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은 아직 아버지가 아니다
[Corée 특집 김정일 '이후'의 시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전해들었을 때, 황당하고 황망한 중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제 남북 정상회담에는 누가 나올 것인가’였다. 남북의 모든 회담에서 그는 최종 결정권자였다. 그가 사라진 상황은 말 그대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이다.
북한 내부로 보면,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 준 충격이 더 컸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남북관계를 포함해 북한의 대외관계에서 보면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은 그보다 충격이 더 클 수도 있다. 김일성 주석 당시에도 남북은 총리급 회담 등을 통해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직접 나서지 않았고, 회담 당사자도 아니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래 김정일 위원장은 회담의 전면에 나섰을 뿐 아니라, 수많은 남북회담의 어떤 합의도 그의 재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북한과의 협상은 ‘김정일과의 담판’이었다. 1994년의 제네바 합의도 김일성 사망 뒤 김정일 당비서가 실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이뤄졌다.
김정은 체제 혹은 김정일 없는 김정일 체제
북한은 장례를 마치자마자 김정은 시대의 출범을 알리기 위한 속도전을 펴고 있다. 미리 준비된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추도 및 장례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의 죽음 뒤, 외부 세계보다는 오히려 북한이 더 적응을 잘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 정도다. 어떤 이상 징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지난해 12월 29일의 대규모 추도대회는 일부 언론의 표현처럼,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의 ‘즉위식’처럼 보였다. 이를 뒷받침하듯 북한은 바로 다음날 노동당 정치국회의를 열어 김정은을 최고사령관으로 추대했다. 그리고 그는 새해 첫날인 1월1일 선군정치의 출발점이 된 ‘근위 서울 류경수 제105탱크사단’을 방문하고 ‘혁명의 성지’라는 금수산기념궁전을 참배했다. 장례와 무관한 공식 업무의 첫 행보이자, 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된 지 이틀 만에 이뤄진 것이다. 자신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다를 바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했다.
불과 2주일여 사이 숨가쁘고, 그리고 치밀하게 준비된 듯한 북한의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북한이 보여준 행보는 김정은 시대의 출범을 늦춰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이 배어 있다. 말 그대로 북한은 ‘김정은 체제’, ‘김정은 시대’로 들어섰다고 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김정일이 없는 김정일 체제로 봐야 하는 것은 아닌가?
북한이 지금 말하는 유훈통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994년 이후 보여준 3여 년의 유훈통치와는 다르다. 당시 그는 북한을 통치했고 때를 기다렸을 뿐이다. 그리고 빨치산 혁명 1세대의 김일성 사람들은 서서히 김정일의 사람들로 대체됐다. 지금의 유훈통치는 다르다. 김정일은 사라졌지만 ‘김정일이 통치하고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김정은 시대라고 말하지만 김정일 시대의 종언은 아닌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실질적인 최고권력자였다. 북한 스스로 ‘김일성의 민족’, ‘김정일의 조선’이라 부른다. 김정은은 뭐라 불러야 하나? 김정은의 노동당? 그가 사라진 뒤 당연히 제기되는 의문은 급조된 후계자 김정은이 어디까지 김정일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인지다. 그게 불확실하다.
그 불확실성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선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도자의 급서가 곧 나라의 급변 사태로 이어지지 않는 시스템을 북측이 마련해놓았음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면서 “김정일 위원장의 육체적 생명에 대한 불확실성을 곧 북측 체제의 ‘급변 사태’ 가능성과 동일시하던 시나리오가 퇴색하면서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이 도리어 감소한 면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1) 류우익 통일부 장관도 “북한은 최초의 중요한 시기를 원만하게 관리해나갔다”고 평가했다. 김일성·김정일의 절대권력을 떠받치는 시스템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평가다.
