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커밍스/ 김정은이 '왕'이 된 이유

2012-02-13     브루스 커밍스

김정일의 사망으로 중단된 미국·일본·남한·중국·러시아·북한 간 6자회담이 한반도 비핵화 논의를 위해 재개됐다. 정권을 물려받은 김정은이 꾸준히 군부대를 방문하는 상황에서 마카오에 머무르고 있는 장남 김정남은 체제가 곧 붕괴될 것이라 예측했다.

   
▲ <평양>, 2007-토먼스 반 후트리브

지난해 12월 17일 싱가포르에서 김정일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덕분에 미국 ‘전문가들’의 야단법석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의 참모였던 인사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경험이 부족한 김정은은 군부의 80대 노장들과 맞설 깜냥이 안 된다며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은 이제 사라졌”고 “북한 체제는 단결성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1) 다른 이들은 쿠데타 가능성을 언급했고, 어떤 이들은 반대로 김정은이 집권하자마자 군부를 휘어잡기 위해 체제를 강화할 것이라 장담했다. 북한이 곧 붕괴될 것이고, 이때 일본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주둔한 미군병력은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가 유출되기 전에 신속하게 회수해야 한다는 이들도 있었다. <<원문 보기>>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2008년 8월 이후로 미국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듯, 북한의 권력다툼이다. 북한은 이오시프 스탈린 사후의 소련이나 마오쩌둥 사후의 중국과 비슷해 보인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아무 일도 없었다.

198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을 처음 방문했다. 중국 베이징을 통해 북한에 들어갔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소련을 거쳐 나갈 생각이었다. 소련 영사관은 평양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발급받은 비자를 요구했다. 대사관에 도착하자마자 KGB 요원임이 분명한 참사관이 친절하게 코냑을 권하며 방문 목적을 물었다. 그는 1980년 제6차 조선노동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지명된 김정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했다. 강한 인상은 아니며 살집도 있고 전체적으로 평범하다고 대답했다. 그는 “당신네 미국인들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한 인물만 생각”한다고 비판하고 “김정일 배후에는 그의 출세나 몰락이 곧 체제의 운명이라고 여기는 관료주의 집단이 있으며,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2020년 다시 와서 김정일의 아들이 집권하는 것을 보라”고 충고했다.

김정일이 69살로 사망하는 바람에 권력승계가 몇 년 앞당겨졌지만, 왕조적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의 운명에 대한 그의 판단은 누구보다 정확했다. 북한 주민들은 군주제에서 1천 년을, 독재체제에서 한 세기(황제를 받들어야 했던 일제강점기(1910~45)와 66년간 지속되는 김씨 일가의 독재)를 보내고 있다. 김정은의 생일이던 지난 1월 8일(출생연도는 1983년인지 1984년인지 밝혀지지 않음), 국영방송은 김정은을 칭송하는 1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김일성의 손자인 그는 위대한 할아버지가 방문했던 상징적인 유적지를 일일이 방문했고, 백두산도 빼놓지 않았다. 북한과 중국 국경에 위치한 백두산맥은 북한 정체성의 기원으로서, 김일성이 1930년 항일 무장투쟁을 이끈 곳이자 1942년 태어난 김정일의 공식 출생지이다.

실력자들, 그의 몰락 원치 않는다

김정은의 ‘보디랭귀지’도 예사롭지 않았다. 미소를 띠고 손을 맞잡은 거대하고 힘있는 청년 김정은은 이미 정치인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친애하는 지도자’ 역할이 아주 자연스러운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근엄하고 권위적이며 냉소적인, 스키 재킷을 입고 단추를 목까지 채운 채 큼지막한 선글라스를 써 눈빛을 감춘 아버지 김정일의 모습은 지워졌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젊은 김정은의 용모와 풍채가, 1940년대 말 집권 당시의 할아버지 김일성과 비교해 얼마나 닮았는지를 보여준 점이다. 옛날 사진까지 찾아내어 두 사람의 헤어스타일도 동일하다고 보여줬다. 마치 손자가 할아버지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복제품 같았다.

