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네 교실엔 규정이 없다

2022-12-30     로랑스 드 코크 l 지리 역사학 교수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육자인 프레네 부부, 셀레스탱 프레네와 엘리즈 프레네는 수많은 글을 통해 자신들의 교육론을 펼쳤다. 그리고 1934년에는 방스에 직접 프레네 학교를 열고 이 교육론을 실천에 옮겼다. 정해진 수업도 없고 칠판 앞에 나란히 놓인 책상들도 없는 이 학교에서는, 총회의 투표로 각종 규칙과 처벌이 정해졌고, 어린 학생들은 자율적으로 학습하고 활동했다.

셀레스탱 프레네와 엘리즈 프레네 부부의 교육론은 정치적인 색채를 띤 하나의 방법이자 기법으로 실질적인 자료, 이론적인 고민 그리고 사상의 만남으로 탄생한 산물이다. 다시 말해 ‘프레네 교육학’은 완성된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과정으로, 사회적·정치적 이념들을 각종 기법을 통해 실험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여정은 상세히 기록돼 한 잡지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셀레스탱과 잡지 <해방 학교(École émancipée)> 간 협력은 관계가 어긋나기 전인 1934년까지 지속됐다.(1) 초기에 프레네는 이론에 주로 몰두했다. 그리고 1922~1923년부터 그는 교육적인 경험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그 일환으로, 프러시아 알토나에서 학교를 운영했다. 당시 그는 학생들의 체형에 맞춰 각종 집기를 구비하고 교사들의 교습 방식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등 자율적인 학습조건을 충족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가 그는 러시아 여행(1925~1925)에서 큰 감명을 받아 18편의 글을 남겼다. 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 속에 해방된 인간’이라는 비전과 목표를 세운 러시아 학교를 보고 ‘아름다운 길’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는 여기서 민중 학교와 프롤레타리아 교육론의 정의를 깨우쳤고 학교를 학습 실험실로써 관찰했다. 학생들은 개별화된 학습을 진행했고 자유와 자율성이 강조됐으며, 학교는 사회와 정치의 축소판처럼 기능했다. 모든 수업은 활동적이었고 시험은 없었다. 야외 수업과 수공업, 산업, 농업, 공동교육 수업이 이루어졌다. 프레네는 감탄했다. “러시아의 학교는 생기가 넘치고, 정치적이나 종교적이지 않다. 노동자공화국의 시민들, 고루한 성직자를 성당에서 쫓아낼 수 있는 비종교적 프롤레타리아를 충실히 양성하고 있다. 이것이 민중학교의 출현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다.” 1925년, 프레네는 이렇게 썼다. 

이 시기 프레네가 목격한 러시아 학교를, 거대한 볼셰비키 프로파간다 기업처럼 상상해서는 안 된다. 1920년대 러시아의 교육 정책은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가인 존 듀이에게서 영감을 받았으며, 특히 신경제정책(NEP) 이후 모든 형태의 민중 교화와 위계적 당국과 결별하고자 했다. 이로써 집중적인 문화 활동, 자유에 기반한 새로운 학교들의 증가, 교육 콘텐츠의 탈이데올로기화가 이뤄졌다.(2) 프로방스 출신의 교육자 프레네는 이런 교육 정책에 매료됐다.

프레네는 또한 존 듀이뿐만 아니라, 아돌프 페리에르, 마리아 몬테소리, 오비드 드크롤리, 라빈드라나드 타고르, 장 피아제,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등 이미 알려져 있던 교육자들의 작업을 면밀히 검토했다. 페리에르에 관해서는 저서 『액티브 스쿨(École active)』(1922)에 언급된 “아동의 자발적이고 개인적이며 생산적인 활동”의 중요성에 공감했다. 몬테소리 교육학이 기반한 교육 원칙, 특히 아동의 행복 추구에 관한 원칙도 차용했다. 프레네는 국가 교육과정의 분석자로도 활동했다. 1923년 프랑스 교육 과정이 발표됐을 때, 능동적인 배움과 자유로운 글쓰기의 강조, 야외 수업의 권장 등 실용을 중시하는 새로운 교육에 가까워진 모습을 보고 프레네는 매우 기뻐했다.

셀레스탱 프레네가 잡지 <클라르테(Clarté)>에 ‘프롤레타리아 학교를 향해: 자본주의 학교의 마지막 단계’라는 어느 정도 완성된 수준의 정치적 기고문을 발표한 것은 1924년이었다. 그는 이 기고문에서 19세기 이전까지의 학교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산업화가 태동하면서 교육이 자본주의의 이익에 부합하기까지의 역사를 말이다. 부르주아 학교는 지식을 이익 창출을 위한 것으로만 여겨, 오로지 지식 극대화에만 주력했다. 이에 프레네는 수작업을 지식 전달을 위한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는 작업 학교를 주장했다. 즉, 노동자가 자신에게 유리한 사회적 질서를 재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학교의 혁명이 완성된다는 것이었다.

