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좌파 보이스카우트
Dossier 소통의 정치사회학
반인종차별주의, 반냉전이데올로기, 반소비사회…. 1960년대 벽두 미국에서는 급진단체들이 늘어갔다. 민주사회학생운동은 생각지 못한 성공을 거두었다. 반세기 전에 발표된 그들의 선언문은 미국 반문화의 필독 참고문헌으로 인정받고 있다.
1962년 6월, 미국 디트로이트 북부 인근에 있는 포트휴런. 민주사회학생연합(SDS·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이 첫 번째 대의원 대회를 개최했다. 이후 이 급진단체는 1960년대 인종차별 반대투쟁, 베트남 반전운동, 반체제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고, 좀더 넓게는 젊은이들이 냉전체제와 결별하도록 이끌었다. 당시 이데올로기적 구속은 지식인들을 무력화시켰고, 미국의 좌파와 노조, 교회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이 이끄는 반공 숙청의 두려움 속에 살고 있었다. 대의원대회에서 민주사회학생연합은 ‘포트휴런 선언’(1)이라는 다소 과장된 제목의 선언문을 발표한다.
미시간대학 학생 톰 헤이든이 초안을 작성한, 종말론적 성찰이 담긴 이 선언문은 젊은 세대에게 뒤늦은 각성의 길을 열어주었다. 1962년, 동서갈등의 폐해는 사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 시기는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미국 경제의 군사화를 포고한 지 14년, 미 국방부 군사교관들이 인도차이나에 상륙한 지 12년, 과테말라 개혁의 희망이 미 제국주의의 군홧발 아래 짓이겨진 지 8년이 흐른 때였다. 1961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퇴임 연설에서 유명한 경고를 남겼다.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군산복합체가 불법적 영향력을 획득함을 경계해야 한다. 부당한 권력이 재난을 초래할 정도로 세력을 확장하게 될 위험이 있고, 그 위험은 지속될 것이다. (중략) 우리는 공권력이 과학기술 엘리트를 포로로 만들 위험에도 신경 써야 한다.”(2)
60년대 미 저항운동 기폭제, SDS
냉전 해빙은 1956년부터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에서 시작됐다. 캠퍼스 안에서 실시하는 의무군사교육훈련(교련)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단식농성을 했다. 갈등은 1962년까지 계속됐고, 결국 대학 운영위원회는 표결을 통해 교련 거부 학생들이 옳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정치학을 전공한 조 파프는 1960년대 전환점에 버클리대학을 지배하던 분위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카키색 바지에, 뒤쪽에 잠금 장치가 있는 벨트, 깃 양쪽에 단추가 달린 버튼다운 옥스퍼드 와이셔츠가 중산층을 대변하던 위대한 시기였다. 그것은 마치 유니폼 같았다. 교련을 담당한 예비역 장교들은 남학생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군복을 입도록 강요했다. 보수주의를 고양시키려는 대학이 학생들에게 대학생활과 무관한 주제는 토론하지 못하게 했고, ‘외부의 선동자’에게서 학생들을 보호하려 했다.”
1961년 봄, 파프는 노동운동가 맬컴 엑스를 초청해 강연회를 열려 했다. 그는 그때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대학 당국은 맬컴 엑스가 학생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킬 우려가 있다면서 허가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어쨌든 우리는 그를 초청할 수 있었지만 공개 광고는 전혀 할 수 없었고, 1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작은 강연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는 전기가 흐르듯 강렬했다. 맬컴 엑스는 내가 이때까지 들어본 연사 중에 최고였다. 맬컴 엑스는 우리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질문을 받으면 그는 질문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또박또박 질문을 다시 반복한 뒤 대답했다. 사람들은 곧 그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하지 않게 되었다. 함께 앉아 있던 흑인들은 홀을 떠나면서 우리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한 달 뒤, 그들 중 절반이 맬컴의 연설을 달달 외웠다.”
