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낙제생 'MBA 부시'

실패로 끝난 'MBA 부시'의 국가 경영

2009-02-01     이브라힘 와르드 | 터프트 대학 경제학과 교수

 포털 사이트 구글에는 "조지 부시가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댓글이 2만 개 이상 올라있다. 하버드대 경영학석사(MBA) 출신의 국가경영자였던 부시의 참담한 실패원인은 무엇일까?
 조지 W. 부시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MBA(경영학 석사) 출신 대통령, 그 것도 명문 중의 명문 하버드 출신 대통령답게 '효율적인 경영'을 대통령직 수행의 모토로 삼았다. 레이건-대처 혁명 이후 20여년이 흐른 상황에서 'CEO 대통령'의 등장은 복지국가의 해체를 더욱 심화시켰다. "재계에는 작은 정부, 정부에는 강한 재계"가 필요하다고 주창했던 윌리엄 매킨리(1897-1901) 대통령이나 "미국의 최대 과제는 경영"이라고 역설했던 캘빈 쿨리지(1923-1929) 대통령 시절처럼 재계가 막강한 권력을 자랑했던 시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1980년대 초, 또다른 신념들이 전성기를 맞이 했다. 레이건은 "정부는 해법이 아니라 문제"라며, '시장의 마술'이 모든 사회·경제적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정치 버전인 마가렛 대처의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공공 후생을 각 개인의 이기적 이익의 총합과 동일시하거나, 정치인들에 의해 포장된 비열한 동기로 간주했다. 레이거노믹스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밀턴 프리드먼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동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치가들이 우리의 돈을 쓰기 위해 사용하는 핑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

 레이건, 대처 그리고 부시…
 역설적으로 가장 혹독하게 국가의 몸집 줄이기를 시도한 사람은 민주당의 윌리엄 클린턴(1993-2000) 대통령이었다. 클린턴의 주요 이니셔티브 중 하나는 정부에 민간 부문의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정부를 재창조'하는 것이었다. 1994년 총선에서 승리한 공화당 극우파와도, 민주당과도, 동일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클린턴의 '삼각' 전략은 가족, 경찰, 감옥 정책의 보수화로 귀결되었으며, 엄격한 재정정책을 수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는 금융 탈규제화의 완성을 주도했다.2)
 클린턴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때쯤에는 공공부채 전체가 빠르게 소멸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조지 W. 부시는 2000년 대선에서 가까스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부시의 당선과 동시에 '역사의 종말' 이데올로기가 정착되었다. 행복한 세계화와 '신경제' 담론은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유능한 소유권 관리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단언했다. 따라서 부시 대통령의 MBA 학위는 '행운의 부적'이 될 터였다. 비즈니스 스쿨들이 전 세계에 걸쳐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공공 행정 분야의 많은 고등교육기관들이 새로운 탄생을 위해 앞 다투어 MBA 과정을 개설했다.
 경제의 금융화가 심화되면서 엔지니어들도 전공 보완을 위해 경제학의 문을 두드렸다. 이른바 금융공학의 탄생이다. 금융공학 전공자들에게는 고연봉 일자리가 보장되었다.3) 월스트리트는 넘을 수 없는 새로운 지평을 연 셈이었고, 금융 혁신의 첨단을 걷고 있던 일부 기업들에 열광했다. 그 중에서도 텍사스의 거대 에너지 그룹 엔론은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하며 가상 경제의 경계를 끝없이 확장했고, 부시가 정치 경력을 쌓는 과정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실 부시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 토마스 화이트를 육군 장관에 임명하는 등, 엔론 출신 기업인들을 요직에 발탁했다. 부시는 "민간 부문의 방법을 공공부문에 적용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CEO 대통령' 스타일 고수
 부시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1년도 못 되어 엔론이 도산했다. 그러나 엔론 도산이라는 정치, 금융 스캔들은 2001년 9.11 테러의 충격파속에 빠르게 잊혀졌다. 애초 '겸손한 대외정책'을 약속했던 부시 대통령은 메시아가 되어 전쟁을 이끌어야 했다.
 이는 부시 정권의 다른 측면들, 특히 행정부 강화와 경제 정책 급진화 같은 측면들을 은폐했다. 심지어 새로운 제국의 야심은 현실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아마도 칼 로브일 것으로 추측되는 부시 대통령의 '핵심 참모' 중 한 명이 언론인 론 서스카인드에게 밝힌 것처럼, "게임 규칙이 변했다. 오늘날 미국은 제국이다. 미국이 움직일 때, 미국은 스스로의 현실을 창조한다."는 말이 통하게 된 것이다.4)
 부시는 '결정권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즐겨 강조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CEO 대통령'의 스타일과 믿음을 고수했다. 부시에게 감세는 만병통치약이었고, 소비는 유일한 성장 동력이었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부시는 대테러 전쟁의 재원 마련이나 그로 인한 미국 국민의 희생을 고민하는 대신 국민에게 소비를 계속하라고 부추겼다.5)
 그리고 2002년 여름, 이라크 공격의 당위성을 설파하기 위한 대국민 선전전을 시작해야 했을 때, 백악관 비서실장 앤드류 카드는 자동차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게 "마케팅 측면에서 볼 때 8월에는 신제품을 출시하지 않는다"며 9월 초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대통령과 비서관들의 회의는 이미 내려진 결정을 승인하는 이사회와 비슷하게 흘러갔다.
 부시는 클린턴과는 반대로 비서관들에게 시간 엄수와 '드레스 코드' 준수를 요구했지만, 막상 구체적인 문제들을 논하게 되면 당황했던 듯 싶다. 이에 대해 폴 오닐 1기 재무장관은 "귀머거리가 가득한 방에 앉아 있는 장님의 심정"이었다고 토로한 바 있다.6)
 행정부 내에도 무능한 인사들이 많았다. 주요 책임자들의 인선 기준은 능력이 아니라 사상적 적합성이었다. 이렇게 발탁된 인사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을 펼쳤지만, 이들의 주장에는 어떤 일관성이 있었다. 즉,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논점'이 온갖 형태로 재생산되었고 강제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종결된 후 역시 하버드 MBA 출신의 폴 브레머가 이라크 행정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라크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인물이 이라크 민주화 및 평화 구축과 국가재건이라는 엄청난 프로젝트의 총지휘자로 임명된 것이다.
 브레머는 이라크로 출발하기에 앞서 2주에 걸친 '집중' 브리핑을 받았을 뿐이다. 브레머는 20여 쪽의 사례 연구 보고서를 검토한 후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비즈니스 스쿨 학생처럼, 단순한 사고로 무장한 채 복잡한 중동으로 떠났다.7) 브레머는 부임하자마자 곧바로 이라크군 무장 해제, 지배정당이었던 바스당 계열 숙청 등 제도 전복에 착수했고, 새로운 정치 시스템을 구축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시스템이 오늘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잘 알고 있다.
 
