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핍박에도 굴하지 않는 팔레스타인 주민들

2022-10-31     알랭 그레쉬 l 언론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군의 끊이지 않는 가자지구 공습과 요르단 강 서안지구 폭격, 이스라엘 정부나 ‘미개인’에 의한 식민지화의 가속,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 위기, 이스라엘과의 군사적 협력에만 관심이 있어 보이는 마흐무드 압바스의 무능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등 팔레스타인 국민들의 시련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평화 협상이 파기되고 2국가 해법이 명백한 실패로 돌아가면서 상황이 더욱 어려워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 어떤 양보도 거부한 채, 현재의 갈등을 악화시키는 종교적 시온주의가 재개한 배경은 무엇일까?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 지 30여 년, ‘두 국가 해법’이 실현될 조짐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가자지구의 무자비한 봉쇄가 계속되는 가운데, 요르단강 서안지구 주민들의 고통은 봉쇄 조치로 인해 더욱 커지고 있다. 이에 팔레스타인 정치 지도부는 크게 동요하고 있지만, 주민들은 굴하지 않고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 

 

“바이든,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 사망증명서에 서명.”(1) 이스라엘 언론인 기드온 레비는 이런 제목의 기사로 2022년 7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중동 방문에서 얻은 중요한 교훈을 전했다. 미국 대통령은 ‘두 국가 해법’을 지지한다고 입에 발린 말을 했지만, “당장은 그렇지 않다”라고 레비는 지적했다. “당장은 그렇지 않다”라면?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결정할 것인가? 정착민들은 스스로 본국으로 돌아갈 것인가? 정착민이 70만 명이 아니라 100만 명이 되면 그들은 만족할 것인가?” 이 <하아레츠> 칼럼니스트는 팔레스타인이 ‘온건’과 ‘서방’이라는 두 카드를 꺼내들던 시절은 끝났다고 말한다. 이제 ‘이스라엘 제품 불매, 투자 철회, 제재(BDS)’ 운동을 금지하는 새로운 법률과 반(反)유대주의와 동일시되곤 하는 반(反)시온주의에 대한 왜곡된 인식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미국과 유럽을 잃었고 그 결과 “미국 토착민(원주민)과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결국 ‘원주민 보호구역’으로 밀려나, 관광객들을 위해 다브케 춤(중동 전통춤의 일종)을 추게 될 것인가? 1967년 6월 아랍-이스라엘 전쟁 이후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외교적, 사회적 상황이 이토록 절망적이었던 적도 없다. 팔레스타인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사막을 횡단하고, 정치적 지도부가 청산되고, 수십만 명이 살던 곳에서 추방돼 난민수용소로 흩어지는 등 이미 고초를 겪었다. 

 

PLO, 팔레스타인 민족의 귀환

그러나 1967년에서 1969년 사이 페다인 조직은 놀라운 일을 해냈고 아랍 국가들의 패배로 남겨진 공백을 메꿨다. 새로운 세대는 무기를 들고 팔레스타인인들 스스로의 힘으로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득세는 이스라엘이 지워버리려 한 민족의 정치적 귀환을 알림과 동시에, 팔레스타인이 세계 정치 지도에서 그 위치를 되찾도록 만들었다. PLO는 몇 년 안에 여러 지역의 난민 수용소, 특히 요르단과 레바논의 난민 수용소에서, 그리고 팔레스타인 점령지인 서안지구, 가자지구, 동예루살렘에서 세력을 굳혔다. PLO는 점차 “팔레스타인 인민의 유일한 대표자”로 인정받았고, 1974년 유엔 총회에서 야세르 아라파트가 한 연설은 이를 확인시켜 줬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이스라엘 선수들 암살도, 1960년대 말 동시다발 항공 납치도, 이스라엘 내 민간인 공격도 PLO의 득세를 멈추지는 못했다. 알제리 독립의 열렬한 옹호자이자 프랑스 점령 기간에 설립된 미뉘 출판사(Les Editions de Minuit)의 대표인 제롬 랭동은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기성 국가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세운 현대전쟁 게임의 규칙을 그들(팔레스타인)이 왜 준수하겠는가?”(2) 유럽에서도, 그리고 공식적인 차원에서도 ‘테러’는 질병이 아니라, 정치적 교착 상태의 징후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1975년, 당시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은 파리에 PLO 사무소를 설치하는 것을 승인했다.