포트휴런 선언에 담긴 주장은 몇 년 전부터 미국 좌파 안에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우후죽순으로 쏟아져나온 텍스트 속에서, 1950년대의 치명적 순응주의, 예를 들면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지 않으려는 교수들을 신중하게 만들던 순응주의에서 벗어나려 한 소시민 청년층의 불안을 강력하게 표현해낸 것이 바로 이 선언이다.
진보적 선언 속 고독·소외·공포
선언문 곳곳에서 고독과 소외의 공포가 묻어난다. 진보주의 신념을 선언한 것 외에, 선언의 중심 주제는 개인의 성숙과 자아실현의 갈망이었다. 이 주제는 그때 유행한 것으로, 무정부주의자이자 심리치료사인 폴 굿맨의 저서 <부조리하게 자라다>(Growing up Absurd)의 성공으로 유명해졌다. 대서양 양안, 유럽과 미국의 반체제 젊은이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끈 책인데 SDS 열성활동가에게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3) 선언문 중 ‘우리들 앞의 사회’라는 제목의 장(章)에는 “노동자들의 상당한 급여 뒤에 감춰진 절망과, 별장 소유나 자동차 세차 속에 들어 있는 존재론적 공허를 폭로하는 것이 학생들의 임무”라고 쓰여 있다. 심지어 대다수 노조조차 전반적 무기력에 빠져 있었고, 마르크스의 <경제학 철학 초고>를 읽지 않은 노조 지도자들은 소외의 여러 변형체를 확인해낼 능력이 없었다. 결국 SDS에서 이런 임무를 맡으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포트휴런 선언은 경제문제는 간단하게 짚고 넘어간다. 선언문 작성자들은 서문에서 “우리 중 상당수가 안락한 은퇴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뒤이어 미국은 유복한 국가이자, 주변부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몇몇 가난한 자들로 인해 당황하는 국가로 그려진다. 오늘날 유토피아를 그린다면 아마 그와 비슷할 것이다. 선언문 작성자들이 미국 ‘황금시대’의 종말에 대해 미리 지적했음에도, 이런 묘사에서 느껴지는 낙관주의는 그들이 자본주의의 불안정한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들의 통찰력 부족은 당시 경제학자들과 공통적인 부분이다. 포트휴런 예언이 있은 지 7년 뒤, 미국 노동자계급(그중에서도 최소한 운이 가장 좋은 백인 계층)은 ‘번영’이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정점을 찍었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급여라는 형태로 합의된 상여금은 최대 수준에 다다랐다. 이것은 기이한 바로크풍 장식의 대형 자동차, 일하지 않는 아내를 위한 두 번째 자동차, 집 안을 가득 채운 대형 가전제품들, 건강보험, 은퇴 노년층을 위한 메디케어(Medicare) 따위로 구체화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1970년대 초반부터 미국이라는 별천지는 붕괴하기 시작한다. 개혁에 개혁을 거듭하면서….
포트휴런 선언 중 ‘무력함에 대한 대안’에 관한 부분은, 전략적으로 유물론과 체념의 망망대해 한복판에 떠 있는 미국의 해방된 학생 엘리트를 내세운다. 과연 어떻게 바꿀 것인가? 선언문에는 “적극적 좌파는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시작해 미국 전역에 있는 그 동맹 지지자들을 잠에서 깨어나게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동맹 지지자’가 과연 누구를 말하는지 선언문 작성자들은 정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개인적 문제가 사회적 경제 상황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점을 사람들이 각성하게 하려면, 좌파는 무기력과 무관심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중략) 지역적·국가적·국제적 차원에서 젊은 신좌파와 점차 해방되는 동맹 지지자 커뮤니티 사이의 진정한 협력을 통해 정치권력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핵에너지와 번영을 믿었던 순진함
50년이라는 시간적 거리가 있기에, 국민에게 저렴한 에너지를 풍족하게 제공하려면 ‘원자력을 통제하고 수많은 원자로를 건설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고 하는 그들의 순진한 주장은 미소를 짓게 한다. 베를린장벽과 냉전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확신 역시 대단한 통찰력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세계의 산업화’에 대해 보면, 선언문 작성자들은 그것을 ‘귀족’의 표식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이 보유한 기술을 친절하게 공유해야 할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런 순진함에도 불구하고, 포트휴런 선언이 미국 좌파 베테랑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따져보아야 한다. ‘뉴욕 지성인’ 그룹(4) 일원이면서 진보 작가인 마이클 해링턴과 어빙 하우는 선언문 작성자들의 냉전 비판이 소련의 위협을 저평가했다며 그들과 반대 입장을 취한다. 이 갈등은 계속되어 한쪽에는 미국식 모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신봉자들이, 반대편에는 1960년대 말 소련만큼이나 유해한 제국주의 세력이 미국에서 발흥함을 간파한 열광적 세대가 대립하게 된다.
