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과학에 대한 두려움, 과연 타당한가?
장미셸 블랑케 교육부 장관의 교육개혁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음절중심 읽기 교육 우선 정책 등 필요한 요소도 있다. 그의 주장이라는 이유로 인지과학을 거부할 게 아니라, 민주적 프로젝트 육성에 활용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교육 시스템이 잘못돼 가고 있다. 물론, 1985년 이후 출생 인구의 학사학위 취득비율은 35%에서 80%로 대폭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에 조사된 초등학교 졸업반과 중학교 졸업반 학생들의 학력 수준은 계속 저하됐다. 교육부 연구과의 보고에 의하면, 2017년 6학년 우수 학생들의 수학 성취도는 1987년 평균 수준에 머물러있다. 또한 받아쓰기에서 15개 이상 틀리는 학생들의 비율은 25%에서 60%로 증가했으며, 학생들의 독해력은 철자 능력의 약 60%에 그쳤다. 학력 저하는 특히 서민계층에서 더욱 두드러지지만, 사실 모든 학생들에게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학생들의 이런 학력 저하 원인은 무엇일까? “무지에 대한 관용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교육기관으로서는 불행한 일이다. 게다가 프랑스의 교육 불평등은 이미 상당 수준 심화됐다.(1)
기회 균등의 신화보다 중요한 것
민주적 학교를 지지하는 이들이, ‘블랑케 장관 이전 시대’로 회귀하고자 한다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공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려면, 교육방식의 전면적인 개선을 위해 교육 시스템을 재검토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회균등의 신화가 아니다. 지식 및 문화 전달에 대한 진정한 사회적 보장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달린 문제다. 이와 관련된 정부 정책을 살펴보자.(2)
블랑케 장관이 우파 정치인임은 확실하다. 그는 공교육을 축소하고 기업의 조기 취업훈련을 장려함으로써 학교 내 직업교육을 없애고 있다. 또한 고등학교에 선택과목과 바칼로레아를 위한 지속적 학업평가를 도입해, 상류 고등학교들과 ‘상속자들’을 위해 학생들 간, 교육기관들 간 경쟁을 심화시키고 있다. 블랑케 장관은 프레데릭 비달 고등교육연구혁신부 장관과 협력해 대학입학자격을 제한하고 연구 통제력을 강화했다. 또한, 학교 관계자들을 교사의 채용 및 관리를 담당하는 영업사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즉, 공교육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초등 교원노조는 읽기와 쓰기 교육에 있어 음절중심 교육법 채택을 위한 강력한 인센티브를 특징으로 하는 교육정책, 학급분할, 초등학교 1학년(CP학년) 평가 및 1월 평가 도입 등을 같은 잣대로 판단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3) 2019년, 10개 노동조합과 교육단체는 독서에 관한 장관 연설을 규탄했다. 이는 재고할 필요가 있는 사항이다. 성실한 학생들의 진로를 모니터링하는 설문조사는, 이런 초기교육의 영향이 고등교육까지의 학업에 미치는 영향을 시사한다.(4)
일류 좌파 논객들이 종종 ‘기초’교육이라 일컫는 이 초기교육을 결코 경시할 수 없다. 초기교육의 효율성 정체 및 감소는 최근 수십 년간 공교육의 전반적 쇠퇴를 초래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아동들이 CP학년을 끝낼 때까지 독해력을 100% 성취하도록 하겠다는 장관의 목표를 반대할 명분은 없다. 독해력 달성을 위한 음절중심 교육의 효과에 대해 확신하는 것은 블랑케 장관뿐이 아니다. 모든 비교연구 결과도 이 방향을 가리킨다.(5)
다만,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다. 블랑케 장관은 CP학년의 모든 어린이가 독해력을 완벽하게 달성하길 바라는 동시에, 고등학교에서는 학업 성취를 막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는 명백한 모순이다. 프랑스에서 문맹은 기업이나 행정기관에 영향을 미친다.(6) 기업이나 행정기관은 지침을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며 디지털 도구에 숙달한 직원이 필요한 만큼, 국가 문맹퇴치기관의 적극적 파트너로서 이 사실을 국가에 꾸준히 상기시킨다.(7) 클로드 텔로가 주도한 2004년 설문조사 결과 발표 후, “기초” 학습의 성과 부진이 학교에 대한 학부모들의 주요 불만사항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다.(8) 1996년 포루위원회의 교육 개혁안 보고서에서부터 2010년 몽테뉴연구소(9)의 보고서에 이르기까지, 질드 로비엥 교육부 장관(2005-2007년 재임)을 포함한 프랑스 우파는 이 문제에 효율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명해왔다.
