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제재 이후 미국이 재발견한 베네수엘라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인 상황에서 석유공급 차질을 우려한 미국 행정부는 지금껏 인정을 거부하던 베네수엘라 당국과 대화를 재개하기 위해 지난해 3월 초 카라카스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5년간의 제재로 베네수엘라를 압박해온 미국은, 이제 베네수엘라가 자국에 유용한 국가가 됐다고 보는 듯하다.
“스타워즈에서 다스베이더가 손도 대지 않고 누군가를 목 졸라 죽이는 것과 비슷하다. 이것이 베네수엘라 정권을 대하는 경제전략이다.”
2019년 3월 22일, 당시 미국 국가 안보보좌관 존 볼턴은 <유니비전(Univison)>에 출연해 미국의 대(對)베네수엘라 전략을 이렇게 설명했다. 2017년 7월에 시작된 미국의 제재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었던 베네수엘라의 경제 위기를 더욱 악화시켰다.
2018년 10월 12일, 윌리엄 브라운필드 전 주베네수엘라 미국대사는 베네수엘라의 상황을 “비극”으로 묘사하며 차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미 식량과 의약품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백만 명에게 영향을 미치겠지만 이 위기를 가속화할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 우리의 목표는 이 가혹한 응징을 정당화한다.”(1)
미국 정부는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 타도 노력을 통해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도 한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타국에 일방적인 제재를 부과할 ‘엄청난 특권’은 타국의 경제를 무너뜨리고, 국가기구를 무력화하고, 사회를 파괴할 수 있다. 그리고 갑자기 입장을 바꿀 수도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에너지 시장이 경색되자, 미국 대통령은 지금껏 인정하지 않던 정치 지도자와 대화를 재개했다. 이로써 미국의 제재 해제가 예고됐다.
제재-경제 위축-민영화의 고리
베네수엘라는 미국이 공세를 강화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무릎을 꿇었다. 2014년 여름부터 (베네수엘라 수출액의 95%를 차지하는) 석유의 가격은 6개월 만에 배럴당 100달러에서 50달러로 하락했고, 2016년 1월에는 30달러까지 급격히 떨어졌다. 이로부터 3년 후, 후안 과이도가 스스로를 (법적 정당성이 없는) ‘임시 대통령’으로 선언했을 때 백악관은 매우 가혹한 제재를 가했다. 캐나다와 유럽연합(EU)도 미국의 제재에 동참했다. 베네수엘라 국영 석유회사 PDVSA(Petróleos de Venezuela S.A.) 본사 및 모든 자회사와의 거래가 금지됐으며 (PDVSA의 미국 내 자회사 시트고(Citgo)를 비롯해) 해외에 있는 베네수엘라 자산은 압수당했다. 이와 함께 베네수엘라 기업과 거래하는 모든 외국 기업은 소송의 대상이 됐다.
이런 조치들은 거의 모든 국제금융 시장에 대한 베네수엘라의 접근을 차단했다. 베네수엘라의 국제금융 거래 능력은 대폭 약화됐다. 2021년 6월, 베네수엘라의 코로나19 백신 구매대금 지불 일부가 가로막혔다. 베네수엘라는 결국 빈국의 백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백신 국제 공동구매 사업 코백스(COVAX)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2014년 이후, 베네수엘라는 외화 수입의 99%를 잃었다. 이런 가운데, 베네수엘라 경제는 2013~2020년 80% 위축됐다. 이는 내전 발발 이후의 리비아보다 더 나쁜 상황이다.
이 위기에 대처하고자, 마두로 대통령은 2020년 9월 29일 “베네수엘라의 경제 활동에 대한 투자의 유연성 제고”를 위한 ‘반(反)봉쇄’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윌리엄 카스티요 반(反)봉쇄정책 차관은 이 법의 취지는 민간 자본을 베네수엘라 경제로 복귀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이 법은 개인이 민간 투자자와 체결한 계약 관련 정보를 특정기간 동안 기밀로 분류하도록 허락한다. 이런 보호를 요청한 것은 바로 기업인들이다. 미국이 베네수엘라와 거래하는 기업을 제재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석유 회사) 로스네프트(Rosneft)가 대표적인 예다.”
