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남미 앞에 멈추다

[Spécial 이념, 무늬와 진실]

2012-01-06     모리스 르무안

1951년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은 ‘생산수단 소유자들의 속박에서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목표 아래 재탄생했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SI 지도자들은 ‘세계화가 야기하는 폐해를 적절히 교정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남미 사회주의에 대해 이들은 어떤 태도를 보여왔을까?

2010년 11월 15일 자유주의의 상징인 프랑스 파리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건물에서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 소위원회(Council)가 열렸다. 프랑스 사회당 제1서기 마르틴 오브리는 개회 연설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의장님께 그리스 지방선거 승리(역대 최대의 기권율 53%!)를 축하한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정치적 용기를 잃지 않고 승리를 거둔 그리스 사회당에 경의를 표합니다.” 우리는 그 뒤 이 범그리스사회주의운동(PASOK·그리스 사회당의 정식 명칭) 당수가 자국민에게 이른바 ‘정당한 긴축’을 강요하다 어떤 운명을 맞이했는지 잘 알고 있다. 또한 이 사민주의 조직(SI)의 중요한 회원이던 로랑 그바그보, 지네 엘아비디네 벤 알리, 호스니 무바라크 등이 어떤 말로를 맞이했는지 잘 알고 있다. <<원문 보기>>

익숙한 독재자들, SI 회원 명단에

정세 분석과 운영이 이런 식일진대, 이 고매한 ‘사회주의자 클럽’이 10년 가까이 남미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정치운동에 철저히 무관심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같은 해 12월 7일, 브뤼셀 유럽의회 ‘알티에로 스피넬리’ 문에는 8년 사이 쿠바에서만 세 번째로 사하로프 인권상을 받은 반체제 인사 기예르모 파리나스의 초상과 이름이 새겨 있다. 반면 같은 건물 강당에서 10여 명의 유럽의회 의원들과 보좌관들이 콜롬비아에서 온 노조활동가와 인권운동가들을 만난 일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증언이 이어졌다. 4개월 전(2010년 8월) 후안 마누엘 산토스(알바로 우리베 전임 대통령 밑에서 국방장관 역임)가 정권을 잡은 이후 노조활동가 39명과 대안민주당(PDA) 활동가 12명이 살해됐다. 덴마크 사민당의 올레 크리스텐센은 여기에 몇 가지 보충자료를 덧붙였다. 그는 2010년 7월, 역시 이번 만남에 참석한 영국 노동당의 리처드 호위트와 함께 ‘콜롬비아를 위한 정의’라는 단체의 안내를 받아 악명 높은 라 마카레나 지역을 방문했다. “우리는 묘지를 방문했다. 2천 명 넘는 사람들(군부와 민병대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묻혀 있었다. 우리는 유럽연합(EU)과 콜롬비아가 협상 중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야 한다.” 그의 말에 단 한 사람만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 대표 에밀리오 메넨데스 델 발레였다. “집권한 지 석 달 만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국민 다수가 산토스에게 표를 던졌다면(기권율 55.59%) 그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FTA 체결에만 유독 관심

3명의 의원은 모두 SI 회원 정당 소속이면서도 이처럼 의견이 달랐다. 유럽단일좌파-북유럽녹색좌파(GUE/NGL)(1) 고문인 벨기에의 폴에밀 뒤프레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유럽사회당(PES) 그룹 안에서 크리스텐센과 호위트 의원은 비주류에 속한다. 이 그룹의 다수가 FTA 비준에 반대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PES를 이끄는 독일의 마르틴 슐츠(독일사민당)는 FTA에 우호적이며, PSOE는 발 벗고 나서서 찬성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33년 살바도르 아옌데가 창당한 칠레 사회당은 SI가 “자본가들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 순응한다”(2)는 이유로 가입을 거부한 바 있다. 냉전 기간에 SI는 남미 지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이유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1954년 자코보 아르벤즈 정권이 전복됐을 때 규탄 성명서를 낸 기억이 없다.” 당시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사회당의 전신) 대외협력부에서 일했던 앙투안 블랑카가 말한다. “10년 뒤 산토도밍고에 미군이 상륙한 것을 규탄하는 발언을 요청하자 기 몰레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봤다!”

