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에서 키이우까지, ‘조국을 위한 죽음’
20세기에 벌어진 대량살상과 제국주의적 광란은, ‘애국적 죽음’을 칭송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에게 침략을 당한 후, 이런 부정적 시각이 바뀌었다. 자국을 지키려는 우크라이나인의 애국심을 부정할 수 없다. 이들의 죽음 앞에서 조국을 위한 희생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는 줄었다. 어떻게 이 전사자들이 전쟁에 부여했던 의미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고대 아테네의 정치인 페리클레스가 말했던, ‘조국을 위한 죽음’이라는 표현을 처음 인용한 인물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다. 이 간결하고 비극적인 문구는, 아테네 전사자들을 기리는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1) 페리클레스는 약 25년 동안 벌어진 아테네-스파르타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도사를 맡았다. 페리클레스는 전사자 추모연설에서 군인들의 죽음과 시민들의 시련에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아테네인들은 적을 피해 성벽 안에 숨어, 스파르타 군과 그들의 동맹국이 토지를 약탈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벽 뒤에서 몸을 움츠린 채, 자신의 집과 수확물이 파괴되는 것을 목격하는 끔찍한 시련을 겪은 것이다. 대체, 왜 이런 시련을 감내하는가? 페리클레스는 아티카 등지에서 전사한 보병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며, 이런 희생정신을 가질 수 있었던 아테네인들과, 아테네의 장점을 열거했다.
아테네는 훌륭한 제도를 갖췄으며, 예술과 올바른 삶의 기쁨을 중시하는 시민들이 일군 민주주의와 사회연대 덕분에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아테네 시민들은 전쟁의 참상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주저 없이 전쟁터로 나가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바로 적들에게는 없는 ‘무기’, 바로 대의명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군주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조국을 위해 싸웠다. 충만한 삶을 누렸던,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이런 죽음은 인류애적인 의미를 가졌다. 이들은 명분 없이 싸우는 적들과 달리 도덕적 자부심을 느꼈고, 이는 승리의 원동력이 됐다.
이들은 무엇을 얻었을까? 자신의 명예만을 위해 싸웠던 전사들은 결국 하데스를 따르는 망령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조국과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영웅들은 추앙받았다.(2) 그리고 페리클레스의 예고대로 과오를 용서받고, 구원 받았다. 영생이라는 보상을 받은 것이다. 죽음으로 영생을 얻는 역설적인 구원 방식은 기독교와 함께 자리 잡았다.
이후 전사에 부여했던 종교적 의미는 점차 희미해졌다. 프랑스 혁명 전, ‘앙시앵 레짐’ 하에서 군인들은 전사할 경우 그 시신이 묘지도 없이 버려졌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 전쟁은 다시 고결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프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파리 시민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했을 때 프랑스군이 불렀던 ‘라인군을 위한 군가’는 조국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조국은 국토뿐만 아니라 집, 농토, 가족을 의미했다. 이 군가가 바로 지금의 프랑스의 국가인 ‘라 마르세이예즈’다.
1792년 프랑스는 프로이센군 공격 위협에 실질적으로 직면했다. 당시 조국은 민족, 지방, 도시, 마을, 토지, 가족을 뜻했다. 이렇게 실체가 있는 조국은 애국적인 희생에 다양하고 절대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
침략자들은 국경을 침범함으로써 공격을 본격화한다. 그리고 만행을 일삼으며 낙인찍힌다. 일례로 1914년 독일의 벨기에 침공을 들 수 있다. 당시 중립국이었던 벨기에는 공격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독일은 이를 무시하고 벨기에를 침공했다. 이런 독일군의 만행에 대한 비난이 일었고, 벨기에 동맹국들은 이 사실을 보도했다(일부 왜곡도 있었다). 이런 경우 엄격한 논리에 따라 정당한 명분을 가진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이렇게 둘로 나뉠 수 있다.
‘조국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이, 실상 자신과 가족, 이웃을 지키는 것이라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과연 구원의 약속이라는 게 중요한 것일까? 사실 전쟁터에서 성직자들은 적들의 침략 동기가 무엇이든, 설령 이유가 없다고 해도 침략자들도 구원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위로해왔다. 침략자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내세우는 이유는 다 있지 않았던가?