베네수엘라 석유시장 진출을 모색 중인 투자펀드에서 일하는 한 국제금융 전문가는 익명을 요구하며 “기밀유지는 베네수엘라 정부에도 이로운 일”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헌법상 금지된 민간 투자자와의 계약 체결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현행 베네수엘라 헌법으로는 자국 혹은 외국 민간 기업이 민관합작기업의 최대주주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지금의 정치적 맥락에서는 헌법 수정이 불가능하다”라고 설명했다. 과거 이 ‘제약’은 볼리바르 혁명이 주권 분야에서 이룩한 주요 성과로 여겨졌지만 궁지에 몰린 현 정부는 이 제약에서 해방되길 원한다. 카스티요 차관은 “기밀유지는 각 계약별로 한정된 기간 동안만 적용된다. 특정 경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일시적인 전술 수정이다. 국가가 잘 활용하지 않는 혹은 비효율적인 기업들의 자산을 민간 분야에 이전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법을 우회하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을까? 카스티요 차관은 답을 회피했다. ‘제재가 강요한’ 민영화 절차를 둘러싼 재량권, 바로 이것이 베네수엘라가 제재에 반격하는 방법의 특이점이다. 2020년 12월 12일, 마두로 대통령은 TV에 출연해 “반(反)봉쇄법 덕분에 다양한 경제 분야에서 투자와 제휴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반(反)봉쇄법의 본질이 기밀유지다”라고 덧붙였다. 베네수엘라의 주요 경제인 단체 ‘페데카마라스(Fedecámaras)’의 리카르도 쿠사노 회장은 마두로 대통령이 “덜 적대적”이라고 평가한 이런 법적 환경 덕분에 “농식품 산업이 발전”(2)하고 있다고 자축했다.
하지만 반(反)봉쇄법은 석유 부문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PDVAS의 중역(2004)을 거쳐 기초산업광업 장관(2005~2006)을 역임한 빅토르 알바레스는 “이 부문은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다”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법은 민간 분야의 공기업 투자를 제한하는 법적 틀을 무시한다. 이는 베네수엘라에서는 법률이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방식으로 적용된다는 생각을 강화해 역설적으로 베네수엘라의 법적 불확실성과 제도적 취약성을 악화시킨다. 이런 맥락에서는 해외 다국적 기업이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알바레스 전 장관은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의 석유산업을 재활성화할 방법은 제재 해제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석유의 판매와 생산, 양쪽에 제동이 걸려
유가 하락과 미국의 제재로 2014년 거의 300만 배럴에 달했던 PDVAS의 일일 생산량은 2018년 150만 배럴 미만, 2020년 35만 배럴로 급감했다. 6년 만에 1/8로 줄어든 셈이다. 베네수엘라에 유입되는 외화의 거의 전량을 차지했던 석유 수출 수입(收入)으로 (다양한 식료품을 비롯한) 막대한 양의 소비재 수입(輸入)을 감당하던 베네수엘라는 큰 타격을 입었다.
베네수엘라 출신 경제학자로 미국 외교협회(CFR) 객원 연구원인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는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 감소는 무엇보다 수요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어느 시점부터 베네수엘라는 여러 유전의 가동을 중단해야 했다. 원유 수송이 중단되고 저장 탱크가 가득 찼기 때문이다. 제재가 두려워 아무도 베네수엘라의 석유를 구매하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베네수엘라는 주로 채권국이자 동맹국인 중국과 러시아에 시장 가격보다 저렴하게 석유를 팔아 넘겨야 했다.”