쿠바 혁명(1959)의 성공으로 반제국주의가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그러나 SI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관심 있게 지켜보긴 했으나 먼 나라 얘기로 취급했다.” 적어도 1973년 9월 11일까지는 그랬다. 살바도르 아옌데의 죽음과 칠레 정권의 몰락은 유럽 사회주의자들에게 스페인 내전만큼이나 강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 앙투안 블랑카는 SI 대표 자격으로 칠레로 날아갔다. 그는 비나델마르에 묻힌 ‘대통령 동지’(Compañero Presidente)에게 애도를 표하고 군사정권에 의해 추방됐다. “그때까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략에 복종해온 SI로서는 워싱턴에 대항해 처음으로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값을 한 셈이었다.”

그 뒤 세계 각국의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의 태도는 유럽 사민주의자들- 빌리 브란트(독일), 올로프 팔메(스웨덴), 프랑수아 미테랑(프랑스), 브루노 크라이스키(오스트리아), 마리우 소아레스(포르투갈), 펠리페 곤살레스(스페인) 등- 과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이 됐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박해받던 남미의 개혁 정당들로서는 이들과의 협력이 절실했다. 그때부터 양쪽의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베네수엘라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대통령과 집권 민주행동당(AD)의 초청으로 1976년 카라카스에서 첫 공식 만남이 있었고, 1980년 3월에는 산타도밍고에서 최초로 ‘남미와 카리브 지역 SI 회의’가 열렸다.

회의에 참가한 남미 29개 정치조직 중에는 1978년 SI에 가입한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FSLN)도 끼어 있었다. FSLN은 가입 당시 아나스타시오 소모사 정권에 대항해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는 비동맹국운동 의장 자격으로 초대됐다. 유럽인들은 남미의 상황에 ‘말려들기’ 시작했다. 살바도르의 민주혁명전선(FDR), 과테말라의 억압에 반대하는 민주전선(FDCR), 온두라스의 애국전선(FP)에 SI 소속 정당들이 참여하고 있었기에- FDR와 FDCR는 정치조직과 무장조직의 연합체였다- 유럽 사민주의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무장투쟁 방식에 동의해야 했다.

1981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 미테랑이 이끄는 사회당(PS)이 정권을 잡는다. 리오넬 조스팽, 레지스 드브레(특별 자문), 앙투안 블랑카(1982년 남미 순회대사) 등의 영향으로 프랑스 정부는 민감한 지역에서 미국과 대립각을 세운다. 1981년 8월 28일 프랑스와 멕시코는 공동으로 살바도르 반정부 세력(무장세력 포함)의 대표성을 인정함으로써 파장을 일으킨다.(3) 미테랑은 산디니스타 세력에 호감을 감추지 않았고 쿠바와도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블랑카는 기쁜 표정으로 당시를 회고한다. “SI의 이름으로 워싱턴 몰래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 사이의 충돌을 막는 데 성공했다.”

80년대, 혁명세력과 강한 연대

로널드 레이건의 반대에도 무력 분쟁보다 정치적 해법을 추구하는 SI의 정책은 결실을 거두었다. 오스카르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은 중미 지역에 평화안을 제시한 공로로 1987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 기간 내내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정치·외교 위원회에서 일한 게릴라 출신 미구엘 앙헬 산도발은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우리 조직은 항상 SI를 협상과 평화 구축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고했다. 가령, PSOE의 주선으로 마드리드에서 최초로 정부와 무장단체가 회담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스웨덴·프랑스·스페인 등의 사민당과 그 밖의 개혁주의적, 우파 성향 정당들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산타도밍고 회의 이후 각국 정당들 간의 차이가 표면화됐다. SI 소속의 몇몇 ‘라틴’ 정당들- 코스타리카 민족해방당(PLN), 베네수엘라 민주행동당(AD), 도미니카 혁명당(PRD) 등- 은 유럽과 명확히 선을 그었다. 마르크시즘에서 먼 뿌리를 찾는 유럽 사민당들과 달리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 삼지 않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반공주의적 견해를 표명했다. 에콰도르 좌익민주당(ID) 당수 로드리고 보리아는 “남미에서는 ‘사회계급’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라고 말한다.(4)

모호한 개혁주의 성향의 이 정당들은 집권 독재정부가 몰락할 경우 기독교 민주당 세력을 추월하기 위해 SI를 이용했다. 그들은 경제적 힘을 갖춘 유럽에서 집권 중이거나 집권이 예상되는 사민당들과 제휴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을 계산했다. 1999년 멕시코 민주혁명당(PRD)의 포르피리오 무노스 레도는 “SI는 일종의 후견인이다. 남미의 몇몇 정당은 유럽인들을 마치 고위층 대하듯 한다”(5)며 분노했다.

