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제1열’ 수에즈, 살라피스트에게 투표하다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의 유혈사태로 이집트 군부와 혁명가들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수에즈에서는 살라피스트가 총선에서 승리했다. 이제 살라피스트는 사회정의와 자유에 대한 요구 사항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수에즈 운하 하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게하레브 사크르는 “나는 이슬람 국가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군사체제 아래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무슬림형제단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그리 멀지 않은 곳, 홍해를 굽어보는 낭떠러지 위로 석유화학 공장들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다. 단호하면서도 단순한 이 열성 공산당 지지자는 ‘미스르 이란’이라는 방직공장의 냉난방 책임자다. 이 공장의 노동자들은 3주간에 걸친 파업 끝에 임금 10% 인상을 쟁취했다. <<원문 보기>>
이탈리아제 양복을 입고 젊은이들에게 둘러싸인 아메드 마흐무드는 수에즈 무슬림형제단의 후보자 순위 1번이다. 3년형을 마치고 최근 석방된 그 역시 “군사체제 아래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산주의자들을 선호한다”면서 “프랑스 군부와 마찬가지로 이집트 군부는 특권을 누리지 않고 정부에 종속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카이로의 타흐리흐 광장과 수에즈에서 지난해 11월 19일 다시 시작된 시위에 대한 질문을 받은 한 60대 남자는 자유정의당 지지자라고 밝히며 “비록 현장에 나가 시위는 하지 않지만 시위자들의 주장을 지지하고 인권유린을 고발한다. 군사체제에 대한 압력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슬림에 우호적인 공산주의자
반면 파업에 대한 마흐무드 ‘형제’의 태도는 미묘하다. “적절한 시기가 아니다. 경제 손실이 40억 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주장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활동가들은 그의 말에 속지 않는다. “비참한 임금을 받는 사람들은 기다릴 수 없다”는 태도다. 그러면 미래의 헌법은? 마흐무드는 “헌법은 모든 이집트인들을 통합해야 한다”면서 “우리는 국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기독교인들까지 아우르는, 최대로 광범위한 연합을 결성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결집의 의지일까, 혁명가가 되기를 원하는 젊은이들과 단절되지 않으려는 의지일까, 아니면 기회주의일까. 어쨌든 최고군사위원회(SCAF)와 관계를 끊고 민주적 게임을 받아들이려는 자세는 확실해 보인다.
아르메 거리는 수에즈의 간선도로다. 이 거리는 타우피크항(1)에서부터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에 해당하는 아르바인 광장으로 이어지는 옛 식민지 구역을 연결한다. 지난해 12월 초, 선거운동은 절정에 달했다. 면포를 잘라내 만든 현수막이 가로등, 야자수, 전신주 등에 내걸리고, 후보자들은 장례식 차양 비슷한 곳 아래서 회합을 연다. ‘살라피스트’(극도로 엄격하고 급진적인 이슬람 종파)와 펠룰(2)은 후보자들의 천연색 사진을 내걸었다. 법으로 지정되어 할 수 없이 살라피스트 후보자 명단에 들어 있는 유일한 여성 후보자의 사진은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진들이 걸려 있던 자리에는 이제 꽃이 놓여 있다.
의원직 2석을 두고 109명의 무소속 후보가 겨뤘고, 또 다른 의원직 4석에서는 12개 정당이 겨뤘다. 이슬람계 3개 정당이 78%를 득표했고, 4개 자유정당이 14%, 4개 펠룰 정당이 7%, 그리고 나세르당은 0.1%를 얻었다. 따라서 6개 의석 중 4~5석을 상위 정당이 휩쓸 수 있다. 각 정당들은 자신의 상징물을 내세운다. 무슬림형제단은 저울을, 알누르당(살라피스트)은 라마단의 초롱을, 다른 정당들은 휴대전화나 집이나 물병을 내세운다. 이슬람주의자들을 제외하고 혁명으로 태어난 정당들은 뿌리내리는 데 성공하지 못했고, 예전의 조직체들은 출전 자격을 박탈당했다. 좌파는 경기장에 들어서지 못했다. 좌파와 우파의 차이가 제대로 부각되지 않아 그들이 내세운 프로그램이 비슷비슷했다.
