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이웃 간의 싸움
두 건국 신화가 부딪칠 때
독립 당시 물려받은 라틴아메리카의 국경선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이웃 국가간, 유럽 강대국에 대한 영토분쟁이 수없이 많다. 교육 제도로 강화된 국민 설화는 영토를 신성시하며 잃어버린 영토 수복을 촉구한다.
콜롬비아의 산 안드레스 제도에서 카리브해의 흰색 모래가 펼쳐진 열도는 마치 그림엽서 같다. 이곳에 거주하는 라이살레스 공동체는 주로 어업으로 먹고산다. 그런데 2022년 4월 21일 내려진 국제사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라이살레스들은 낚시 그물을 접었다. 콜롬비아 소속 섬들을 둘러싼 바다가 니카라과의 영해로 인정되면서 이곳에서 이뤄지는 어업행위가 불법이 됐기 때문이다.
산 안드레스 제도의 일화는 라틴아메리카 영토와 영해를 두고 벌어진 일련의 국경 분쟁 중 최근의 일이다.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계류되거나 현재 공판 중인 사건 18건 중에서 1/3이 라틴아메리카 국가 간 영토분쟁이다. 사상적, 사회적, 문화적 분열을 넘어 지리적 긴장관계가 라틴아메리카 사회 전체에 팽배하면서 국가공동체를 결집시키고 있다. 물리적인 동시에 가상의 국경을 두고 감도는 외부의 위협에 대해 상대적으로 애국심이 고조되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는 자가 계속 가져라”
문서에서 국가 간 경계를 구분하는 원칙은 명백한 편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1810년에서 1821년 사이에 대부분의 국가가 독립하면서 새로운 영토 소유권은 ‘현실점유의 법원성 원칙(Uti possidetis juris)을 따르기로 했다. 이 원칙의 의미는 한 마디로 ‘가지고 있는 자가 계속 가져라’다. 브라질제국은 새로 건립되면서 1750년 마드리드 조약 체결 당시 협의된 국경을 그대로 가져와 영토상 단일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이 법적 원칙에 따라 스페인왕국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예전의 하위 행정 조직의 경계선을 그대로 따랐고, 키토 레알 아우디엔시아 영토는 에콰도르, 리오 데 라 플라타 부왕령은 아르헨티나가 됐다. 당시 현지 크리올 신흥 엘리트들이 새로 건립한 공화국은 왕국의 제도적(및 사회적) 구조를 완전히 붕괴시키지 않으면서 식민지 지위에서 벗어나길 바랐다.(1)
그러나 현실점유의 법원성 원칙은 수많은 암초에 부딪혔다. 시몬 볼리바르가 구현한 하나 된 라틴아메리카라는 유토피아는 현재 콜롬비아 영토와 파나마,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그랑드 콜롬비아’라는 하나의 국호로 묶었다가 1831년 해체됐다. 한편 아르헨티나는 수도와 지방의 이해가 일치하지 않아 오랫동안 충돌해 몇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다가 1860년 다시 연방국을 이뤘다. 이 지역 내 국가의 국경선을 바꾼 19세기의 수많은 무력 분쟁도 빼놓을 수 없다. 파라과이 국토의 절반을 빼앗은 3국 동맹 전쟁(1865~1870)과 미국과 멕시코의 전쟁(1846~1848),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 사이에 발발해서 볼리비아의 해양 접근권을 박탈한 태평양 전쟁(1879~1884) 등이 있다.
게다가 스페인왕국의 자원착취적 논리는 일부 구조적 지점(광산, 대도시, 항만)에 집중됐고 이를 중심으로 영토의 다른 부분도 개발됐다. 각국의 독립 시점에 미국 영토의 대부분은 거의 개발되지 않았거나(아마존 삼림이나 마푸체 원주민이 사는 파타고니아 대평원) 명확한 소속 여부가 드러나지 않았다(과테말라 총사령관의 식민지 시절을 거쳐 현재는 콜롬비아가 된 누에바 그라나다 부왕령으로 전속된 산 안드레스 제도의 사례). 과거에는 본국으로부터 한목소리로 지배되던 식민지 지역 체계였지만, 새로운 공화국은 이웃에 개의치 않고 각자 독자적인 규칙을 수립했다.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이 지역에 상호 모순되는 건국신화가 발달했고, 이는 결국 수많은 영토분쟁의 원인이 됐다.