90년대, 신자유주의 세력 대거 유입

1980년 출범한 SI 남미-카리브 지역위원회(SICLAC)에는 FSLN 같은 조직뿐 아니라, 강한 중도 성향의 아르헨티나 급진시민동맹(UCR), 기독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한 칠레 사회당(1996년 가입), 70년간 썩 민주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장기 집권해온 멕시코 제도혁명당(PRI) 등도 포함돼 있다. 심지어 신자유주의 모델을 도입하고(1990~94), 좌파 애국동맹(UP) 활동가들이 집단학살당한 시기(1986~90)에 집권 여당이던 콜롬비아 자유당(PL)도 회원으로 있다. 콜롬비아 전 대통령 알바로 우리베 역시 2002년까지 자유당에 몸담았던 인물이다.(6)

아무려나, 구대륙의 사회주의자들은 SI 회원 정당 수를 늘리면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다. 더 나아가 유럽 자본과 경영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자유주의의 관리자 노릇까지 하고 있다.

1999년 6월 25~26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개최된 SI 총회에서, 펠리페 곤살레스는 “과거의 사회주의는 경직되고 엘리트주의적이었다”고 비판하면서 “민주적 사회주의는 항상 민주주의와 짝을 이루는 시장을 받아들였다”(7)고 역설했다. 폐막 성명서는 “세계 전체에 만연한 비극적인 불평등”을 비판하면서도 결국은 실업과 기아, 빈곤을 줄이기 위해 “세계화에 참여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8) 브라질 민주노동당(PDT)의 레오넬 브리졸라는 이에 대해 “내용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좌파와 우파 양쪽 모두에서 써먹을 수 있을 정도”(9)라고 비판했다. 한편, 슬쩍 삽입된 짧은 문구에는 “베네수엘라의 정치 상황과 정부가 기존 질서에 취하는 대결적 자세”에 대한 SI의 우려가 반영돼 있었다. 우고 차베스가 정권을 잡은 지 불과 6개월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SI위원회(모든 회원 정당 참여)뿐 아니라 SICLAC의 지역회의에서도 같은 장면이 반복됐다. “이틀 동안 멍청하게 앉아 국가 정상이나 당수가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 본인이 아니라 보좌관들이 준비한 연설문을 현장에서 받아서 더듬더듬 읽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전 SI 부의장 마르가리타 사파타(FSLN)의 말이다. 앙투안 블랑카가 한마디 거든다. “좋은 의도로 가득하지만 무의미한 말을 늘어놓는다. 아무 결론도, 실천적 구속력도 없다. 회의가 끝나면 참석자들은 새로운 상황 인식 없이 자리를 뜬다.”

그러나 전혀 쓸데없는 자리는 아니다. 블랑카는 “개인적 만남, 오래된 친구들과의 감격적인 포옹이 있다”고 말한다. 사파타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도 있고 친구들과 해후할 수도 있는 자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 친구의 적은 내게도 적이다’라는 말은 이곳에서도 통한다.

1989년 1월 1일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 ‘CAP’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가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재선됐을 때, 스페인의 펠리페 곤살레스는 “베네수엘라는 앞으로도 올바른 결단을 통해 번영을 누릴 것”(10)이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제대로 봤소, ‘동지’! 당선되자마자 신자유주의로 전향한 페레스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조조정 권고를 받아들임으로써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결국 베네수엘라 민중은 같은 해 2월 27일 그 유명한 ‘카라카소’(Caracazo) 봉기를 일으켰다.

쿠데타 세력에도 손 내밀어

페레스 정권은 진압 과정에서 시민 3천 명을 무참히 학살했다. 2011년 1월 민중봉기를 강경 진압한 전 튀니지 대통령 벤 알리의 집권여당 입헌민주연합(RCD)이 SI에서 제명된 것과 대조적으로, 페레스의 민주행동당(AD)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 SI는 심지어 1993년 부정 혐의로 탄핵된 페레스에게 연대와 우정의 메시지를 담은 공식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베르나르 카상은 페레스 대통령이 “첫 임기 동안 유럽 친구들에게 관대했다”고 말한다. “곤살레스가 SI 의장일 당시 스페인의 PSOE는 베네수엘라의 재정적 ‘연대’ 덕을 많이 봤다.”(11) 그러니 1992년 2월 4일 ‘부정부패로 얼룩진 민주주의’에 대항해 봉기한 우고 차베스 중령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