선거판에 뛰어들지 못한 좌파
나헤드 마주크는 “국민은 정당에 애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물 개개인에 관심을 보인다”고 단언한다. 마주크는 이집트 정치판에서 좌파에 속하는 사회주의 민중동맹 계열로서 몇 안 되는 여성 후보(전체 여성 후보는 4명)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자신을 독자 노선으로 정의하고 싶어 한다. 선거의 열쇠는 무엇일까? 관록이다. 혁명적인 동시에 보수적이고, 노동자이면서 종교적이고, 전투적이면서 전통적인 민중을 설득하려면 그 지역에서 태어난 명문 가문의 아들인 쪽이 유리하다. 선거전은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대립시키고, 함께 시위하게 하고, 무엇보다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측정하려 든다. 혁명을 통해 부각된 여성들과 젊은이들이 출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나이 지긋한 한 택시기사는 “나는 젊은이들에게 투표하고 싶다. 그들만이 우리가 예전 체제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줄 수 있을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이곳 정치세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펠룰과 혁명 지지자들(비록 거리에 나서서 혁명을 계속하려는 사람들은 아니더라도)로 나누는 것이다. 나세르당의 한 젊은 후보자는 “펠룰과 형제단은 똑같은 정책을 제안한다”면서 “그들은 보수주의자이며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한다. 두 번째는 이슬람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로 구분하는 것이다. 샤리아(이슬람교의 법규)를 법 제정의 근간으로 삼는다고 정해놓은 헌법 제2조를 문제 삼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경제사회법률자료연구소(Cedej)의 연구원 클레망 스퇴에르는 “오직 살라피스트들만이 시민권과 이슬람, 시민 국가와 이슬람 국가를 대립시키고 있다. 함께하는 삶의 바탕을 이루는 원칙이 이슬람인지 아니면 시민권인지가 논쟁의 초점”이라고 강조한다.
수에즈의 살라피스트들이 이룬 성과는 놀랍다. 51%의 득표율은 전국 최고 기록으로, 무슬림형제단을 앞지르고 있다. 다른 지역 살라피스트의 득표율은 25% 정도다. 오래전부터 수에즈에 뿌리내린 이들은 명망 높은 설교자 하페즈 살라마 족장의 명성 덕을 많이 봤다. 80대인 살라마는 1967년 이스라엘에 맞선 레지스탕스 지도자였고, 1980년대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지하드(성전)의 창시자이기도 하다.(3) 이곳의 젊은 살라피스트들은 혁명에 동참했다. 최근 시위에 모습을 자주 드러냈고, 시위 질서 유지를 담당하기까지 했다.