하지만 해방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생각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1970~1971년 요르단에서 축출된 PLO는 1982년에는 레바논에서 추방됐다. 1982년 여름 이스라엘의 베이루트 포위 공격은 유럽의 일부 여론을 팔레스타인인들 편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사브라-샤틸라 학살(1982년 9월 16일에서 18일까지 레바논의 기독교 우익 정당인 카타이브의 민병대가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의 시아파 민간인 수천 명을 학살한 사건-역주)은 말할 것도 없고, 레바논의 수도에서 이스라엘 장군 아리엘 샤론이 동원한 총, 비행기, 탱크의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 그 결과 PLO는 군사적 선택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특히 아랍 정권들이 이스라엘에 맞서기를 포기한 데다, 그중 최강국인 이집트가 1979년에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PLO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PLO 전사들이 튀니지와 예멘 사이의 팔레스타인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흩어지면서 PLO의 무장 작전의 효율성도 더욱 떨어졌다. 그러나 PLO에는 두 개의 카드가 있었다. 인티파다(1987~1993)로 확인된 팔레스타인인들의 PLO 지지와, 1980년 6월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EEC)의 ‘베니스 선언’으로 확고해진, “평화 없는 평화는 불가능하다”라는 국제적 인식, 특히 유럽의 인식이 그것이다. ‘베니스 선언’은 팔레스타인의 자결권과 중동의 모든 협상에 PLO를 참여시킬 필요성을 인정했다.

냉전 종식과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 남아프리카에서 중미에 걸친 다양한 갈등 해결이 만들어낸 낙관론, 수년간 인티파다를 겪은 이스라엘 사회의 피로감, 팔레스타인 탄압에 대한 서방 사회의 격분 등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된 결과, 1993년 9월 13일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 아래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이 평화협정(일명 '오슬로 협정')에 서명했다. 이 평화협정의 주요 내용은 팔레스타인이 5년간 과도기적 자치 기간을 거친 다음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합의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PLO는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영토 전체에 이슬람교도, 유대교도, 기독교도가 공존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서방의 압력으로 포기했다.(3) 그리고, 이 영토에 두 국가가 공존하는 해법, 이른바 ‘두 국가 해법’을 받아들였다.

 

평화 없는 평화협정, 오슬로 협정의 실패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 두 당사자 간의 협정이 아니다. 피점령자에게 매우 불리한 역학관계에서 점령자가 피점령자에게 강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협정 조문은 이스라엘에 유리하도록 매우 모호하게 작성됐다. 일례로, 이 협정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반환해야 할 영토의 식민지화를 중단하도록 규정하지 않았다.(4) 그럼에도, 이 협정이 ‘평화협정’이라 주장할 수 있는가? 

답은 ‘NO’다. 점령자 이스라엘이 각 단계에서 미국의 지지와 유럽연합의 호의를 등에 업고 그의 입장만 관철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오슬로 협정에 명시된 의무 중 극히 일부만 이행됐다. 팔레스타인 정치범 석방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가자항 건설도 중단됐으며,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사이의 ‘안전한 통로’는 5년이나 늦게, 그것도 일부만 개방됐다.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날짜는 신성한 것이 아니다”라고 변명하며 식민지화를 계속 추진했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의 ‘카프카적’(독일어 사전에 따르면, 부조리하고 악몽 같다는 뜻의 형용사-역주) 분할을 요구했다. 협정 이행이 이처럼 계속 지연된다면 팔레스타인의 인내심은 바닥날 것이며, 아라파트가 선택한 협상의 길을 규탄했던 하마스의 입지만 강화될 것이다. 독립과 번영을 불렀어야 할 '평화'는 고통과 박탈감만 가져왔다.

 

팔-이스라엘 국경, 팔레스타인 난민, 이스라엘 정착촌의 미래, 예루살렘 영유권 등 미해결 과제를 풀기 위해 2000년 7월 캠프 데이비드 산장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간 열린 중동평화협상에서도 팔레스타인 당국은 서안지구의 40%에 걸쳐 흩어져 있는 일부 지역에 대해서만 통제권을 인정받았다. 우리는 협상 당사자들의 다양한 증언을 통해, 이 협상에서 이스라엘의 “관대한 제안”은 없었음을 알고 있다. 이스라엘은 서안지구의 10% 이상을 합병하고, 예루살렘 영유권을 유지하며 국경을 통제하고, 이스라엘 정착촌 대부분을 보호하기를 원했다.(5)