 오바마 취임 직전 '시장 광신도' 반격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 실패는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해도, MBA 출신 대통령이 경영, 나아가 단순 물류에 속하는 분야들에서 실패를 반복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다. 2005년 9월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를 계기로 미국 국내 여론이 부시의 위기관리 능력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카트리나 사태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부시의 무능력 때문이었다. 카트리나가 막대한 재산 및 인명 피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TV 카메라 앞에서 대재앙의 주범인 마이클 브라운 연방 재난관리청(FEMA) 청장을 "브라우니, 정말 잘했어!"라고 격려했다.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 시대의 피날레를 장식한 임기 마지막 해는 경제침체와 금융시스템의 파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특히 금융위기는 정부의 대규모 개입을 초래했다. 그렇지만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시장 광신도들은 미친 듯이 움직였다. '최후의 발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같은 움직임의 목적은 환경이나 노동 규제 같은 분야에 '부시주의'의 흔적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남겨놓는 것이었다.8) 부시주의가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그 한계를 극명하게 노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상황이 있을 수 있을까? 두 권의 저서가 설명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먼저 경제학자 제임스 갤브레이스는 <약탈 국가>라는 책에서 '약탈 국가'의 급부상을 묘사한다.9) '약탈 국가'는 1960년대 저자의 아버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가 분석한 '새로운 산업국가'와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새로운 산업국가에서 재계는 물론 강력한 권력을 보유하고 있기는 했지만, 노조 같은 견제세력이나 비교적 자율적인 공권력과 공생하는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러나 공권력의 약화는 부작용을 낳았고, 엄격한 재정정책·시장, 작은 국가에 대한 공화당 담론은 그런 의미를 완전히 상실했다.10)
 최근 미국 정부의 금융시스템 구제 조치 이전부터, 정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기업들에게 정부가 퍼주기식 개입을 하는 모습은 이미 일상화돼 있었다. 공무원의 수가 감소한 반면, 경비업체 블랙워터 같은 민간 기업들이 특히 치안과 국방 분야에서 국가 기능의 일부를 담당하는 경우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11)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자 상원의원의 손자이며 정치와 비즈니스가 항상 뒤섞여 있던 가정 출신인 부시 자신만 해도12) 명문 대학 입학과 축재, 그리고 정치 경력까지, 모든 것이 가족 '커넥션' 덕분이 아니겠는가?13)
 