‘자본주의 대 이슬람’ 대결이 된 선거
수에즈 남쪽 45km 지점에 위치한 소쿠나항에서 상품 취급을 담당하는 레다는 말쑥하게 면도를 하고 정성껏 단장했지만, 얼굴에는 최근에 생긴 상처 자국이 선명하다. 학업을 마치기도 전에 그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그의 아버지는 최근 사망했다). 레다는 지난해 1월 25일부터 혁명에 참여했고, 얼굴 상처는 총알이 오른쪽 눈을 살짝 비켜가면서 생긴 것이다. 항만 노동자들은 파업에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간신히 항구에 있는 빈 컨테이너 2개를 얻었다. 한 컨테이너에서는 운동을 하고 다른 컨테이너는 기도용이다.” 한 기술자가 그에게 잡무를 시키며 창피를 준다. 피라미드식 지배체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한 살라피스트 동료가 그를 사위로 삼아 숙소를 제공하고 그의 월급에서 숙박비를 공제한다. 그는 또 다른 살라피스트 족장인 모하메드 압델 할레드에게 투표했다. 레나는 “내가 사는 구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다”면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했다. 수에즈는 역설적이다. 권위에 저항하는 사회혁명에 처음부터 동참하지 않던 살라피스트들이 최고의 혁명 도시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
화학자이자 석유회사 총괄이사이며 설교자이기도 한 할레드는 알누르당 후보자 리스트 1위에 올라 있다. 턱수염을 사각형으로 잘 다듬은 이 사업가는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 편안히 앉아 보수주의자다운 말을 늘어놓는다. “나는 샤리아를 전적으로 실행하고 이슬람의 규율을 모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싶다. 정치와 종교는 하나이며 똑같은 것이다.” 관광은? “종교적·과학적이거나 건강과 관련된 관광이었으면 좋겠다.” 파산 지경에 이른 경제와 대량 실업은? “노동자 이주를 장려하고, 소비재가 아닌 서비스 분야의 소규모 투자계획에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 인프라에서는, 예를 들면 소쿠나와 아르바인을 연결하는 전철이나 쇼핑몰 같은 좀더 큰 규모의 투자에 혜택을 주어야 한다.” 어떤 자금으로? 그는 그 질문은 교묘하게 피해간다. 파업은? “당사자들 사이의 대화가 부족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설교로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에는 제한이 있다.” 콥트교도(이집트 기독교)들은? “그들의 종교에 맞춰 재판받을 것이다.” 콥트교 재판정에서 재판받는다는 얘기다.
이곳에는 6천 명 정도의 기독교 공동체가 완전히 숨죽인 채 살아가고 있다. 마치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성모 성당의 세라팽 신부는 침울한 시선으로 “우리는 매일 살라피스트들의 모욕을 견디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공격받지 않았다. 폭력은 없다. 우리는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곳에 남을 것이다”라고 내뱉듯이 말한다.
혁명 도시 석권한 이슬람 근본주의
살라피스트들은 그들에 찬동하는 회교사원에서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무슬림형제단은 그들만큼 회교사원을 잘 이용하지 못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탄압받았다. 따라서 우리의 종교, 우리의 일, 우리의 가족과 생활조건을 보호해줄 사람들에게 투표해야 한다.” 사람들은 금요일마다 그런 소리를 들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너온 지원금 덕에 그들은 자금도 부족하지 않다. 지난해 12월 14일 1차 선거일에는 투표소 문 앞에서까지 음식을 나눠주고 공약을 선전하며 불법적으로 선거운동을 했다. 살라피스트들은 이슬람 정체성을 강조하며 특히 빈곤층,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 그리고 농촌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상대적으로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 정체성을 덜 강조한다. 하지만 경제사회법률자료연구소(Cedej)의 연구원 알라 알딘 아라파트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그들이 정책을 실행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두 그룹 사이에는 상호 침투성이 존재한다. 많은 무슬림형제단 고위 책임자들은 살라피스트 학교에서 공부했고, 1980년대에는 같은 회교사원에서 설교를 했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살라피스트화했다고 볼 수 있다.”
군사위원회가 반대하지 않는다면, 새 의회는 헌법 제정 임무를 맡은 위원회 위원을 임명하고, 이후 헌법은 국민투표에 회부될 것이다. 의회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내각 임명 방식과 마찬가지로 불분명하다. 모든 것이 여전히 최고군사위원회에 달려 있어, 최고군사위원회가 예전 체제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이집트인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많은 후보자들이 혁명이 끝났다고 간주하는 만큼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이집트의 국가기능 정지는 이제 더 이상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거기간을 그토록 길게 잡은 것은- 상원 선거를 치르는 오는 3월 11일까지- 혁명 청산을 목적으로 한 것일까?
