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일통화, 환상에서 환멸로

[Spécial 이념, 무늬와 진실]

2012-01-06     앙투안 슈바르츠

단일통화(1999년 창안)는 2002년 1월 1일부터 유통됐다. 당시 미디어는 프랑스에서 제안하고, 벨기에에서 고안해, 독일에서 주조한 유로화의 장밋빛 미래를 꿈꿨지만, 지금 유로화는 갖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투자자와 기업은 과연 유로화가 살아남아 11번째 생일을 맞을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1999년 1월 4일, 채널 <프랑스2>의 8시 뉴스 장면. 3일 전부터 유로화는 공식적으로 유럽연합(EU) 11개 회원국의 단일통화가 됐다. 한 르포르타주는 ‘금융시장의 축제 같은 하루 이야기’를 내보냈다. 파리 증권가의 한 책임자는 “유로화는 혁명, 그것도 유익한 혁명”이라고 분석했고, 장클로드 트리셰 프랑스은행장은 “현재 상황을 보면 더할 수 없이 기쁠 따름”이라고 했다. 클로드 세리용 앵커는 자크 들로르 전 유럽위원회 위원장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금융인들은 물론 친유럽 성향의 정치가들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좌파인 당신은 오늘날 화폐로 하나가 된 유럽에 기뻐하는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들로르 전 위원장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단일통화로 프랑스는 좀더 자유로워지고, 통화 분야에서 운신의 폭이 확대되겠지요. 단, 경제·통화 연합이 성공한다면 말입니다.”

경제·통화 연합은 성공했는가? 12년이 지난 지금, 들로르 전 위원장은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게 됐다. 유로화 창안자 중 한 명이었지만 그는 이제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다”고 논평했다(<르수아르>, 브뤼셀, 2011년 8월 18일자). 마틴 울프 <파이낸셜타임스> 논설위원도 “20년 전 정치 지도자들이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단일통화를 구축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2011년 11월 9일자).

정·재·언이 합창한 유토피아

프랑스 지도자들은 1980년 말 단일통화 체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유럽 통합을 재차 추진하고 싶은 동시에 독일 마르크화 헤게모니를 우려해 공동 화폐를 창안하려 했다. 독일 지도자들은 회의적이었다. 미테랑 대통령은 그들을 설득하려고 사전 조정 작업 없이 자본의 전적인 자유화 카드를 내밀었다. 자크 들로르가 이끌던 중앙은행가와 전문가 위원회는 분데스방크(일명 ‘부바’, 독일중앙은행을 의미) ‘인사들’의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단순하지만 강한 해결책을 찾았다. 경제·통화 연합을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정한 조건에 따라 창설하고, 향후 유럽중앙은행(ECB)은 정권에서 독립해 가격 안정을 감독하는 임무만 맡는다는 것이다. 마스트리흐트 조약(1992년 조인)에 명문화된 이런 구상에는 독일 신자유주의에 붙여진 이름,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라는 독특한 주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단일통화가 등장한 이후 주된 담론은 유로화 체제의 이데올로기적 기초에 대해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언론에 유로화는 완전히 다른 사안, 아니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역사의 진보였다. 아마 문자가 발명된 이래 가장 획기적인 진보로 여겼을 것이다. 당시 <르몽드> 발행인이던 장마리 콜롬바니는 “유로화의 등장은 의지가 시장을 누르고, 소수의 결의가 경제적 압력을 이긴 승리였다”고 평했다(<르몽드>, 1998년 12월 31일자). 베르나르 게타는 “유럽연합은 이성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유로화로 인해 유럽통합운동이 가속화됐고, 유럽 국민을 그들이 꿈꾸는 유럽으로 인도했다”며 “유토피아는 유년기를 벗어났다. 이제 성년이 됐다”고 점쳤다(<누벨 옵세르바퇴르>, 1998년 12월 31일자).

로랑 조르팽 <리베라시옹> 편집장은 회의론자들에게 “유럽의 건설은 감정적 문제이기 이전에 이성의 정치를 구현하는 일”이며 “바로 그 이유로, 유럽 국민이 지지한다면, 유럽 건설은 위대한 진보이자 민주주의로 가는 진전”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감독을 받지 않는 기관을 설립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민주적 진전으로 보일 수 있다. 그는 “우리는 미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며 “이런 걸 모험이라고 하지 않느냐”고 따졌다(<리베라시옹>, 1999년 1월 1일자).

독일 입맛 맞게 질서를 구축하다

미디어는 그들의 감격과 함께하려고 애썼다. <프랑스 수아르>는 ‘영광의 날이 도래하다’라는 타이틀을 내세웠고(1999년 1월 5일자), ‘대륙의 탄생’이라는 문구가 <누벨 옵세르바퇴르>의 표지를 장식했다(1998년 12월 31일자). 웬걸, 1년이 지나자 <르몽드>는 “새로운 통화가 그 누구보다 투자자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됐다”고 인정했다. “유로는 좀더 통합적이고 연대적이며 강력한 유럽을 만들기 위해 고안”됐으니 1999년 3월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언급한 것처럼 “유로는 세계화를 억제할 수 있는 최상의 수단”이 되어야만 했으나, “사실상 유로는 외국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한 유럽 각국의 경쟁만 강화했다”고 지적했다(2000년 1월 5일자).