그러나, 베네수엘라와 미국 간 석유무역이 중단된 것은 아니다. 미국 석유업체 셰브런(Chevron)은 미국 당국으로부터 제재면제 특혜를 받아 베네수엘라에서 사업을 지속했다. 심지어 PDVAS와 설립한 합자 회사도 유지했다. 셰브런은 석유 시출을, PDVSA는 판매를 담당한다(PDVSA에서 20년간 근무한 기술자 루이스 로메로에 따르면 셰브런은 오리노코 벨트(Orinoco Belt, 오리노코 강 유역 유전지대)에서 “생산성이 가장 높은” 업체다). 하지만 PDVSA는 더 이상 미국에 석유를 판매할 수 없다. 2017년에만 해도 미국은 베네수엘라산 석유의 41%를 사들이는 주요 구매국이었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문제는 수요 감소가 가장 크지만, 생산요소 확보의 어려움도 적지 않다. 로메로는 “오리노코 벨트에서 시추한 중질원유를 수출하려면 경질의 원유를 섞어야 한다. 베네수엘라는 이 배합과정에 필요한 희석제를 미국에서 수입했는데, 제재로 수입이 중단됐다”라고 설명했다. 희석제가 없으면 원유를 휘발유로 정제할 수 없으므로, 베네수엘라에는 휘발유와 경유가 부족해졌다. 따라서 베네수엘라 국민들은 연료를 사러 몇 시간씩, 심지어 며칠씩 줄을 선다.
2021년 9월, 마두로 정부는 이 난관을 타계하고자 원유 생산량 일부를 제공하는 대신 이 귀한 희석제를 20년 간 공급받는 협약을 이란과 체결했다. 최근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량 증가는 미국의 제재를 받는 양국 간 동맹의 결과다. 2021년 베네수엘라의 일일 평균 원유 생산량은 85만 배럴로 전년도 35만 배럴 대비 2.4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2022년부터는 일일 평균 200만 배럴로 회복하는 것이 베네수엘라의 목표다.
고철을 둘러싼 온갖 불법행위들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내 정유시설을 정상화해야 한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위기를 계기로 이런 유형의 투자를 촉진할까? 로메로는 “생산량은 빠르게 증가할 것이고 베네수엘라는 유가 상승을 최대한 활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 시설이 많이 훼손됐다. 사람들이 고철을 팔기 위해 시설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로메로가 설명했다. 고철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들이 오가는 오리노코 벨트의 파헤쳐진 도로 가장자리에서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가끔 유전에 가보면 파이프를 절단하고 있는 고철상을 마주친다. 이들은 급히 도망쳐 우리가 떠나길 기다렸다가 되돌아온다. 이들은 대체로 밤에 활동한다. 직원들이 석유, 전선 심지어 기숙사 가전제품까지 훔쳐가는 경우도 있다.”
이는 명백한 절도 행위임에도, 어느 정도 용인되는 편이다. 일부 공공분야의 경우 저임금을 보상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을 규제하고, 비공식 분야를 관리하기 위해 베네수엘라 정부는 2018년 시행령을 제정했다. 고철에 “국가산업 발전에 전략적이고 필수적인 성격”을 부여한 이 시행령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국내에서 발생한 고철은 군 장성이 경영하는 국영 기업인 에세키엘 자모라 생태사회주의 공사(Corpoez)에 독점 판매돼야 한다.
로메로의 동료 모이세스 바르가스에 따르면 현금 부족에 시달리던 PDVSA는 2020년 “가동 중단 시설에서 나온 고철과 부품으로 하청업체에 대금을 지불”했다. “당국은 상태가 양호한 유전의 운영에 집중하기를 선호한다. 다른 유전들을 복구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수도 카라카스 소재 (주요 국립대학인) 베네수엘라 중앙대학 사회학 교수 안드레스 안티아노는 “고철시장은 불투명하며 합법과 불법이 공존하는 회색지대”라면서 “중개상이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는 분야다”라고 덧붙였다.
바르가스는 또한 “중개상은 수거된 고철을 톤당 250달러에 사서 금속 종류에 따라 톤당 1,000달러까지 받고 Corpoez에 판매한다. 하지만 그 전에 PDVSA의 시설을 경비하는 군인들이 고철을 관타항으로 가져가는데 필요한 통행증을 발급해주고 수수료를 챙긴다. 관타항에 모인 고철은 터키로 수출된다”라고 설명했다. 돈벌이가 되자 배관이나 전선을 도둑맞아 온 동네의 전기와 수도가 끊길 정도로 고철 거래가 확대됐다.
