
글 / 안영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장 editor@ilemond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