블랑케 장관이 이 문제에 결단력 있게 대처한 것도, 중등학교 고학년에 대해 조치를 취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블랑케 장관이 이끄는 교육부의 모든 연구 조사는 초등학교에서의 학업 성취가 향후 학업에 장기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960년대 이후 서민계층 아동교육 정책은 취학기간을 단축하는 방향으로 추진돼왔다. 관련 사례로, 1960년대 제1차 교육개혁 시기의 직업 및 기술 교육 전문과정 개설이나 1985~1995년 제2차 교육개혁의 부수적 작업으로 추진된 ‘프로’ 바칼로레아를 들 수 있다. 블랑케 장관은 이 같은 논리를 따르고 있다.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 제한 및 통제는 초등교육의 효과를 강화하려는 노력과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이 장관의 논리다.
두 가지 반대 논리, 숙명론에 저항
이런 정책에 직면해, 교육 민주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민주주의의 기본 요건인 청소년의 문해력 향상을 위한 조치를 수용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학업 성취에 대한 대중의 열망을 이용해 계급 불평등을 은폐하려는 모든 조치들에 반대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장관의 초등교육 정책에 불만을 표하고 있다. 독서를 위한 음절중심 교육을 옹호하는 것은, 정치적, 교육적 반동의 상징이 된 1970년대 합의에 배치되는 것이다. 아직도 음절중심 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교사의 비중은 5%에도 못 미친다. 초기교육의 효율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 폭넓게 알려져 있고, 음절 교육에 유리한 비교연구 결과가 쏟아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의견을 주로 청취하는 교육학 및 교육과학 분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음절중심 교육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남아 있다.
장관에 반대하는 첫 번째 논리는, 그의 정책이 교사들의 교육적 자유를 존중하지 않기에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이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취약한 주장이다. 독해교육은 항상 장관의 권고사항으로, 교사들은 언제나 감독관들에게 전달 받는 입장이었다. 이는 교사 양성과 연수에서도 강조된다. 문제의 핵심은 교육부에서 권고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권고의 성격이다. 또한 권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전문가 그룹의 변화다.
두 번째 논리는 다음과 같다. 블랑케 장관은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하고자 신경과학에 교육적 권한을 양도하는 과학위원회를 설립했다. 전문가들과 노조원들은 이를 “새로운 모호성을 야기하는 행위”(10)라며 맹비난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배경설명이 필요하다. 이 위원회의 의장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지신경과학자 스타니슬라스 드앤이지만, 주된 구성원들은 실험심리학자들이다. 이들 실험심리학자들은 수십 년간 교육 문제에 대해 합법적 발언권을 가졌던, 그리고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교육심리학자들의 자리를 차지했다. 교육심리학자들로서는 ‘박탈’인 셈이다. 그러나, 그들의 박탈감이 ‘뇌교육’에 관한 드앤의 연구를 배제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학위원회에서는 블랑케 장관의 교육정책이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을까? 실험심리학자들은 뇌 영상촬영 연구로 그 이론적 근거가 더욱 명확해진 사회과학적 통계 연구를 이 작업에 결합시킨다. 드앤은 이런 연구 조사를 통해 모든 아동들이 “작지만 엄청난 학습기계”라고 주장하며, 학업 불평등을 “선천적인 재능의 불평등”으로 설명하는 논리에는 생물학적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11) 그 결과, 드앤은 인문사회 분야의 연구가 확립하고자 하는 ‘보편적 교육’의 원칙에 신뢰성을 부여한다.(12)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드앤은 혁신적인 접근법을 제시한다. 이 접근법은 ‘과학만능주의적 시도’와는 다른 차원의, 인문학적 접근법이다. 인문학은 ‘인간 본성’에 대한 고정관념에 맞서 한 세기에 달하는 투쟁 끝에 문화 상대주의 원칙을 관철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드앤은 뇌는 “유연하고 순응적이어서 인간 활동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는 기관”이라고 주장하면서, 문화 상대주의 원칙을 제한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유기적 결정론으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뇌는, 가상의 원시적 회로에서 뇌에 제시되는 모든 것을 맹목적으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뇌 회로를 다른 용도로 전환함으로써, 우리의 문화적 환경에 적응한다”(13)라는 ‘신경 재활용’론을 개진하기 위해서다. 여느 과학적 주장과 마찬가지로 이런 주장도 비판적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주장의 이론적 영향력이 상당함을 감안할 때, 이 주장이 문제의 본질에 실질적으로 천착하기를 바랄 뿐이다.
사회학은 수십 년 간의 교육 실패에 대한 사회적·가족적 결정론을 탐구해 왔다. 문제의 원인을 학교 밖에서 찾으면서, 사회학은 교육적 패배주의를 강화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숙명론적 관점에 도전하는 학교 교육 그 자체의 영향에 대한 드앤의 시각은 고려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1) Jean-Pierre Terrail, ‘La tolérance à l’ignorance dans l’institution scolaire 학교 교육기관 내 무지에 대한 관용’, 교육민주화연구그룹(GRDS), 2020년 5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