자국화폐가 사라진 나라
2018년 물가상승률이 13만%를 넘어선(3)(2021년에는 “단” 686%로 감소) 초(hyper) 인플레이션의 영향으로 베네수엘라에서는 자국 화폐가 오래전부터 사용되지 않는다. 결국 당국은 일상생활에서의 달러 사용을 승인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이를 “미국의 경제 제재에 대한 항거 행위”(4)로 제시하며 베네수엘라 경제의 사실상의 달러화가 “국가의 생산력 회복과 배치 그리고 경제 기능을 도울 수 있다”(5)라는 역설적인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이 선언은 베네수엘라 정부가 2018년 말부터 국가 경제의 개방과 유연성 제고를 위해 내린 결정의 일환이다. 2018~2019년 가격 상한선과 환전 통제가 철폐됐다. 베네수엘라 화폐 볼리바르의 공식 환율은 시장 환율에 가깝게 하향 조정됐고 수천 종류의 제품에 부과되는 관세도 철폐됐다. 더 상징적인 결정은 국내 거래에서 외환 사용을 허가한 것이다.
이 조치들은 빠르게 성과를 거뒀다. 2022년 초 경제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경제회복의 최대 수혜자는 수도 동쪽에 위치한 고급주택가다. 이 지역 소재 부유층 거주지인 라스 메르세데스에서는 고급 승용차 판매점 수가 최근 3배로 늘어났다. 자동차 사진작가 페테리스 베르진스는 “2020년 전에는 3곳에 불과했던 고급 승용차 판매점이 이제 10곳 정도 된다”라고 설명하며 “람보르기니, 포르쉐, 벤틀리 심지어 페라리도 대량 입고됐다”라고 기뻐했다.
관세 철폐로 “이 현상은 확대됐다”. 쉐보레 콜벳 C8의 최초 생산 물량은 구매 대기자가 줄을 선 미국 시장에 출시되기도 전에 베네수엘라에 먼저 도착했다. 이 차량은 카라카스에서 20만 달러에 판매된다. 고급 스포츠카가 있으면 일반 주유소에서 길게 줄을 설 필요가 없다. 베르진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 행복한 차량 소유자들은 “미국에서 수입된 고급 스포츠카 전용” 고가 휘발유인 VP 레이싱(Racing) 판매 전담 주유소를 애용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카라카스에서는 외벽 전면이 유리로 지어진 고층 빌딩, 세계 각국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 수입 제품이 넘쳐나는 식료품점이 차례로 들어섰다. 카라카스 부유층 거주 지역에 있는 대형 상점 보데곤 악투알은 켈로그 콘프레이크, 프레지덩 로크포르 치즈, 자르지 않은 벨로타 하몽, 메이플 조 메이플 시럽, 네스프레소 커피 캡슐, 디종 마이유 겨자, 샴페인, 위스키, 라베리 푸아그라 심지어 누텔라까지 대용량 포장으로 판매한다. 근로자연구교육센터(CIFO) 소장인 경제학자 마누엘 서덜랜드는 이런 식료품점의 “고객은 구매력 상위 6% 가구”라고 강조했다.
잔돈이 없어 손님을 놓치는 상인들
서덜랜드 소장은 “볼리바르요 아니면 달러요?”라는 계산원의 의례적인 질문에 대부분 고객은 달러를 선택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부는 국내 구매의 60%를 차지하는 달러 거래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안티아노 교수는 석유 수출로 벌어들이던 수입을 박탈당하고, 제재로 외국 자본과 단절되고, 세금을 징수해 부를 재분배할 능력이 없는 “베네수엘라는 정부가 존재하지 않는 국가가 되고 말았다”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다면 베네수엘라에서 유통되는 달러의 출처는 어디인가? 알바레스 전 장관은 “베네수엘라 경제의 달러화는 공식적인 절차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즉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와 합의를 체결하고 공급받은 달러가 아니다. 자금세탁을 비롯한 다양한 출처가 존재한다. 그중 가장 큰 두 출처 중 하나는 금, 석유 생산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에 나가 있는 베네수엘라인들의 자국 송금이다.”
