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 토론’ 혹은 복화술

[부르디외식 국가의 우화]

2012-01-06     피에르 부르디외

전례 없는 경제·사회적 위기 앞에서 제대로 된 공적 토론은 보이지 않고, 좌파와 우파는 번갈아가며 긴축만 외치고 있다. 공적 담론의 공간은 어떻게 구획되는가? 소수 의견을 ‘여론’으로 둔갑시키는 신비로운 힘의 정체는 무엇인가? 1990년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부르디외는 ‘국가’에 대한 강의를 통해 이런 질문에 답을 제시했다.

공인(公人)은 국가의 이름으로 말하는 복화술사다. 그는 공식적 태도로(어떻게 공식적인 것이 연출되는지 분석이 필요하다), 대상 집단을 위해, 그들을 대신해 말한다. 또한 모든 이들을 위해, 모든 이들을 대신해 말한다. 그는 보편적인 것의 대표로서 발언한다.

아무 의견이나 여론이 될 수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여론’의 현대적 개념이다. 현대사회, 즉 권리가 존재하는 사회를 창조한 이들이 내세우는 ‘여론’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여론이란 암묵적으로 다수결 혹은 의견을 가질 자격이 있는 모든 이들의 의견이다. 이른바 ‘민주적’이라 간주되는 사회에서 ‘공식적인 의견이란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다’라는 명시적 정의 뒤에는 ‘여론이란 의견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의 의견이다’라는 잠재적 정의가 숨어 있다. 후자의 정의는 과거 납세자에게만 선거권 자격을 부여했듯이 여론을 양식 있는 의견, 의견다운 의견에 국한시킨다.

‘공식적인 위원회’란 이를테면 표현될 만한 의견을 적절한 형식 속에서 표현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인지되는 집단이다. 위원회를 구성하는 주체는 위원들, 특히 위원장을 선택할 때 그가 관료적 세계의 암묵적 규칙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해낸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암묵적 선택 기준이다. 다시 말해, 그는 합법적 방식으로, 즉 게임의 규칙을 넘어서면서 동시에 게임을 합법화하는 방식으로 위원회의 게임을 수행할 줄 알아야 한다. 게임을 넘어설 때만이 우리는 게임 내부에 더 깊이 참여할 수 있다. 모든 게임에는 규칙과 페어플레이가 존재한다. 카빌리의 남자들 혹은 지식인 집단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적용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우월성(Excellence)이란, 게임의 규칙 안에서 그 규칙을 뛰어넘음으로써 게임에 대한 최고의 오마주를 바칠 수 있는 기술이다. 통제된 위반은 결코 이단(異端)이 아니다.

‘여론조사’와 ‘위원회’라는 투트랙

지배 집단은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일 때 지극히 사소한 표식을 참고한다. 여기서 게임의 규칙을 규칙화한 방식으로 위반할 정도로 게임의 규칙에 충실하는지 문제가 된다.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 적절하게 처신할 줄 알아야 한다. 샹포르(프랑스 극작가)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반종교적 발언에 대해 주교 총대리는 미소 지을 수 있다. 주교는 웃음을 터뜨릴 수 있으며, 추기경은 거기에 말을 보탤 수도 있다.”(1) 우월성의 위계구조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게임의 규칙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나 이는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는 직책이라야 가능하다. 추기경의 반(反)교권주의적 농담이야말로 최고 수준의 교권주의인 셈이다.

여론은 이중의 현실이 반영된 공간이다. 아직 구성되지 않은 영역에 규칙을 도입하려고 할 때 여론을 근거로 내세우지 않을 도리는 없다. 안락사나 시험관 아기와 관련해 “법적 공백이 있다”(탁월한 표현이다)고 말하는 것은 그 일을 담당할 권위 있는 사람들을 호출하는 것과 같다. 도미니크 메미는 다양한 사람들- 심리학자, 사회학자, 여성, 페미니스트, 대주교, 랍비, 전문가 등- 로 구성된 윤리위원회(인공수정 출산과 관련한)에 대해 묘사한 바 있다.(2) 몇몇 개인어(個人語·Idiolecte)(3)들을 법적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보편적 담론으로 변형시키는 것, 다시 말해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어려운 문제에 대한 공식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이 위원회의 목적이다. 가령 대리모를 합법화하는 것  등의 상황에서는 여론을 내세울 필요가 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여론조사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겐 여론조사 결과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맥락에서 보면 “신은 우리와 함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여론, 특권자들의 전체에 대한 의견