베네수엘라뿐 아니라 1980~90년대 집권한 SI 소속 ‘라틴’ 정당들-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칠레, 에콰도르, 멕시코, 파나마 등- 은 실질적 복지정책을 단행했다. 말 그대로 국민이 잘 먹고 잘 입을 수 있게 노력했다는 뜻이다. 워싱턴과의 공조로 규제 완화와 민영화를 강요하던 세계은행과 IMF는 신뢰를 잃고 쫓겨났다. 투쟁의 결과로 혹은 민중운동 세력의 추대로 새로운 인물들이 정권을 잡았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브라질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등이 그들이다.

2002년 7월 19~20일 카라카스에서 개최된 SICLAC 회의에는 주최국 자격으로 베네수엘라 민주행동당(AD) 당수 라파엘 앙헬 마린, 용감한 국민연합(ABP)의 안토니오 레데즈마, 일간지 <엘 나시오날> 발행인 미구엘 엔리크 오테로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모두 직간접적으로 2002년 4월 11일 반차베스 쿠데타를 공모했다. 당시 베네수엘라 대통령 고문이던 막시밀리엔 아르벨라이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멕시코 제도혁명당(PRI)과 FSLN 쪽의 권고로, 당시 SI 사무총장이던 칠레의 루이스 아일라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개인적 자격’으로 참석한다는 조건으로 만남을 수락했다. 다음날, 약속 장소에 나타난 사람은 몇 명뿐이었다. 아일라 사무총장은 마지막 순간에 약속을 취소했다.”

회의 막바지에 SICLAC는 “베네수엘라의 민주주의 체제와 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나선 민주행동당과 그 연합세력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한마디로 쿠데타 공모 세력을 지지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사회당(PS)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한 장자크 쿠를리안스키는 “항의 의사를 밝혔다가 민주행동당 사무총장에게 드잡이를 당할 뻔했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성명서에 담긴 결론은 이미 회의 전에 작성돼 베네수엘라의 반정부 계열 신문에 실린 터였다. 사실상 아무런 가치도 없는 말들이었다.” 단순한 실수인가, 아니면 몰지각의 소산인가? 그 성명서는 지금도 SI의 공식 사이트에 게재돼 있다.(12) 그 뒤로도 SI 소속 베네수엘라 정당들- 민주행동당(AD), 사회주의운동당(MAS), PODEMOS(‘우리는 할 수 있다’는 뜻)- 의 견해를 고스란히 반영한 성명들이 발표됐다. 모두 볼리바르 혁명에 적대적 입장을 고수하는 정당들이다.

정작 좌파 정당들엔 등 돌려

“사회주의인터내셔널?” 주프랑스 볼리비아 대사관 고문을 지낸 알폰소 도라도는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린다. “파스 사모라가 SI 부의장을 지낸 적이 있다. 그때 기억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좌익혁명운동당(MIR) 지도자인 사모라는 1989년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 위해 과거의 독재자 우고 반세르와 협상한다. 2002년 모랄레스와 그가 이끄는 볼리비아 사회주의운동당(MAS)- 베네수엘라 MAS와 동명- 의 인기가 치솟자, 사모라는 백만장자 곤살로 산체스 데 로사다와 연합한다. 그러나 데 로사다 대통령은 2003년 10월 민중봉기로 사임한다. 볼리비아 MAS는 베네수엘라 통합사회당(PSUV), 에콰도르 조국동맹(Alianza PAIS·조국주권고양운동), 살바도르 민족해방전선(FMLN),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과 마찬가지로 SI 회원이 아니다. 이 정당들은 가입 권유를 받은 적도 없다.

