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평양 뉴칼레도니아의 재구성

분리 독립 찬반으로 나뉜 정치판의 균형을 깨는 한 군소 정당

2022-10-31     실뱅 데른 l 누메아에서 활동하는 기자

2019년 실시된 뉴칼레도니아 지방의회 선거에서 투기적 성향의 한 우파 정당이 분리독립 지지 세력을 상대로 복수에 성공했다. 제3의 길을 추구하는 이 신생 ‘오세아니아’ 정당은 뉴칼레도니아 정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대대로 내려오는 민족 간 유대관계를 정치 수단화하거나 재활성화하려는 이들 틈에서, ‘오세아니아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누메아 협정’ 종식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2022년 5월 4일, 다양한 배경을 가진 부족 지도자들과 정계 대표들이 뉴칼레도니아 수도 누메아의 마젠타 지구에 있는 왈리스 푸투나 회관을 찾았다. 꽃목걸이 증정과 전통 돗자리, 직물, 참마 교환 등의 행사가 끝나자 ‘오세아니아 사촌들’의 화해를 도모하는 발언들이 이어졌다. 뉴칼레도니아에서 5월 4일은 의미 깊은 날이다. 33년 전 장마리 치바우와 예이웨네 예이웨네가 우베아섬에서 암살당한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진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암살자 주벨리 웨아도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 토론회에 참석한 칼레도니 연합(UC)(뉴칼레도니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이자 카나크 사회주의 민족해방 전선(FLNKS)의 핵심 정당)의 다니엘 고아 대표가 다음과 같이 외쳤다. “왈리스 푸투나의 폴리네시아 형제자매들이여, 더 이상 뉴칼레도니아에서 여러분의 자리가 있는지 묻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자리는 바로 이곳입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태어난 푸투나계 밀라쿨로 투쿠물리 오세아니아의 각성(EO) 대표는 “우리는 선조들에게 물려받은 오세아니아의 정치, 즉 관습 덕분에 이번 사건을 기회로 전환할 수 있었다”라고 화답했다. 

 

전례 없는 대화의 장이 열리다

문제의 ‘사건’은 한 달 전에 벌어졌다. 내부 분열이 감지되던 상황에서 UC의 제52차 전당대회가 열렸다. 개회 연설에서 다니엘 고아 UC 대표는 ‘오세아니아 동지들’에게 ‘확고한 정치적 입장’을 취할 것을 촉구하며 “물론 이들 덕분에 과반 의석 확보가 가능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카나크인(Kanak, 뉴칼레도니아 원주민-역주)은 이들의 동참 여부와 상관없이 투쟁을 이어갈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이 예상치 못한 경고성 발언이 있은 지 며칠 후, EO는 2020년 7월 자치의회에서 독립 지지 진영(UC-FLNKS)과 형성한 연합에서 탈퇴했다.

식민지배로 훼손된 오세아니아의 유대관계를 회복하려는 결단인가? 아니면 정치적 의도가 담긴 전술적 화해의 손짓인가? 독립 찬성과 반대로 철저하게 양극화된 뉴칼레도니아에서 5월 4일 열린 이 ‘오세아니아 토론회’는 양측 진영 모두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 토론회는 (비원주민 공동체의 토지 취득을 비롯한) 주요 문제를 논의하고 ‘관습법’(1)에 대한 고찰을 진행하는 등 전례 없는 대화의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동시에 이 토론회는 원주민과 왈리스 푸투나 출신 이주민의 관계 정상화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자리였다. 왈리스 푸투나는 뉴칼레도니아 북동쪽으로 2,000km 떨어진 태평양 망망대해에 존재하는 작은 섬들(총 면적 142㎢)의 집합체다. 관습적으로 3개의 왕국으로 나뉘며 19세기 이후 가톨릭교와 굳건한 관계를 형성했다. 인구조사에 따르면, 왈리스 푸투나 출신 이주민은 총 2만 2,520명이다. 이는 뉴칼레도니아에서 3위이며 페누아(Fenua, ‘본토’를 뜻하는 왈리스어) 인구의 2배 이상이다.

