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19세기 크름전쟁에 패배했을 때

21세기 러-우 전쟁의 ‘데자뷔’

2022-10-31     마리피에르 레이 l 현대사학과 교수

크름전쟁(1853~1856)의 승전국인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는 이 전쟁에 대한 기억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반면, 패전국인 러시아는 크름전쟁에 대한 기억을 여전히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19세기 유럽에서 벌어진 대표적 전쟁, 크름전쟁(1853~1856)은 몇 가지 측면에서 역설적이다. 첫째, 전쟁이 남긴 흔적과 관련해서다. 영국과 프랑스는 크름을 비롯해 말라코프, 알마, 세바스토폴, 인케르만, 발라클라바 등의 지명들을 각종 기념물과 거리, 문학, 영화 등에 새겨 넣음으로써 영광스러운 역사를 기념하고 있다.(1) 또한 크름전쟁에 얽힌 명사들(캉로베르, 마크 마옹, 래글런 경,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등)뿐 아니라, 무명용사 석상(알마교 교각을 장식한 알제리 보병-역주)에 대한 기억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정작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다 승리를 거둔 이 영광스러운 크름전쟁 자체에 대한 기억은 서구 사회나 국가에서 점차 잊혀지고 있다. 반면 크름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와 러시아인들은 톨스토이의 『세바스토폴 이야기』를 비롯한 문학작품들과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각종 기념비들을 통해 이 통한의 역사를 생생히 간직하고 있다. 

 

크름반도에서 그치지 않은, ‘크름전쟁’

후대에 ‘크름전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사실 이 전쟁이 일어난 곳은 크름 반도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선은 캅카스와 아시아는 물론, 백해, 심지어 솔로베츠키 제도까지 실로 광범위했다! 크름전쟁의 또 다른 역설은 사망원인에 있다. 크름전쟁은 약 80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그런데, 이 가운데 전투 중에 사망한 즉 ‘전사자’는 약 24만 명으로 30%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그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아갔을까? 그 답은 ‘질병’이다. 나머지 70% 중 상당수가 티푸스, 콜레라, 이질, 괴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한편 크름전쟁은 ‘현대전’의 성격이 가미된 전쟁이었다. 유럽 역사상 최초로 사진작가가 전쟁의 참상을 카메라로 기록했는가 하면, 전쟁터에 뛰어든 종군기자가 시민들에게 거의 실시간으로 전황을 보도했다. 또한 최초로 전쟁 중 전보가 오갔고, 최초로 증기선이나 강선총 같은 살상무기가 사용됐다. 또한 야전병원의 출현으로 수많은 여성과 간호사(종교인 혹은 일반인)가 다친 병사를 돌봤으며, 외과의사 니콜라이 피로고프가 에테르를 마취제로 사용했다. 

그런 한편, 크름전쟁은 재래전의 성격도 강했다. 병사들이 직접 총검을 들고 육탄전(말라코프 요새 점령 때)을 벌였고, 지루한 포위전(발라클라바, 카르스, 세바스토폴)을 이어갔으며, 진흙탕 구덩이 참호 속을 뒹굴며 온갖 전염병에 시달렸다. 크름전쟁은 지정학적이면서도 종교적인 전쟁이었지만, 기독교 국가와 이슬람 국가 간의 대립은 아니었다. 놀랍게도 기독교 국가 연합이 오스만제국을 돕기 위해 정교를 신봉하는 러시아 제국과 맞선 싸움이었다. 

마지막으로 크름전쟁은 ‘여론 전쟁’이었다. 유력 언론의 전례 없이 대대적인 보도로 여론의 관심은 그 어느 전쟁 때보다 뜨거웠다. 시민들 사이에 군자금 모금 운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외국인 혐오주의적인 난폭한 글들이 난무했고, 러시아에서는 반유럽 정서가 고조됐다. 반면 평화를 호소하는 글들도 많았다. 일례로, 망명생활 중이던 빅토르 위고는 유럽 역사상 최초로 반(反)군국주의 책자를 출간했다. 이토록 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웠음에도, 정작 크름전쟁은 1856년 3월 파리에서 체결된 국제조약이라는 지극히 고전적인 방식으로 종결됐다.