치안·행정 권력의 만연한 부패
60만 명이 넘는 수에즈 주민의 반 이상이 극빈구역인 아르바인에 몰려 산다. 바로 이곳에서 혁명이 시작됐고, 그 뿌리를 내렸고, 열혈투사들을 양성해냈다. 모래로 된 도로, 황폐해진 시장의 진열대, 미처 다 지어지지 않았거나 폐허가 되어가는 비위생적인 주택들, 쌓여가는 쓰레기…. 식수도 아니건만 단수는 흔한 일이 됐다. 인구가 증가하면서 집세가 폭등했다. 공공서비스의 부재로 생활은 힘들어졌다. 이 지역은 마치 유배지와 같다. 아마 주민 3명 중 1명은 실업 상태일 것이다. 운하 회사는 이곳 주민들이 고분고분하지 않고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해 남부나 델타, 해외 노동자들을 선호한다. 이들이 수에즈 주민의 40%를 차지한다.
운하 도시들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4) 제작자인 에마드 에른스트는 “물 문제는 수에즈 주민들이 겪는 모든 불행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 문제는 무바라크 아들의 친구들이 새로운 기업을 정착시키기 위해 어떻게 사람들을 쫓아냈는지 잘 보여준다. 외곽 구역 주민들은 아인소쿠나 해수욕장의 하수가 역류해 물난리를 겪었고, 어부들은 홍해 오염과 항만 운영에 따른 희생자들이며, 주변 마을 농민들은 관개용수관이 말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비난한다. 집권당은 그들을 위해 한 번도 투표한 적 없는 반동적 주민들을 그런 식으로 벌해왔던 것이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부패는 도처에 존재한다. 부패는 운전면허증, 학위, 일자리를 얻게 해준다. 하지만 저항은 경찰의 괴롭힘에서 시작됐다. 기계공학을 전공하는 20살 대학생 알리는 4년 동안 감옥을 6번이나 다녀왔다. “나는 이유를 알고 감옥에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정치를 하기에는 너무 겁이 많았다. 그런데도 형사들은 수험준비반에서, 카페에서, 아무데서나 나를 잡아갔다. 나는 항상 신분증을 지니고 다녔다. 경찰들은 감옥에 잡아넣는 인원 수에 따라 월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에도 노동자 투쟁은 계속되고
수에즈만은 이집트의 중요한 산업단지 중 하나다. 이곳에서 전체 석유와 석유화학 제품의 79%가 생산되고, 중공업과 해운 항만 활동이 왕성하며, 홍해와 사막 사이에 시멘트·섬유 산업단지가 7km 정도 이어져 있다. 운하는 관광과 이주자들이 송금하는 돈에 이어 이집트 경제의 세 번째 수입원이다. 운하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급증해서 지난해 45억 달러의 기록을 세웠다. 하지만 이것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지난 한 해 동안, 1946년 이래 최대 규모의 파업이 이집트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7년 전 마할라알쿠브라의 섬유공장에서 시작됐다.(5) 그리고 2008년 4월 6일 청년운동으로 새로운 추진력을 얻었다.(6) 사유화, 노동시장 자유화, 불안정화와 계속되는 인플레 속에서 노동자들의 권리가 대폭 줄어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7)
철강 재벌 아흐메드 에즈가 2010년 말 더 값싼 아시아 노동력을 고용하려고 직원 4천 명을 해고하려 하자 수에즈는 격분하고 저항했다.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 집권당 의원이자 무바라크 가족의 친한 친구인 아흐메드 에즈는 무바라크 실권 후 처음으로 체포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파업은 2월 8일 항구에서 시작됐는데, 운하 회사에서 처음 조직된 것이다. 2월 19일 독자적인 새 노조들이 공동 성명서에 서명했다.(8)
수에즈운하 회사의 중견간부이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 사우드 오마르는 이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운동과 카이로에서 탄생한 노조조직을 연결·조정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는 “당시 월급은 100~400유로였고 보너스는 0.13~1만 유로로 편차가 컸다”고 한다(수에즈의 평균 월급은 100유로 미만이다). 노동자들 주장에는 파업권, 노동재해, 재국유화, 최저임금과 최고임금에 관한 사항 등이 포함돼 있었다. 오마르는 말을 이었다. “2월, 4월, 7월, 행정부는 매번 임금인상과 더 나은 노동조건을 약속했지만 어느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무바라크가 ‘여러분을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그대로다’라는 식의 연설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서 노동자들이 집결했다.” 노동자들은 작업 중단, 연좌 농성, 피켓 시위 등 다양한 행동을 벌였지만, 탄압은 없었다.