경제 위기로 베네수엘라 인구 2,900만 명 중 1/5이 해외로 이주했다. 많은 가족들이 친척들로부터 송금을 받는다. 해외 이민자 5명 중 3명이 고국에 돈을 부친다.(6) 로드리게스 CFR 객원 연구원은 “이처럼 베네수엘라에 송금된 금액은 2021년 40억~50억 달러에 달했다. 베네수엘라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상당한 금액이다. 비교할만한 수치를 예로 들면, 2020~2021년 베네수엘라의 석유 수출 수입은 40억 달러 미만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제재 때문에 해외에서 베네수엘라 계좌로 송금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서덜랜드 소장은 “해외에 거주하는 베네수엘라인은 대부분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송금을 한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자금의 이체는 대체로 신뢰할만한 전용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이뤄진다. 파리에 거주하는 베로니카 이달고는 암호화폐 교환 플랫폼인 바이낸스 애플리케이션으로 어머니에게 매달 돈을 보낸다.
하지만 해외이주민들의 송금이 국내의 현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베네수엘라 최대 쇼핑몰인 삼빌의 옷가게에서 막 나온 프랭클린 히메네스는 “정말 미치겠다!”고 소리치며 “소액권 확보 전쟁이다. 우리 같은 고객뿐만 아니라 고객에게 돈을 거슬러 주지 못하는 상인도 마찬가지다. 20달러 지폐를 한 장 꺼내면 같은 곳에서 한번에 다 써야한다”라고 설명했다. 이날 히메네스는 옷가게에서 빈손으로 나왔다. 이 매장의 점원은 “소액권 부족으로 가게들은 판매 기회를 놓치고 고객을 잃는다”라고 짜증을 내며 “자주 그랬듯이 현재 현금인출기가 텅텅 비었다는 게 문제다. 그렇다고 볼리바르화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다”라고 토로했다.
실제로 수년 전부터 정부는 볼리바르화 유통량을 줄여 달러화 대비 자국 통화의 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 속도를 늦추는 통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카티아나 페타레를 비롯한 유명 상업 지구에는 20달러 지폐 1장을 1달러짜리 지폐 18장으로 바꿔주는 비공식 소액권 교환 상인도 있다. 이들 중 한명은 “한 번 교환할 때마다 2달러를 벌 수 있다”라고 털어놓으며 자신의 소규모 사업에 만족감을 표했다. 소액권 교환 상인을 주로 찾는 이들은 고객을 잃느니 20달러 한 장 당 2달러 손해를 감수하는 영세 상인들이다.
“먹고 살려면 투잡은 기본이다”
경제가 사실상 달러화되면서 인플레이션은 억제됐다. 하지만 10년 전 차베스 대통령이 펼친 사회정책으로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평등한 국가였던 베네수엘라에서는 불평등이 커졌다. 볼리바르화 소득자의 삶은 어려워졌다. 3백만 명의 공공 부문 근로자 평균 월급은 달러로 환산하면 10달러(10.05유로)를 넘지 않는다. 5백만 명의 퇴직자가 수령하는 국민연금으로는 생활이 어렵다.
카라카스의 서민 거주 지역인 바리오 23 데 에네로에서 만난 마리아 R.이 여기에 속한다. 퇴직 교사인 그녀가 받는 연금은 달러로 환산하면 1달러 수준이다. 이 돈으로는 달걀 6구 1판을 살 수 있을 뿐이다. 그녀는 (퇴직자들의 인플레이션 대처를 돕기 위해 2020년 5월 수립된) ‘반(反)경제 전쟁’ 지원금과 식량 지원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0세가 넘은 마리아 R.는 그녀 못지않게 재정 상황이 열악한 아들 집에 살아야 한다.