그러니 협상 실패는 불가피했다. 하지만 바라크 총리는 협상 실패의 책임이 아라파트 수반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0년 9월 제2차 인티파다가 일어나 사망, 폭탄 테러가 연이어 발생했다. 그동안 바라크 총리는 “아라파트는 이제 평화를 위한 대화 상대가 아니며, 나는 아라파트의 민낯을 보여줬다”라고 이스라엘 국민을 설득했다. 이를 보면 이스라엘의 평화운동가 유리 아브네리가 바라크 총리를 “평화의 범죄자”라 칭한 것도 근거 없는 중상모독은 아니다. 

‘평화 프로세스’의 실패를 아라파트 탓으로 돌리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그 같은 실패의 주범은 ‘양쪽의 극단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스라엘이 정부와 여론을 막론하고 팔레스타인을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것이 협상 실패의 결정적 요인임을 간과하는 것이다. 존엄성, 자유, 안보, 독립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는 그에 대한 이스라엘인들의 권리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돼 왔다. 많은 서구인들이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실이지만, 바로 이런 식민주의적 사고방식이 시온주의 운동의 기원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논란은 이를 증명하고 있다.

2018년 7월 19일, 이스라엘 의회는 “유대인의 민족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제목의 새 기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의 제1조에는 “이스라엘 국가에서 민족자결권을 행사할 권리는 유대인에게만 있다”라고 명시돼 있다. 이는 곧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그런 권리가 없다는 말이 된다. 또 다른 조항에는 “국가는 유대인 정착촌의 발전을 국가적 가치로 보고, 정착촌의 설립과 통합을 장려하며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라고 규정돼 있다. 이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소유의 땅이든, 예루살렘이든, 이스라엘 국민의 땅이든 국가가 몰수할 권리가 있음을 뜻한다. 이 조항은 국제형사재판소가 “한 인종집단의 다른 인종집단에 대한 조직적 억압과 지배의 제도화된 체제”로 정의한 아파르트헤이트 범죄(인종 분리 및 차별 범죄)를 지원하는 조항이라 할 수 있다. 2021년, 이스라엘 인권운동단체 벳셀렘(B'Tselem)은 “요르단강과 지중해 사이에 유대인 우위 정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 뒤를 이어 두 주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와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도 벳셀렘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이 단체들이 중국이나 베네수엘라, 러시아를 비난할 때는 서방으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이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에는 반유대주의라는 비난만이 쏟아졌을 뿐이다. 

이런 비난이 2000년대 이후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프랑스 정치계급의 상당수의 의견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선의를 가진 진실한 사람들조차, 때로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 이스라엘의 새로운 법으로 드러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이스라엘 간의 실제적 차이를 강조하면서,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한 후 유배된 유대인들의 귀향권을 보장받은 이스라엘”의 이미지, 즉 ‘기적’의 이미지를 ‘살려내려’ 한다.

 

시온주의 운동 속의 식민주의

 

19세기 말 시작된 정치적 시온주의 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그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역사는 서구의 세계 정복 운동과 맞물려 있다. 프랑스의 유대인 동양학자 막심 로댕송은 1967년 전쟁 발발 당시 <레 탕 모데른느(Les Temps Modernes)>에 발표한 ‘이스라엘은 식민국가인가?’라는 제목의 유명한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팔레스타인 땅에서의 이스라엘 국가 형성이, 19~20세기 유럽-미국의 대대적인 팽창 운동과 완전히 맞물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두 가지는 타민족을 경제적·정치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완벽하게 일치한다. 당시 정치적 시온주의의 창시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일례로, 그는 남아프리카의 영국인 정복자 중 한 명인 세실 로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계획은 식민화 계획’이라고 썼다.” 

시온주의 운동의 이 같은 식민주의적 성격은 처음부터 식민지 개척자들과 원주민들 사이의 ‘분리’ 정책, 곧 시작될 ‘아파르트헤이트’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남아프리카, 알제리에서처럼 식민지 개척자들은 항상 원래 거주자를 불법 거주자로 간주했고, 이들을 신의 이름이나 ‘문명’의 이름으로 양심에 따라 추방하거나 심지어 학살했다.

