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화 역습과 SF식 대응
[Spécial 이념, 무늬와 진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는 인공지능로봇 ‘할(HAL) 9000’이 등장한다. HAL은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목성을 향해 비행하던 중 승무원들의 통제권을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다. HAL은 승무원 전원을 몰살하려 하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진 한 생존자가 나타나 결국 HAL의 전원장치를 끊어버린다. 이쯤에서 다시 지구로 귀환해보자. 좀더 정확히 말하면 2012년 유럽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보자. 문득 정치적 구심점 없이 모든 통제권을 벗어난 자유전자(Free Electron) 유로화가 어쩐지 우주로봇 HAL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1999년 1월 유럽 전역이 축제 분위기로 뜨겁게 달아오른 가운데, 마스트리흐트 조약의 수렴 조건을 충족하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단일화폐 체제가 탄생했다. 하지만 당시 유로화 체계를 설계한 주역들은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훗날 천방지축 천덕꾸러기로 변할 거라는 사실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다. 더욱이 유로화를 중추로 하는 유럽연합(EU)이란 제도 자체가 뒤흔들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원문 보기>>
역사가들은 ‘유로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헬무트 콜과 프랑수아 미테랑, 심지어 자크 들로르의 죄에 대해 도저히 정상참작을 해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들은 각국마다 경기주기, 생산구조, 인구, 생산성 수준 등이 매우 다르거나 심지어 상반되는데도 유럽 내 단일화폐 정책을 강제하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1)
하지만 이것이 유로화의 유일한 태생적 결함은 아니다. 독일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유로화를 유럽중앙은행(ECB)이 관리하도록 한 결정 역시 치명적인 실수였다. ECB는 각국 정부나, 보통선거를 기반으로 한 여타 기관에서 완전히 독립적인 기관이다. 또 다른 실책으로는 ECB가 유럽국 국채를 직접 매입하지 못하도록 금지한 규정을 꼽을 수 있다. 이 정책에 따라 유럽국은 어쩔 수 없이 금융시장이나 시중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한다. 시중은행 역시 협상을 통해 ECB로부터 저리에 돈을 빌려쓰는 처지인데도 말이다.
유로화의 태생적 결함들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유로화는 인공지능로봇 HAL과 달리 처음부터 그 어떤 제어장치에도 연결된 적이 없다. 덕분에 유로화는 자기만의 동력을 지닌 채 독자적인 화폐의 길을 걸어올 수 있었다. 유로화를 상대하는 유일한 파트너는 금융시장과 ECB뿐이었다. 유로화는 이들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거나, 심지어 이들을 위해 헌신해왔다.(2) 사실상 국채 위기(국채 위기가 발생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민간, 특히 은행이 진 빚이 납세자가 갚아야 할 국가의 빚으로 변환한 데 있다)는 과두 금융세력이 투기를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특히 유로존의 존재는 과두 금융세력의 투기 행각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유로존의 화폐정책으로 인해 북유럽(주로 독일·네덜란드·오스트리아·핀란드)과 남유럽(그리스·스페인·포르투갈·이탈리아)의 국채 금리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금융계나 ECB는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할 의무가 없지만, 유로존 국가 지도자들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자신이 통과시킨 EU 협정문에 입각해 신자유주의 교리를 실천해야 하는 동시에, 선거에서도 승리해야 하고, 최소한의 사회 통합을 실현함으로써 투표소나 거리에서 대중이 들고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2011년 12월 8~9일, 브뤼셀에서는 몇 회인지도 알 수 없는 ‘마지막 기회’라고 불리는 유럽정상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이 회의를 계기로 마스트리흐트 조약과 이를 계승한 리스본 조약의 한계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물론 이날 회의에서 탄생한 신재정협약 역시 기존 조약 규정이 지닌 딜레마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3)
