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제2의 고향이 된 ‘동방 기독교인’

2022-10-31     에마뉘엘 하다드 l 기자

약 반세기 전부터 중동의 기독교인들이 프랑스를 종교적 피난처로 선택하고 있다. 본국이 각종 사건에 휘말릴 때마다 이들의 ‘디아스포라’는 늘어난다. 이들은 선조의 문화를 보존하는 동시에, 프랑스 사회에도 적극적으로 동화해야 한다는 이중과제를 일상적으로 안고 살아간다. 

 

사르셀의 중동 출신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소규모 식료품점들을 지나, 브뤼노 야칸은 큰 조립식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대표로 있는 프랑스 아시리아 칼데아인 협회(AACF)의 본부가 있는 건물이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직전에 문을 연 탓에 지금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야칸은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다. 코로나가 종식되고 일상이 회복되면, 자신과 같은 종교를 가진 이들이 이 공간을 채울 것이라고 말이다. 발두아즈 주의 인구 약 6만 명 중 약 8,000명이 야칸처럼 기독교인들이다. 대부분은 튀르키예의 동쪽 국경선 인근 하카리 고원 출신이고,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선조가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1969년부터 AACF의 사무실이 문을 열기 전까지 50년 세월 동안, 3세대에 걸친 동방 기독교인들은 사르셀을 공동체 지역으로 일궜다. 이들의 선조는 쿠르드족의 수탈과 터키 정부의 차별 대우를 피해 이 대도시로 왔다. 

야칸이 말했다. “영광의 30년 때 3명의 남성이 공사 현장의 계약직 노동자로 이곳에 왔습니다. 하카리의 아시리아 칼데라 지역 8개 마을 에서는 모두가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다른 가족들도 따라왔지요. 그리고 그 지역 공동체의 다른 일원들도 독일이나 스웨덴으로 가는 대신 이곳을 택해 정착했습니다.”

 

디아스포라와 국가 간 네트워크

이주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1970년대에는 먼저 도착한 이들이 빚을 내 브로커에게 돈을 건네고 가족과 친척을 입국시켰다. 그리고 함께 좁은 아파트에 살면서 빚을 갚기 위해 밤낮으로 일했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이어진 걸프전이 끝나자, 이번에는 기독교를 믿는 이라크 난민들이 이곳으로 대거 몰려왔다. 사르셀 시의 자문관이면서 공동체 생활 도우미인 앙토니 얄라프는 2014년 IS가 모술과 니네베 평원을 공격했을 때 이라크 북부 기독교인들을 위해 다시 한 번 연대감이 발휘됐다고 회고했다. 

“다에시(IS)가 모술을 공격하자 사르셀의 청년들은 즉각 이라크 기독교인 지원 위원회(CSCI)를 조직했습니다. 월드컵이 한창이던 때 우리는 의회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며 우리의 주장을 관철하려 노력했습니다. 결국 사르셀은 이라크 기독교인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고, 50채의 임대 주택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대학원생인 클레르 르포르는 이라크 기독교인들이 프랑스 사르셀로 이주하고 이곳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디아스포라와 국가 간 네트워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1) 사르셀의 아시리아 칼데라인, 알포르빌과 뫼동의 아르메니아인, 이시레물리노의 레바논 출신 마론파 기독교 신자 등 우리가 흔히 ‘동방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갓 이주한 같은 종교인들을 아주 능숙하게 효율적으로 돕는다(박스 기사 참조).