라틴아메리카계 젊은 엘리트들은 식민지배를 벗어나자 자국의 운명을 점칠 건국신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독립 공화국의 이론적 근거를 세우는 작업이었다. 같은 지역 내에서도 민족과 역사적 현실이 다양했기에, 이들은 모든 사회 구성원이 공유할 국가적 인식을 만들고 편집했다. 이 과정에서 예술이 큰 역할을 했다. 문화적 규준, 문학, 연극, ‘순수하게’ 국가를 대표하는 민속 등이 만들어졌다. 국가를 작곡하고 민간 설화를 창조하고 국가의 새로운 영웅을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기본교육이 일반화되면서 교실에서 이런 신화와 설화를 가르쳤다.
위대한 서사시는 이웃나라의 설화와 반대로 쓰였다. 이 서사시는 영토 문제를 근간으로 작성됐다. 에콰도르 정치학자 아드리안 보니야가 페루와 에콰도르 국가주의에 관한 논문(2)에서 강조했듯 “정체성과 소속감, ‘에콰도르’ 혹은 ‘페루’라고 여겨지는 ‘공동체’는 물리적인 공간과 반드시 결부된다. 국가 이미지를 구기는 표상이 있을수록 더욱 그렇다. 이 표상으로는 지역적, 문화적으로 특수하고 다양한 표현이나 전 세계적으로 비교했을 때 동일한 역사를 갖고 있고 민족 구성도 동일하고 경제와 자원도 유사한 여러 사회 등을 들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와 같이 천연자원이 다양하고 풍부한 지역에서 자연은 건국 설화에 큰 몫을 차지한다. 페루와 에콰도르 간 영토분쟁은 아마존 삼림 일부를 두고 벌어졌고, 이는 1995년 이 지역의 마지막 군사적 충돌인 세네파 전쟁으로 이어졌다. 에콰도르는 이 전쟁으로 국가적 세계관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안데스산맥에 있는 에콰도르는 아마존 국가라는 전제에서 건국신화를 구축했다. 세네파 지역(그리고 아마존강 접근권)을 빼앗기는 것은 국가 정체성을 훼손하는 일이었다. 태평양 전쟁(1879~1884) 당시 볼리비아는 해상 접근권에 관해 동일한 문제를 겪었다.(3) 해상강국을 자부하는(게다가 늘 해군이 있었다) 볼리비아는 이 전쟁이 단순히 경제적 위협이 아니라 건국신화를 뒤흔든다고 여겼다.
삼림과 바다, 축구를 둘러싼 분쟁
이런 상황에서 영토분쟁은 온전한 국토를 이루려고 빼앗긴 영역을 회복하겠다는 정당한 요구였다. 지식 계승을 위한 교육체계 덕분에 위대한 건국신화는 세대를 거쳐 국민의 정신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가령 아르헨티나에서 포클랜드 제도는 교실에 걸린 국가 지도에 당연히 포함돼 있다. 2006년 발효된 국가교육법에는 “포클랜드 제도, 남조지아 제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를 되찾겠다는 전투적 다짐은 모든 지역에서 공통된 교육 프로그램이다”라고 명시됐다.
이런 분위기였던 만큼, 전쟁이 끝난 1985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아르헨티나 국민의 73.6%가 “독립 이후 국토를 빼앗겼다”라는 입장을 보인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포클랜드 제도 상실은 유명한 ‘사막의 정복’ 당시 파라과이 토지와 파타고니아의 마푸체 영토 수백만㎡ 수복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상실감은 교육 수준에 비례해, 고등교육학위를 보유한 응답자 중 86%가 공감한다. 초등교육 단계에서 학업을 중단한 이들 중에는 61%라는 점과 대조적이다. 아르헨티나인들이 교육체계에 남아 있을수록 그들은 국가주의적 역사관을 더 깊게 체득하는 셈이다.