기본권 투쟁으로 확산되다
정부는 두 법안을 가결했다. 3월에 가결된 법안은 파업 가담 노동자들을 체포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이고, 6월에 가결된 법안은 파업은 허가하지만 ‘업무를 중단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항이 명시됐다. 어쨌든 수에즈에서 벌인 운동은 상당히 강력해서 어느 누구도 체포되거나 해고되지 않았다. 7월 말, 혁명가들의 지지를 받은 노동자들은 임금 협상에서 급여표를 재조정하고, 40% 임금 인상과 더 많은 보너스를 얻어냈다.(9)
운동은 서서히 다른 분야로 퍼져나갔다. 독자적 노조 조직이 지역적·전국적으로 뿌리내린 덕택에, 아니면 운하 활동에 반드시 필요한 중요 기업들인 덕분에 그들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노동자들은 단 한 번도 운하를 봉쇄하려 하지 않았다. 운하를 보호하는 군인들이 무서워서 그랬을까? 수에즈에서 포르사이드를 운항하는 선박 운항사인 와히드 알시르가니는 운하는 “우리 눈의 눈동자와 같다”고 강조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을 국가 이익의 보증인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수치화하기 힘들지만 혁명이 거둔 또 다른 성과는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표현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뿐만 아니라 행상인들의 경우 지나치게 많은 웃돈을 지불하지 않고 상거래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1월 28일 경찰은 무너졌고, 자취를 감췄다. 국가보안부가 감시를 계속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체포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 듯 보인다. 하지만 70명의 이슬람주의자들이 체포된 다음날, 자유주의 성향의 후보자 탈라트 하릴은 “예전 상태가 재연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고물가·고실업·고학력 젊은이들을 위한 일자리 부재 등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무역을 전공하는 20살 대학생 모하메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혁명은 끝났다. 이제 나는 결혼하기 위해서, 그리고 존엄한 대우를 받기 위해서, 상점 청소로 생활비를 벌지 않아도 되는 일자리와 집을 원한다.”
무슬림 권력도 심판엔 예외일 수 없다
11월 28일 텔레비전 사회자이자 정의당(중도파) 후보이며, 국제원자력기구(IAEA) 전 사무총장 모하메드 알바라데이의 측근이기도 한 메다트 에이사가 벼랑길 위로 질풍처럼 달려왔다. 그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운하 회사 종업원들이 미국산 최루가스를 탈취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최루가스는 11월 타흐리르 광장에서 많은 시위자들을 질식사하게 한 것과 동일하다. 종업원 체포 소식에 항구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에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2월에 군부는 우리에게 말했다. ‘머리를 들어라. 당신은 이집트인이다!’ 이제는 ‘내가 그 위로 총을 쏠 수 있게 머리를 들어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주장한 것의 10%를 얻었을 뿐이다. 이 혁명은 5년, 1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하나의 과정이다. 현 체제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한 중도에서 멈출 수는 없다.”