SI가 가입을 원하는 정당은 따로 있다. 남미 좌파의 아이콘, 룰라가 이끄는 브라질 노동당(PT)이다. 그러나 룰라는 따로 조직을 꾸렸다. 그는 1990년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온건 정당들(SI 회원 정당 포함)뿐 아니라 무장투쟁에서 탄생한 정치조직, 공산당(쿠바 포함)과 다양한 분파들을 아우르는 상파울루 포럼을 결성했다. PT 중앙지도부의 발테르 포마르는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사민주의가 위기를 맞는 상황에서 남미의 신자유주의와 대결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세력을 포용할 수 있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SI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거리를 둔 채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기존 동맹 관계에 집착하는 유럽의 사민주의자들은- 포르투갈 제외-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참여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남미의 새로운 운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때로 시행착오를 범하지만,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상당한 사회적 성취를 이뤄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 등 막강한 역량을 자랑하는 독일 사민당(SPD) 역시 남미의 운동에 무관심하긴 마찬가지다. 토니 블레어 때문에 힘을 잃은 영국 노동당의 ‘골수’들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다. 다만, 이탈리아 민주당의 마시모 달레마가 카라카스를 방문한 적은 있다. 아르벨라이스는 재밌다는 듯 당시를 회고한다. “그는 긴장해 있었다. 우리가 차베스와 만남을 주선했다. 그는 차베스를 만나고 나오면서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며 매우 기뻐했다.”

브라질 룰라 등은 SI와 딴살림

폴에밀 뒤프레는 “유럽 의회에서는 몇 년 전부터 FTA가 주요 의제로 등장했다. 사회주의 그룹 구성원들은 대부분 진보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가령 아무도 온두라스 문제(2009년 쿠데타)를 의제로 채택하자는 요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반면 2004년 유럽 사회당(PSE) 대표 엔리크 바론 크레스포는 콜롬비아 대통령 우리베를 직접 초청했다. 2월 10일 우리베가 연설하는 도중, GUE/NGL과 녹생당원, 자유주의 정당 소속의 몇몇 의원, 상당수의 사회당 의원들이 바론 크레스포를 비난하며 자리를 떴다. 그러나 스페인 의원들은 모두 자리를 지켰다.

남미와 관련해 스페인 정부는 EU 안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스페인은 마치 자국 영토인 갈리시아와 안달루시아를 대하듯 쿠바에 관심을 기울여왔고, EU 안에서 유일하게 쿠바와 EU 관계 정상화를 주장해왔다. 2011년 11월 야당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PSOE는 남미와의 협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알폰소 도라도는 양쪽이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국제적이지 않은 국제주의자들

2010년 10월 22일 파리 솔페리노 거리의 사회당사는 흥분에 휩싸였다. 사회당 대변인 브누아 아몽이 베네수엘라에 가서 차베스 대통령을 만날 ‘의향’이 있다고 발표한 것이다. 분노한 사회당 우파와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지지 세력들은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도라도는 주프랑스 볼리비아 대사관 근무 때 느낀 환멸을 토로한다. “우리는 세골렌 루아얄과 마르틴 오브리와 가끔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당은 볼리비아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프랑스 사회당과 더 가까워지려고 노력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21세기 사회주의 혹은 ‘미주 볼리바르 대안’(ALBA)(13) 같은 연대 노력에 관해 토론할 기회는 당연히 없었다.” ALBA의 결성은 신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뿐 아니라 유럽의 경제적·지정학적 이익에 정면으로 대치된다.

사회당은 2002년과 2003년, 포르토알레그리에서 개최된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대안세계화주의자들을 추월하고 브라질 정부에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세골렌 루아얄은 대통령 선거 유세 과정에서 자신을 각각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당선된 여성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와 미첼레 바첼레트와 비교했다. 그러나 이들은 강경 우파가 다시금 정권을 잡는 데 일조했다.

“사회당은 SICLAC에 20년 전부터 남미와 관련된 일을 해왔지만 아무 성과도 내지 못한 사람들을 파견한다.” 앙리 엠마뉘엘리 의원 보좌관 로베르토 로메로는 분노에 차서 말을 잇는다. “남미의 특정 정당에 대한 사회당 내부의 적대감은 근거가 없다. 차라리 철저한 무지에 가깝다. 남미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때로 오보에 가까운 기사를 인용하는 <르몽드>나 <리베라시옹>의 편집국 수준과 비슷하다.”

인터뷰에 응한 대다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로베르토 로메로는 SI에 대해 “속 빈 강정이다. 차라리 세계에서 가장 편안한 여행을 제공하는 여행사라고 하는 편이 맞다”고 말한다. “그곳에서는 아무 결론도 나오지 않는다.” 꼭 그렇지만도 않다. SICLAC 회의나 신뢰를 잃은 소속 정당들이 발표한 성명서들이 SI를 통해 배포되지 않는가? 그럼 남미의 반정부 언론들은 그 내용을 대서특필한다. 전세계 좌파가 우리를 지지한다! 유럽 언론들이 그 기사들을 인용한다. ‘포퓰리즘’ 타도!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그 기사를 읽는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순환이 완성된다.