물이 반이나 찼나, 반밖에 안 찼나
그러나 물이 반쯤 담긴 컵을 보고 반이나 찼다고 말할 수 있지만, 반밖에 안 찼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북한이 보여준 속전속결식 행보는 그만큼 다급하다는 방증이다. 김정은을 김정일과 비교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불안하다.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때 김정일은 이미 52살이었다. 유훈통치 시기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시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최고권력자의 지위에 오르지 않았다. 20년간 후계자로서 경륜을 쌓았으며, 이미 군 최고사령관이자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고는 당 총비서 취임 뒤 19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와 함께 ‘김정일 체제’를 출범시켰다.
그에 비해 20대 후반의 김정은은 후계자로 지명된 지 불과 3년도 안 되는 시점에 아버지의 죽음을 맞았다. 공식적으론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된 지 1여 년 만이다. 누가 보더라도 20대 후반의 젊은이에게 ‘대장’이라는 호칭은 어울리지 않는다.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됐음에도 실질적 권력이 아닌 상징적 권력이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밖에 없다. 결국 ‘지금 북한을 통치하고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계속될 것이다. 북한 스스로 ‘김정은의 영도’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도 김정은이 당 총비서, 국방위원회 위원장,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등 국가와 군 그리고 당의 최고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로선 지난해 12월 28일 김 위원장의 영결식에서 영구차를 호위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을 중심으로 리영호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등 7명의 ‘김정일의 인물들’이 ‘김정은 시대’를 이끌 수밖에 없다.(2)
그러나 권력의 공백은 이 김정일 사람들이 메울 수 있을지 몰라도 지도력 부재 문제는 다르다. 유훈통치가 모든 문제에 답을 줄 수는 없다. 새로운 상황에서 국가 중대사에 대한 최종 결정을 누가 할 것이고, 누가 그 책임을 떠맡을 것인가? 김정일의 권위를 빌릴 수 있겠지만 김정일과 같은 결정을 내릴 인물이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예컨대 1992년 김일성 주석은 80회 생일을 맞아 국가의 거의 모든 주요 업무를 김정일에게 맡겼다고 했다. 실제로 1991년 12월 24일 김정일 비서가 군 최고사령관에 추대됐을 때 주석직과 총비서직이라는 김일성의 지위는 상징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1994년 1차 핵 위기가 심화되면서 한반도 정세가 전쟁 상황으로 치닫는 조짐을 보이자 전면에 나선 것은 김일성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난해 12월 30일 국방위원회 성명과 2012년 1월 1일 신년 공동사설의 논조는 ‘우리는 외부 세계와 대화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메시지로 봐야 한다. 국방위원회 성명은 “그 어떤 변화도 거부한다”고 못박았다. 남쪽의 대응은 분명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때와 달랐다. 그럼에도 성명은 이명박 정부가 장례 기간 중 취한 조처들을 ‘반민족적 대역죄’로 규정하고 상종하지 않는 것은 물론 끝까지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신년 공동사설도 ‘민족의 대국상’을 외면하고 조의 표시를 방해한 ‘남조선 역적패당의 반인륜적, 반민족적 행위’에 분노를 표시했다. “‘위대한 장군님의 유훈’을 받들어 자주의 길, 선군의 길, 사회주의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겠다”는 것이다. 김태우 통일연구원장은 “현재의 위기의식을 반영하는 ‘수세적 허세’(Defensive Bluffing)”로 평가했다. 당연히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있었다면 그 내용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정부가 조의를 표했고 조문도 제한적이나마 허용한 상황이었다. 김 위원장이 있었다면 아마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때 북이 특사 조의 방문단을 보낸 것과 같이 새로운 대화의 창이 열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은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김정일이 없기 때문이다. 북의 이런 대응은 후계 체제가 불안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정당화할 수 있다.