‘오세아니아 문제’는 3년 전부터 이목을 집중시켰다. 누메아 협정(1998년 체결)이 명시한 독립 찬반 주민투표 기한이 막바지에 다다른 시점에서 정치판의 핵심 이슈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2018년 실시된 제1차 주민투표 결과는 주요 반(反)독립 인사들의 예상보다 더 근소한 차이로(56%가 ‘완전한 자주권 회복’에 반대) 프랑스 잔류를 선택했다. 인구가 가장 많고 유럽계 주민 대다수가 거주하는 남부지방의 유권자 일부는 2018년 주민투표 결과에 충격을 받아 2019년 지방선거에서 강경 우파에 표를 던졌다. 이는 연합 정당 ‘신뢰하는 미래’의 승리로 이어졌다. 이 연합 정당은 그동안 누메아 협정이 이룩한 성과 대부분을 의도적으로 평가 절하하는 공격적인 메시지를 내세웠다. 2014년 이후 온건주의로 돌아선 정당 ‘함께하는 칼레도니’는 이 선거에서 패배했다. 

 

EO의 시계추 전술, 승자는?

2019년 5월 지방선거의 결과는 특히 놀라웠다. 선거 2개월 전 창설된 신생 정당 EO가 남부 지방의회 의석 4개를 차지했다. 그랑 누메아 지역 주민의 95%를 차지하는 왈리스 푸투나 공동체의 표심을 사로잡은 결과다. EO의 밀라쿨로(‘기적’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미라클(miracle)의 현지식 변형) 투쿠물리 대표는 2013년 프랑스 엑스마르세유대학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34세의 젊은 정치인이다. EO는 자치 정부 구성을 결정하는 자치의회(심의회) 의원도 3명 배출했다. 뉴칼레도니아 자치 정부는 다양한 주요 정치 세력을 대표하기 때문에 ‘합의제’ 정부로 불린다. 자치의회에서는 독립 찬성 진영(26석)과 반대 진영(25석)이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EO 소속 의원 3명이 ‘킹메이커’ 혹은 ‘민주주의 메이커’ 역할을 할 것으로 분석했다.

2010년 5월 24일, 첫 번째 이변이 발생했다. 예상을 깨고 독립 찬성 진영의 로슈 와미탄이 자치의회 의장으로 선출됐다. 와미탄은 의장 취임 연설에서 “오세아니아가 과반 의석을 확보한 역사적인 순간”이라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세아니아인은 수천 년 전부터 태평양 서쪽 바다에서 교류했다. 하지만 식민지배가 만든 인위적 경계는 오세아니아인을 분열, 대립시켰다. 이제 오세아니아인이 선조들의 문화적 가치를 중심으로 다시 뭉쳐, 모든 주민과 이 가치를 공유할 때가 왔다.”

EO의 ‘시계추’ 전술의 수혜자는 UC-FLNKS였다. 그런데 며칠 뒤 EO는 오히려 신뢰하는 미래와 연합을 구성했다. EO 소속 바이무아 물리아바를 자치 정부의 장관으로 세우려는 선택이었다. 물리아바는 누메아, 하와이, 파리 케브랑리 미술관을 거친 학예사 출신 정치인이다. EO는 (지방의회, 자치의회, 시의회 선거 등) 이후 선거에서도 섬세한 외줄타기 묘기를 선보였다. 결국 독립을 지지하는 진영 카나크 해방당(PALIKA)과 손을 잡았고, 이 정당 소속의 정치인 루이 마푸가 2021년 7월 대통령에 임명되는 성과를 낳았다. 루이 마푸(Louis Mapou, 1958.11.14.~)는 1982~1984년 장마리 치바우 이후 최초로 대통령이 된 카나크인이다.