이런 지적도 언론이 유로화 통용을 축하하는 샴페인을 터뜨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렉스프레스>는 “유로화 만세!”를 외치며 열광했다(2001년 12월 27일자). 정책·통화 당국과 손잡은 수많은 기자들은 국민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새로이 진행되는 연대운동”을 반겨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주르날 뒤 디망슈>, 2001년 9월 2일자). 미국인들이 달에 도착해 걸었다고 했던가? 유럽인들은 이제 머리 아프게 환율을 계산하지 않고도 대륙을 여행할 수 있다고. 언론인 장 부아소나는 “류머티즘으로 꼼짝 못하던 유럽인들이 어떻게 단일통화라는 믿기 어려운 것을 구상할 수 있었는지 전세계가 놀랐다”며 흥분했다.(1)

반대 의견에 ‘포퓰리즘’ 낙인

미디어계에서는 새로운 통화가 달러와 경쟁해 세계 무대에서 ‘유럽의 입지’를 강화해주리라고 굳게 믿었다. 미적으로 뛰어난가 싶은 유로화 지폐와 동전은 논설위원들의 감동을 자아냈다. <리베라시옹>은 유로화가 “막연하게만 여겨지던 본질에 실체를 부여하고, 유럽인들 사이에 공감대를 넓혔다”고 평가했다(2002년 1월 3일자). 텔레비전 방송사는 1월 1일 유로화를 인출하기 위해 현금인출기를 찾은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았다. 칼럼니스트 에리크 르 부셰도 “유럽인 수백만 명이 유로화를 구하려고 모여들고, 마치 크리스마스처럼 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돈을 가지고 즐긴다면 이는 생활 속에서 일어난 진정하고 실제적인, 기쁘게 받아들여야 할 혁명”이라고 감탄했다(<르몽드>, 2001년 12월 30·31일자).

일반 시민들은 이렇게까지 경탄하지 않았다. 이미 유로화 전환으로 물가가 상승하진 않을까 걱정하는 이들이 있었다. 한 칼럼니스트는 “참 편하군!”이라며 격분했다. 그는 “물가가 상승하면 사람들이 바로 유로화를 비판할 것”이라며 “위험요소는 어디에나 있는 잡탕물 같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푸자드주의(1953년 프랑스의 서적문구상 피에르 푸자드가 중소 상공업자의 정치적 불만을 배경으로 일으켰던 반의회주의적 극우운동. 낮은 세금과 협동조합주의를 옹호했으나 점차 민족주의적·반유대주의적 경향을 드러냄)가 등장한 단순한 이유를 환기할 필요가 있다. 유로화는 이미 하나의 현실로서 프랑스와 유럽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주르날 뒤 디망슈>, 2001년 9월 2일자). 방어 노선은 분명했다. 반박하기 힘든 의견과 비판적 견해는 폄하됐고 ‘데마고그’나 ‘포퓰리즘’의 낙인이 찍혔다. 많은 비난이 있었고, 이는 특히 2005년 유럽헌법에 대한 국민투표에서 다시 힘을 얻었다.(2) 장클로드 트리셰 은행장은 “단일통화를 바라던 정치적 주류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졌다”며 “이런 결과가 나와서 감동스럽고 자랑스럽다”고 프랑스인들을 치켜세웠다(<프랑스2>, 2001년 8월 30일).

10년 만에 무너진 이데올로기

유럽이 서브프라임 사태의 직격탄을 피해가자 시사평론가들은 들로르의 식상한 발언을 되풀이했다. “유로가 우리를 지켰다.”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총리 시절에 스페인 재무부 장관을 지낸 로드리고 드 라토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2007년 4월 9일 “오늘날 유럽은 번영과 다양성으로 전세계의 부러움을 사는 대륙”이라면서 “선견지명이 있는 지도자들 덕분에 유럽 대륙의 강화된 경제적 통합을 구현할 수 있는 기관이 설립됐다”고 감격했다. 신중한 관찰자던 그는 “유럽은 지속적으로 전세계의 안정에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고 “세계 발전에서 유럽의 기여도는 어마어마할 것”이라며, “유럽 경제는 견고하다”고 덧붙였다(<르피가로>, 2007년 4월 9일자). 더 이상 혜안이 있을 수 없어 보이리라.

상황이 변했다. 이데올로기의 장벽은 무너졌다. 유로화 포기 가능성까지 논의되는 실정이다. 경제위기가 통화 연합을 갉아먹는 중대한 모순점을 만천하에 드러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ECB로 하여금 가입국에 직접 대출하지 못하게 하면서 금융시장을 꼼짝 못하게 했다. 프랑스 정부는 한때 자신들이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하던 입장을 취하면서 ECB가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길 바란다. 반면 ECB는 재정불량국의 국채를 매입하면서 본연의 임무와 지위의 범위를 넘어섰다고 평가하며, 위기에도 불구하고 질서자유주의적 구습을 고집하고 있다.

자, 이제 유로는?

/ 앙투안 슈바르츠 Antoine Schwartz
유럽 전문가. 프랑수아 드노르와 <사회적 유럽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레종다지르·파리·2009)를 공동 저술했다.

번역 / 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장 부아소나, <Europe, annee zéro (Europe, zero year)>, 바야드, 파리, 2001.
(2) 세르주 알리미, ‘군장을 한 미디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5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