로댕송은 ‘유대인’과 ‘성지’를 연결하며 시온주의 식민주의를 ‘특수한 경우’로 만드는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이 글의 목적은 단 하나, 팔레스타인의 땅에서 유대인들이 빼앗아간 모든 역사적 권리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이 글의 독자들이 내 주장에 현혹됐다며 부끄러워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일란 파페는 다음과 같은 명쾌한 표현으로 로댕송과 비슷한 견해를 표현했다. “대부분의 시온주의자들은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신이 자신들에게 팔레스타인을 줬다고 믿는다.(6) 많은 반종교적 서양인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법원이 성경을 소유증서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서로 다른 형태의 ‘정착민 식민주의’들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더 많다. 에이미 캐플란의 연구가 보여주듯,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동조는 유대인의 식민지 건설과 극서부 정복, 무장한 시온주의 정착민과 용감한 카우보이 간의 유사성 때문일지도 모른다.(7)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1948년 이후 ‘분리 개발(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실시하면서 인종차별을 극에 달하게 만든 국민당이 주도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이스라엘과 간의 동맹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당 지도자들은 나치 독일에 대한 동조와 반유대주의에 힘입어 세력을 키웠다. 그들은 그럼에도, 이스라엘과 수십 년간 협력관계를 유지해왔다. 이 협력관계는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이 핵 군사기술을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됐다. 

 

“이스라엘이 꼭 유대인은 아니다”

이스라엘 하이파대학교의 베냐민 베이트할라미(Benjamin Beit-Hallahmi) 교수는 이 부자연스러운 결합의 비밀을 밝혀냈다. 그는 “우리는 유대인을 싫어하면서도 이스라엘인을 좋아할 수 있다. 이스라엘인이 꼭 유대인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정착민이며 전사들이다. 그들은 강인하고 회복력이 있다. 그들은 지배하는 법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8) 전 세계 극우 운동 대부분이 이스라엘에 집결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발언이다. 반유대주의자들도, 이스라엘인들은 “이슬람의 위협에 직면해 지지를 받아 마땅한 백인 정착민”으로 간주한다. ‘테러와의 전쟁’ 시대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은, 야만인에 대항하는 문명의 전초기지로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강조한 사람은 유대인 출신의 오스트리아 기자였던 테오도르 헤르츨(1860~1904)이었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펼쳐졌던 페이지는 넘어갔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모든 전략적 비전과 정당성을 상실했다. 아랍 국가들은 대개 팔레스타인에 등 돌리고 있다. ‘이슬람 테러’에 대항해,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에 대항해 결집하는 서방이 막상 팔레스타인 드라마에서는 딴전을 피우고, 최악의 경우 이스라엘이 2022년 8월 가자지구 공습처럼 적대행위를 먼저 시작할 때조차도 “이스라엘의 자기 방어권”을 인정하면서 이 나라를 테러와의 전쟁의 최전선으로 본다. 유럽연합은 ‘두 국가 해법’을 옹호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해법을 묵살하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식민화 정책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제재도 가하지 않고 방관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직면한 도전의 심각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헛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베트남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해방 투쟁 이후 가장 규모가 큰 글로벌 연대 운동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이밖에도 다른 중요한 자산을 갖고 있다. 가령, 팔레스타인인들은 ‘역사적 팔레스타인’(요르단 서안과 가자지구, 이스라엘까지 포함한, 이스라엘 건국 전 팔레스타인인들의 땅-역주) 인구의 절반을 대표한다. 또한 팔레스타인인들으 그들을 영토에서 몰아내려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경험과 망명 혹은 점령 속에서 단련된 결의, 그리고 2021년 5월 예루살렘에서 가자지구, 하이파에서 예닌까지 전 지역에 걸쳐 일어난 봉기가 보여준 흔들리지 않는 민족의식을 지녔다.

그들은 끈질기고 완고하게 저항하며 항복을 거부한다. 프로이센의 군사전략가였던 칼 폰 클라우제비츠(1780~1831)가 말했듯, “전쟁이 자국의 의지를 상대 국가에 강요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스라엘은 실패한 셈이다. 적어도 이 목적에 있어서는 말이다. 

