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민 거주지 강제 지정의 다른 이름
1940~1946년의 유랑민 박해 수단
강제 노동, 여행 금지, 물자 제한, 거주지 지정… 이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법이 ‘유랑민’이라고 지정한 약 2만 명에게 취한 조치였다. 그 중 ‘거주지 지정’은 이들 중 대다수에게 가해졌다. 당국은 이 제재를 유랑민들에게 종종 가했으나, 역사학자들은 이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1940년 4월 6일 프랑스 법령은 수도 전역에서 유랑민들의 통행을 금지하고 거주지 지정을 명령했다. 이 법령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 내 집시 무리나 여행자들을 박해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알베르 르브룅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폴 레노(외무부 장관 및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국방부 장관 및 전쟁 장관), 알베르 세롤(법무부 장관), 앙리 루아(내무부 장관)는 유랑민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해당 보고서에 따르면, 유랑민은 “국가 안보와 기밀을 위협하는 요소”(1)라는 것이다. 이 4명의 장관은 ‘유랑민’을 ‘노점상, 기업가, 상인’과 구분하면서, “유랑민의 이동을 허용하면, 그들이 군대 이동, 부대 주둔, 방어시설의 위치 등 중요한 정보를 적에게 빼돌릴 위험이 있다”고 적었다. 이 장관들은 군사지역 지휘관들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 “유랑민의 이동을 금지하고, 경찰 및 헌병의 감시 하에 이들의 거주지를 강제 지정해야 한다”라고 제안했다.
1939~1946년 프랑스 내 유랑민 강제 거주지는 수백 개에 달했다. 거주지 지정 명령을 내릴 때 일부 도지사들은 유랑민이 거주할 지역은 물론, 구체적인 장소까지 지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른(Orne)에서는 4개 장소가 지정됐다. 쿠르토메르는 헌병대 초소 부근에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150m 길이의 도로를 정비했다. 페르방셰르에서는 경기장이 지정됐고, 란(Rânes)에서는 RN 809번 국도의 N 출구 쪽 도로 양측에 두 줄로 심어진 나무 아래 구역이 정해졌다. 파세에서는 ‘개인 소유의 비경작 공터’도 징발됐다.(2) 이 네 지역의 공통점은, 각 지역의 중심지에서 아주 멀리 있었다는 것이다. 유랑민들의 주요 거주지였던 알랑송, 플레르, 아르장탕은 거주지 인근에 헌병대 초소가 있었다. 오른 도지사는 유랑민들의 거주지 근처에 생필품을 구할 곳이 있는지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주거용 마차(트레일러)가 있는 가족들은 지정 장소들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인들이 들어왔을 때 많은 이들이 마차를 버려야 했다. 그러자 도지사는 지낼 곳도, 마차도 없는 사람들에게 거주지를 지정해줘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어떤 도지사들은 이들에게 창고를 구해주거나, 드물게는 집을 구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도지사들도 있었다.
1945년 11월, 샤를 바이스는 니에브르 도지사에게 서한을 보냈다. 서한의 내용은 “가족들이 지낼 숙소를 찾아야 하니, 이동을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샤를 바이스의 서한에 따르면, 그의 가족은 5년 동안 생솔 주의 마을에 갇혀 있었다. 그는 아내와 9명의 어린 자녀들과 함께 어느 마차에서 지냈는데, 그중에는 생후 3개월에 불과한 영유아도 있었다.(3) 그들 가족이 마차에서 보낸 몇 년간 겨울은 몹시 혹독했다고 한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니, 가족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니에브르 도지사는 샤를 바이스의 편지를 내무부 장관에게 보내, 언제 이들의 거주지 지정이 끝날지 물었다. 그러나 장관은 샤를 바이스의 이동을 허가하지도, 그의 가족을 위해 집을 구하지도 않았다. 어떤 지정 거주지에서는, 마차도 없어서 다른 사람의 마차 밑에 짚을 깔고 자는 이들도 있었다. 아나 라그레네 페레는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는 마차 밑에서 잤다. 아버지는 부서진 집에서 벽돌을 가져다가 전부 포장마차 밑에 하나하나 쌓았다. 농장에서 얻어온 짚도 깔았다. 우리는 아이들과 넝마를 깔고 잤다.”(4)
“유랑민들이 감옥을 더럽혔다”
마차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도지사가 건물을 구하는 일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대부분 적절하지 않은 장소들이었다. 1940년 11월 오뷔송 군수는 폐쇄된 오뷔송 감옥 건물에 유랑민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감옥이라고 해도 지정 거주지였기에, 건물을 정비할 예산은 없었다. 남녀노소 모두 바닥에서 잠을 잤다. 지정 거주지에서는, 바닥재를 가져다가 불을 지피는 것도 금지됐다.