EO의 로드맵은 오세아니아계 주민의 소외 방지와 사회·경제적 불평등 축소를 추구한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빈곤선 이하의 주민이 18.3%에 달한다. 2019년 인구 조사 결과, 비(非)카나크인 가구가 카나크인 가구보다 평균 2배 높은 경제 수준을 누리는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 수준 격차도 눈길을 끌었다. 2년제 전문대 과정 수료자가 유럽계 주민은 54%에 달했으나, 왈리스 푸투나인과 카나크인은 각각 9%와 8%에 불과했다.

의회와 정부의 수장을 나눠 가질 계획이었던 반독립주의 주요 정파들에 ‘약체와의 연합’이라는 EO의 선택은 최악의 상황에 닥친 악재였다. 식민지 상관 경제를 통한 이익 추구와 ‘서구식 굿거버넌스’에 기댄 탈식민지화 과정을 빨리 청산하고 싶었던 일부 지배계층은 1980년대 이후 왈리스 푸투나 공동체를 표밭으로 만들어 준 인종 구분 방정식에 익숙해졌다. 이들은 EO의 행보를 가볍게는 이례적 변수, 무겁게는 배신으로 간주했다. 

2020년 제2차 주민투표 결과는 독립 반대 53%라는 더욱 근소한 차이를 기록했다. 유럽계 혈통을 주장하는 주민 비율이 2009년 29%대에서 10년 뒤 24%대로 감소했다.(2) 프랑스통계청 INSEE의 표현을 빌리면, 이런 ‘다민족 모자이크’ 사회에서 오세아니아 관습이 낯선 일부 누메아 주민은 ‘소수민족화’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미디어는 이 편집증적 두려움의 징후를 계속 보도했다. EO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뉴칼레도니아 정계가 왈리스 푸투나인의 입지(및 정치적 도구화)를 재고하는 계기가 됐다. 타 민족들은 왈리스 푸투나인을 무시하고 이들의 억양을 조롱했다. 타 민족들은 왈리스 푸투나인을 럭비선수, 석공, 나이트클럽 경비원, 기껏해야 선거인 명부의 들러리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결박당한 오세아니아의 정체성

 

프랑스는 다른 식민지에서 그랬듯이, 뉴칼레도니아에서도 “오세아니아인 간 분열과 경쟁을 조장”했다. 그 결과 “니켈 광산에서 일하는 도시화되고 유순한 모범 이민자”와 “참마를 재배하는 골칫거리 원주민”(3)이 서로 대립했다. 폴리네시아인과 멜라네시아인 사이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적 위계질서는 쥘 뒤몽 뒤르빌을 필두로 한 유럽 탐험가들이 만든 것이다. 왈리스 출신 이민자 2세대로 라 포아 마을에서 교사로 일하는 토마시 타우투는 석사 논문에서 “일반적으로 오세아니아인을 특정하는 기준은 당시 과학자들의 머리에서 나왔거나 식민지 행정 기관이 임의적으로 설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4) 

인류학자 겸 역사학자인 니콜라 토마는 오세아니아의 도서 공동체를 최초로 접한 유럽인들이 간과한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오세아니아인들의 관계는 한 곳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유럽인들은 그 점을 놓쳤어요. 망망대해에 있는 섬의 주민들은, 이웃 섬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진 섬들과도 교역 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5) 이곳에 도착한 선교사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이 과거의 기억을 지우는 것이었다. 식민지 건설에 필요한 조건을 미리 예측한 셈이다. 

바이무아 물리아바는 “1837년 이곳(왈리스섬에 이어 푸투나섬)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가톨릭을 강요하고 우리의 전통 종교를 파괴했다”라고 비판했다. “우리가 섬기던 창조신 타갈로아와 마우이는 항해사이자 탐험가로 바다에서 섬을 낚아 올렸습니다. 선교사들은 낚시 배 보관 창고뿐만 아니라 낚시 배 자체를 파괴해 항해를 금지하고 우리의 종교를 말살했습니다. 그들은 별자리를 읽을 줄 아는 이들을 악마로, 항해를 하는 이들을 무법자로 간주했습니다. 왈리스섬과 푸투나섬 주민들은 오세아니아의 정체성을 결박당한 셈입니다.”

