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디약의 아이들

2022-11-30     파스칼 코라자 | 기자

2005년 프랑스 월간지 <뤼마니테(L’Humanité)>는 ‘공포의 땅에서 잊힌 사람들’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1,000개에 달하는 무덤이 똑같이 생긴 철 십자가와 함께 늘어서 있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시간의 무게 속에 무너져 내리는 무덤들. 이것들이 이어지는 작은 길 위에 인간의 대퇴골, 턱뼈, 두개골 가루가 조약돌과 뒤섞여 있다.” 

납골당에 안치된, 비닐봉지에 담긴 유해를 보고 있노라면 이름 없는 십자가가 그나마 덜 끔찍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롱드 주에 있는 도시 카디약에 있는 ‘잊힌 자들을 위한 무덤’의 모습이다. 이 무덤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정신병원’의 역사와 연관이 깊다. 1923년에 문을 연 이 병원은 전쟁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군인들을 수용했다. 땅 전체가 철 십자가 하나만 꽂힌 이름 없는 묘지들로 가득 차 있다. 『카디약의 아이들』(갈리마르, 2021)에서 프랑수아 누델만은 카디약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후 이 무덤에 묻힌 자신의 조부 이야기를 다뤘다. 

“나의 조부도 마찬가지였다. 이 장소는 이제 막 정리를 마쳤고, 사망자들은 이제야 자신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누델만은 기뻐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문제를 지적하려는 듯하다. “굳이 ‘장엄한 역사를 집필하고자’ 자신과 조상의 과거를 캘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나 자신과 연관된 과거의 일부만이라도 알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다른, 즉 과거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 ‘이미 미라가 돼버린 사람들’에게 집착하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집착? 오히려 그 반대다. 사실 나는 그들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거리를 두고, 냉정하게 바라보고 싶다. 그들의 이야기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면, 후손들을 짓누르는 비밀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 비밀은 우리를 짓누르지 못할 것이다”.

2012년, 프랑수아 누델만은 『이탤릭체 여행』(1)을 출판했다. 1944년 10월에 돌아가신 조부를 추모하고 그분께 무덤을 만들어 드리고자 쓴 책이다. 부모님 묘를 쓰지 못한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 금기를 어긴 일은 이미 그리스에서 있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듯하다. 그는 탐방 기사를 쓰던 중에, 스페인 공화파의 한 후손을 만났다. 그 후손의 삼촌은 시체 더미 구덩이에서 남동생을 찾기 위해 애썼고, 스페인 내전 동안 프랑코 장군이 이끈 반란군에 맞서 시민군 병사로 최전방에서 용감하게 싸웠다.

 

스타인벡의 소설 속 ‘리청’처럼

 

 

나는 그 후손의 이름은 잊었다. 그 대신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의 소설 『통조림 공장 골목(Cannery Row)』에 등장하는 중국인 ‘리청’이다. “할아버지의 뼈에 한없는 애정을 보였던” 리청은 차이나타운 무덤에서 할아버지 시신을 꺼내어 그의 후손이 사는 중국으로 보낸다. 2000년 내가 마침내 내 조부의 흔적을 찾았을 때, 그의 시신은 이미 화장된 채 이 납골당에 안치돼 있었다. 그래서 나는 리청처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20년 후, 복원을 마친 카디약 정신병원 출신자들이 매장된 이 무덤에 다시 한번 발을 디뎠을 때, 강철로 된 거대한 판 위에 나의 조부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땅속에 파묻혔던 이름이 마침내 나왔다. 그 이름이 (알파벳 순서 때문에 우연히도) 땅바닥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정부는 나의 조부가 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그의 이름을 전사자 명단이 적힌 벽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상관없다. 내 뇌리를 가득 채운 것은 자신의 고향과 멀리 떨어진 타국에 묻힌 세네갈 군인들이었다.

두 가지 침묵의 법칙이 있다. 하나는 가족이 강요하는 법칙, 다른 하나는 정부가 규정한 법칙이다. 이 두 법칙이 때로는 서로 겹치면서도 전혀 연결되지 않은 점이 놀랍다. 가족 사이에 존재하는 법칙이라 해서 덜 엄격한 건 아니다. 비극을 겪은 세대는 그 비극을 언급하지 말 것. 2세대는 자신이 아는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 것. 

