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소말리아 해적, 재판 그물에 걸린 어부

2012-02-13     레미 카라욜

지난 1월 초, 영국 해군은 해적 행위 혐의로 소말리아인 13명을 체포했고, 스페인 법정도 같은 혐의로 6명의 소말리아인을 투옥했다. 영국·스페인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인도양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 가장 신속한 수단을 사용하며, 그 과정에서 종종 인권을 무시하고 있다.

2011년 11월 30일부터 압둘라히 아메드 구엘레흐(36)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날 자정 무렵, 구엘레흐가 몇 달 전부터 투옥돼 있던 파리 요양구치소 감독관들은 말 그대로 그를 내쫓았다. 그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무서웠다. 이 소말리아인은 3년 전 소말리아의 먼 바다에서 ‘해적질’을 했다는 죄목으로 수갑과 족쇄를 찬 채 프랑스 땅을 밟았지만 프랑스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구엘레흐는 석방된 뒤 앞서 프랑스에 정착한 소말리아인들이 부담하는 비용으로 파리 근교의 싸구려 호텔에 묵고 있지만, 1박에 38유로 하는 작은 방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의 변호사인 플로랑 루아조 드 그랑메종은 “구엘레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언어부터 시작해서 이곳의 모든 것이 낯설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구엘레흐가 프랑스에서 안 것이라고는 감옥의 벽들과 간수, 그리고 다른 수감자에게서 받은 폭력뿐일 것이다. 변호사 그랑메종은 이렇게 덧붙인다. “그의 상황은 예전에 한 번도 겪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오고 싶지 않았던 나라에 있게 되었다. 신분증도, 이 땅에 들어왔다는 어떤 흔적도 없어서 출국할 수 없다.”

3년 전 프랑스군에 압송된 구엘레흐

이 사건을 담당한 또 다른 변호사는 “(프랑스) 군대가 소말리아에 있던 사람들을 재판하기 위해 사전 조사 없이 서둘러 데려오면서 이런 난감한 일이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구엘레흐는 2008년 9월 16일 새벽 소말리아 영해의 길이 16m의 범선 에이스포커 선상에서 다른 소말리아인 5명과 함께 프랑스 군대에 체포됐다. 그로부터 14일 전, 한 프랑스 부부(장이브 들란과 베르나데트 들란)가 이 범선을 타고 프랑스로 항해하다 해적 행위가 빈발한 이 해역에서 납치됐다.(1) 군의 공격 과정에서 소말리아인 1명이 사망했고 6명은 체포됐다. 프랑스군에의해 감금된 채 비행기로 파리에 오는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2)

배 위에서 낚시하다 체포돼

그들 중 에이스포커호 공격에 가담한 사람은 2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기항할 때, 혹은 임무교대를 위해 합류한 사람들이다. 구엘레흐는 프랑스군 작전이 있기 바로 전날 합류했다. 그는 한구석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고, 선상 감시자들은 그에게 생선을 공급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날 밤 배에 남아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6명의 소말리아인들(3)에게는 길고도 끔찍했을 38개월의 임시수감과- 벨기에는 이와 유사한 사건을 8개월 만에 재판했고 네덜란드는 18개월 만에, 스페인은 19개월 만에 판결을 마쳤다- 파리법원 3호실에서 2주일간의 변론을 거쳐 구엘레흐는 석방됐고, 다른 5명은 검찰의 구형량보다 훨씬 적은 4∼8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인질 부부가 도리어 해적 무죄 주장?

지난해 11월 15~30일 진행된 재판이 끝난 뒤- 프랑스에서 이런 재판은 처음이었다- 정부가 위험한 테러리스트라고 소개한 이 6명은 지역 실력자로 확인된 한 사업가의 지시를 따르는 하급 직원이었을 뿐이다. 인질로 잡혔던 들란 부부조차 그 사실을 시인했다. 들란은 법정에서 “그들은 멀미를 했다”고 진술함으로써 그들이 비전문가였음을 지적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풋내기 선원이었다는 말이다. 그의 아내는 “그들은 아무것도 미리 계획하지 않았다. (무기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남편 들란이 화를 내자 감시자들은 벌벌 떨었다고도 했다. 들란은 심지어 선실에서 흡연 금지, 갑판 위에서 음식물 먹지 말 것 등과 같은 엄격한 규칙을 감시자들에게 요구했고, 그들에게 고기 잡는 기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감시자들이 휘발유가 필요하다고 하자 근처 어부들에게 물어보라고 충고한 것도 들란이었다는 것이다.
최후심리가 끝났을 때 방청객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게 됐다. 납치됐던 인질들이 그들의 감시자들을 얼싸안고 ‘행복한 새 인생’을 기원했던 것이다. 들란은 변론에서 “나는 구엘레흐가 우리를 납치하는 것과 무관하다고 항상 말해왔다”고 주장했다. 나머지 5명은 유죄다. 하지만 들란은 그들을 ‘장난에 들떠 도를 넘은 아이들’로 생각하고 있다.

1심 무죄 받고도 항소심 탓 출국 못해

정부는 들란 부부와 배심원단의 관용을 적당히 평가했을 뿐이다. 검찰은 구엘레흐의 석방을 비롯해 나머지 수감자들의 형량이 “국제사회- 특히 프랑스- 가 중요한 군사적 수단을 행사하도록 만든 해적 행위라는 지극히 중대한 사안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항소했다. 변호인단이 보기에 이 표현은 마치 자백처럼 들린다. 변호사 그랑메종은 “더 이상 재판을 하는 게 아니라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경영하는 것”이라고 야유했다.
젊은 국선 변호인들로 구성된 변호인단은 “평상시와 아주 다른 소송”, “피고인에게 불리한 심리”였다고 규탄했다.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소말리아의 정치·사회 상황은 거의 언급되지 않은, 간단히 말해 ‘정치 소송’이었다는 것이다. 소말리아 해안에서 지난해 9월 16일 벌어진 프랑스군 작전을 축하하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담화가 증거자료로 첨부된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판결이 진행될 수 있었겠느냐고 그들은 강조했다. 비록 검찰이 항소했지만, 어느 파리 주재 소말리아 영사관 사람의 말처럼, 구엘레흐의 석방은 각자 모든 것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지역에서 파리가 보여준 태도를 유죄판결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 레미 카라욜 Rémi Carayol 언론인

번역 /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1) 필리프 레이마리, ‘국제사회, 소말리아 해적과의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1월호.
(2) 변호인단은 불법 소송을 규탄하면서 이 사건을 유럽인권법정으로 이송했다.
(3) 그들은 파리에 도착할 때 완전히 추위로 얼어 있었고, 같이 수감된 사람들에게 얻어맞은 상태였다. 그들은 변호사 말고 다른 누구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고, 가족 소식도 최소한으로만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소말리아인들과 한방에 수감돼 고립을 면할 수 있게 되기까지 2년을 기다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