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통치, 스마트에서 다시 철권으로

2012-01-11     이광석

권력은 디지털 네트워크 기술을 기반으로 재탄생한다. 시민들의 정치성 고양과 일상 속 저항의 진지전이 장기화되면서, 권력의 통치 방식도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민을 타격하는 폭력과 훈육의 방식에서 점점 일상적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드러운’ 스마트 통치 기제를 동원하기 시작한다. 한때 시민의 자유로운 기술은 마찬가지로 권력을 위한 ‘스마트한 통제’를 위해서도 쓰인다. 즉, 기술의 스마트화는 시민의 자유를 신장시키기도 했으나, 현대 권력의 내부 형질 전환에 크게 이바지했다.

훈육 체제에서 ‘스마트 통치’로

역사적으로 보면,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통치 권력 속성의 변화는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박정희 정권은 주민등록 시스템의 전산화를 꾀하면서 국민의 신원 정보를 전국 단위에 걸쳐 관리토록 했다. 전두환 정권은 국가 전산망 사업으로 공안망을 재정비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국가 초고속망이 깔리면서 전국 단위의 디지털 인프라망이 탄생한다. 따져보면 훈육의 시초는 박정희 시절이었으나, 스마트 통치로의 질적 전화는 문민정부로 접어들면서다. 어느 시기보다, 군부의 철권정치가 끝나고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까지 디지털 기술의 적용 방식은 철저히 대민 행정 편의와 관료주의의 욕망에서 응용된 측면이 크다. 부드럽고 스마트한 기술 권력의 시대였다.

김대중 정부에 뒤이은 참여정부 시절까지 디지털 기술은 대체로 행정 시스템 효율성, 다시 말해 문서 처리 등 행정 비용 절감, 대민 소통 방식 개선, 디지털 정보에 의한 관리 체제 전산화 등의 요구에 대한 반응이었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혹은 효과상 디지털 기술 수단과 관련 정책이 국가 억압적 통제 의도로 비치는 경향은 많지 않았다. 두 정부 모두 대체로 부드럽고 스마트한 통치 전략으로 디지털 기술을 적절히 배합했다.

일반적으로 훈육의 통치 기법이란 물리적 폭력에서 통계적 관리 시스템에까지 걸쳐 있다. 전투경찰의 강경 진압, 정치 사찰, 강제 철거 등 물리적 폭력, 그리고 작업장 내 노동 분업, 시·공간 분할, 구획과 관리, 인구통계 등 다양한 통치 기법이 이에 해당한다. ‘스마트 통치’란 무엇인가? 좀더 세밀하고 촘촘하게 신체를 개별적으로 관리하며 그 행로와 흔적을 실시간으로 샅샅이 기록·관리하는 전자 통치 형태를 지칭한다. 그러나 스마트 통치는 훈육 논리를 완전히 대체하지 않는다. 스마트 통치는 훈육의 특징과 함께 가는 경향이 더 크다. 예를 들어 시위 현장의 경찰 폭력성(곤봉, 군홧발, 물대포 등)이 변형돼 유지되면서 스마트 통제(디지털 사진 채증, 온라인 전후 검열 등)가 ‘광장 정치’의 기본이 되어간다.  그래서 스마트 통치는 훈육의 ‘심화’(Intensification)와 ‘강화’(Augmentation)로 볼 수 있다. 들뢰즈가 아날로그의 ‘훈육’ 사회와 디지털 시대의 ‘통제’ 사회를 대비한 것처럼,(1) 독일 사회학자 바우만 또한 ‘고형성’(Solidity)에 견줘 ‘유동성’(Liquidity) 사회의 도래를 얘기한 적이 있다.(2) 딱딱한 고형의 아날로그 산업 세계에 비해 미끄러지듯 흘러다니는 데이터의 세계가 바로 유동성 세계다. 이 신세계에서는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모이고 흩어지는 동태적 권력의 흐름이 대세다. 들뢰즈의 스마트 시대 통치 권력은 이런 유동성과 흐름에 기초한 권력을 뜻한다. 유동적으로 떠다니는 권력은 한곳에 집중되고, 고정된 권력과 사뭇 다르다. 멈춰 있는 상태의 권력, 이는 ‘정주권력’(Sedentary Power)이다. 그러나 바우만은 “모든 굳어 있는 것들을 녹이는” 현대 권력의 핵심을, “영토성과 정착의 원칙 위에 선 노마디즘의 반역”으로 묘사했다. 스마트 통치성은 네트워크를 통해 권력의 공간 확장과 이동을 완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스마트 통치 권력은 더욱더 ‘비가시’(Invisibility) 권역으로 숨어든다. 특히 대중에게 보이지 않는 통치 행위는 권력의 속성을 중립화한다. ‘연장’(Extension)과 ‘모듈화’(Modulation)는 이것의 주된 기제다. 권력과 권력 행위를 위임하거나 대리하는 방법들이다. 연장과 모듈화는 통제력의 눈과 촉수를 만들어 활용하면 가능하다. 이 상황에서는 권력이 없으면서도 마치 거기 있는 것처럼 임한다. 연장은 쉽게 생각하면 몸통에 달린 길게 연결된 단자들과 같다. 연장은 통제력의 확장욕에서 자연스레 성장한다. 그 방식은 “권력 스스로를 비가시화함으로써, 모든 타자들을 가시화”(3)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공공장소의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은 전형적인 연장의 예이고, CCTV 경찰본부는 모듈화(이미지 데이터 관리·분류·체계화)를 행하면서 관리와 통제를 행하는 미시 권력의 지역 통제센터가 된다. 기술에 의해 중립화된 것처럼 보이는 스마트 권력의 작동 방식은 눈에 보이는 권력의 폭력 방식에 비해 대단히 효과적이다. 곤봉과 군홧발에 비해 스마트한 기술에 의한 통제가 대중의 분노를 덜 일깨운다. 푸코식으로 보면, “권력이란 자신의 본질적 부분을 외부로부터 숨길 때만 견딜 만한 것”(4)이기에, 통치 권력은 기술에 의지한 비가시 권역에 숨는 행위를 점차 선호한다.

