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주거권을 외치다

2012-01-11     호야

가끔 달팽이가 부러울 때가 있다. 몇십 원씩 오르는 최저임금과 몇억 원씩 오르는 집값의 격차가, 혼자 집을 1083채 가진 누군가와 집이 없어 거리를 방황하는 누군가의 격차가 이 땅의 삶을 너무 불안하고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부동산 불패 신화는 집을 ‘사는 곳’이 아닌 ‘사는 것’으로 변질시켰고, 가진 자는 더 가질 수 있으나 없는 자는 점점 갖기 힘들어지는 현상을 낳았다.

자신이 원하는 집을 그려보라고 하면 제각기 다른 형태의 집이 나오겠지만, 그 누구도 전기가 끊긴 집, 온수가 나오지 않는 집, 다른 누군가가 함부로 들어오거나 부수는 집은 그리지 않을 것이다. 집은 기본적으로 인간다운 삶을 가능케 하는 공간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집은 ‘인권’이다. 하지만 이 땅의 집에서는 여전히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다. 서울 강남의 포이동을 보자. 포이동 주민들은 지난 30년간 정부로부터 ‘불법’으로 규정되어 강제이주와 주민등록 말소 등 온갖 위기를 겪어왔다. 그리고 얼마 전 또 한 번의 강제철거가 이루어졌고, 그들은 다시 억압에 저항하며 마을 재건에 나섰다.

또 하나의 포이동, ‘청소년 주거권’

나는 청소년인권활동가로 살아가고 있다. 최근 들어 내 주변의 청소년 활동가들이 가출을 감행하는 경우를 여럿 보았다. 나는 거기에서 또 하나의 포이동을 본다. 포이동과 ‘청소년 주거권’은 전혀 무관한 듯하면서도 닮은 점이 많다. 먼저, 그들은 억압받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포이동 주민들이 정부로부터 ‘불법’이라는 굴레를 쓰고 강제철거를 당한 것처럼 청소년들은 친권자(부모)에게서 ‘미성숙·보호주의’의 굴레를 쓰고 억압받는다. (부모를 친권자라고 일컫는 것은 ‘친권’이라는 것이 이 사회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정당화되고 있는 부모-자식 간 권력관계와 청소년 미성숙 담론, 그리고 보호주의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청소년 활동가들이 집을 나가는 이유는 대부분 친권자의 억압 때문이었다. 흔한 예로는 청소년인권단체 활동 금지와 학업 강요를 꼽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사회에서 ‘보호’와 ‘사랑’의 이름으로 너무 일상적으로 자행된다. 하지만 실제 그것을 겪는 청소년에게는 억압에 지나지 않는다. 청소년 가출은 이런 측면에서 친권자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롭기 위한 저항이 아닐까.

김량씨는 글에서 포이동을 보고 획일화, 거대 권력의 점유권 강화에 맞선 창의적인 생존미학을 느낀다고 했다. 나는 이 부분도 청소년 주거권과 맞닿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포이동 주민들의 마을 재건이 개발에 눈 먼 거대 자본과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면, 청소년 주거권은 ‘친권자의 권력, 청소년 미성숙 담론, 보호주의’로 대변되는 나이주의에 대한 저항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회에는 청소년의 가출은 일탈이라는 시각과,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년들에 대한 걱정이 공존한다. 청소년은 ‘나이가 어려서’ 부모의 보호 아래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그 나이가 되도록’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공존한다. 이는 나이라는 잣대가 빈약하지만, 매우 굳건하게 이 사회에 뿌리박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립하는 것은 언젠가는 해야 할 생의 한 과정임에도, 청소년의 자립은 나이라는 잣대가 빚은 미성숙 담론과 보호주의 아래서 일탈로 규정된다. 그렇기에 청소년의 가출은 자립을 향한 의지를 표출하는 것이자 ‘나이주의’라는 거대 권력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다.

청소년 주거권의 생존미학

나는 포이동 주민들이 강제철거에 저항하고 다시 마을 재건에 나선 데에서 생존미학을 느끼는 것처럼, 청소년 주거권에서도 나름의 생존미학을 느낀다. 둘의 차이라면 포이동이 무너진 집을 복원하는 작업이라면, 청소년 주거권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 집을 세우는 작업에 가깝다. 알게 모르게 청소년 활동가들 사이에 청소년 주거권을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돈도 없고(돈을 버는 데 제한도 있고) ‘빽’도 없는 청소년들이 온전히 자신의 삶을 펼쳐내기 위한 자립 방법을 모색한 것은 이렇다. 자신이 사는 공간을 타인에게 열어 일정 기간 함께 지낼 수 있게 하는 오픈하우스, 청소년 생활협동조합, 빈 공간을 점거하고 주거권을 얻어 공적 공간으로 창출해내는 스쾃운동, 거기에 몇 명씩 모여 함께 살아가며 집세를 분담하는 방법까지. 이 방법들은 해결책이기보다는 다만 초석일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하지 않으면 결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고, 이 방법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생존미학에 대해 말하고 싶다.

먼저, 이 방법들은 집을 ‘소유’ 개념이 아닌 ‘점유’ 개념으로 접근한다. 집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열려 있는 공간일 뿐이다. 소유가 아닌 점유로 집을 대하면서 폐쇄된 공간은 열린 공간으로 변모한다. 또한 이는 사유재산을 확실히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두 번째는 기존 ‘가족’이라는 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 사회에는 ‘결혼·혈연으로 맺어진 형태의 가족만이 가족’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같이 살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생각이 기존 틀을 깨고 나온다. 그리고 가족이란 이름으로 얽매던 것으로부터 자유, 그리고 누구와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자유가 우리를 맞이한다. 마지막으로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이런 방법들은 결코 개인의 힘으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다른 사람들이 함께해야만 가능하다. 이 사회는 개인의 힘만으로 헤쳐나가기엔 너무나 불안한 사회다. 이런 사회이기에 더불어 살아가는 힘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삶의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청소년 주거권을 확보하는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며, 이 사회가 행복해지는 길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좀더 나은 삶을 위해

얼마 전 고3 학생이 모친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의 반응은 ‘패륜이다’, ‘어머니가 너무하긴 했지만 자식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등이었다. 하지만 나는 과연 그것이 그 아이의 인성 문제로 단정될 수 있는지, 또 그 아이가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 어머니의 집착 이상의 학업 강요와 폭력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억압으로 다가왔을지 생각해본다. 이 사회가 친권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청소년 주거권을 인정한 사회였다면, 그 아이는 어머니의 광적인 탄압에서 빠져나와 한숨 돌릴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지경까지 가지 않았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좇는 이 사회, 청소년도 예외는 아니다. 청소년이 행복하려면 그들에게 주거권을, 자유를, 인권을 허하라!

청소년 주거권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열심히 싸워야 하는 것은 청소년 당사자일 것이다. 이 싸움은 시작부터 힘겹지만, 비청소년이 먼저 지지하고 함께 싸워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청소년에게도 집은 인권일 수 있도록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바라며 글을 마친다.

/ 호야 청소년인권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