프랑스 정부도 그들에게 관대한 편이다. 16세기에 프랑수아 1세와 오스만 제국 간에 동맹이 체결돼 프랑스가 ‘동방 기독교인들의 보호자’ 역할을 했던 시기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전통이다. 오늘날 ‘동방 기독교인’들은 ‘보호가 필요한 소수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이 주제를 다룬 책을 펴낸 티그란 예가비앙은 말했다.(2) 그런 한편, 그는 중동 지역에 대한 프랑스와 다른 서구 열강들의 지정학적으로 애매한 태도를 지적하며 “이런 태도는, 그들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동방 기독교인의 고통을 오히려 가중시켰다”라고 비판했다. 동방 기독교인은 이슬람 극단주의의 표적인 동시에 거주국 국민들의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됐다. 중동을 향한 제국주의적인 야심을 버리지 않은 서구의 ‘제5열(스파이)’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난민으로 프랑스 사회에 정착하려는 노력들

3명의 선구자들을 따라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우아즈에 정착한 아시리아 칼데라인들은 난민과 무국적자 보호 사무국(Ofpra)을 통해 곧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2010년 11월 바그다드에서 연쇄 폭탄 테러로 50명 이상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에리크 베송 프랑스 이민부 장관은 이라크의 기독교인 150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를 반긴 이들도 많았지만, 프랑스 내에서 많은 논란이 일기도 했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F) 소속 인류학자인 오샹 다워드는, 모든 이라크인들이 알카에다 관련 집단의 테러로 불안에 떠는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가 “희생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라고 일침을 놓았다.(3)

그래도 아시리아 칼데라인들이 프랑스 정부로부터 혜택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 않냐고 이야기하자, 이사 얄라프는 발끈했다. “나는 프랑스어를 거리에서 배웠다”라고 자랑하던 그는 자신의 공동체가 프랑스 사회에 안착하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파리 세바스토폴 대로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이 50대 남성은 과거 상티에 구역에서 밤낮으로 재봉틀을 돌리던 시절을 뿌듯하게 떠올렸다. 이제는 어엿한 의류회사 사장이 된 얄라프는 결혼식에 하객 2,500명을 초대했다. 그는 “우리 공동체에서는 내가 최초로 음악인 쥘리아나 젠도(Juliana Jendo)에게 축가를 부탁했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는 한 젊은 미혼모를 프랑스로 데려왔습니다. 그녀의 아버지와 남동생은 다에시가 모술을 장악하고 1개월 후 목숨을 잃었지요. 저는 그녀에게 작은 방을 얻어줬고, 아직도 경제적인 지원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백발을 뒤로 넘기면서, 언제나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만 했다고 털어놓았다. 우리가 동방 기독교인을 지원하는 단체들을 언급하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들은 하는 일이 없어요, 전혀요.”

AACF의 사르셀 본부에는 아시리아 칼데라 문화를 소개하는 잡지 <Ninway>의 사무실도 있다. CSCI의 코디네이터이자 시 자문관(사회당)인 앙토니 얄라프가 말했다. “외브르 도리앙(Œuvre d’Orient)과는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과 우리는 각자 일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극우파에 가까운 에스오에스 크레티앙 도리앙(SOS Chrétiens d’Orient)과는 전혀 교류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 위원회가 성취한 것들을 가로채려 했기에 처음부터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2월 중순에 프랑스 반테러 검찰청(PNAT)은 에스오에스 크레티앙 도리앙의 ‘전범 공모’ 혐의에 대한 예비 수사에 착수했다. 

사르셀에 거주하는 아시리아 칼데라인들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매개체로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시 측에서 먼저, 얄라프가 ‘윈-윈 관계’라고 표현한 것들을 제안했다. 1997년부터 2017년까지 사르셀 시의 시장을 역임한 프랑수아 퓌포니(사회당)는 1914년과 1920년 사이에 터키 군대가 자행한 아시리아 칼데라인 학살 사건(Sayfo)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비를 2006년 세계 최초로 세웠다. 또한 ‘아시리아 칼데라인의 정원’(2016년 4월 23일)과 ‘아르메니아인의 정원’(2015년 4월 18일)을 개관해 두 공동체가 겪은 대학살의 100주년을 기념했다. 단순한 인기 전술일까? 그러나 2020년에 시의원으로 선출된 아시리아 칼데라인 12명 중에는 퓌포니가 소속된 사회당이 아닌 다른 정당 출신도 있었다.