이제 스마트 권력은 어디에든 ‘편재’(Ubiquity)한다. 편재성은 ‘유비쿼터스’ 기술에 의해 완전해진다. 위성항법장치(GPS), 무선인식전자태그(RFID) 칩, CCTV, 휴대전화 위치추적 장비, 유·무선 인터넷 등은 현대 권력의 폭력성과 자신의 촉수를 숨기기엔 안성맞춤이다. 현실의 감시 카메라는 이제 더 이상 고착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권력의 촉수와 같다. 즉, 어디서든 존재하는 유비쿼터스의 비전은 실지 권력의 촘촘한 감시망을 뜻한다. 이 디지털 장비들은 일종의 탈중심화된 권력 촉수가 되고, 어디서든 연결돼 공간 기동성을 부여받는다. 어디든 편재하는 스마트 통치는 시민 활동의 실시간 파악과 그들의 생체 정보에 대한 통제력에 비례해 성장한다. 자유로운 신체 이동 능력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오히려 끝없이 권력의 네트워크에 접속되고 분류돼 호출된다. 통신기술이 가져다주는 것은 물리적 공간의 소멸 문제가 아니라, 권력이 줬던 가시적 거리감의 소멸이다. 물리적 공간 소멸이란 곧 스마트 통치의 새로운 디지털 장을 전제한다.

스마트 통치의 퇴행성과 변질

군부가 지닌 훈육 통치의 오래된 유산과 함께 과거 문민정부들은 이렇듯 매끈하고 부드러운 스마트 통치 속성을 혼합해 진화했다. 그러나 그 진화의 국면은 몇 년 전부터 다시 변질되고 퇴행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태생부터 촛불 정국에 대응해오며 정권 기반을 유지하면서 강박적 기질을 익혔다. 권력 유지의 불안과 조급증이 가중되면서 폭력과 훈육에 기대는 경향이 커졌다. 여론 향배에 대한 모르쇠 일관, 공안몰이식 탄압, 대민홍보 채널 풀가동, 시민사회 감시, 온라인 검열 등이 지속·확대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권력 통치 행위의 세련된 맛은 떨어지고 해묵은 권위주의적 기제가 판을 친다.

거세지는 물리적 폭압만큼 온라인 공간 내 스마트 통치 행위 또한 퇴행의 길을 걷는다. 도구적 폭력이 가중되면서 어설프고 거친 권력 행위가 크게 늘고 있다. 권력의 스마트한 통치는 2008년 촛불 정국 이후 급격히 퇴행한다. 조·중·동·매 종합편성 채널 개국을 통한 언로 불구화 기도, 각종 인터넷 관련 악법의 도입과 연장 시도, 미네르바의 구속 수사, 정권 홍보용 라디오방송 실시, 포털 업체들에 대한 간접 통제력 확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심의와 선거법을 통한 처벌 강화, 전자주민증 재도입 등 온라인과 미디어 영역에서 공공성을 훼손하고 권력의 통제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추론해보건대, 토건에 기초한 신권위주의 권력은 점차 새로운 권력 통치 수단으로 쓰이는 미디어·통신 기술의 세련된 속성을 끌어들일 수 있는 포용 능력에서 그 스스로 한계치를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온라인 영역에 대한 정부 규제가 악화일로에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통심의위)가 그동안 ‘입맛대로’ 해온 콘텐츠 내용 심의 기능을 확대해 통신심의국을 세우고, 그 안에 ‘뉴미디어정보심의팀’을 신설해 가동하는 것도 비상식의 억압적 국면이다. 규제의 주목적은 알려진 대로 <나는 꼼수다>(이하 <나꼼수>)류의 팟캐스트를 국내 실정법 안에서 불구화하는 데 있다. <나꼼수>의 대중적 영향력과 반향은 방통심의위의 전문팀 가동과 접속 차단, 이어 BBK 사건과 관련한 ‘허위사실’ 유포 혐의의 정봉주 전 의원 구속 수감 등으로 풀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해 느끼는 시민들의 허기가 제도정치에서 수용되지 못하고 <나꼼수>를 통해 카타르시스적으로 엉뚱하게 해소되는 현실이 아쉽지만, 상실의 시대를 끝내기 위한 제2, 제3의 <나꼼수>식 풍자가 계속 등장할 것이란 점에는 이견이 없다.