영토분쟁 개념은 국가의 DNA인 기본 문서, 즉 헌법에 포함되면서 정점을 찍었다. 영토문제는 이제 국가정책이 됐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볼리비아 헌법 제268조는 “태평양과 영해 접근권의 영토 불가침권”을 선언한다. 베네수엘라 1999년 헌법 제10조는 자국 영토를 “1810년 베네수엘라 도독령”(사실상 이웃 가이아나와 분쟁 중인 에세키보령도 포함함)으로 묘사한다. 아르헨티나 1994년 헌법은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불가침 주권을 주장하며 이곳의 수복이 “아르헨티나 민족의 간절하고 항구적인 목표”로 여긴다. 브라질 1988년 헌법은 “영토 경계”를 국경선을 따라 폭 150㎞의 띠로 규정하며 이는 “국토 수호에 필수”로 이곳의 점유와 활용은 법으로 규제한다고 명시한다.
마라도나가 만들어낸 ‘설욕’의 쾌감
영토 신성시는 ‘종교적 스포츠’인 축구에도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예배 의식과 스포츠가 결합된 행사에서 뒤섞이며 마법과 현실을 넘나든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 영국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가 손으로 넣은 골이다.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장군의 말기 군부 정부에 큰 수치심을 안긴 포클랜드 전쟁 후 4년이 지난 시점이라 아르헨티나 국민은 대중문화에서 ‘신의 손’이라 여겨지는 ‘황금빛 아이’가 넣은 신비로운 골에서 설욕의 쾌감을 맛봤다.
몇 년 전,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다른 “축구 전쟁”에서 서로 대치했다. 엘살바도르 난민 물결을 온두라스가 거세게 억압하면서 시작된 두 이웃 국가 간 증오심은 두 국가의 간교한 독재 정부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 증오심은 1970년 월드컵 평가전에서 구체화됐다. 두 대표팀이 붙은 첫 번째 경기에서 온두라스가 승리하자, 자국의 패배를 수용할 수 없었던 18세 엘살바도르 청년이 자살했다. 이 죽음은 전국적 반향을 일으켜 엘살바도르 대통령과 축구 국가대표팀 전체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엘살바도르에서 열린 리턴매치에서 온두라스 대표팀이 묵는 호텔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 대표팀은 경기장에 가는 길에 군부대의 보호를 받았지만, 엘살바도르 사람들은 경기장에서 온두라스 국기를 태우고 국가가 나오는 시점에 행주를 내걸어 최종 도발을 감행했다. 2주 후 두 국가 간 전쟁이 발발했고, 4일 만에 2,000~6,00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국가 분쟁의 신성화에 맞서 카톨릭교회는 이 지역 일부의 평화협상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식민지 시절부터 교회는 스페인 왕실에 세계적으로 카톨릭의 확장도를 작성하라고 압박했다. 20세기에 교회는 국민을 달래기 위해 다시 국경선을 그리자고 촉구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칠레와 아르헨티나 사이의 파타고니아 분쟁 해결과 세네파 전쟁의 휴전 결정에 개인적으로 개입했다.
이웃 간 중재자를 자처한 브라질
영토분쟁 해결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제 3의 관계자가 있다. 그 중 특히 브라질이 눈에 띈다. 19세기 초, 아마조니아 국경 확정은 특히 브라질에 중요한 사안이다. 아직 확실하게 달라지지 않은 파이를 게걸스럽게 떼어가려는 신생 공화국들에 둘러싸인 브라질은 숲의 가장 넓은 면적을 확보하려고 국경 확정 절차에 돌입했다. 브라질의 대표적인 국민 설화는 지구의 어머니인 아마존 강과 정글에 관한 것이다. 1830~1840년 브라질 낭만주의 세대는 이상적인 원시 열대 자연을 중심으로 국가 이미지를 구축했다. 풍부한 자연에 대한 찬사는 국가 정체성의 근간이 됐다. 게다가 브라질은 이웃 10개국과 경계를 맞대고 있으니 영토분쟁이 일어날 위험성은 더욱 커졌다. 덩치만 커다란 브라질은 이웃 나라와의 새로운 관계를 관리할 담당 외교단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로 신속하게 결정했다.