 

아르메니아인은 디아스포라와 동의어

파리와 사르셀의 남쪽에 위치한 알포르빌은 동방 기독교인 박해의 또 다른 역사적 현장이다. 이번에는 3명이 아니라 4명의 아르메니아 출신 남성이 1915년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피해 알포르빌로 이주해 와 제지 공장과 금속 가공 공장에서 일했다. “파리 구종 가의 아르메니아 교회는 이 4명을 시작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이 알포르빌에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공식화했습니다.” 이 공동체 역사의 전문가인 세방 아나니앙이 설명했다.(4)

파리의 호사스러운 장 구종 가에 위치한 생장 밥티스트 성당에서,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의 대주교 바한 호브하네시안은 아르메니아인들을 ‘디아스포라의 동의어’라고 표현했다. “동방 기독교인들이 고향인 중동 지역에 그대로 머물도록 지원”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내세우는 ‘에스오에스 크레티앙 도리앙’과 같은 NGO들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동방 기독교인을 위한다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이 이슬람 극단주의나 다른 단체의 표적이 됐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대주교는 덧붙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과거에만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물론 과거를 자랑스럽게 여겨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인들은 어느 곳을 가든지 가장 먼저 교회를 세운 후, 다음으로 학교를 짓는다”고 그는 설명했다.

알포르빌에는 종파 별로 교회도 있고 1978년에 지은 아르메니아학교도 있다. 아나니앙에게는 곳곳에 아르메니아어로 된 지명이 있고 아라라트 식료품점(아르메니아의 아라라트산에서 따온 이름)에서 수드주크(소시지)를 살 수 있는 알포르빌이 곧 고향이다. “모든 아르메니아 공동체는 선조들이 새롭게 뿌리내린 도시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가 설명했다.

알포르빌 아르메니아문화사무소(MCA)의 대표인 아락스 데르 케보르키안이 말했다.

“우리는 프랑스인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생각하는 동시에, 인종 말살의 위기를 겪은 선조들을 떠올리며 아르메니아 문화를 보존할 의무도 느낍니다. 이렇게 소중하게 이어온 유산이 사라지도록 둘 수는 없다고 종종 이야기합니다.”

 

“박해를 하는 튀르키예로 돌아갈 수는 없다”

외브르 도리앙(Œuvre d’Orient) 협회의 파리 본부는 프랑스 동방 가톨릭 자치단의 총대리 파스칼 골니슈 몬시뇰이 2014년부터 이끌고 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본국 없는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없는 본국은 힘이 없습니다. 본국과 디아스포라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역사학자인 베르나르 에베르제는 말했다. “디아스포라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가 있습니다. 각기 다른 역사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 디아스포라입니다.” 그리고 본국이 존재해야 문화를 잊지 않고 보존하는 일도 상대적으로 쉽다. 아르메니아 학교에서는 언어를, MCA에서는 문화 활동을 가르치고 있지만, “일상에서 접할 수 없는 문화를 가르치는 것이라 어려움이 많다”고 케보르키안은 솔직하게 말했다. 

