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네요”
“저는 올라서서 영수증을 내밉니다.”
“저는 노란 옷을 입은 교통안전 요원을 보면 조심스럽게 피해서 가요.”
“저, 할인 혜택 받아요.”
몇 년 사이에, 공공장소가 일견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문구들로 채워졌다. 전부 1인칭으로 돼 있는 지시사항이다. 이런 식의 문구를 붙이는 아이디어는 필시 광고 전문가들에게서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공익광고에서도 이런 유형의 문구를 쓰는 일이 급격하게 빈번해지고 있다. 이제는 정부 당국조차 나서서 이런 1인칭으로 된 문장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마르세유 도시 중심가에는 시민들이 크리스마스 트리를 지정한 장소에 두도록 독려하는 벽보가 붙었다.
“친환경 축제를 위해 제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이네요.”
이런 문장에 장점이 있다면, 권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크리스마스 트리는 지정한 장소에 두세요”라는 속뜻을 담고 있지만, 이처럼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명령/지시하는 형태가 아니다. 반대로, 명령/지시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없애버림으로써 명령/지시가 자취를 감추고 혼잣말이 남은 형태다. 이는 형태만 보면 명령문이 아니다. 이미 진행 중인 상황을 묘사하는 설명문이다. 즉,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명령/지시한 행동을 시행하는 시점에서 명령문을 보면 이는 과거에 했던 말이다. 명령/지시의 실행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명령/지시가 선행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명령/지시를 받는 사람은 자기 생각과 주관이 있으며, 명령의 내용과 그에 따른 행동을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기기에 중재가 필요하다. 반면 말과 행동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 명령/지시를 받는 주체와의 중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경우에는, 그저 좋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나열하는 문장이 된다. 어떤 말을 할 때, 그 말이 명령어나 지시어가 되려면 말과 행동 사이의 거리가 필요한데, 그 거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타자에게 명령/지시를 한다는 것은 권위적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행위다. 명령/지시를 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거리는, 그 명령/지시를 받는 자가 그에 복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명령/지시를 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나와 다른 존재라는 것을 가정한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명령이나 지시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1인칭으로 가장한 명령문, 우리 발언권 빼앗아
그러나 다른 이에게 명령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말이 필요하다. 명령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듣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의 위엄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깔려있다. 아무리 짧아도 “이리 와!”, “그만!”, “발사!” 등등의 명령은 대화다. 즉각적인 폭력은 아니더라도, ‘뒤로 미뤄진 폭력’으로 볼 수도 있다. 명령을 들은 사람이 아직 복종하지 않은 상태라면, 명령을 한 사람은 들은 사람이 복종하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1인칭 직설법이라는 형태로 가장한 명령에는 이런 기다림이 없다. 메시지를 듣는 사람이 이미 그 내용에 복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자신이 그 행동을 하고 있고, 그것을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식의 명령은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이므로, 정부 당국이 좋아한다. 타인, 특히 지시를 듣는 타인에 대한 태도가 소극적이다 보니, 모호하게 넘어가는 지점이 있다. 그러나, 실상 폭력성은 이 지점에 도사리고 있다.
명백한 형태의 명령, 지시, 요구, 청원 등을 하는 쪽에서는 듣는 쪽을 자신과는 다른 타자로 가정한다. 이것이 최소한의 예우다. 타자의 결정을 미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1인칭 직설법 형태로 된 명령문은 명령을 하는 자가 명령을 듣는 자를 ‘나’로 칭한 다음, 듣는 자의 생각이나 행동을 대신 언급한다. 그리고 명령을 듣는 자가 이미 그 명령에 동의했고 따르고 있다는 내용이다.
정부 당국이 양심의 심판을 대신해 거기에 있다. 우리 스스로 말하는 그 자리, 우리 스스로 이미 행동을 했다고 말하는 그 자리에 있다. 명령하는 자와 명령받는 자가 대면하는 공간을 교묘하게 없애버림으로써 정부 당국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우리 내부로 들어와 버린다. 거리를 없애고 네 역할을 내가 대신해주겠다고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도 피할 수 없다. 이 문구를 읽는 순간, 이미 나는 그 문구에 동의한 사람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중으로 발언권을 빼앗긴다. 첫째, 1인칭 직설법으로 가장한 이 명령문엔 대답할 수가 없다. 둘째,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나를 대신해 말해주는 입이 이미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명령문에서 왜 그 행동을 해야 하는지 정당화하는 내용이 없으면 어린애에게 하는 명령문이나 다름없다.