사람들이 결집하는 이유에는 그토록 많은 젊은이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장교들에 관한 재판 문제도 포함된다. 사망자 가족 대변인인 아민 다수르는 “살인으로 기소된 어떤 장교도 판결받지 않았다”면서 “더 나쁜 것은 그들 대부분이 다시 군에 복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법원은 그들이 정당방위였다고 보고, 혁명은 권리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권리는 소급되지 않는다”고 힘주어 말한다. 유가족들은 모두 정부가 제안한 보상을 거부했고, 분노는 폭발했다. 몇몇 가족들은 변하는 게 하나도 없다면 직접 보복할 수도 있다며 벼른다.
무슬림형제단과 가까운 한 변호사는 “혁명은 순교자들을 먹고 자란다”고 말한다. 지난해 6월 20일, 수에즈에서 시위자들을 사살한 혐의로 기소된 경찰관들이 석방되면서 두 번째 혁명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리고 7월에는 순교자를 인정하라며 다시금 타흐리르 광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노조의 투쟁이 급물살을 탔다.
카이로에서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수에즈까지, 점점 더 공조 체제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혁명가들은 다수가 아니다. 4월 6일 청년운동 회원이자 정의당원인 모하메드 마흐무드는 “혁명은 언제나 소수에 의해 이루어졌다. 2천만 명의 이집트인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왔지만, 7천만 명은 집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최고군사위원회는? “평온이 다시 찾아오면 군사위원회는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무바라크에 맞서 싸웠고, 이겼다. 우리는 군사위원회와 대치할 때마다 그들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언젠가는 우리가 그들을 물리칠 것이다.” 선거 뒤에 이슬람주의자들이 다수당이 된 의회가 민중을 대변할 정통성을 얻게 된 것은 오직 거리로 몰려나온 민중 덕택이 아니었던가? “타흐리르 광장의 시위가 없었다면 무슬림 형제들은 출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정당성은 혁명에서 나왔다. 그들은 젊은이와 체제, 평신도회, 그리고 당을 놓고 서로 나뉘어 있다. 만일 그들이 배신한다면 국민은 다시 광장으로 나갈 것이다.” 이곳 행동파들은 아무것도 겁내지 않는다. 그들의 낙관주의와 전술적 센스는 가공할 만하다. 수에즈에서 혁명은 계속 진행 중이다.
글 / 프랑수아 프라달 François Prada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국제투기자본 감시 시민연대인 국제금융관세연대(ATTAC)에서 펴낸 <발전의 미래는 있는가: 절약과 연대의 사회를 위하여>(Mille et Une nuits·파리·2004)를 편집하고, <노망 든 자본, 경제학 비판 단상>(Le Passant·베글·2002)을 썼다.
번역 /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1) 클로딘 피아통, 『Suez, histoire et architecture 수에즈, 역사와 건축』, IFAO(프랑스 동양고고학 연구소), 카이로, 2011.
(2) 군사정권에 호의적이면서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 집권당 출신인 반혁명주의자들에게 붙인 호칭.
(3) 질 케펠, ‘이집트의 이슬람 그룹. 1981~86년의 변동’, <Politique étrangère>, 2호, pp.429~446, 1986.
(4) <카라시 젤드>(가죽 소파), 에마드 에른스트의 영화, 2011.
(5) 마리 뒤보스, ‘2004년 이후 이집트의 사회 분쟁: 섬유산업 노동자들의 불안정화와 지역 결집’, <Revue tiers-monde>, Paris, 2011년 4월.
(6) 라파엘 캠프, ‘혁명 이후의 혁명, 이집트 노동자들 일어서다’, 알랭 그레슈, ‘이집트 노동자들, 혁명은 아직 ‘진행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3월호와 7월호 참조.
(7) 프랑수아즈 클레망, ‘새로운 노동시장, 사회 갈등과 빈곤’, 뱅상 바테스티, 프랑수아즈 이르통, 『L’Egypte au présent 이집트의 현재』, Sindbad - Actes Sud, Arles, 2011.
(8) ‘이집트 독립노조 선언문’, 2011년 2월 21일, www.arabaw.org
(9) 조엘 베냉, ‘노동자들은 이집트 혁명으로 무엇을 얻었나?’, <Foreign Policy>, Washington, DC, 2011년 7월 20일.