아나톨리아의 천년 도시 이시(Ischy)에서 태어나 11세에 프랑스로 이주한 스테판 얄라프는 사르셀에도 본부가 있는 프랑스 아시리아 칼데라인 연합(UACF)의 코디네이터로, 같은 문제를 겪고 있다. “제 아이들에게도 아르메니아어를 가르치려고 노력 중이지만 쉽지가 않네요. 우리 연합에도 아르메니아어 수업이 있지만, 공사다망한 청년들은 잘 들으려고 하지 않아요.” 고국인 아르메니아를 자주 방문하면 언어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가 대화를 나눈 아르메니아인들은 단호했다. 여전히 기독교인들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는 튀르키예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입을 모아, 프랑스 사회에 동화돼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공동체의 일원들, 특히 여성들이 가정에서 아르메니아어 대신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프랑스 사회에 동화되려는 노력과는 별개로 여전히 많은 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배우자를 찾는다. 골니슈 몬시뇰은 족내혼의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사 얄라프는 자신의 옷가게에서 바쁘게 일하며 말했다. 그에 따르면 아르메니아인의 90%가 같은 아르메니아인을 배우자로 선택하고, 다행스럽게도 이제 강제 결혼은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족내혼은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유대관계를 끈끈하게 유지하는 교회를 통해 가장 많이 이뤄진다. 청년들이 교회에서 이성을 만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글·에마뉘엘 하다드 Emmanuel Haddad
기자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Claire Lefort, Derrière le paravent des “minorités religieuses” au Moyen-Orient : exemples irakiens 중동의 ‘소수 종교인’이라는 방패막이 뒤 : 이라크인의 예, in Jérôme Bocquet (지도), La France et les “chrétiens d’Orient”. Écrire une histoire dépassionnée 프랑스와 ‘동방 기독교인’.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역사, <Les Cahiers d’EMAM>, n° 32, Études sur le monde arabe et la Méditerranée, 투르(Tours) 대학교, 2020.
(2) Tigrane Yégavian, 『Minorités d’Orient. Les oubliés de l’Histoire 중동의 소수인, 역사에서 잊힌 자들』, Éditions du Rocher, Monaco, 2019.
(3) Hosham Dawod, ‘Chrétiens d’Irak : ne choisissons pas nos victimes ! 이라크의 기독교인 : 희생자를 선택하지 맙시다!’, <르몽드>, 2010년 11월 9일.
(4) Sévan Ananian, 『Alfortville et les Arméniens. L’intégration réciproque, 1920~1947 알포르빌과 아르메니아인. 상호적 통합, 1920~1947』, éditions A. Val-Arno, Bois-Colombes, 1999.

 

 

해외로 뻗어나가는 ‘동방 기독교인’ 교회

 

‘동방 기독교인’이라는 총칭적인 표현에는 동방 지역의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포함된다. 콥트 가톨릭 신자, 칼데라인,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신자, 시리아 가톨릭 신자, 시로-말란카르 가톨릭 신자, 그리스 멜키트 가톨릭 신자, 그리스 가톨릭 신자, 루마니아 그리스 가톨릭 신자, 비잔티움 전례 러시아 가톨릭 신자, 에티오피아 교회와 에리트레아 교회의 신자, 마론파 교회와 우크라이나 교회의 신자가 여기에 해당한다. 
고유의 교구를 운영하는 마론파 교회와 우크라이나 교회를 제외하고, 프랑스에서 모든 종파의 총대리 역할은 파스칼 골니슈 몬시뇰이 맡고 있다. ‘동방 기독교인’에는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그리스 정교회, 콥트 정교회와 같은 동방 정교회의 신자들도 포함된다. 
이들 공동체에 관한 제대로 된 통계가 없는 탓에 프랑스 내 동방 기독교인 이민자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레 카이에 드 로리앙(Les Cahiers de l’Orient)>이 2011년 ‘아랍의 봄’ 발발 이전 상황을 추산한 자료에 따르면, 2008년 중동의 기독교인은 600만~700만 명(이 중 이집트의 콥트 신자가 400만~600만 명)이었고 이는 전체 인구의 약 4%에 해당했다고 한다.(1) 
최근 이 공동체들은 점점 해외로 확산 중이다. 수많은 동방 기독교 교회가 본국만큼이나 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레 카이에 드 로리앙>에 따르면, “마론파 신자의 약 60%, 시리아 정교회와 그리스 가톨릭 교회 신자의 50% 이상, 그리스 정교회와 시리아 가톨릭 교회 신자의 35%가 디아스포라에 해당한다. 아시리아 교회 신자는 2012년 이전에 이라크와 시리아에만 10만 명 정도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유럽, 호주, 아메리카 대륙에도 15만 명이 있다. 아르메니아 교회 신자도 중동에 48만 5,000명(아르메니아 제외)이 있고 서구권에 120만 명 이상이 살고 있다.”  


글·에마뉘엘 하다드
번역·김소연


(1) ‘Chrétiens d’Orient 동방 기독교인‘, <Les Cahiers de l’Orient>, n° 118, 파리 근동지역 연구센터(Centre d’études et de recherches sur le Proche-Orient), Paris, 2015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