유럽의 제국들이 남태평양의 열도들을 점유한 시기는 대부분 19세기 중반 이후다. 식민지배 행정 관료들은 공동체간 이동 제한을 강화했다. 건축술과 항해술을 잃어버린 섬 주민들은 포경선과 백단나무 무역선에 몸을 싣는 것으로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소명 ‘타바카(tāvaka, 모험으로 가득 찬 탐험)’을 이어갔다. 뉴칼레도니아에 정착한 이주민들 일부만이 멀리 떨어진 왈리스, 푸투나, 키아무, 통가, 사모아에서 온 항해자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을 이어갔다. 

원주민 차별법이 적용되는 동안 카나크인은 생존을 위해 외부와의 단절을 선택했다. 다양한 언어(지금까지 남아있는 현지어는 28개)를 자랑하던 카나크인은 죄수 유형지 건설의 편의를 위해 뉴칼레도니아의 주도 그랑드 테르의 보호구역으로 거주가 제한됐다가 1867년 이후 행정 관리 목적으로 뉴칼레도니아 전역 300개 이상의 부족 집단에 재배치됐다. 

 

바다에 대한 기억상실증

역사학자 폴 피진은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된 상황에서 집단 내에서의 존재, 즉 정착촌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각 부족은 자신들의 오랜 역사를 강조하는 담화를 발전시켰다. ‘외부인’ 취급을 면하기 위해서였다”라고 설명하며 “지상의 멜라네시아 신화가 탄생한 이유”라고 덧붙였다. 케누 완(Kenu Waan) 프로젝트의 아일레 티쿠레 대표는 이런 역사적 유산 때문에 카나크인이 ‘바다에 대한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묘사했다. 케누 완은 전시회와 회의를 개최하며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각 지역 고유의 노하우를 발굴하는 단체다. 태평양 고유의 대형 어선과 별자리 관측 항해법을 부활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일데팽 출신인 티쿠레 대표는 “한 민족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탈식민지화 과정에서 중요한 작업이다”라고 규정하며 “바다는 선조들이 저 멀리, 전 세계로 나아갔던 길을 우리 앞에 열어준다...”라고 덧붙였다. 

원주민 차별법은 1946년 철폐됐지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오세아니아계 원주민’ 차별 조치가 철폐된 것은 그로부터 십 년 후의 일이다. 1957년, 뉴칼레도니아는 최초로 보통선거를 실시하고 자치의회를 구성했다.(6) 같은 시기, 왈리스 푸투나 제도에서는 코프라(coprah, 말린 코코넛 과육-역주) 단일 생산이 막을 내리고 현지 노동력이 (야테 댐, 도로 기반시설, 니켈 광산 등) 뉴칼레도니아의 대규모 건설현장으로 이동했다. 바이무아 물리아바는 “뉴칼레도니아와 다른 시각으로 프랑스를 본 인물”이라고 왈리스 푸투나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약탈, 아타이 봉기, 주민 강제 이주가 발생했다. 왈리스 푸투나는 프랑스 식민 지배보다 선교사들을 먼저 겪었다. 프랑스인은 일종의 구원자처럼 등장했다. 다른 곳에서 일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왈리스 푸투나는 프랑스에 고마워했다”라고 덧붙였다. 

1969년, 탈식민지화 물결이 일기 시작하고 파리 유학 1세대 카나크인들이 돌아와 ‘붉은 스카프’ 운동을 펼치자 프랑스와 현지 ‘기득권층’은 원주민의 표심이 프랑스의 이익에 해로운 방향으로 향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조르주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 정부에서 총리직을 맡은 피에르 메스메르의 이름을 따 ‘메스메르’ 회람으로 불리던 프랑스 정부 공문서는 1971년 카나크인과 오세아니아계 주민의 문화적 근접성을 유럽의 이익에 반하는 위협으로 강조했다. “원주민 인구가 오세아니아계 타민족 공동체의 지지를 받아 민족주의적 요구를 하지 않는 한 (...) 프랑스가 뉴칼레도니아에서 입지를 위협받을 일은 없다.” 