이미 2010년 6·2 지방선거와 연이어 2011년 4·27 지방 재·보궐 선거에서 집권여당에 대한 20~30대의 분노가 표출되고, 2011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40대까지 합류하면서 권력 통치의 유연적 지배 전략이 완전히 몰락한 지 오래다. 그동안 SNS를 포함해 인터넷 공간은 점점 반역의 공간이 되어갔다. 반면 권력의 온라인 공간에 대한 통치 행태는 ‘공안’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유연하고 부드러운 스마트 통치 행위는 온데간데없다. <나꼼수>에 대한 과잉 반응과 통제욕뿐만 아니라, 2011년 5월 방통심의위는 ‘2MB18nomA’ 트위터 아이디가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욕설을 지칭한다는 이유로 접속 차단을 시행한 바 있다. 비슷하게 선거 국면마다 SNS에 대한 감시 및 사찰을 강화하고 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유세 기간 중 선관위가 투표 독려를 해도 부족할 판에 SNS 이용 ‘인증샷’ 지침까지 내놨다. 그나마 해를 넘기기 바로 전, SNS를 포함한 인터넷 선거운동이 더 이상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헌번재판소의 판결이 나면서 당장 19대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트위터 등 SNS를 활용한 투표 독려 활동에 숨통은 트였다.

온라인 철권통치를 향한 반격

스마트 통치의 퇴행과 변질은 ‘해킹’의 대중적 의미 또한 변질시키고 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수많은 좀비 컴퓨터를 내세워 표적 서버를 무력화하는 방식의 디도스(DDoS) 공격이라는 지하 급진 해커들의 ‘네오러다이트’(Neo-luddite·기계를 통한 기계파괴 운동) 행위이거나, 북한 등 테러국들의 은행 전산망 마비 행각 정도로 취급됐다. 그런데 10·26 보궐선거의 선관위 디도스 공격 사건에 의해 전통적 해커들의 정치적 대의는 우스워지고, 오히려 국내 보수 우익들의 신종 투표 교란 행위의 일환으로 해킹이 재정의되고 있다. 윗선의 ‘지시’ 없는 해괴한 디도스 공격과 저질의 투표 사보타주 행위는 그동안의 스마트한 통치를 ‘코미디 통치’로 만들고 있다.

물질 세계의 훈육 체제와 굴절된 디지털 공간의 모습은 지금 이 시대 한국 스마트 통치의 야만성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갓 시작한 2012년, SNS 등을 통한 온라인 문화는 또 다른 열린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권력 통치의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온전히 그 억압의 계기들이 온·오프라인 양 측면에서 과도할 정도로 드러날수록, 우리의 SNS 문화는 더욱 불온한 이들의 집합소가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스마트 권력의 퇴행성이 커질수록 SNS를 포함한 우리의 디지털 공간은 신권위주의 통치 권력의 ‘꼼수’를 드러내 유통시키고, 주류 미디어를 움직이게 하고 이슈와 관련해 감성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 장소로 진화할 것이다. 폭압적 정서를 드러내는 온라인 철권통치에 대항해 현재 신생 플랫폼이자 새로운 저항의 처소에서 절망과 분노에 찬 이들 간의 횡적 연동과 연결은 당분간 큰 흐름으로 이어질 분위기다.

/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대학원 교수. 저서로 <사이버 문화정치>(문화과학사·1998), <디지털 패러독스: 사이버공간의 정치경제학>(커뮤니케이션북스·2000), <사이방가르드: 개입의 예술, 저항의 미디어>(안그라픽스·2010) 등이 있다.


(1) Gilles Deleuze, <Negotiations(1972~90)>, Columbia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5.
(2) Zygmund Bauman, <Liquid modernity>, Polity Press, Cambridge, UK, 2000.
(3) Michel Foucault, <Power/knowledge: Selected interviews and other writings 1972~77>(C. Golden, ed), Pantheon, New York, p.71, 1980.
(4) Michel Foucault, <The history of sexuality: An introduction>, Vintage Books, New York, p.86, [1976]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