방스 학교는 복잡한 행정 절차에서 벗어나 프롤레타리아 교육을 실천하는, 새로운 교육법의 원칙들을 실험하는 장으로서 1934년 프랑스 남동부 알프 마리팀에 설립됐다. 장 제이의 결정으로 방스 학교가 공식 개교했을 때, 엘리즈와 셀레스탱은 둘 다 은퇴한 상태였기에 공립 학교 형태를 따르지 않아도 됐다. 1936년 여름에 <레뒤카퇴르 프롤레타리앵(L’Educateur prolétarien)>은 ‘프레네 학교 개교 1년 동안의 경험’에 전체 지면을 할애했다. 셀레스탱은 부족한 자원 때문에 고통스러웠다고 토로했지만, 결국 프롤레타리아 학교에만 해당되는 ‘자원 부족’으로 인해 교육적이고 사회적인 이상향에 더 근접했던 셈이었다고 위안했다.

 

‘자연’과 ‘자유’를 향한 건물, 음식, 교육방식

방스 학교는 재정 문제도 겪었다. 엘리즈에 따르면, 지원을 약속했던 관대한 부르주아 기부자들이 마지막 순간에 지원을 거부했다고 한다. 프레네 부부는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 건물을 짓는 공사에도 손을 보태야 했다. 그렇게 완성된 학교는 완벽하게 ‘프롤레타리아 건물’의 모습이었다. 사치스러운 부분은 찾아볼 수 없었고, 공기, 햇빛, 물, 공간, 들판, 고요, 테라스, 정원이 전부였다. 간신히 차 한 대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을 지나면 에스테렐과 앙티브까지 이어지는 해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처음 등록한 15명의 학생들 중 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비참한 환경에서 성장한 아동들이었다. 1명은 아픈 엄마의 손에 자랐고 8명은 젠빌리에 고아원 출신이었다. 또 1명은 아버지가 집을 불태운 뒤 어머니가 정신을 놓아버린 가정의 자녀였다. 엘리즈와 셀레스탱은 학교에서 각각 엄마와 아빠로 불렸다. 담요 살 돈이 없어서 망토를 덮고 잤다. 지식 전달에 집중하는 귀족 학교와 달리, 아동들은 모든 가사에 참여했고 가축도 돌봤다. 공산주의적인 독단주의는 없었다. 아동들을 가두는 모든 시스템을 파괴하는 즐거움만이 존재했다.

음식 또한 ‘프롤레타리아적인 자연주의’에 입각해 과일, 곡식, 쌀, 옥수수, 세몰리나(밀의 일종), 파스타류를 기본으로 했다. 우유는 없었지만 신선한 요거트와 치즈는 제공됐다. 배를 쉽게 부르게 하는 묽은 수프나 빵을 주로 섭취하던 아동들의 식습관을 바로잡아야 했다. 프레네는 초반 몇 개월 동안 아동들은 포만감이라는 느낌을 알지 못해 온종일 먹을 생각만 했다고 말했다. 음식에는 예민하고 불안한 상태로 학교에 입학한 아동들을 진정시키는 기능도 있었다. 

한동안 젠빌리에 고아원에서 온 아동들은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집 주변만 배회했다. 조금이라도 난처한 상황에 놓이면 괴성을 질러대는 아동들도 있었다. 어떤 아동이 문제를 일으키면 엘리즈와 셀레스탱은 무엇을 먹었는지 물었다. 하루는 한 아동이 테라스 너머로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초콜릿을 먹은 상태였던 적도 있었다.

학습 면에서 보면 프레네 학교에는 딱히 수업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칠판 앞에 나란히 놓인 책상들도 물론 없었다. 아동들은 문서 작업실, 자료실, 출력실, 예술실, 어린이실, 교사실, 목공실, 방직실과 같은 여러 작업실로 흩어져 찾아갔다. 긴 복도를 따라 위치한 폭 2m 가량의 방들은, 아동들이 앉아서 작업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자율적으로 작업에 몰두하는 아동들에게 해당 작업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또 자신감을 불어넣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이런 방식은 ‘규율을 위한 거푸집’을 닮아 있는 전통적인 학교에 대한 반발로 고안됐다.(3) 프레네는 방스 학교의 유일한 교육자였고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았으므로, 아동들이 독립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했다. 

젠빌리에 고아원의 아동들이 오면서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차분하고 공동체 생활에 완전히 적응해 있는 기존 아동들과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프레네는 고아원 아동들이, 비이성적이고 술에 절어 있고 영양 상태가 나쁜 도시 노동자의 모습과 비슷했다고 표현했다. 한 손에 『Salut camarade! 안녕, 동지!』 책을 든 수사관이 나타나 거칠게 악수를 청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다른 아동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도록 이 아동들을 시간을 들여 교육해야 했다. 벌을 주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먼저 노트에 잘못을 기록한 뒤 총회에서 그 심각성에 따라 처벌 내용을 결정했다.

방스 학교의 일정은 빡빡했다. 주말도 주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중에 작업한 결과는 매주 토요일 저녁에 의회에서 검토했다.