1971~1984년, 프랑스는 유럽 및 다른 해외 프랑스령 주민의 뉴칼레도니아 경제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펼쳤다.(7) 하지만 1980년대, 피할 수 없는 전환점이 찾아왔다. 더욱 거세진 카나크인의 독립 요구는 유혈 사태를 예고했다. ‘사건들’이라고 불리는 이 일련의 폭력 사태로 1988년 누메아 협정 체결 전까지 8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이로써 프랑스는 더 이상 ‘오세아니아 사촌들’의 통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 듯 보였다. 

1970년대, 왈리스 푸투나 출신 ‘교민들’은 본토의 3 왕국(알로, 시가베, 왈리스)과 산하 구역 및 마을을 본 딴 관습 체계를 뉴칼레도니아에 수립했다. 펠레시타 혹은 파이풀레(pelesita or faipule, 구역 촌장)와 풀레콜로(pulekolo, 마을 촌장)도 정해졌다. “우베아 모 푸투나(Uvea mo Futuna, 왈리스 푸투나 고유 명칭)의 관습법적 질서를 뉴칼레도니아로 옮겨오는 동시에” “가톨릭을 신봉하는 공동체 구성원을 보듬기” 위한 교회 당국 및 부족 지도자들의 의지를 반영한 절차였다.(8) 이 관습법적 조직 체계는 공화국 칼레도니 연합(RPCR)의 집단적인 표 확보에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했다. 자크 라플뢰르를 필두로 당시 막강한 위세를 떨쳤던 정당인 RPCR은 닭고기, 쌀, 현금 및 기타 경제적 혜택을 제공하며 집단 차원의 지지를 유도했다. 

 

소년들을 총받이로 쓰는 식민지배자들

토마시 타우투는 “왈리스에 거주할 당시 우리 부모님들은 어부나 농부였다”라고 설명하며 “뉴칼레도니아에 와서는 노동자가 됐다. 이 세대는 프랑스어를 잘 구사하지 못한다. 읽고 쓰기에 능숙하지 못하다. 왈리스의 학교는 교리문답만 가르쳤다. 집단 내의 권력자인 촌장은 정치인들이 쉽게 동원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촌장은 대표로 연설을 듣고 마을로 돌아가 마을 구성원에게 투표 지침을 전달했다. 모든 구성원이 이 지침을 따랐다”라고 덧붙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RPCR은 경쟁적인 여러 정당으로 분할됐다. 하지만 집단적인 충성심을 돈으로 사는 관행은 계속됐다. 시민편입사업(PPIC) 일자리와 ‘협력자’ 직위는 유권자의 충성심을 부추겼다. 남부 지방의회 의장을 거쳐 자치의회(2012-2022)에 입성한 필리프 고메스 의원은 2009년 선거에서 다수의 왈리스 푸투나 단체에 특혜를 제공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소속 정당 함께하는 칼레도니가 자치 정부의 주도권을 되찾은 2014년, 고메스 의원은 예상을 뒤엎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메아 헌병대 므니에지부 정보부의 조사 보고서는 “2008년 말 16개 이상의 단체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PPIC 일자리 80개를 할당하고 (...) 20개 이상의 협력자 직위를 만드는 방식의 선거 후견주의 체계”를 지적했다.(9)

 

남부 지방의 수장을 돌아가며 차지했던 반독립주의 정당들이 널리 활용한 후견주의 관행은 관습법적 공동체 조직, 문화단체, 행동주의 정치단체들 사이에 혼란을 초래했다. 누메아 검찰은 이미 존재하는 혼란을 ‘고조시키지 않기 위해’ 방관자적 입장을 취했다. 그 덕분에 후견주의는 더욱 성행했다. 그런 점에서 2019년 6월, 누메아 법원이 유력 정치인 아롤드 마르탱의 ‘유권자 매수’ 사건 1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한 것은, 후견주의 정치인에 대한 최초의 법적 처벌이라는 의미를 남겼다. 그랑 누메아 지역 파이타 시장을 역임한 아롤드 마르탱은 2014년 시의회 선거 당시 왈리스인의 표를 확보하기 위해 왈리스 공동체의 ‘영향력 있는 구성원’에게 현금 봉투를 배포한 혐의로 기소됐다. 