/ 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저서로 <마이애미의 다섯 쿠바인>(Don Quichotte·파리·2010)이 있다.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반자유주의, 반자본주의, 녹색사회주의, 공산주의 혹은 포스트코뮤니즘 세력의 연합 정당.
(2) 1935년 전당대회에서 채택·공표된 강령.
(3) FDR-FMLN은 사민주의자 기예르모 운고가 이끄는 정치조직 FDR와 게릴라 조직인 살바도르 민족해방전선(FMLN)의 연합체다.
(4) <Nueva Sociedad>, n°48, 카라카스, 1980년 5~6월호.
(5) <Pagina 12>, 부에노스아이레스, 1999년 6월 27일.
(6) 현재 SICLAC에 ‘정회원’, ‘자문회원’, ‘옵서버’ 등의 자격으로 총 39개 정당이 가입해 있다.
(7) <Pagina 12>, 1999년 6월 26일.
(8) ‘부에노스아이레스 회의: 변화를 만들어가자’, 사회주의인터내셔널 홈페이지, 1999년 6월 25~26일, www.internationalesocialiste.org.
(9) <La Naciõn>, 부에노스아이레스, 1999년 6월 28일.
(10) <엘파이스>, 마드리드, 1989년 2월 2일.
(11) 베르나르 카상, ‘스트라스부르의 신성동맹’,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4년 4월호.
(12) ‘사회주의인터내셔널 남미와 카리브 지역위원회 회의: SICLAC’, 2002년 7월 19~20일, www.internationalesocialiste.org.
(13) 쿠바, 볼리비아, 에콰도르, 온두라스(2009년 쿠데타 전), 베네수엘라,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앤티가 바부다가 가입했다.


신통치 않은 스페인

남미에 진출한 다국적기업을 통해 막대한 이권을 챙기는(1) 스페인은 알력관계의 실상을 잘 알기 때문에 대립 상황은 피하려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나름의 명백한 논리가 깔려 있다.

펠리페 마르케스 곤살레스 전 스페인 총리는 스페인 자본의 대리인이 되어 오랜 ‘동료들’과 변함없는 우정을 과시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인 알란 가르시아 전 페루 대통령은 대통령 첫 재임 기간(1985~90)에 국제통화기금(IMF)에 과감히 맞서는 진보주의자였지만 두 번째 임기(2006~2011)에는 철저한 보수주의자 면모를 보였다. 좌파인 호세 루이스 사파테로 스페인 전 총리는 제17차 이베로-아메리카 정상회담(2007년 11월 칠레 산티아고에서 개막) 연설에서 30분 넘게 ‘사회적자유주의’(Social-liberalism)를 예찬했다. 반면 2006년 1월 22일 에보 모랄레스가 볼리비아 대통령에 당선되고 스페인이 볼리비아의 부채 7300만 유로를 삭감해주고 석 달이 지난 뒤, 스페인 외무장관 미겔 앙헬 모라티노스는 “볼리비아가 ‘합의 없이’ 탄화수소산업을 국유화할 경우 양국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국무부의 외교전문을 살펴보면,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어릿광대’로,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형편없고’,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성실하지만 무지하고 미숙하다’고 평가되어 있다. 심지어 다니엘 오르테가 니카라과 대통령은 ‘최악’이라고 묘사했다. 이런 사적 기밀을 담은 외교전문이 여러 스페인 지도자들에게 전달되었다. 반면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 정부의 외무장관으로 임명되기 전 이베로-아메리카 국무장관을 지낸 트리니다드 히메네스 주재하에 마드리드 미 대사관에서 열린 회담과 관련한 문서를 보면, “히메네스가 말하길, 스페인은 차베스 대통령과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꺼린다. (중략) 하지만 스페인 정부는 베네수엘라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만한 정보를 기자들에게 은밀히 제공하고 있다.”(2) ‘중도좌파’ 성향의 일간지 <엘파이스>를 읽은 독자라면 이런 주장의 신뢰성을 의심하긴 어려울 것이다.

번역 / 배영미 petite0222@hotmail.com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졸.


(1) 페드로 라미로, ‘네오콘키스타도르’, <마니에르 드부아> 119호, 2011년 10~11월 참조.
(2) ‘Demarche on Democracy in Venezuela’, 마드리드 주재 미 대사관, <Confidential>, 2007년 1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