 

6시 30분 : 기상 및 마사지, 반응, 필요 시 발한(發汗), 체조

7시 15분 ~ 7시 45분 : 서비스(집안일)

7시 45분 ~ 8시 15분 : 아침 식사

8시 15분 ~ 8시 30분 : 침대 및 기숙사 정리

8시 30분 : 학습 시작. 수업은 자유로운 글 읽기로 시작한다. 함께 글을 읽고 선택하고 출력한다. 이는 계산, 문법, 과학 등 다른 학습을 위한 기초 자료로 활용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작업실로 이동해 각자의 수준과 진도에 맞추어 작업을 진행한다(미국의 교육자 칼턴 워시번의 교육학에서 영감을 받음).

10시 30분 : 들판에서 작업 또는 자유 작업

11시 30분 : 체조

정오 ~ 1시 30분 : 점심 식사

1시 30분 ~ 4시 30분 : 자유 수작업

4시 30분 : 공동 토론 또는 단체 강독

5시 10분 : 회의 – 학생들은 학교에서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의견 발표를 준비하는 훈련을 받는다.

 

마들렌에 따르면, 엘리즈와 셀레스탱은 학생(아동)들이 일어날 무렵이면 이미 일어나서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고 한다. 모든 학생들은 커다란 욕조에 들어가 여름에는 햇빛 아래에서, 날씨가 추워지면 기숙사 안에서 몸을 말렸다. 셀레스탱은 학생들에게 땀을 내게 했다. 학생들은 알코올램프를 쬐다가 몸이 “적당히 뜨거워지면” 차가운 욕조 안으로 뛰어들었다고, 마들렌은 썼다. 그리고 셀레스탱은 마사지 글러브로 학생들의 몸 곳곳을 강하게 마사지했다.

마들렌은 작업 방식도 설명했다. 매주 학생들은 몇 가지 일로 구성된 개인별 작업 계획표를 받았다. ‘자유로운 학생들의 협동조합’은 매주 토요일에 회의를 열었다. 학급 대표로 선출된 학생이 벽에 붙은 일지를 읽었다. 그 일지에는 한 주 동안 학생들이 경험한 슬픔, 기쁨, 바램 등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질문 상자’가 주어졌다.

방스 학교에서는 모든 이들이 공동체를 위해 일해야 했다. 수업이나 암기는 없었다. 학생들만 할 수 있는 작업도 있었는데, 공동체 안의 생활을 기록한 월간 잡지 <선구자(Pionnier)>를 펴내는 일이었다. 엘리즈는 수작업을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엘리즈는 방스 학교가 여전히 전통적인 학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예술가적인 기질이 넘쳤던 그녀는 언제나 더 많은 창의성, 자유, 그리고 자연과의 교감을 원했다.

방스 학교의 첫해 결과 보고서를 보면, 모든 것이 기대했던 대로 되지는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개선해야 할 점도 많았고, 학교 운영은 수많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또한, 이를 프레네가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명백한 것은, 프레네 부부가 이 학교를 교육적인 실험과 관찰의 장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작업의 중요성과 교육적인 도구로서 작업이 놀이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도 보고서에 강조돼 있다. 당시 유행했던 새로운 교육이 추구하는 방향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방스 학교가 중요시한 가치는 ‘자유’다. 학생들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프레네 학교는 마치 공동작업실 같은 존재였다.

후에 방스 학교는 협동조합의 형태로 운영됐다. “우리는 주인도, 사장도, 대표도 아니다. 우리는 학생들과 똑같이, 권리보다 의무가 더 많은 공동체의 일원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정치적, 적어도 사회주의적인 표현이었다. “우리는 오늘이 아니라 내일을 위해 일한다. 우리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필요성에 대해 의식이 있는 인간과 투사를 양성한다. (...) 그리고 우리는 이 투쟁의 증인이다. 우리의 공동체가 과감한 시발점이 돼 사회주의적인 사회가 실현될 때,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대로 민중의 편에 설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방스 학교는 이상주의자가 그리던, 실용주의와 이상주의가 절묘하게 뒤섞여 있는 교육적 경험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글·로랑스 드 코크 Laurence De Cock
지리 역사학 교수. 이 글은 최근 출간된 그의 저서 『Une journée fasciste. Célestin et Elise Freinet; pédagogues et militants 파시스트적인 하루. 셀레스탱 플레네와 엘리즈 프레네 부부: 교육가 겸 활동가』, Agone(Marseille)에서 발췌했다.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1910년에 창간된 잡지로, 혁명적 노동조합주의를 표방하며 비종교적교육자연맹(Fédération des membres de l’enseignement laïque)의 기관지였다.
(2) Antoine Janvier, Matérialisme et révolution chez Freinet 프레네의 유물론과 혁명, <Cahiers du GRM>, n° 14, Toulouse, 2019.
(3) Célestin Freinet, Plus de leçons 더 많은 교훈, <Brochure d’éducation nouvelle populaire>, <L’imprimerie à l’école>, 1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