 

 

글·알랭 그레쉬 Alain Gresh
온라인 신문 <Orient XXI> 편집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편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 이슬람과 서양문화의 융합 가능성 등을 전문적으로 집필하고 있다.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


(1) <Haaretz 하아레츠>, 텔아비브, 2022년 7월 16일.
(2) Jacques Vergès, 『Pour les Fidayine 피다인을 위하여』의 서문, Éditions de Minuit, Paris, 1969.
(3) El-Fatah, 『La Révolution palestinienne et les Juifs 팔레스타인 혁명과 유대인』 (1970년 초판 발간), Orient XXI et Libertalia, Montreuil, 2011. 
(4) Alain Gresh, 『Israël, Palestine, vérités sur un conflit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진실』, Fayard, Paris, 2007. 
(5) Amnon Kapeliouk, ‘Retour sur le sommet de Camp David 캠프 데이비드 정상으로의 귀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2월호.
(6) 시온주의 운동의 창시자들은 대부분 신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종교적 시온주의가 발전한 오늘날 시온주의자들은 또 다르다.
(7) Amy Kaplan, 『Our American Israel. The Story of an Entangled Alliance』,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18.
(8) Alain Gresh, 『De quoi la Palestine est-elle le nom? 팔레스타인은 무엇의 이름인가?』, Les liens qui libèrent, Paris, 2010. 

 

추방법

 

내년 11월 이스라엘 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종교적 시오니즘 성향의 극우 정당 대표 이타마르 벤그비르는 최근 이스라엘군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방법’ 제정에 찬성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집권하면, 나는 ‘추방법’을 시행할 것입니다. 이 법안은 이스라엘 국가나 군대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추방할 것입니다(...). 군인들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사람들은 국가에서 추방될 것입니다 (...) 아마 유럽으로 추방되겠죠. 그곳에는 일할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출처: “If elected, I will deport anyone who acts against the State of Israel - Ben-Gvir 내가 선출되면,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추방할 것이다”, 벤그비르, <예루살렘 포스트>, 2022년 8월 16일.

 

관대한 제안

 

“우리는 당신들에게 역사상 가장 큰 예루살렘을 제안한 것입니다.” 이는 2008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 간의 평화협상에서 팔레스타인 협상 대표 사에브 에라카트가 당시 이스라엘 외무장관이었던 치피 리브니에게 한 말이다. 이는 PA의 중대한 양보였다. PA는 특히 이스라엘이 요르단 서안지구, 헤브론, 가자지구의 일부 땅(1967년 제3차 중동전쟁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의 남은 땅 22% 중 약 5%에 해당하는 땅)을 팔레스타인에 반환하는 대신, 동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정착촌 대부분을 이스라엘 영토로 넘기겠다는 제안을 했다. 1967년 이스라엘군이 22%를 정복했다.   

 

출처: “The Palestine Papers 팔레스타인 문서”, <알자지라>, 2011년 1월.

 

아랍권의 거부감...

 

‘아랍 바로미터’(BBC방송과 미국 프린스턴대 소속 여론조사기관-역주)가 아랍 세계에서 미국과 중국 간의 경쟁에 대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수단 응답자의 39%와 모로코 응답자의 31%(2021년 6월 41%)가 자국과 이스라엘 간의 지속적인 정상화에 찬성했다. 조사 대상 9개국 중 8개국에서, 미국의 중재 하에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모로코, 수단이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에 합의한 ‘아브라함 협정’을 지지한다는 응답은 20% 미만이었다. 이스라엘과 오랫동안 수교 관계를 유지해 온 이집트와 요르단에서 그 비율은 약 6%로 더 낮았으며, 모리타니(8%), 리비아(7%), 팔레스타인(6%)에서도 비슷한 수준으로 낮았다.   

 

출처: “Public Views of the U.S.-China Competition in MENA : normalization of relations between Arab states and Israël,  MENA(중동·북아프리카지역)에서의 미중 경쟁에 대한 대중의 견해: 아랍 국가와 이스라엘 간의 관계 정상화”, arabbarometer.org, 2022년 7월.

 

튀르키예의 실용주의

 

10년 이상 갈등 관계에 있던 이스라엘과 튀르키예가 8월 17일 양국의 외교 관계를 전면 복원하고 양국 대사와 총영사를 복귀시키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결정에 일부 유권자들의 격렬한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4월 19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자신의 소속 정당인 정의개발당(AK Parti) 의원들 앞에서 이 화해를 정당화하면서, “우리와 이스라엘의 정치-경제적 관계와 예루살렘 문제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과 수용 가능하고 합리적이며, 일관성 있고 균형 잡힌 관계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명분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