지역 강대국이자 아마존 삼림의 70%를 차지한 브라질은 지역 불안을 막기 위해 자국 국경선 확정을 넘어서 이웃 국가 간 영토의 분명한 경계선을 세우려 했다. 브라질은 중재자를 자처하며 콜롬비아와 페루(1932년), 페루와 에콰도르 간 아마존 지역을 둘러싼 영토분쟁에 개입했다. 두 나라가 독립한 시점부터 잠재된 페루와 에콰도르 간 분쟁은 1941년 리우 조약으로 부분적 해법을 찾았다. 양국간에 터진 세네파 전쟁은 브라질의 개입으로 1998년 브라질리아 합의에 서명하며 종식됐다.
국경 분쟁 해결을 위해 20세기 초에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강대국이 개입했지만, 최근 수십 년은 지역적, 다자간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인접한 제3국가가 큰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에콰도르와 페루 간 분쟁의 경우, 협의를 이끈 주체는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미국이다. 평화의 수호자인 이들 국가는 서로간, 혹은 전쟁 당사국과 영토분쟁에 휘말려 있기도 했다. 파타고니아 남부 지역을 두고 아르헨티나와 칠레가, 영해 경계선을 두고 칠레와 페루가 맞섰다.
1948년 라틴아메리카의 대다수 국가는 ‘평화적 분쟁 해결을 위한 미주조약’을 체결하며 분쟁을 해결할 평화적 수단을 강구하고 지역 기구와 국제사법기구의 도움을 받기로 합의했다. 모든 분쟁을 피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분쟁으로 인한 불안이 지역이나 다자간 차원에서 해결되도록 위임하며 단계적 긴장 완화 국면에 도입했다. 최근 헤이그 법원의 판결은 라틴아메리카의 사례로 가득하다. 볼리비아와 칠레(2018), 코스타리카와 니카라과(2009, 2015, 2018), 니카라과와 온두라스(2007), 니카라과와 콜롬비아(2012, 2022), 페루와 칠레(2014) 등이다. 미주기구(OAS)는 과테말라와 벨리즈(1859년부터 이어진 벨리즈 남부 지역을 둘러싼 갈등),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런 영토분쟁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 간 양자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면서도 일부 상황을 타개할 지역적 협의의 장을 다지는 역할도 했다. 이제 라틴아메리카에서 국경선은 분화되기보다는 합쳐지는 추세다. 초국가적 기관이 발달하고 전 세계에 라틴아메리카를 ‘평화의 땅’으로 인식시키려는 계획이 수립되고, 인접국가들 간 의존성(경제, 관광, 안보, 난민 문제 등)이 심화되고 국가별 외교단이 전문화되면서 최근 이 지역 영토분쟁의 평화적인 해결을 이끌어내고 있다.
최근 사례를 보면, 2021년 9월 칠레와 아르헨티나 간에 영해 경계선을 두고 분쟁이 다시 시작됐으나, 외교적 채널을 통해 신속하게 해결됐다. 이로써 향후 무력 분쟁은 더욱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집권 정부에 중요한 선거가 다가오기 몇 주 전부터 국경 문제를 잠재적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낌새가 보인다. 그러나 에콰도르 정치학자 아드리안 보니야가 지적했듯, 라틴아메리카에서 국가주의의 비중은 국가와 국민이 종종 간과되는 주변 지역에서 국가 구조가 취약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국가 주권을 내실 있게 하는 요소가 부족하면 주권은 권위 행사나 영토 확보를 앞세운다. 따라서 국토 수호와 확장은 상징적인 힘을 부여하고 정부 존립을 정당화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다”라고 그는 지적했다.
민족국가의 개념에서 정부가 흔들리면 국가를 앞세우기 마련이다.
글·로마인 드로그 Romain Droog
주벨기에 아르헨티나대사관 경제고문, ‘새로운 라틴인의 공간 단체’ 소속 기자
번역·서희정
번역위원
(1) Renaud Lambert, ‘Icare ou l’impossible démocratie latinoaméricaine 이카루스 혹은 라틴아메리카의 불가능한 민주주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1년 3월호.
(2) Adrián Bonilla, ‘Las imágenes nacionales y la guerra 국가 이미지와 전쟁’, <Colombia Internacional>, no 40, Universidad de los Andes, Bogotá, 1997.
(3) Cédric Gouverneur, ‘La Bolivie, les yeux vers les flots 볼리비아, 물결을 바라보는 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