 

지정학적・종교적 갈등이 전쟁으로 

크름전쟁은 지정학과 종교라는 이중의 갈등에서 비롯됐다. 한편으로는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특권을 찬탈하려 함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미래를 놓고 분쟁이 일어났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교와 정교 간 분쟁의 씨앗인 성지 문제가 전쟁에 불을 지폈다. 1774년 예카테리나 2세가 오스만 제국 정교도에 대한 보호권을 넘겨받기 위해 러시아-투르크 간 쿠추크 카이나르지 조약을 맺은 이후, 러시아는 끊임없이 이 조약을 빌미로 오스만 제국의 내정에 간섭했다. 

18세기 말 이후, 러시아 제국은 흑해 및 다르다넬스·보스포루스 해협에 대한 특권을 끈질기게 요구하며, 발칸반도로 진출을 꾀했다. 1825년 니콜라이 1세 즉위 후 러시아는 차츰 목적을 달성했다. 러시아는 두 해협의 관할권(차르의 표현을 빌리면 ‘집 열쇠’)을 외교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당시 이웃 열강들 또한 쇠락하는 오스만 제국을 ‘유럽의 병자’로 간주하며 호시탐탐 영토를 침범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 러시아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영토 분할을 거부하며 ‘투르크의 유일한 보호자’를 자처했다. 러시아의 공격적인 정책은 각종 불평등한 상호조약으로 이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1829년 9월 체결된 아드리아노플(에디르네) 조약과 1833년 체결된 운키아르 스켈레시 조약이었다.

특히 운키아르 스켈레시 조약의 골자는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와 전쟁 중인 타국 선박의 다르다넬스 해협 통과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사실상 이는 흑해를 ‘러시아의 호수’(루이 필립 치하 프랑스 외무장관 프랑수아 기조의 표현)로 삼으려는 조약이었고, 유럽열강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이 불평등 조약에 맞서, 1841년 7월 13일, 투르크와 그 동맹을 제외한 어떤 나라의 군함도 보스포루스 및 다르나넬스 해협 통행을 금지하는 런던 해협협약이 체결됐다. 일단 니콜라이 1세는 협약 내용을 받아들였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후퇴에 불과했다. 

크름전쟁의 발단은 지정학적 배경이 가장 컸지만, 그 외에 종교적 성격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가톨릭의 장녀’로 간주되던 프랑스는 로마가톨릭교의 수호자가 되기를 자처했고, 비잔틴 제국의 전통을 계승한 러시아 제국은 동방정교의 수호자가 되기를 희망했다. 1852년 나폴레옹 3세는 팔레스타인 성지 관할권을 지닌 오스만 제국에게 ‘베들레헴에 소재한 예수탄생교회의 열쇠를 가톨릭교도들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니콜라이 1세는 이를 대(對)오스만 정책에 대한 위협이자 프랑스의 도발로 간주했다. 

 