‘관계 단절’ 선언, 엿보이는 불안감
따라서 2012년 한반도 정세를 내다볼 때 공식적인 권력승계 과정이 순조롭다고 해서 그걸 바라보는 외부의 인식이 안정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김정일 부재’는 외부 세계의 북한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맞물려 언제든 권력 구도의 불안정 내지 권력투쟁설 등 여러 관측을 촉발하며, 북한을 포함한 모든 관계를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바라보는 바깥 세계도 2012년은 온통 불투명하기만 하다. 남한을 비롯해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거의 모든 주변 국가들이 정권 교체를 하는 시기다. 이런 동시적 정권 교체는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1945년 이래 남한은 12명의 대통령이, 미국은 11명의 대통령이 등장했다. 북한은 이제 세 번째로, 가장 어린 나이의 지도자를 맞았다. 그런 면에서 보더라도 북한은 당분간 문을 닫아걸고 내부의 문제를 정리할 시간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크다.
천안함 사건을 북한의 소행으로 단정짓고 거의 모든 남북관계를 중단시킨 5·24 조처는 이명박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마찬가지로 국방위원회 성명과 신년사는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올해 6자회담과 북-미 관계를 포함해 한반도 정세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둘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얼어붙은 남북관계는 3월 초부터 이어질 한-미 합동군사연습 등으로 더욱 악화할 개연성이 크다.
우선 북-미 접촉은 물론 6자회담 재개 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미국은 한-미 공조와 남북 대화 우선을 강조해왔고, 미국이 조의 표명에서 보여준 것은 이명박 정부와 철저히 조율한 끝에 한 치의 균열도 보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남쪽 정부가 조문 문제에서 유연한 태도를 보인 데는 1994년 제네바 합의 때의 갈등과 균열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북-미 대화가 진전된다면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북한의 ‘통미봉남’(通美封南)에 동조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대변인은 1월3일(현지시각) 남북관계의 지속적인 개선이 6자회담 재개 전에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앞서 그는 지난해 12월 28일 “북한으로부터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데 이어 29일에는 “공은 북한 쪽에 있다”는 표현을 썼다. 관망하는 자세에 ‘남북관계 개선’이라는 조건이 추가된 셈이다.
북한 외부도 불확실성 고조
김 위원장 사망 직전인 지난해 12월 15~16일 중국 베이징 접촉에서 북-미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3차 대화의 문을 열어가고 있었다. 로버트 킹 미국 북한인권특사와 리근 북한 미국국장은 북한에 대한 대규모 영양급식 지원을 배경으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UEP) 중단 문제에 의견을 접근시켰다. 북한은 우라늄 농축 중단에 대해 명확한 언급이나 약속은 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24만t 영양급식 지원 등을 배경으로 잠정 중단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3차 북-미 대화 개최 문제는 앞으로의 북-미 관계를 가늠할 시금석이다. 그러나 북한이 미국에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일 가능성은 크지 않다.
미국은 올해 들어 미-중 합의를 바탕으로 북한에 대한 압박 중심의 ‘전략적 인내’에서 서서히 ‘전략적 관여’ 정책으로의 전환을 보여왔다. 그러나 여기엔 북한을 이용해서 대(對)중국 견제를 정당화하는 측면과, 대선 국면에서 북핵 문제가 3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위기로 확산되는 것을 관리하겠다는 다분히 정략적인 측면이 숨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 김 위원장의 죽음이 미국의 대북 정책을 과감하게 전환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보다는 북한의 불확실성을 중국을 통해 관리하겠다는 쪽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그리하여 북-미 대화가 진전되지 못하고 남북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북한이 도발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면 중국에 그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이다.
글 / 강태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위원.
(1) 백낙청, ‘김정일 이후와 2013년 체제: 김정일 급서, 남녘의 봄은 준비되고 있는가?’, <창비주간논평>, 2011년 12월 29일.
(2) 북한 당기관지 <노동신문>은 2011년 12월 29일 홈페이지에 게재한 이날치 신문 1면과 3면에 전날 촬영된 영구차 호위 장면 사진을 3장이나 실었다. 사진을 캡처하거나 프린트하면 ‘김정은 시대를 이끌 당·군 주요 인물’이라는 설명이 따라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