즉, 명령을 듣는 사람이 “왜 그것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암묵적 질문에 답변하지 않는 명령문이다. 아버지 혹은 정부 관리가 하는 일방적인 명령이 이런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명령도 명령을 받는 자가 “저는요”라고 말할 능력도 없다고 무시할 정도로 어린아이 취급하진 않는다. 각자 양심에 따른 심판이 있는 법이다. 명령받는 사람은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도 있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다.
물론 명령할 때 상대를 강제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 혹은 “당신”이라고 말하며, 내 말을 듣는 상대방을 타인 취급하는 태도는 그 사람에게 무엇을 강제하든 간에, 적어도 명령을 듣는 사람이 그 명령에 아니라고 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 말라고 강제하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1인칭 직설법을 가장한 명령은 그렇지 않다. 1인칭 직설법은 타인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하지 않는다. 광고 문구, 인터넷 페이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도로 표지판, 기차표에 이르기까지 다른 누군가에게 말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환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쓴다. 명령을 따라야 하는 개인에게 뒤로 물러설 가능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제 양심의 심판이 공공장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민을 어린아이 취급하는 정부
마치 착한 아이라도 된 듯이 말하는 이런 식의 말투는 놀랍게도 전체주의 정부의 이상과 닮아있다. 정부가 행사하는 권력이 너무 절대적이다 못해, 심지어는 보이지 않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런 이상은 우리가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확연한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시장경제와 경영에서 이뤄지는 소통에서도 이런 이상을 원하는 모습이 발견된다. 1인칭 단수로 이뤄진 명령문은, 다음 질문들에 관한 답에 가깝다.
- 여기에는 해야 할 일, 저기에는 원하는 일이 있는 인간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을까?
- 인간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한다고, 자신의 의지를 따르고 있다고 믿으면서 명령에 복종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자아를 상실한 채 예속된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
1인칭 단수로 이뤄진 명령문은 바로 이런 열망이 언어로 표출된 것이다.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사회, 권력인데 권력이 아니라고 감추는 사회, 타인과 중재하지 않고 타인이 스스로 결정할 여유를 허락하지 않은 채 행동하게끔 하는 사회가 이런 열망을 꿈꾼다. 요컨대, 시민을 어린아이처럼 취급함으로써, 권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에 분노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명령을 아무 저항 없이 수용하려면 어린아이가 돼야 한다. 19세기의 교양 있는 부르주아가 다음과 같은 광경을 본다면 얼마나 경악할 것인지 한번 상상해 보자.
신뢰할 수 없는 공익광고 문구들
정기구독을 신청하거나 할인 혜택을 받으려면 “저 할인 혜택 받아요!”라고 외치는 버튼을 클릭해야만 한다. 내가 할인 혜택을 받을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려면, 이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온 세상이 원하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대한 어린이 공동체 코드’에 맞춰 행동해야만 이런 물건에 접근할 수 있다. 잘못했다가는, 단지 물건만 살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교환 규정(“저는 영수증을 내밀어요.”)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돼버린다.
1인칭 단수로 이뤄진 명령문은 착각을 일으킨다. 마치 우리가 말하기 원했던 그대로 말하고 있다는, 마치 우리가 행동하길 원했던 그대로 행동하고 있다는 착각 말이다.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 최적화된 인간이 되게끔 몰아간다. 즉 자신이 모욕당한다는 사실도, 자기 것을 빼앗긴다는 사실도 모른 채 누군가가 자기를 대변해줘야 하는, “말도 못하는” 어린아이다.
그러나 시민들에게는 이런 모욕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 시민을 말도 못하는 어린아이라 여기는 정부에게, 시민이 권한을 허락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 권한을 부활시키지 않으면 된다. 시민의 의사를 무시하는 정부 기관이 내세우는 공익광고 문구는 신뢰를 지닐 수 없다. 시민의 말하는 능력과 생각하는 능력을 인정해야만, 정부 당국도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세드리크 라강드레 Cédric Lagandré
작가
번역·이정민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