카라카스 시청 기술자로 근무하다 퇴직한 마리아 R.의 아들은 70세가 넘은 나이에 다시 작업복을 꺼내 입었다. 비공식적인 방식으로 개인 가정의 사소한 일거리를 맡기 위해서다. 같은 동네에 사는 리오넬 F. 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엘리아스 토로 공립병원 간호사인 그는 원래 직업 외에도 콜롬비아에서 들여온 커피를 신고하지 않고 판매한다. 그는 “장사가 잘되는 날에는 병원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을 하루 만에 번다”라고 설명했다.
세 자녀를 둔 한 어머니는 “지원금을 받긴 하지만 매월 18달러(16.3유로)밖에 안 된다”고 토로하며 “고기 1㎏은 3.5달러(3.2유로), (베네수엘라 국민의 주식인 아레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옥수수 가루 1㎏은 1달러(0.9유로), 우유 1리터는 2달러(1.8유로)다”라고 식료품 가격을 줄줄이 읊었다. 그녀 역시 이 동네의 많은 주민과 마찬가지로 매월 정부가 빈곤층에 배부하는 식료품 꾸러미를 수령하지만 “이마저도 규칙적으로 배부되지 않는다”. 대학교수인 안티아노도 월급이 20달러(18.1유로)에 불과해, 부업을 하고 있다.
2022년 3월 2일, 마두로 대통령은 7볼리바르(약 1.4유로)인 최저임금을 125볼리바르(약 26.2유로)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급여를 보충해 주는 식권(공무원들에게 배부되는 음식점 이용권) 지급 금액도 3볼리바르(약 0.6유로)에서 45볼리바르(약 9유로)로 늘어날 예정이다. 연금 역시 최저임금 수준으로 상향 조정됐다. 마두로 대통령은 이에 더해 국가 보조금 또한 인상된 최저임금 가치에 맞춰 상향 조정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치들만으로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안티아노 교수의 설명처럼 베네수엘라에서는 “살아남으려면 모두가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직업을 가져야 한다. 공공 서비스의 질도 영향을 받는다. 공무원의 결근이 잦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
비트코인 채굴장, 비트코인 결제 확산
사실 당국이 그저 외면만 한 것은 아니다. 정부는 일부 부처, 기관, 공기업에 암호화폐 ‘채굴’ 장비를 설치했다.(7) 안티아노 교수는 “이 덕분에 공무원은 급여를 보충할 수 있게 됐지만, 가끔 정전이 발생하거나 인터넷 속도가 저하된다”라고 설명했다. 정부 최측근 고위 공무원은 심지어 ‘채굴장’을 만들어 놓고 컴퓨터 수십 대를 가동시킨다. 안티아노 교수는 “암호화폐 채굴은 대다수 관료의 주요 수입원이 됐다”라고 덧붙였다. 군대도 예외는 아니다. 2020년 11월, 베네수엘라 최대 군사 기지 푸에르테 티우나에 ‘디지털자산생산센터’가 개설됐다. 센터 운영을 담당하는 GB 아구스틴 코다시 엔지니어 61 여단의 인스타그램 공식 계정에는 이 대규모 채굴장은 “장병들의 복지를 위한 수입” 마련을 목표로 설립됐다는 내용이 게시됐다.
잠재 수익성이 매우 높은 암호화폐 채굴은 공공분야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보조금 덕분에 전기료가 매우 저렴한 베네수엘라는 엄청난 전력을 소비하는 암호화폐 생산의 수익성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다. 많은 베네수엘라 국민이 ‘채굴자’가 됐다. 암호화폐 채굴 전용기기 판매 전문 베네수엘라 업체 중 하나인 크립토아빌라의 대표인 길버트 로하스는 “기기 구매 비용을 회수하고 실질적인 이윤을 남기려면 수개월이 걸린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채굴이 시작된 시기는 유가 하락으로 경제 위기가 심화된 2014년이다. 채굴은 초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살아남는 수단이기도 하다. 채굴자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많은 채굴자가 식사를 하는 공간에 기기를 들여놓는다. 채굴로 올린 수익을 추가로 기기 구매에 재투자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창고에 채굴장을 차린다.”