러시아의 오판, 유럽 차원으로 번진 전쟁

러시아는 프랑스-투르크 관계를 약화시킬 심산으로, 1853년 1~2월,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영토 분할을 제안했다. 대영제국이 이집트와 크레타를, 러시아가 루마니아의 공국들(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역주)과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고 해협 통제권을 나눠 가지자는 내용이었다. 이는 공평한 쌍무조약에 해당했다. 그러나 사실상 런던 해협협약을 통해 도출된 오스만 문제의 국제적 해법에 위배됐고, 특히 프랑스를 협상 대상에서 배제했다. 러시아의 황제와 카를 로베르트 네셀로데 외무장관은 내심 동방문제와 관련해 영국과 러시아 간에 상호 국익을 충족하는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는 러시아의 오판이었다. 러시아의 해협 진출을 원치 않는 영국은 오스만 제국 분할에 적대적이었다. 영국은 러시아가 단순히 해협을 넘어, 동지중해까지 진출하며, 인도로 가는 길목을 위협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한편 나폴레옹 3세는 러시아에 이중의 타격을 가했다. 먼저 대외적으로 동방(레반트) 지역에 대한 국익 수호 의지를 재천명하고, 1815년 잃어버린 프랑스의 위상을 되찾겠다고 나섰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가톨릭교도와 연합해, 성지를 둘러싼 다툼만이 아니라 다양한 문제에 관여했다.

 

러시아, 침략을 십자군 원정으로 미화시켜

1853년 초, 러시아 외교당국은 발칸반도 진출에 대한 대외적 반발을 과소평가하고, 자국 군사력에 지나친 자신감을 보였다. 결국 니콜라이 1세는 전쟁을 결심했다. 2월 러시아의 황제가 멘시코프 왕자를 술탄 압둘메지드 1세에게 보냈다. 그는 술탄에게 오스만 제국 정교회 신자들에 대한 러시아의 보호권을 거만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그런 심각한 주권 침해를 용납할 수 없었던 술탄이 요구를 거부하자, 러시아 제국은 7월 정교도 박해를 구실로 오스만 제국에 병합된 지역인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침공했다. 

러시아는 일종의 십자군 원정으로 침공의 명분을 미화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도 10월 4일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11월 9일, 피춘다 해전에서 첫 승전보를 울린 나히모프 제독이 3주 뒤 시노페 항에 정박한 투르크 함대를 괴멸시켰다. 오스만 제국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프랑스와 영국은 1854년 3월 12일 오스만 제국을 지원하기 위한 조약을 체결했다(오스만 제국이 개혁을 약속하는 조건이었다). 3월 27일, 양국은 차르의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고, 1년 뒤 사르데냐 왕국도 대열에 합류했다.

전쟁이 유럽 차원으로 번지자, 발트해(올란드 제도), 발칸반도, 캅카스, 다뉴브강 삼각주, 백해, 아시아(4개월에 걸친 포위전 끝에 러시아군은 1855년 11월 26일 투르크의 요새 카르스를 함락했다) 등 다양한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1854년 여름, 러시아 니콜라이 1세는 선의의 표시로 다뉴브(도나우) 강 연안 공국들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러시아의 갑작스러운 태도 전환을 미심쩍게 생각하며 1854년 9월 14일 크름반도에 상륙해 계속 공세를 이어갔다. 이로써 크름반도에서는 지루한 악전고투가 줄기차게 이어졌다. 가령 영불 연합군이 승리를 거둔 알마 전투(1854년 9월 20일)나 인케르만 전투(11월 5일)와 1855년 2월 17일 투르크의 승리로 기록된 예프파토리야 전투가 대표적이다.

몇 개월 뒤,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장비, 훈련, 기술 면에서 프랑스나 영국 해군에 한참 열세인 러시아군이 조금씩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남부를 잇는 철도가 없어 도로를 통해 크름반도로 병사를 파병하고 군사 물자를 보급하던 러시아는 전투원들의 요구에 제때 부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용맹한 주민들의 영웅적인 항거에도 불구하고, 세바스토폴은 포위 1년 만인 1855년 9월 11일 결국 함락됐다. 그보다 불과 3일 전에는 마크 마옹 군대가 말라코프를 함락하기도 했다.