이날 유럽정상회의가 표방한 기본 노선에는 협약 내용 이상의 것이 담겨 있다. 여기에는 위기 이후 EU에 나타난 총체적 시류가 잘 반영돼 있다. 이를테면 이날 유럽 정상들은 유로존 회원국의 공공재정 재건을 절대적 선결 과제로 삼았다. 원칙상의 이유(특히 독일 정부가 주장하는 도덕성)에서든, 유로화를 살려내기 위해서든, 공공재정 재건이 매우 중요하다고 봤다. 유로화가 일부 유럽국의 국채 디폴트 위험에 대한 투기 대상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도 중요했다. 반면 다른 요소는 모두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됐다. 몇 년간 지속될 긴축재정에 따른 사회적 문제도, 앞으로 유로존 전역이 침체 위기에 빠질 우려도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결국 HAL을 구하려면 승무원들을 제거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 독일 정부는 엄격한 태도를 고집했다. 결국 각 회원국은 균형예산 ‘황금률’을 자국 헌법에 명시하는 데 합의하고, 허용 범위를 국내총생산(GDP)의 0.3~0.5%로 제한했다. EU 사법재판소에는 각 회원국이 이 규정을 자국 헌법에 명시했는지를 잘 살피도록 했다. 유럽집행위원회도 회원국의 예산정책을 감시하고, 예산 적자가 3%를 초과할 경우 거의 자동적으로 회원국을 처벌(GDP의 0.2%에 해당하는 액수의 벌금)하도록 규정했다. 반면 유럽의회는 게임에서 빠졌다.
유로화 살리려 경기침체도 불사
진심으로 신재정협약을 간절히 원한 사람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유일했다. 메르켈의 처지에서는, 독일 수출을 떠받쳐줄 안정적 단일화폐 지역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구속력 있는 법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절실했다. 설령 신뢰 잃은 국가를 길바닥에 내버려두는 일이 생기더라도 말이다. 이미 그는 그리스에 이를 점잖게 요구한 적도 있다. 사실 그것만 가능하다면 메르켈 총리는 유럽재정안정메커니즘(ESM·2012년 7월, 위기국 ‘구제’를 위한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대체할 예정)의 상한선을 증액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실제 구제기금 지원에는 인색하게 굴 것이 뻔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메르켈 총리가 자국의 정치적 압력을 모른 척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특히 카를스루에 연방헌법재판소의 감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2009년 연방헌법재판소는 한 역사적 판결을 통해, EU가 지닌 “민주적 차원의 구조적 결함”을 꼬집고 “개별국의 국회가 우선시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메르켈 총리는 의사결정 때마다 의회 다수나 재판소가 반대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하는 처지다.(4) 그러니 정부 간 협정보다 더욱 단단한 ‘방탄벽’이 되어줄 협약이 필요한 것이다.
2011년 12월 9일 신재정협약이 통과되자마자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계획에 따르면, 최종 문안 서명은 오는 3월, 이어 비준은 연말 전으로 예정돼 있다. 하지만 이는 상황이 낙관적으로 흘러갈 때의 이야기다. 일부 유럽 정당이나 단체가 유로존을 위한 협약 시안이 완전히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메르켈 총리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제안한 (정신병자나 죄인에게 입히는) ‘구속복’ 이외에(혹은 이를 대신할) 또 다른 대책을 제안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 유명한 금융거래세를 도입하자고 주장할 수 있다. 금융거래세를 걷으면 ‘구제’ 기금 예산을 늘리는 데 요긴하게 쓸 수 있다. 이미 프랑스와 독일의 두 지도자는 공식적으로 금융거래세 찬성 쪽으로 돌아선 상태다. 한편 영국이 26개 유럽국이 참여하는 이번 신재정협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앞으로 영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비로소 유럽이 언행일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협약이 정말 비준될지는 불투명하다. 국민투표 제도가 존재하거나, 아일랜드처럼 아예 의무화된 국가에서 국민투표를 피해가기 위한 온갖 꼼수가 판을 치더라도 반드시 협약이 비준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욱이 일부 국가의 의회(슬로바키아·네덜란드·핀란드·헝가리·체코공화국)가 비준을 거부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 올랑드 사회당 의원을 비롯한 일부 대선 후보들이 대통령에 당선되면 신재정협약 재협상을 요구하겠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2013년 신재정협약이 발효될지는 미지수다.