2021년 7월 크립토아빌라 사옥에서 문을 연 “비트코인 채굴 역사관”에서 마주친 후안 L.은 각종 채굴기기 모델(가장 많이 팔리는 모델인 앤트마이너 AntMiner S9의 가격은 1,250달러)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채굴을 시작하고 싶지만 필요한 자금이 없는 배관공 후안 L.은 “신용 판매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를 팔 작정이다”라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립토아빌라 매장에서 만난 페드로 B.는 “나는 호텔을 경영하는데 직원들 월급 줄 돈이 없어 객실 하나를 비워 채굴기기를 설치했다”라고 털어놨다.
로하스 대표가 “비트코인 열풍”으로 묘사한 이 현상은 과도한 전력 소비로 이어져 주민들이 ‘채굴’에 몰두하는 지역의 변압기를 과부하 상태로 만들었다. 결국 정부는 2018년 ‘암호화 자산 및 관련 활동 국가감독청’(Sunacrip)을 만들어 암호화폐 부문 규제에 나섰다. 이제 비트코인을 채굴하려면 Sunacrip이 발급한 허가를 취득해야 한다. 이 감독 기구는 채굴을 허가하는 지역도 결정한다.
로하스는 “이제는 채굴로 발생한 수익에 세금이 부과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정부는 암호화폐 부문을 조직화하고 규제한다”라고 설명하며 예전에는 특히 정기적으로 채굴기기를 압수하는 등의 공권력 남용 사례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카라카스에서는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비트코인을 거래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상점의 수가 늘고 있다. 청년들의 경우 암호화 게임으로 눈을 돌렸다. 비트코인 채굴과 비교했을 때 훨씬 적은 최소한의 초기 투자금만 있으면 되는 암호화 게임 사용자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카스티요 전 반(反)봉쇄정책 차관은 이 모든 변화는 단순히 실용주의의 표출일 뿐이며 이와 같은 실용주의가 없었다면 베네수엘라는 경제 회복을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하경제가 발달한 것은 사실이다. 공공 부문을 떠난 이들이 영세 상점, 영세 사업으로 성공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좋은 일이다. 이 부문은 개인이 주도한다. 국가는 이 부문을 장려하고 지원할 것이다.” 카스티요 전 차관은 마지막으로 “우리의 목표는 30년 전 중국의 목표와 비슷하다. 당시 중국은 민간분야와 협력해 경제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그만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사람들이 쥐를 잘 잡는 국가를 원한다고 생각한다”라고 결론 내렸다.
안티아노 교수는 “제재는 베네수엘라를 미국과 협력할 준비가 된 국가로 변화시켰다”라는 또 다른 분석을 제시했다.
글·마엘 마리에트 Maëlle Mariette
기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Venezuela as a Narco State’, 국제전략연구소(CSIS) 주최 회의, Washington DC, 2018년 10월 12일.
(2) ‘Entrevista al responsable de la patronal venezolana : “Un ala del Gobierno de Maduro quiere ir a la privatización... con otro nombre”’, <La Información>, Madrid, 2020년 12월 12일.
(3) 베네수엘라 중앙은행이 발표하고 라틴아메리카 카리브 경제 위원회(ECLAC)가 인용한 수치
(4) ‘Los casinos vuelven a florecer en Caracas’, <La Voz de Galicia>, La Corogne, 2021년 10월 4일.
(5) ‘Maduro dice que la dolarización de facto es “válvula de escape” para la economía’, <EFE>, Madrid, 2019년 11월 17일.
(6) 국민생활실태조사, 안드레스 벨로 카톨릭 대학(UCAB), Caracas,2021년 9월.
(7) Frédéric Lemaire, ‘Paiera-t-on bientôt sa baguette en bitcoin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