때로 여론조사 결과는 곤란을 초래한다. 가령 양식 있는 의견은 사형에 반대하는데, 여론조사 결과는 찬성으로 나올 수도 있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경우 위원회가 설치된다. 위원회는 양식 있는 의견을 구성한다. 이를 통해 양식 있는 의견은 여론의 이름으로 합법적 의견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여론은 반대 의견을 제시할 수도 있고, 그 주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상당수 주제에 대해 후자인 경우가 많다).

여론조사의 특성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궁금해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그 안에 답을 슬쩍 밀어넣는 것, 즉 답을 강요하는 것이다. 문제는 표본추출 오차 같은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양식 있는 의견에서 도출된 질문을 강요하는 것이다.그리하여 이를 통해 일부 사람들에게 질문해 얻은 답을 모두의 답으로 삼는 데 있다. 이제 질문에 의해 생산된 답은 양식 있는 답으로 간주된다. 사람들에게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질문을 존재하게끔 만든다. 그러나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 자체다.

허버트 스펜서에 대해 쓴 필의 저서(4)에 실린 알렉산더 매키넌의 글(1828)을 소개한다. 매키넌은 이 글에서 여론을 정의한다. 그의 정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명시적으로 내세울 수 없을 뿐이지 사실상 공인된 정의나 다름없다. 우리는 여론에 대해 말할 때, 민주적으로 정의된 여론의 제한적 부분집합으로서 얻어진, 효과적인, 허가된 여론만 공식적인 여론(즉, 모두의 여론)으로 간주하는 이중 게임을 수행한다.

“여론은 공동체 안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접하고, 가장 똑똑하며,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에 의해 생산·관리 되는 모든 주제들에 대한 의견이다. 이 의견은 점차 확산되어 문명화된 국가 안에서 일정한 교육을 받은 양식 있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채택된다.” 이렇게 지배자들의 진리는 모든 이들의 진리가 된다.

사회학은 1880년대 의회에서 최하위 계층 아동들을 국가 교육제도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그 뒤 교육제도가 사람들의 요청 없이도 사람들이 기대한 바를 실현함으로써 초반에 제기된 이 질문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초반에 이루어지는 공공연한 토론들은 사회학자에게는 도발적 폭로가 된다.