EU와 또 다른 EU의 출현
그럼에도 신재정협약이 정말 발효된다면, EU와 대등하거나 혹은 잠재적으로 이와 경쟁하게 될 새로운 유럽 체제가 탄생하게 된다. 현 유로존 회원국(17개국)과 협약 체결을 희망하는 비유로존 국가(총 10개국 중 독자 노선을 택한 영국을 제외한 9개국)를 아우르는 순수 유로존 체제가 출범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르코지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두 개의 유럽이 존재하게 됐다. 하나는 회원국 사이의 연대나 규제를 더욱 강화하기 바라는 유럽이고, 또 하나는 오로지 단일시장 논리만을 추종하는 유럽이다.”(5) 이로써 각 유럽국의 참모습을 발견할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당연히 두 번째 부류를 자처하고 나설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도 그는 이미 자신의 유일한 목표가 단일시장을 유지하는 동시에, 자국 경제를 먹여 살리는 금융계(GDP의 10%, 160만 명 고용)를 EU의 엄격한 규제로부터 보호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영국과 다른 나라(프랑스·독일) 사이의 근본적 차이는 유로존 가입 여부다. 지난 EU 이사회에서 나온 제도적 대책도 다름 아닌 유로존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영국 파운드화의 가치는 영국 경기나 영국중앙은행의 개입에 따라 변동한다. 덕분에 영국은 AAA 신용등급을 줄곧 유지하고 있다. 반면 유로화는 신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정책자들이 얼마나 훌륭한 예산정책을 펴느냐에 따라 변동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독일과 재정불량국의 국채 금리차(스프레드)에 따라 가치가 변동한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계는 유로존 전체의 ‘평균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취약한 국가가 쓰러지면서 발생하는 도미노 현상에 의한 유로존 전체의 위험성을 더 감안한다. 유로존 전체의 신용등급이 줄줄이 강등될 수 있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자본은 벌써 붕괴 대비 중
지금까지 유로존 붕괴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대기업뿐 아니라 고위 금융기관마저 유로존 붕괴 시나리오 검토에 들어갔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각 유럽 국가의 주요 은행들은 하나 이상의 국가가 유로존을 탈퇴하거나 아예 유로존이 붕괴하는 경우에 대비해 긴급대책을 마련 중이다”.(6) 왠지 이쯤 되면 ‘제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법’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는가.
글 / 베르나르 카상 Bernard Cassen
파리8대학 명예교수, ‘투쟁의 기억’ 사무총장. 국제 비정부기구(NGO) ‘세계사회포럼’ 고문 겸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 전 공동 대표.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1) 로랑 자크, ‘치고받는 강대국, 승자는 투기자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년 2월호.
(2) 앙투안 뒤미니·프랑수아 뤼팽, ‘국가엔 고리채, 금융자본엔 화수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1월호.
(3) 이 협약의 체결국은 원칙적으로 현 17개 유로존 국가와 비유로존 국가 가운데 협약 체결을 희망하는 국가에 국한한다. 이런 차이점을 구분짓기 위해, 비록 이 협정에 EU 사법재판소, 유럽집행위원회 같은 일부 EU 기관과 ECB를 위한 규정이 포함돼 있음에도 프랑스에서 사용 중인 ‘정부 간 협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4) ‘유럽의 모든 권력은 금융에서 나온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2월호.
(5) 2011년 12월 13일자 <르몽드> 대담 기사.
(6) <월스트리트저널>, 뉴욕, 2011년 12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