상황이 이토록 비참함에도, 오뷔송 경찰서장은 “유랑민들이 감옥을 더럽혔다”라고 군수에게 서한을 보냈다. 그리고는 “유랑민의 수가 너무 많아졌으니, 국가경제를 위해 남자들은 노동 수용소로, 여자들은 아르젤레스 수용소로 이송할 것”을 요청했다.(5)
당국은 어떤 기준으로 지정 거주지를 선정했을까? 여러 서신들을 참고하면, 몇 가지 공통적인 기준이 있다. 그 첫 번째는 ‘경찰서와 가까운 곳’이다. 어떤 곳은 헌병대 초소에서 100m 이내에 있거나, 경찰들이 매일 순찰을 도는 길목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두 번째는 ‘근처에서 물을 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물을 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역 당국이 조치를 취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당국이 가장 중요시한 기준은, ‘사유지가 아니면서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곳’이었다. 시장들의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도지사들은 거주지 지정을 강행하곤 했다. 시장들은 명령을 수락하되, 조건을 걸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꺼리는 열악한 곳에 한해 유랑민들에게 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40년 4월 말, 베지에르 군수와 베지에르 헌병대장, 의사 한 명이 에로(Hérault)의 도지사가 유랑민 거주지로 선정한 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니자로 갔다. 그곳은 니자와 클로 사이 고원에 위치한 “풀이 무성하고 곳곳에 작은 덤불들이 있는” 황무지였다.(6)
세 사람은 그곳이 인근 지역 주민들의 쓰레기장임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곳에서 물을 구하려면 아주 멀리 떨어진 니자 세탁장까지 가야 했다. 또한 그곳은 지질학적으로 현무암 지대로, 물이 스며들지 않아 홍수 위험이 있는 곳이었다. 세 사람은 이곳이 유랑민 거주지로 적합하지 않은 이유를 에로의 도지사에게 설명했지만, 도지사는 듣지 않았다. 베지에르 군수는 “이곳은 유랑민들을 감시하기도 어렵고, 그들이 물이나 식량을 구하러 니자로 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라고 덧붙였다.
대부분의 지정 거주지들이 마을 중심지에서 너무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유랑민들은 마을에 자주 올 수 없었다. 바르의 도지사는 아윕스(Aups) 부근의 어느 숲을 지정 거주지로 선정했다. 도의 서신들에는 이 장소가 ‘셴 수용소’라고 적혀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 내 유랑민들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반(反) 집시주의의 희생양이 됐다. 제3공화국은 군사적 패배 이전에도 이들의 거주지를 강제로 지정했다. 비시 정권과 점령군은 1944년 9월까지 이 정책을 유지하고 강화했다. 프랑스 임시정부는 ‘1940년 4월 법령’이 폐지된 1946년 7월까지 거주지 지정을 연장했다.
글·리즈 푸아노 Lise Foisneau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연구원. 『Les Nomades face à la guerre (1939~1946) 전쟁을 맞닥뜨린 유랑민들(1939~1946) 』(Kincksieck, Paris, 2022년 1월 출간)의 저자(발랑탱 메를랭과 공저). 이 기사는 이 책에서 발췌했다.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프랑스 총리 폴 레노가 제출한, 수도 전역에서 유랑민들의 이동을 금지하는 1940년 4월 6일 법령 및 보고서.
(2) 오른 도지사에게 제출한 헌병대 보고서, 오른 도청 문서보관소, 1940년 5월 13일.
(3) 샤를 바이스가 니에브르 도지사에게 보낸 서한, 코트 도르 도청 문서보관소, 1945년 11월 21일.
(4) 2019년 3월 9일 기파바에서 수집한 아나 라그레네 페레의 증언.
(5) 오뷔송 경찰서장이 오뷔송 군수에게 제출한 보고서, 크뢰즈 도청 문서보관소 1940년 11월 14일.
(6) 베지에르 군수가 에로 도지사에게 보낸 서한, 에로 도청 문서보관소, 1940년 1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