그러나 3세대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원한다. 나는 조부가 죽은 원인을 알기 위해, 삼촌의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몇몇 기억을 하나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꼭꼭 숨겨진 기억을 파내려니 또 다른 법칙과 마주쳤다. 의료기록을 보호할 것. 나의 조부가 돌아가신 후 50년간 누구도 그의 의료기록을 건드리지 못했다. 나의 조부는 당신의 아내를 죽이고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에 법원은 그가 자신의 행동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판단했고, 결국 그는 구치소 대신 정신병원에 갇혔다.

나의 조부를 진찰한 첫 번째 의사는 그가 알코올 중독자라고 판단했다. 그 후 다른 의사는 “알려지지 않은 신진대사 문제”라는 가설을 내놓았다. 어느 의사도 나의 조부가 1917~1918년 이탈리아 최전선에서 싸운 군인임을 파악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 스트레스장애)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때였다. PTSD가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에 포함된 것은, 베트남 전쟁 이후인 1980년이다.

 

무명의 4,464명, 마침내 그 이름을 되찾아

이후 나는 8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독일의 프랑스 점령 시기 관련 병원 자료에 접근하기 위한 기다림이었다. 이 자료들은 법이 개정된 후 2008년에 지롱드 주 기록보관소로 이전됐다. 자료들이 이전된 다음 해, 나는 보르도로 향했다. 대중에게 60년이나 접근이 금지됐던 자료를 열어보기 위해서였다. 비밀의 역할은 가족을 지키는 데만 있지 않다. 그것은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역사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해 준다. 

나는 나의 조부가 사망한 원인이 ‘결핵 환자가 일으키는 발작’ 다시 말해 ‘아사’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동안 정신병원 직원들이 암거래한 사실도 알게 됐다. 기록보관소를 ‘뒤진’ 것은 아니었다. 풍문을 바탕으로 자료를 연구했다. 카디약의 정신병원에서 벌어진 일은, 인간이 어디까지 비열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였다. 

아사로 사망한 이의 일대기를 쓰는 것은 “다른 시대를 살았던 미라를 동정”하기 위함이 아니다. 광기 속에 죽어간 이에게 인격을 부여하기 위함이다. 일명 ‘범죄자의 유전자’ 같은 유전적 측면을 캐내기 위함도 아니다. 삶이라는 측면에서 한 인간을 광기 속에 몰아넣은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함이다. 세 번의 전쟁으로도 부족했는가? 

17세 당시, 나의 조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군에 맞서 전방에서 싸웠다. 그가 23세가 됐을 때, 파시즘 체제에 맞서는 분쟁이 있었다. 40세, 독일군은 조부의 농장 바로 앞에 독일 점령지와 자유 프랑스 사이에 두는 경계선을 세웠다. 그가 더는 기억하지 못하는 광기의 몇 분 때문에, 그가 이성을 잃은 단 몇 초 때문에 이전의 그는 잊혀지고 말았다. 그가 정신병원에 수용되기 전에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농부였고, 누군가의 아들이었으며 다섯 명의 아버지이자 고향인 베네토 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이주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카디약은 촌락이다. 정신병원이 그 중심에 있다. 많은 사람이 이 정신병원에서 일을 했고 또 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이 정신병원 근처에 살았다. 그래서 무덤이 있는 이 땅이 분쟁으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잊기 힘들다. 자신의 조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을 억압하고, 묻혀버린 진실을 캐내려는 것을 막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카디약 지역에서 70만 유로를 들여 무덤을 복원시키려 할 때, 왜 환영하지 않았을까? ‘관광 코스로 만들어 돈을 벌’ 생각을 할 시간에 카디약에 묻힌 자들의 후손을 생각했어야 하지 않을까? 후손들은 고인이 된 조상의 이름이 새겨진 벽에 떨면서 다가가, 잊고 지냈던 그들과 조우해야 했다. 그 자리를 마련했어야 하지 않을까? 관광객들이 묘소애착증(묘지에 집착하는 정신병) 때문에 온다면 어떠하리. 그 묘지는 누구의 것도 아닌 것을. 

물론 전투가 없었다면 이곳이 역사적 장소가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윗선이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에 맞춰 무덤 복원 프로젝트의 진행을 말하자, 밑의 사람들이 줄을 섰다. 물론 이런 식의 프로젝트에는 이익을 취하려는 개인이나 단체가 들러붙는 법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우울했던 장소가 존엄성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저 숫자로만 불리던 무명의 4,464명이 마침내 그 잊혔던 이름을 되찾았다는 사실이다. 

 

 

글·파스칼 코라자 Pascal Corazza 
기자, 작가.

번역·이정민
번역위원


(1) Pascal Corazza, 『Voyage en italique 이탤릭체 여행』(Transboréal, Pari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