 

1856년 파리조약, 1904년 영불협상

1855년 3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에 즉위한 알렉산드르 2세는 절대 항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름전쟁에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던 동맹국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오스트리아 정부가 마련한 의정서를 바탕으로 1856년 1월 종전 협상에 응했다. 1856년 3월 30일 프랑스 외무성(케도르세)에서 체결된 파리조약은 마침내 프랑스가 빈 체제의 굴욕을 씻고, 1815년 성립된 유럽 질서의 종언과 러시아의 후퇴와 프랑스 외교의 화려한 국제무대 복귀를 실현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흑해가 ‘중립지대화’됨에 따라, 흑해 연안에 배치된 오스만과 러시아의 무기 및 진지도 해체가 결정됐다. 러시아는 두 해협에서 물러났고, 마침내 영국은 인도로 향하는 길목을 지켜낸 것에 안도했다. 오스만 제국 영토의 완전성도 조약 체결국들에 의해 보장됐다. 러시아는 더 이상 오스만 제국 내 정교도들에 대한 특수한 권리를 요구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다뉴브강 연안 공국들에 대한 특권을 포기하고, 이 지역의 자율권을 인정했다. 또한 몰다비아의 베사라비아 남부 병합도 받아들였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는 다뉴브강 어귀와 카르스 요새를 오스만 제국에게 반환하고, 다뉴브강을 국제관리하는 방안을 받아들였다. 

 

발칸반도 지배에 종지부 찍은 러시아

하지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태도는 다소 유화적이었다. 크름반도(1783년 점령)와 캅카스 일부를 투르크에 돌려주려던 영국 장관 파머스턴 경의 계획은 끝내 휴지조각이 됐다. 파리조약은 곧 나폴레옹 3세의 승리를 의미했다. 흑해를 중립지대화하고, 오스만 제국 영토의 완전성을 보장해주기로 한 파리조약은 40년에 걸친 러시아의 발칸반도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그 외에도 파리조약은 수많은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먼저 사르데냐 왕국이 이탈리아 통일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했다. 결국 나폴레옹 3세는 국적 원칙(Principle of nationalities, 나폴레옹 3세는 다국적 제국 대신 국적에 기초한 새로운 국가의 창설을 지지하는 국적 원칙의 옹호자였다-역주)에 입각해 사르데냐의 통일운동을 지지했다. 다음으로 유럽의 홀대를 받으며 반유럽 감정이 고조되던 러시아 제국은 금세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침략·지배하고, 극동 진출을 꾀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다.

“러시아는 분노하는 게 아니라, 집중하고 있다.”

파리 조약이 체결된 다음 날, 신임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 왕자가 이같이 선언했다.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수년 동안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크름전쟁은 러시아가 유럽열강에 견줘 얼마나 통신, 교통 등 분야에서 경제적으로 뒤쳐져 있는지, 러시아 군대가 얼마나 구조적으로 취약하고 병사들의 신체적 상태도 심각한지 여실히 보여줬다.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3월 농노제도를 폐지하는 등 각종 개혁을 실시했다.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도 1854년 영국·프랑스와 맺은 조약에 의거해 일련의 정치·사회 개혁에 착수했다. 

러시아의 고립은 길지 않았다. 크름전쟁 때 지원을 거부한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의 신성 동맹에 실망한 러시아 제국은 곧장 새로운 외교군사동맹을 물색했다. 때마침 1870~1871년,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잃은 패전국 프랑스가 유럽대륙에서 새로운 동맹국을 찾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츰 양국은 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1891~1892년 프랑스 제3공화국과 차르의 러시아 제국 사이에 정치·군사적 동맹이 체결됐다. 프랑스와 러시아의 동맹 관계는 1904년 영불협상(이후 러불동맹 및 영러협상과 합쳐져 삼국협상으로 발전-역주) 체결로 더욱 강화됐다.

크름전쟁 발발 50년 뒤, 어느새 과거의 적은 동맹이 됐다. 

 

 

글·마리피에르 레이 Marie-Pierre Rey
팡테옹소르본 파리 1대학 현대사학과 교수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Eric Hazan, ‘Dans les rues de Paris(한국어판 제목: 파리의 정치적인 거리 이름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0년 6월호, 한국어판 2016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