‘월가 점령’ 운동과 닮은 점
SDS 운동은 1969년 와해됐지만 그 명성은 수십 년간 지속되고 있다. 운동 주도자들이 때로 자신의 역할을 과장해가면서까지 그들의 사료 편찬에 세심하게 신경 써온 덕택이다. 이 점에서 ‘흑표범단’(Black Panthers·미국의 극좌 흑인 과격파) 같은 운동은 운이 없었다. 지도자들이 투옥되거나 살해되어 역사서에 그들의 투쟁을 기록해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톰 헤이든의 경력이 훗날 미국 사회가 SDS를 인정하는 데 기여했을 수도 있다. 포트휴런 선언문을 작성한 그는, 1964년 뉴아크 빈민가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했고, 몇 년 뒤 여배우 제인 폰다와 결혼해 베트남 하노이로 건너갔다. 이후 그는 다시 미국에 돌아와 민주당에 합류해 캘리포니아주 연방의원에 선출되었다.
최근 6개월 동안 월가 점령시위(OWS·Occuper Wall Street)는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될 때까지 뉴욕에서 오클랜드에 이르기까지 점령지를 미국 전역으로 늘려갔다. 포트휴런 집회가 있은 지 50년, 미국 사회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두 사건 사이에 조직적 지식인 운동이 없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다. SDS의 정치사상은 카를 마르크스의 초기 저서뿐 아니라 프란츠 파농, 파울루 프레이레(브라질의 교육가·사상가. 문맹퇴치 운동을 전개하고 해방교육을 주장했다), 군나르 뮈르달(스웨덴 경제학자. 저개발 국가에 관한 연구 등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같은 사상가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았다. 월가 점령 같은 시위는 또 없을 것이다. 이 시위는 미국의 상대적 위력 상실이나 전통적 좌파의 쇠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포트휴런의 학생들이 자신을 자기만족이라는 어둠 속의 보이스카우트 단원으로 생각한 반면, 월가 점령자들은 자신이 99%를 대변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어제는 1%가 전위부대였지만, 오늘은 그 1%가 맞서 싸워야 할 권력이다.
글 / 알렉산더 콕번 Alexander Cockburn
대안정보사이트 ‘카운터펀치’(www.counterpunch.org)의 운영자.
번역 /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1) 미국 독립선언문을 암묵적으로 참조했다.
(2) 텍사스 출신의 보좌관 랄프 E. 윌리엄스가 기안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감수한 이 퇴임 연설문에는 ‘예를 들면 학생폭동이 일어났을 때처럼, 정상적 사회가 거리에 의해 통치되는 무정부 체제로 떨어지는 경향에 대해 조심하라’는 부분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 문장은 최종 감수 과정에서 배제됐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3일 뒤 취임 연설에서 전임 대통령의 수사(修辭)를 자신의 스타일로 반복한다. 하지만 ‘군산복합체’는 사라지지 않았고, 정반대로 케네디 대통령은 자신의 선거공약에 맞춰 대륙 간 미사일 1천 기를 확보함으로써 탄도미사일 부분에서 ‘미국의 뒤짐’을 회복했다. 하지만 이 격차는 사실과 달랐다. 소련은 1960년 겨우 4기의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3) 1960년 출간된 <부조리하게 자라다>는 곧 미국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독일과 이탈리아 등 여러 유럽 국가에서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출간되지 않았다.
(4) 마르크스주의와 소련 비판을 결부시킨, 20세기 중반에 탄생한 지성인 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