전쟁의 수에즈, 투쟁의 수에즈
BC 13세기 클리스마(현재의 수에즈)가 건설됨. 이것이 2세기께 쿨줌이 되어 지중해와 홍해 교역의 중심이 됨.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 개통.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고안한 운하 건설에 노동자 150만 명 동원. 수백∼수천 명이 공사 중 사망.
1951년 12월 18일 시위 진압 영국군이 카프르 압두 근교에 방화. 1월 초 수에즈 시민들이 영국인들 공격. 이에 대한 진압으로 1952년 1월 25일 이스마일리아 봉기 발생.
1956년 7월 26일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수에즈 운하 국유화. 프랑스, 이스라엘, 영국 동맹 정책 실패.
1967년 6월 전쟁(3차 중동전쟁) 수에즈 폭격으로 80% 파괴. 나세르 대통령, 운하도시 주민 전체를 나일 삼각주와 카이로로 이주시킴. 100가구는 잔류.
1973년 10월 24일 10월 전쟁 반(反)이스라엘군 봉기. 수에즈를 떠나 징집된 주민들이 포함된 이집트군 2만 명 아르바인에서 이스라엘군 습격 포위. 1975년 운하 재건 및 주민들 귀환, 운하 통행 재개.
2001년 제2차 인티파다와 연대해 가자지구 행진.
2007년 파업운동 시작.
2009년 1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 폭격과 이스라엘에서 수입되는 값싼 생산물(가스, 비료)에 항의해 가자지구와 연대 시위.
2011년 1월 28일 이집트 경찰 수에즈에서 철수, 수에즈 해방
저항의 문화
“수에즈의 집들은 내가 사는 도시의 집들. 그 집들이 그대로 있게 나는 순교자로 죽을 각오가 돼 있다네.” 1973년 이집트가 수에즈운하를 되찾은 뒤 폐허가 된 수에즈에서 문호 압델 라만 알 압누디가 쓴 이 노래는 수에즈 찬가가 되었다. 열성 노조 활동가인 모하메드 네피아우이는 “지난해 2월 3일, 권력의 청부살인자들과 혁명가들 사이에 시가전이 벌어졌을 때 몇몇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 소란이 멈췄다”고 말한다. 그 며칠 전에는, 타흐리르 광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수에즈 해방을 축하하며 이 후렴구를 불렀다.
가자 근방의 시장이나 타흐리르 광장의 가로등 위 높은 곳에서 휘날리는, 가운데에 배의 키와 불꽃이 들어 있는 코발트색 깃발은 수에즈 주민들의 결집을 나타내는 또 다른 상징물이다.
수에즈와 운하 도시의 음악을 ‘심시미아’(Simsimya)라고 한다. 리라·키타라·북·심벌즈 등의 악기를 사용하는 음악인데, 이집트 파라오 시대에- 카이로 박물관 34전시실은 이 음악에 관한 물품들이 전시돼 있다- 시작된 것으로, 어부들이 배를 타고 홍해를 거슬러 올라간 예멘, 지부티 등의 영향이 혼합된 것이다. 그룹 탄부라를 창설한 자카리아 이브라힘에 따르면, 이 음악은 수단인들이 이주하면서 운하 도시들에 있는 카페에서 재탄생하게 됐으며, 1956년 수에즈 전쟁과 더불어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우리는 용감하고 씩씩해, 점령군과 싸우자.(후렴) 프랑스가 우리들의 피를 앗아가고 영국인들이 우리 피를 빨았네.” 또한 1967~73년 운하를 떠난 주민들에게는 망명의 음악이었다. 훈련과 전투, 저항의 음악이기도 했다. 영국인, 프랑스인, 이스라엘인과의 싸움에서 수에즈를 따라다니는 무기가 되었고, 이제는 이집트 경찰과 싸우는 무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