1980년대 ‘사건들’이 일어날 당시 RPCR의 치안부서 책임자이자 자치 정부의 안보 담당자였던 앙리 모리니가 이끈 민병대는 수십 명의 ‘왈리스인’을 모집했다. 이들은 주민 대부분이 카나크인인 누메아 북부지구를 비롯해 관목지대 프랑스인 소유지에서 벌어진 시위를 진압하거나 루아이오테 군도에서의 선동 작전에 투입됐다. 1985년, 크리스티앙 블랑 뉴칼레도니아 사무총장은 “왈리스인을 총받이로 쓰는 식민지배자들”을 규탄한 FLNKS의 성명을 지지했다. 왈리스 푸투나 자치의회의 한 의원은 “오세아니아 전통에 반하는 공작에 조종당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10) 

토마시 타우투는 “한집에 살던 모리니 민병대 소속 사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해가 지면 그는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섰다. 길에는 10인승 폭스바겐 미니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 안에 탄 이들은 모두 타마(Tama, 소년을 뜻하는 왈리스어)였다! 120kg의 거구였던 내 사촌은 5,000 CFP 프랑을 받고 토요일 저녁 민병대 활동에 참여했다.” 

이런 상황은 민족 간 불신을 심화시켰고, 왈리스 푸투나 공동체가 반독립주의 정당들에 충성하는 일종의 ‘악순환’을 만들었다. 왈리스 푸투나인은 카나크인이 독립을 쟁취하면 자신들을 추방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반독립주의 정당들은 이런 상황을 막아줄 유일한 보호막을 자처했다. 바이무아의 부친 칼레포 물리아바가 1980년대 말 창설한 오세아니아 연합(UO)은 왈리스 푸투나 공동체 해방을 주장한 최초의 정당으로 RPCR과 FLNKS의 중간 노선을 취했다. 1989년 첫 실시된 남부 지방의회 선거에서 UO는 의석 2개를 획득했다. 이후 칼레포 물리아바 후임 UO 지도자 중 일부는 독립에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기도 했다. 일례로 알로이시오 사코는 오세아니아 민주주의 연합(RDO)을 창당하고 FLNKS에 합류했다.

하지만 사코와 같은 노선변경은 이례적인 경우에 속했다. 2000년대 누메아의 밤거리에서는 오히려 해로운 삼위일체가 재탄생했다. ‘유럽인’이 운영하는 나이트클럽은 ‘폴리네시아인’을 경비원으로 고용해 ‘멜라네시아인’ 청년들의 출입을 막았다.(11) 그랑 누메아 지역의 중고등학교 앞에서는 인종 간 패싸움이 벌어졌다. ‘인종차별적’인 살인 사건들이 계속 일어났다. 왈리스 푸투나 공동체의 인구 급증 역시 누메아 외곽의 토지를 둘러싼 갈등의 원인 중 하나였다. RPCR는 토지 분쟁이 존재했던 둠베아 계곡에 주택단지를 조성해 왈리스인에게 분양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1980년, 당시 독립을 지지하는 유일한 의원이었던(UC) 로슈 와미탄의 부인 스콜라스티크 피조는 폴 디주 프랑스 해외영토 장관에게 항의 서한을 보냈다. “당신은 누메아를 보호하기 위해 왈리스인으로 벽을 세워 우리를 막겠다는 심산이다. 카나크인은 누메아를 공격한 적이 없다. 우리의 선조들이 계획한 적도 없고, 지금의 우리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이 공격은 이 나라의 과거의 악몽일 뿐이다.”(12) 

 