북한의 문화는 시나 문학 할 것 없이 예법과 관습, 전통은 물론 왕가를 둘러싼 비화를 다루며, 특히 최근 들어선 왕위 계승에 대한 내용을 중시하고 있다. 많은 왕들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가장 추앙받는 왕이자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1397~1450)은, 상왕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21살에 수선했다. 김정은처럼 세종대왕도 셋째아들이었다. 첫째아들은 무도한 행동으로 한양에서 추방됐고, 둘째아들은 승려가 됐다. 김정일의 아들들도 비슷하다. 장남인 김정남은 위조 여권으로 일본에 입국하려다가(디즈니랜드에 가려고 했다고 함) 발각되어 북한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때부터 세계적 도박의 중심지인 마카오에 머무르고 있다. 차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을뿐더러 그는 이번 아버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아버지 모습 지우고 할아버지 재현

동양인은 ‘체면이 깎이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품위’나 ‘명예’라는 의미로 보면 적당할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지도자의 얼굴은 국가의 위신을 의미한다. 1981년 북한 방문시 공항을 나와서 김일성의 거대한 초상화 앞을 지날 때였다. 북한 가이드가 정중하게 “저희 수령님을 모욕하지 마십시오”라고 주의를 줬다(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입국하자마자 쫓겨나고 싶진 않았다).

북한의 유일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은 북한을 다른 그 무엇보다 우위에 두는 인식이다. 한국학자 개리 레드야드에 따르면, 두 번째 글자 ‘체’(體)를 ‘나라’라는 뜻의 글자 ‘국’(國)과 조합한 ‘국체’는 연설에서 곧잘 등장하는 단어로 나라의 체면, 즉 품위를 언급하기 위해 사용됐다고 한다. 그는 “국체는 상처를 입을 수도, 부끄러워질 수도, 모욕될 수도, 더럽혀질 수도 있”으나 “사회 구성원들이 적절하게 처신하여 국체(품위)가 ‘실추’되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체라는 단어는 북한 주민의 집단의식 속에 뿌리 깊이 자리잡은 가치와 연관 있다. 북한을 방문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사상이 그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종종 지나친 교만함이나 화려한 기념물로 표출되지만 이는 결국 국가의 위엄을 영속시키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종은 1863년 11살에 즉위했고,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섭정했다. 대원군은 집정 기간에 지배적 사상이던 성리학을 부흥시키고, 문호 개방을 요구하는 여러 외세에 맞서 쇄국정책을 펼쳤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일으켰고, 2년 뒤에는 메이지 일본의 조선 침략 시도를 물리쳤다. 이때가 ‘은둔의 나라’라는 별명을 잘 보여준 시기이자, 국체 사상이 가장 팽배했던 시기다.

세종대왕에 투사되는 캐릭터

고종이 친정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고종은 조선을 개혁하고 근대화하기 위해 문호를 개방하는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고, 강대국을 이용해 서로 견제하려고 했다. 이 정책은 1910년 국권을 상실할 때까지 25년 동안 이어졌다. 18m에 달하는 김일성 동상을 앞세운 조선혁명박물관에서 방문자들은 흥선대원군의 업적을 칭송하는 영상물을 관람하고, 미개한 외세로부터 조선을 지킨 성벽을 상징하는 석물을 살펴보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승리한 무용담을 들을 수 있다.

김정일의 장례식에서 김정은 뒤로, 오랜 기간 공안기관의 수장을 맡고 있는 김정일의 처남 장성택(55)이 보였다. 김일성의 측근으로 여든이 넘은 김기남 노동당비서가 그의 뒤를 따랐다. 김정일의 운구차로 사용된, 가족의 문장이 새겨진 링컨 콘티넨털 리무진 곁에 세 세대가 엄숙하게 행렬했다. 반대편에는 세계 4위의 군병력을 지닌 군부의 군총참모장, 인민무력부장 등이 김정일을 호위했다.