‘담론’이 아닌 ‘믿음’을 생산하는 것

공식적인 것을 재생산하는 이들은 연극화 과정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것(감지되지 않는 것, 비가시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러나 자기 발언의 명분이 되는 것을 생산할 줄 안다. 프랑스어 ‘Produire’(생산하다)의 어원인 라틴어 ‘Producere’는 ‘앞으로 가져오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는 생산할 권리의 명분을 생산해야 한다. 그는 연극화·형식화를 피할 수 없으며 기적을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말로 창조하는 자에게 말의 기적, 레토릭의 성공이야말로 가장 평범한 기적이다. 그는 자신의 진술에 대한 허가를 연출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의 발언을 허가해주는 명분을 생산해야 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활유법’(活喩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부재하는 사람, 죽은 사람, 동물, 의인화된 사물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게 하는 수사법.” 사전은 항상 우리에게 훌륭한 도구가 되어준다. 사전 속에는 보들레르가 ‘시’(詩)에 대해 한 말이 소개되어 있다. “언어를 교묘하게 다루는 것은 초혼(招魂) 주술을 행하는 것과 같다.” 법률가나 시인처럼 복잡한 언어를 다루는 지식인들은 일정한 형식 안에서 발언함으로써 자기 발언의 명분이 돼주는 상상적 지시 대상을 연출하고 생산한다. 그는 발언의 지시 대상과 그 발언의 명분을 존재하게끔 한다. 그는 하나의 담론을 생산함과 동시에 그 담론의 보편성에 대한 믿음을 생산해야 한다. 마치 영혼이나 유령을 불러오듯이- 국가는 유령이다- 자신이 행하는 것을 보증해줄 그 무엇을 생산해야 한다. ‘민족’, ‘노동자’, ‘인민’, ‘국가 기밀’, ‘국가 안보’, ‘사회적 요구’ 등이 그것이다. 페르시 슈람은 대관식(戴冠式)의 분석을 통해 종교적 의식이 어떤 식으로 정치적 의식으로 이전되는지를 보여준다.(5) 대관식을 통해 종교적 의식이 정치적 의식으로 그토록 쉽게 변형될 수 있는 것은 두 의식이 모두 자생적·합법적·보편적 모습을 띠는 담론의 근거가 존재한다고 믿게끔 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은 그 담론에 동의하는 통합된 집단의 연극화- 주술·초혼 같은 방식으로- 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법적 의식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E. P. 톰슨은 18세기 영국에서 재판의 연극화- 법관이 쓰는 가발 등- 가 수행한 역할을 강조했다.(6) 파스칼적 의미에서 이 연극을 단순한 추가 장치로 간주해버리면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 연극은 법률 행위의 구성적(Constitutive) 요소다. 일반 정장 차림으로 법을 말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법관의 발언에 장중함이 결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항상 법률용어를 개선해야 한다면서 절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 언어야말로 법관의 마지막 의복이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은 더 이상 카리스마를 가질 수 없다.

법관은 왜 가발을 쓰는가

연극화 기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특정 이해(利害)를 일반적 이해로 연출하는 것이다. 즉, 보편적인 것(Universel)에 대한 관심(이해)과 정치인의 무사무욕(無私無慾)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는 성직자의 신앙, 정치인의 신념과 양심 등을 연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신앙의 연극화는 성직자로서 살아가기 위한 잠재적 조건으로서 공인이 공식적인 것에 바치는 중요한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철학교수는 철학에 대한 신념이 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진정으로 공적 인간이 되려고 한다면 무사무욕과 신념을 보여주어야 한다. 무사무욕은 부차적 덕목이 아니다. 이는 권력을 위임받은 모든 이들이 필수적으로 지녀야 할 정치적 덕목이다. 성직자의 무분별한 행동, 공직자의 비리 등은 모든 이들이 기만적으로 지니는 정치적 신앙이 붕괴한 결과다. 신앙은 사르트르적 의미에서 집단적 기만과 같다. 이 게임에서 모든 이들은 자신과 타인을 기만한다. 그들은 모두가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잘 안다. 이것이 바로 ‘공식적인 것’의 정의다.

* 이 글은 <국가에 대하여: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1989~92>(Raisons d’Agir-Le Seuil·파리·2012년 1월 5일 출간)에서 발췌했다.

/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 사회학자 (1930~2002)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Nicolas de Chamfort, <금언과 격언>, 파리, 1795.
(2) Dominique Memmi, ‘학자와 사상적 지도자: 인공수정 출산 윤리 생산’, 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n°76~77, pp.82~103, 1989.
(3) 그리스어로 ‘idios’는 ‘특유한’(particulier)의 의미가 있다.
(4) John David Yeadon Peel, <Herbert Spencer: The Evolution of a Socialogist>, 런던, Heinemann, 1971. 윌리엄 알렉산더 매키넌(William Alexander Mackinnon·1789~1870)은 오랫동안 영국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5) Percy Ernst Schramm, <Der König von Frankreich. Das Wesen der Monarchie von 9 zum 16. Jahrhundert. Ein Kapital aus Geschichter des abendlischen Staates>, H. Böhlaus Nachf, Weimar, 1939.
(6) Edward Palmer Thompson, ‘Partician society, plebeian culture’, <Journal of Social History>, 7(4), pp.382~405,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