프랑스는 우리를 잃을 것이다

2001년 생루이의 아베 마리아 지구에서 발생한 분쟁으로 적대감은 절정에 달했다. 몽도레는 티 강을 사이에 두고 카나크족 거주지와 과거 가톨릭 선교단이 사용했던 토지에 세워진 왈리스 푸투니아 정착촌으로 나뉘었다. 원주민 보호 구역의 카나크족은 35년 전에 지어진 노후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남부 지방 당국은 강 반대편에 ‘폴리네시아인’ 공동체를 위한 주택단지 건설을 추진했다.(13)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가옥 방화와 난투극이 벌어지고 6,000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2001년에서 2003년 말까지 주변 지역은 내전과 흡사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혹자는 이 비극적인 상황을 ‘인종청소’로 규정했다. (양 ‘진영’에서) 3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77가구, 총 1,000여 명의 왈리스 푸투나인이 이곳을 떠나 누메아 외각 주택단지로 이주했다. 인접한 두 족장 관할구역 간 경쟁에서 비롯된 위기를 정치 수단으로 이용한 생루이 족장(다름 아닌 로슈 와미탄)에 비난에 쏟아졌다.

반독립주의 노선을 추종하다가 2019년 초 EO 출범에 참여한 70대의 정치 원로 멜리토 피나우는 “아베 마리아 지구 사태는 반독립주의들이 우리를 저버렸다는 트라우마로 남았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 사건은 뉴칼레도니아의 ‘공생’에 대재앙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아베마리아 사태 이후 왈리스 푸투나 공동체와 다양한 ‘카나크 촌락’ 간 유대관계의 역사를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탐구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런 관점에서 개최된 ‘타바카’ 전시회는 오세아니아 정체성을 재창조하는 자리였다. ‘카나크 문화유산을 기리는’ 치바우 문화센터에서 2009년 개최된 이 전시회는 구전, 고고학 및 문화 지식의 집성체를 선보였다. 7월 25일, 왈리스 푸투나 족장들과 카나크 관습 상원(1999년 설립된 대의제기관)은 최초로 상호 존중의 중요성에 동의하는 ‘엄숙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식민지배 이전에 존재했던 두 민족 간 유대관계를 찬양했다.(14) 이로부터 10년 뒤 출범한 EO는 이 문화 운동의 정치적 연장선에 존재한다. 

EO는 뉴칼레도니아 사회에 잠재된 적대감을 나타내는 지표 역할을 하고 있다. 투쿠물리 당대표는 “반독립주의자들은 재정 및 행정 분야에서는 역량을 입증했다”라고 인정하며 “하지만 정치적 용기는 전혀 없다... 용기를 내어 조국을 개혁하고 있는 것은 독립주의자들이다”라고 평가했다.(15) 하지만 2021년 말 분리독립 찬반을 묻는 마지막 주민투표가 열렸을 때 EO는 내부 토론을 거친 끝에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캠페인을 펼쳤다. 완전한 자주권 이양은 아직 시기상조라는 판단이었다. 