김정일의 장례식은 김일성의 장례식과 비슷했다. 당시에도 전문가들과 공식 기관 사이에는 각종 관측이 난무했다. <뉴스위크>는 ‘머리 없는 괴물’이라는 표제를 내놓았다.(2) 주한미군사령관은 북한이 “내부 분열로 자멸하거나 외압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1990년대 말 북한 체제 붕괴가 임박했다는 주장을 달고 살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북한은 아직 건재하다. 몇 년만 있으면 소련에 맞먹는 기간을 존립하게 된다. 김정일이 사망하기 얼마 전 미국의 한 대학에서는 김정일의 사망과 동시에 군중이 봉기해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내용의 강연이 열렸다. 그 예상은 빗나갔다. 북한 주민들은 오열하며 거리로 모여들어 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집단 히스테리적 모습을 보였다. 1919년 고종 국장 때 국민이 모여들어 항일 독립운동이 극에 달한 모습을 연상시켰다.

김일성이 사망한 뒤 김정일은 공식 활동을 접고, 권력다툼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게 내버려두었다. 그러면서도 정식 후계자처럼 행동하면서 과거 왕조시대처럼 삼년상을 치렀다. 김정일은 199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설립 5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 등장해 전권을 장악했고, 국가를 지배할 준비가 됐음을 보여줬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북한은 이날 첫 번째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다.

   
▲ <평양>, 2005-니콜라 리제티

서방의 전망은 매번 빗나가

김정일은 서양에서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사상적 순수함이 퇴색하고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여러 차례 주장했다. 북한은 “사상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결론지으며 카를 마르크스를 거꾸로 세우고, 아니면 헤겔을 바로 세웠으니 흥선대원군의 성리학자 사관이 좋아했을 만한 문구이다.

김정은도 정권을 잡기 전에 삼년상을 치를까? 그럴 것 같지 않다. 이미 여러 차례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군사기지도 방문했다. 김정은은 경험을 쌓을 동안 저자세를 취하며 정권을 체제 원로들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이다.

미국과 남한에서는 올해 대선이 있다. 특히 강경한 대북정책을 펼쳐 북한이 껄끄러워하는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에 재출마할 수 없다. 중국 후진타오 주석도 올해가 임기 마지막 해이며,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의 재선 여부도 불투명하다. 주변국의 역할이 재분배되는 상황에서 시간을 갖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그러는 사이 김정은은 북한 주민에게 아버지보다 훨씬 친근한 이미지를 지닌 체제의 얼굴로 자리잡을 것이다.

겉모습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긴 필자가 틀렸고, 소련 대사관 참사관의 말이 맞았다. 그가 누구를 닮았든 간에 무릇 왕은 언제나 옳은 법이다. 김정일에 대한 전설 중에는 그가 필드에 처음 나간 날, 이글을 몇 번이나 했다는 일화도 있다. 에른스트 칸토로비치는 유명한 저서 <왕의 두 신체>에서 “두 명의 왕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왕의 의무가 부과된 나약한 인간으로서 언젠가 죽음을 맞는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군주제를 구현해 영속하는 완벽한 존재이다.(3) 이처럼 북한 주민들은 김일성을 무결점의 영원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김일성을 기리기 위해 마련된 묘는 북한에서 가장 크고 호화스러운 건물이다.

친근한 이미지의 체제 얼굴 될 것

김일성과 매우 닮은 얼굴을 가진 김정은은 셀 수 없이 많은 재난, 홍수, 가뭄, 경제 붕괴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기근으로 얼룩진 17년에 걸친 김정일 시대를 조만간 잊게 만들 수 있을까? 김정일이 이룩한, 이목을 끄는 만큼 미심쩍은 단 하나의 성과는 핵무기 획득이다.

인간은 원래 그렇다.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이상적인 과거를 추구한다. 김정은은 아직 서른 살이 채 안 되었다. 예전 그 소련 대사관 참사관의 예측이 이번에도 적중한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 그의 얼굴을 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미국 시카고대학 역사학과장. 저서로 <한국전쟁, 그 역사>(랜덤하우스·뉴욕·2010) 등이  있다.

번역 / 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빅터 차, ‘중국에 새로운 성(省)이 생기나?’, <뉴욕타임스>, 2011년 12월 19일자.
(2) 1994년 7월 18일, 김일성 사망 며칠 뒤 기사.
(3) 에른스트 칸토로비치, <왕의 두 신체 : 중세 정치신학에 대한 논평>(프린스턴·1957), 갈리마르, 파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