침략자에게 ‘애국적 죽음’이란 없다
게다가 전사에 대한 종교적 정당성도 작용하고 있었다. 권위 있는 역사학자 에른스트 칸토로비치는 중세 말기 애국적 죽음의 기원에 대해 연구했다.(3) 그는 세계 1차 대전 당시 일어났던 놀라운 사건을 계기로 연구를 시작했는데 당시 벨기에 리에주 주교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군인들에게 영생을 보장하리라는 설교를 한 것이다. 모두가 이런 가톨릭교회 교리의 해석을 납득한 것은 아니다. 특히 리에주의 독일 주지사의 비위에 거슬렸다. 당시 베트만 홀베크 독일 총리가 비유했듯 ‘휴지 조각’ 같은 1839년 런던 조약으로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했으나, 벨기에는 독일로부터 침공을 당했고 리에주는 점령상태였다.
병사들은 ‘애국적 죽음’에 대한 찬양을, ‘능력 인정’으로 인식했다. 그런 영예를 우리가 취하거나, 적어도 적이 가지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이렇게 상반되는 명분은 상호 충돌하기도 한다. 극단적 평화주의는 다소 모순된 면을 보이는데 원래 평화를 주장하는 ‘전쟁과의 전쟁’이라는 격언도 세계 2차 대전에 대한 혐오감을 막고 저지할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전쟁은 자국의 영웅적인 전사와 반대편에 있는 치욕스러운 적의 대립이 됐다.
용병이나 징집병의 죽음과 고통에 대해서도 정당한 이유를 부여해야 한다. 그래서 군 수장들은 적극적으로 이들을 ‘영웅’이라고 치하한다. 러시아의 블라드미르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침공 3~4일 만에 자국의 ‘영웅’과 우크라이나인을 대립시켰다. 어떻게 이런 중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러시아를 위해 목숨을 바친 러시아군은 없으며, 우크라이나를 점령하는 것이 그 나라를 돕는 것이라 생각한 러시아군은 더더구나 없다. 이들 대부분이 전쟁의 목적도, 심지어 적의 정체도 몰랐다면 조국을 위한 희생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대개 군은, 여전히 사람의 생명을 존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이미 2차 대전이 벌어지는 최악의 상황에서 제기된 바 있다. 언어학자 빅토르 클렘페러는 나치독일의 언어에 관한 저서에서 영웅주의에 대해 설명하면서, 독일인들이 “장렬하게 전사한 영웅들과 독일 장병들이 있었다”라고 자랑했던 사실을 전해준다.(4) 마치 나치 친위대(SS, Schutzsraffel)와 대량 학살자들이 영웅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는 것처럼, 그 학살자들이 마치 대단한 명분을 지키기 위해 희생이나 한 것처럼 말이다. 이는 ‘희생’도 정당하지 않은 것이 있고, 심지어 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언어학자 클렘페러는 이 군인들을 영웅이라 칭할 수 없다고 했다.
영웅적 죽음은 바람직한 사명을 가진 자에게만 해당된다. 조국을 위한 죽음과 전투에서 보이는 호기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죽음 그 자체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즉 평범한 것이다. 이제 ‘애국적인 죽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해야 한다. 그래야 파렴치한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일삼는 날조를 막을 수 있다.
애국적 죽음이란 침략을 당한 ‘피해자’이자, 부당함에 맞서 싸웠던 ‘저항자’의 죽음이다. 침략군에게 애국적 죽음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글·알랭 가리구 Alain Garrigou
파리 낭테르 대학교 정치학과 명예교수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Thucydide, 『La guerre du Péloponnèse 펠로폰네소스 전쟁』,Licole Loraux, 『L’invention d’Athènes 아테네의 발명』, Paris, Payot, 1993년.
(2) Jean-Pierre Vernat, 『L’individu, la mort, l’amour. Soi-même et l’autre en Grèce ancienne 개인, 죽음, 사랑. 고대 그리스에서 자신과 타인』, Paris, Seuil, 1989년.
(3) Ernest Kantorowicz, 『Mourir pour la patrie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다』, Paris, PUF, 1984년.
(4) Victor Klemperer, 『LTI. La langue du IIIe Reich, 제 3국의 언어』, Paris, Pocket,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