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 혹은 ‘바닥을 향한 경쟁’
정보화 시대의 역설적 혼란
1989년 팀 버너스리가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 사이에 정보 공유를 쉽게 하기 위해 글로벌 하이퍼텍스트 공간 개념을 제안할 때만 해도, 디지털이 정보의 간격으로 인해 발생하는 세상의 혼란을 구원해줄 것으로 믿었다. 불과 20여 년이 흘러 인터넷의 세계는 빛만큼이나 빠른 네트워크를 갖추었다. ‘클라우드’란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저장장치는 마치 블랙홀처럼 끝없는 크기로 시간과 공간의 속박을 풀고 온 세계의 모든 콘텐츠를 저장한다. 네트워크로 묶인 세계를 누가 고안하고 제안했는지 따질 짬도 없이 ‘집단지성’이라는 중앙처리장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퍼스널 컴퓨터의 보급에서 시작된 세계의 디지털화는 ‘원하는 것을 언제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실시간 혁명의 시대를 구현하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이를 <세계는 평평하다>(2005)라는 책에서 기술적 우월도 위계서열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로 규정했다. 얼핏 유토피아적인 모습이지만 그 결과는 혼란스럽다. ‘모든 사람이 모든 것에 관해 말하면서 과부하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노르베르트 볼츠, <세계를 만드는 커뮤니케이션>, 2009)이 높아진 탓이다. 68세대 이후의 독일 인문학을 대표해온 볼츠는 “당신의 손가락 끝에서 정보를”이라는 구호가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더 많은 가치는 더 적은 정보”를 일컫을 뿐이라고 말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쓰레기 정보를 치우는 일은 중요하지만, 쓰레기 처리 시스템은 쓰레기가 만들어진 다음에 만들어진다. 볼츠의 규정대로 더 많은 가치를 갖는 정보는 더 적을 수밖에 없어 쓰레기화한 정보와 구별하기란 거대한 진흙탕 속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찾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럼에도 세계는 왜 정보의 확산을 멈추지 않는 걸까?
‘굿바이, 구텐베르크! 신문·책을 잃고 울다’라는 부제를 단 <미디어 혁신에 관한 거의 모든 시선: M-everything>은 그 이유를 유쾌하게 설명해주지 않지만 짐작은 할 수 있게 하는 방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디지털 변화가 시작된 이래 수많은 학자와 저술가들이 분석해 묶어낸 ‘책’들이 이 책 곳곳에서 인용구를 달고 고개를 내민다. 세계 굴지의 미디어들이 생존을 위해 벌이는 이전투구도 여기저기 발견된다.
‘24년째 기자생활 중’인 저자는 일간신문에서 주간지와 월간지까지 다양한 언론사 생활에서 체득한 현장성과, 저널리즘과 디지털출판학을 공부한 강단의 언론학 이론을 배경으로, 책 제목 그대로 ‘미디어 혁신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준다. 물론 ‘더 많은 가치를 담은 더 적은 정보’를 찾아내는 일은 책을 읽는 이의 몫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이유는, 이 책이 미디어와 저널리즘에 국한된 정보만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디어 혁신을 이끄는 정보기술(IT)은 실시간 혁명 시대를 건너야 하는 우리 모두에게 유용할 뿐 아니라 재미도 준다. 저자가 머리말에 썼듯이, “기술의 혁신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이뤄졌지만 오늘날 겉으로 드러난 변화는 거의 미디어에 집중돼 있는 듯하다”.
수십 년 쌓은 지식이 손가락 하나의 터치로 열리는 검색창과 경쟁할 수밖에 없도록 기술은 발전했다. 발전한 기술은 수백 명의 기자가 수백억원의 비용이 들어간 장치를 이용해 생산한 콘텐츠를 초등학생의 블로그와 경쟁해야 하는 운명의 장으로 내몰고 있다.
언론의 위기는 자승자박인가
저자는 이런 현실을 수직적 기득권을 가진 올드미디어와 수평적이고 도전적인 뉴미디어의 대결이라고 규정한다. 뉴스코퍼레이션 회장 루퍼트 머독은 구글을 ‘신문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뉴스를 도둑질하는 도벽환자’라고 비난하고, 구글의 에릭 슈미트는 수많은 트래픽을 주고 있는 데 무슨 말이냐며 머독을 반박한다. “만약 검색 결과에 자사 기사가 있는 게 싫다면 간단하게 뺄 수 있다”는 슈미트의 말은 협박이 아니라 현실이다. 한국 언론도 ‘네이버’를 통하지 않고서는 자사의 사이트로 독자를 유입하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틈새시장이나 전문적인 시장은 (유료화가) 가능할 것 같지만, 전체 뉴스에 대해 돈을 받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는 슈미트의 견해는 ‘제4부’로 불리던 언론이 존재를 걱정할 수밖에 없게 된 현실에 대한 지적이자 언론이 변화해야 할 방향이기도 하다.
종이 신문을 중심으로 한 기존 언론에 대한 경고는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있어왔다. 뉴미디어가 가져올 위기에서 탈출하려면 지역화와 전문화를 서둘러야 한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본과 정치권력의 대변인이 된 언론은 그 길을 선택하기 힘들다. 정작 그 길은 새로운 미디어들이 새로운 기술로 무장하고 걸었다. 한국 언론 역시 포털 사이트의 콘텐츠 공급자로 스스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미 언론은 1830년대에 유행한, 오로지 대중의 관심을 좇고 광고 수익만 기대했던 페니신문(Penny Press)과 너무 닮았는지 모른다.
기존 언론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갖게 된 소셜미디어는 스스로 영욕에 찌들어 퇴락의 길로 접어든 기성 언론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성장해가고 있다. 저자는 그 힘을 미국의 사회학자 마크 크라노베터의 말을 빌려 느슨한 관계에서 찾는다. “소셜미디어는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를 지원하며 사람들을 콘텐츠 소비자에서 생산자로…”라는 위키피디아 인용글은 저자가 소셜미디어에 거는 기대를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만, “소셜미디어가 미래 주류 미디어로 각광받을 것이다. (중략) 마케팅을 포함한 사업적인 것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점으로 꼽은 것은 우려스럽다. 사람을, 사회를 이롭게 하는 목적에서 벗어난 언론은 더 이상 언론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라진 페니신문과 운명을 같이한 거리의 무가지도 그 목적은 공기로서 언론이 아니라 돈벌이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조직이든 먹고사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디지털 시대의 언론사들 역시 편집과 경영의 벽을 허물고 보도와 사업을 혼재시키며 새로운 존속의 길을 찾고 있다. 저자가 ‘디지털 뉴이코노믹스’에서 논한 하이퍼링크경제학, 관심경제학, 롱테일경제학이 그가 걱정하는 “구텐베르크와 작별을 고하고 책의 장례식을 치른 뒤의 상실감”을 어떻게 보상해줄지는 여전히 혼돈 속에 있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저자는 ‘다운시프트 & 보살핌의 경제학’, ‘심리학과 결합한 행동경제학’ 등으로 디지털 뉴이코노믹스를 정립해가야 한다고 끝을 맺는다.
낙원과 지옥 사이, 의지적 낙관의 힘
뉴미디어가 만드는 새 디지털 세상은 사람에 따라 낙원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발전은 낙관론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괴짜들이 만드는 새로운 세상은 권력욕에 불타는 이들이 만드는 세상보다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닐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연 팀 버너스리는 정보 공유를 통해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으로 월드와이드앱의 특허를 세상과 공유했다. 머뭇거리면 날은 곧 저문다.
글 / 윤승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