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 블로거들, 왜 분열했나
Dossier 소통의 정치사회학
아랍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사이버활동가(Cyberactivist)들이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사이버활동가들은 민중의 열악한 삶과 그로 인한 저항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부유한 도시민 출신에 정치사회운동 경험이 별로 없는 이 20~30대 젊은이들은 본래 탈정치적 성격의 온라인 활동을 표방했다. 하지만 정부의 탄압은 오히려 이들을 한데 결집하는 원동력이 됐다. 튀니지 인터넷 논객 하마디 칼루차(1)는 “벤 알리 정권 시절, 반체제 사이버활동가는 모두 합해 100~200명 되었다. 우리는 홀로 만인을 상대해야 했다. 사이버수사대가 온갖 비방전을 펼치며 사람들의 불신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그런 위협이 오히려 우리에게 약이 됐다. 덕분에 절대적 신뢰를 얻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그레브 지역 사이버활동가는 몇 가지 공통분모 아래 하나로 결집해 있지만, 정체성은 국적에 따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이를테면 모로코의 유명 사이버활동가는 대부분 공학자나 언론인인 반면, 튀니지는 예술·문화계 인사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튀니지의 ‘페이스북 혁명’을 상찬하는 매체 논평에만 익숙하다면, 뜨겁게 달아올랐던 튀니지 블로거들이 돌연 인터넷 활동에 환멸을 느끼고 떠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인터넷 논객 매니키어스(2)는 최근 튀니지 블로거들의 심경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들은 (인터넷 시민운동의 사망과 마주해) 깊은 애도에 잠겨 있다.”
튀니지 시민들이 비로소 현 정권이 갈 때까지 갔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던 것도, 그리고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던 것도 모두 인터넷이란 공간이 존재한 덕분이었다. 취재 중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사이버운동이 불붙은 배경으로 <튀니진>(Tunezine)이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튀니진>은 ‘인터넷 시민운동의 초대 순교자’인 경제학자 주하이르 야흐야위(3)가 2001년 창간한 반정부 성향의 웹진이었다. 이렇듯 시민들은 인터넷 세상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체제, 좀더 근본적으로는 튀니지 사회와 비평적 거리를 두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일부 블로거들은 동시대인의 일상과 고민, 고통 등을 담은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렸다. 하지만 인터넷 활동이라고 해서 검열이나 경찰 탄압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일부 블로거는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대표적인 예가 파트마 아라비카라였다. 그녀는 2009년 경찰에 체포됐지만, 국내외적으로 일어난 구원운동에 힘입어 석방됐다.(4)
이때부터 튀니지 블로거들은 ‘아마르 404’(인터넷 사용자에게 해당 웹페이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주는 이른바 ‘404오류’를 퍼뜨리는 가상의 인물에게 붙인 별명)에 반기를 들고, 줄기차게 이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0년 인터넷 검열이 전 페이스북 사용자에게로 확대되면서 블로거들의 저항운동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정부 검열을 규탄하는 온라인 탄원서에 1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일부 사이버활동가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결정을 내렸다. 바로 5월 22일 인터넷 검열에 대한 항의시위 개최를 허가해달라고 정부에 공식 요청한 것이다. 하지만 경찰의 개입으로 시위를 포기해야 했다. 대신 시민들에게 하얀색 티셔츠를 입고 튀니스 대로로 집결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날의 운동을 기획한 주동자 중 한 명인 야신 아야리(5)는 이를 일대 ‘전환점’으로 표현했다.
취재차 만난 이들은 저마다 2010년 12월, 청년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실탄 발포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인터넷에 부지런히 퍼나르던 순간을 이야기하며 감정에 북받쳤다. 당시 그들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뜨거운 연대감에 불타올라 거리로 뛰쳐나가거나, 밤새도록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시위 현장과 경찰의 만행이 담긴 영상을 여기저기 퍼뜨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날 시위는 튀니지 공동체가 집단적 시련 앞에 하나로 똘똘 뭉치는 순간이 되었다. 하지만 금세 공동체는 분열했다. 화합의 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진 엘아비딘 벤 알리의 퇴진은 온 시민이 하나가 되어 기쁨을 함께한 순간인 동시에, 다시 시민이 사분오열하는 기점이 됐다. 공동의 적을 잃은 사이버활동가들은 돌연 정치 경쟁자로 둔갑했다. 그들의 관계는 경쟁, 의혹, 비방 등으로 악화됐다. 서구 언론에 자주 소개되면서 유명세를 누린 블로거 ‘튀니지 걸’은 “적이 분명하지 않았다. 누가 누구의 적인지 더 이상 분간할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분열됐다. 서로를 지지하는 블로거와 그렇지 않은 블로거로 나뉘었다”고 말했다. 하마디 칼루차도 사이버활동에 환멸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2011년 1월 14일을 기점으로 인터넷은 온갖 잡담이 난무하는 수다장으로 바뀌었다. 더는 사고를 위한 장이 아니었다. 파벌 대립으로 얼룩진 인터넷 세상 속에서 우리 목소리를 경청하도록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민주화운동 이후 소셜 네트워크는 수많은 신규 가입자를 받아들였다. 그 가운데는 왜곡된 정보를 퍼뜨리거나 동영상과 사진 등을 위조하는 사이비 활동가도 다수 섞여 있다. 그 결과 소셜 네트워크는 끔찍한 불협화음을 내기에 이른다.
언론매체는 인터넷 시민운동의 성과를 지나치게 예찬한 나머지 정작 튀니지 사이버활동가들의 참된 현실은 은폐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혼란에 대한 말은 충분히 귀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이 설령 해외 언론이 널리 공유하는 어떤 확신에 위배되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서구 정부와 언론, 학계는 마치 블로거가 튀니지 시민의 합법적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이들을 공공 무대 전면에 내세웠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서구 세력들이 정말 진보주의 세력을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다.
글 / 스마인 라셰르 Smaïn Laacher & 세드리크 테르지 Cédric Terzi
사회운동연구소(CNRS-EHESS) 연구원.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가명이다. http://fr-fr.facebook.com/Kaloutcha.Hamadi.
(2) 초기 혁명에 참여했던 이 블로거는 2010년 12월 소셜 네트워크는 이제 역할을 다했다며 인터넷 활동을 중단했다.
(3) 2002년 감옥에 수감돼 고문을 받은 주하이르 야흐야위는 단식투쟁을 벌이다 2003년 말 가석방됐다. 2005년 3월 13일, 37살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 http://fatmaarabicca.blogspot.com. 해외 언론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파트마 아라비카는 튀니지 사이버활동가 사이에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5) http://mel7it3.blogspot.com.
(6) www.atunisangirl.blogsp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