 부시 정권 공직, '기업 진출 위한 경력'
 역사학자 토마스 프랭크는 2008년 출간된 <철거반>에서 급진 보수주의자들의 공권력 파괴행위를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들 급진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적인 자유주의 국가를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과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의 산물로 간주했고, 민주적 이상이 변질된 것으로 치부했다.14) 이 책은 또한 1980년대 반정부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워싱턴 정가에 침투했던 몇몇 '혁명가'들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하버드 MBA 출신인 그로버 노퀴스트 미국 세금개혁협회 회장은 국가의 사회 복지 기능을 "욕조에 익사시킬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축소할 것을 주창했다.
 다양한 핑계를 앞세워 진행되었던 '숙청'이 끝나자 새로운 세대의 공직자들이 출현했다. 새로운 공직자들은 기업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공직에서 물러난 후 해당 기업에 진출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제 공익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들을 먹여 살리는 '국가라는 젖소'의 젖을 짜기 위해서가 아니면, 워싱턴 정가에서 경력을 쌓을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또 다른 핵심 인사인 공화당 대학생 회장 출신의 잭 아브라노프는 부패 로비스트가 되었고, 새 천년을 뒤흔든 거대한 정치, 금융 스캔들에 연루되어 현재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토마스 프랭크는 재계가 빈약한 정치를 미화하던 시절의 발언들을 인용하고 있다. 예컨대 하원의원장을 역임했던 호머 퍼거슨은 1928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국가의 최고 봉사자는 최악의 봉사자이다. 공직의 최상위에 있는 인물은 부식성 인물이다. 그는 우리의 자유를 파괴한다. 그가 뛰어난 인물일수록 더 오랫동안 공직에 머무를 것이고 더 위험한 인물이 될 것이다."15) 이 같은 20세기 기준으로 볼 때 조지 W. 부시는 예외적인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번역 | 박수현 domyosie@ilemonde.com


 

각주

1)리처드 파르네티 & 이브라힘 와르드, <위기의 앵글로-색슨 모델>, 에코노미카, 파리, 1997.
2)특히 1999년 그램-리치-브릴리 금융현대화법과 2000년 상품선물거래 현대화법을 예로 들 수 있다.
3)'저항할 수 없는 비즈니스 스쿨',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0년 5월.
4)론 서스카인드, '의심 없이', <더 뉴욕타임스 매거진>, 2004년 10월 17일.
5)프랭크 팰그리니, '부시의 연설: 어떻게 국가를 규합할 것인가?', <타임>, 2001년 9월 21일.
6)론 서스카인드, <충성의 대가: 조지 W. 부시, 백악관, 폴 오닐의 교육>, 시몬 & 셔스터, 뉴욕, 2004.
7)폴 브레머 & 말콤 맥코넬, <이라크 수기: 희망의 미래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 시몬 & 셔스터, 뉴욕, 2006.
8)로자 브룩스, '오바마가 물려받을 부시의 지뢰밭',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2008년 11월 20일.
9)제임스 갤브레이스, <약탈 국가>, 프리 프레스, 뉴욕, 2008.
10)부시 대통령은 후임 대통령에게 2008~2009년 1조 달러에 달하는 적자와 10조 달러가 넘는 부채를 물려주었다.
11)제레미 스카힐,  <블랙워터: 세계 최강 군대의 등장>, 네이션 북스, 뉴욕, 2007.
12)케빈 필립스, <미국 왕조: 상류계층, 재산, 부시 가문의 정치인>, 펭귄, 뉴욕, 2004.
13)몰리 어빙 & 루 두보스, <조지 W. 부시의 짧지만 행복한 정치 생활>, 랜덤하우스, 뉴욕, 2000.
14)토마스 프랭크, <철거반>, 뉴욕, 2008.
15)토마스 프랭크, 위의 책, p.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