뉴칼레도니아는 또 한 번의 ‘주민투표’를 계획하고 있다. 뉴칼레도니아의 새로운 법적 지위를 결정하고 누메아 협약 종식 후 단계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다. 그런데 인구 절반을 대변하는 독립 찬성 진영은 3차 주민투표 결과 인정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독립 반대 진영은 ‘4만 2,000명의 프랑스인’을 지방선거 특별 선거인 명부에 재포함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18년 발표된 ‘프랑스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부상은 누메아 협약 종식과 시기가 맞물렸다. 이후 뉴칼레도니아 현지의 정치 주체들은 1988년 이래 균형 유지자를 자처했던 프랑스의 태도가 변했다고 느꼈다. 뉴칼레도니아 정계의 ‘엄지동자’ EO는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대양으로 눈을 돌려 프랑스의 노선 변경으로 생긴 정치적 공백을 채우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바이무아 물리아바는 “우리가 오세아니아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오세아니아 전체(지구 면적의 1/3)와 우리를 이어주는 끈이다. 내 말이 파리 시민의 말보다 통가인 혹은 파푸아인에게 더 설득력이 있을까? 당연히 그렇다. 프랑스는 이 점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경고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동화의 개념이 통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는 이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는 우리를 잃을 것이다. 프랑스가 뉴칼레도니아에서 추진하는 계획은 현실과 단절돼 있고 이곳의 환경에도 우리의 요구에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실뱅 데른 Sylvain Derne 
누메아에서 활동하는 기자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프랑스 헌법 제 75조에 따르면 프랑스 내에서 카나크인과 왈리스 푸투나인은 법적으로 동일한 ‘특별’지위를 누린다.
(2) ‘어느 공동체에 속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 41.2%는 ‘카나크’, 24.1%는 ‘유럽’, 11.3%는 혼혈이라고 답했다. 프랑스통계청(INSEE), 2019년 인구조사.
(3) Eric Wittersheim & Alban Bensa, ‘Nationalisme et interdépendance : la pensée politique de Jean-Marie Tjibaou, 민족주의와 상호의존성: 장마리 치바우의 정치사상’, <Tiers-Monde,> n° 39, 1997.
(4) Tomasi Tautuu, ‘Enracinements polynésiens d’hier et d’aujourd’hui dans l’archipel de Nouvelle Calédonie, 폴리네시아인의 뉴칼레도니아 열도 정착의 과거와 현재’, 뉴칼레도니아대학 예술, 문학, 문화유산 석사 논문, 2012, 온라인 열람 가능
(5) Nicholas Thomas, 『Océaniens – Histoire du Pacifique à l’Âge des Empires, 오세아니아인-제국주의시대 태평양의 역사』, Éditions Anacharsis, Marseille, Toulouse, 2020.
(6) Isabelle Merle & Adrian Muckle, 『l’Indigénat – Genèse dans l’empire français, pratiques en Nouvelle-Calédonie, 원주민 차별법-프랑스 제국 내에서의 기원과 뉴칼레도니아에서의 관행』, CNRS Éditions, Paris, 2019.
(7) Olivier Houdan, ‘Le C.I.P.E.N.C ou la mise en œuvre de la dite “circulaire Messmer”, 뉴칼레도니아 정보 일자리 센터 또는 “메스메르 회람”’ 회의, 온라인으로 시청 가능.
(8) ‘Uvea, 우베아’, 왈리스를 뜻하는 토착어. 타바카 역사 연구 위원회, 『Tāvaka lanu ‘imoana – Mémoires de Voyages, 타바카 라누 이모아나-여행의 기억』, Éditions ADCK/Tāvaka, Numea, 2009.
(9)  ‘L’affaire des associations wallisiennes et futuniennes relancée, 왈리스 푸투나 단체들 사건 재조사’, 뉴칼레도니아 라 프르미에르(Nouvelle-Calédonie la Première) 방송국 홈페이지 개제 기사, 2014년 2월 12일.
(10) Christian Blanc,『La force des racines kanak en Nouvelle-Calédonie, 뉴칼레도니아 카타크족 기원의 힘』, Éditions Odile Jacob, 2021.
(11) ‘Comment les videurs trient à l’entrée des boîtes des nuits, 나이트클럽 경비원들이 입장객을 가려내는 방식’, <les Nouvelles Calédoniennes>, 2009년 9월 21일.
(12) <Les Nouvelles Calédoniennes>, 1980년 8월 13일, 인류학자 장귀아르가 『Heurs et Malheurs du pays de Numea, 누메아 고장의 행운과 불행』에 수록, Éditions Le Rocher-à-la-voile, p.146, 2000.
(13) Pierre-Christophe Pantz, ‘La minorité wallisienne de Nouvelle-Calédonie : intégration, territoire et identité d’une diaspora insulaire, 뉴칼레도니아의 왈리스 소수민족 : 왈리스 이주민의 통합, 토지, 정체성’, 지리학 석사 논문, 파리1대학(팡테옹 소르본).
(14) ‘Wallis, Futuna, Nouvelle-Calédonie – Tāvaka pour un destin commun, 왈리스, 푸투나, 뉴칼레도니아-공동 운명을 위한 타바카’, <Mwà Véé>, n° 65, ADCK, Numea, 2009년 7월.
(15) <Nouvelles Calédoniennes>, Numea, 2022년 8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