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축구, 저항의 텐트

2012-02-13     올리비에 카랑트

와칼라는 최근 2~3년 사이 서사하라 허허벌판 위로 솟아난 수많은 신흥지구 가운데 하나다. 신흥지구가 하나둘 들어서면서 서사하라 최남단의 모리타니 접경지대에 위치한 다클라시는 개발이 한창인 신도시의 위용을 한껏 뽐내고 있다. 서사하라의 다른 광대한 지역과 마찬가지로 와칼라도 1975년 모로코에 병합됐다가 ‘폴리사리오 인민해방전선’(모로코로부터 서사하라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살라위족의 반군운동)이 독립을 선포하면서 영유권 분쟁에 시달리고 있다. 주민투표를 통해 독립 여부를 결정하기로 한 유엔 결의가 몇 차례 채택됐지만, 20년째 선거는 감감무소식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감시의 눈총을 받지 않고 이 지역을 마음 놓고 활보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곳곳에 국가보안경찰과 모로코군 병력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다. “치안 담당 경찰과 군인이라면 정말이지 넌덜머리가 난다. 정복 차림의 경찰이 1명이라면 사복을 입고 위장한 경찰은 무려 10명이나 된다.” 취재차 만난 다른 많은 이들처럼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국인 거주자가 격분하며 말했다.

사라위족-모로코인 축구 경기 뒤 대충돌

자동차를 타고 와칼라 지구를 휘 한 바퀴 돌아봤지만 그 어디서도 2011년 9월 말에 일어난 폭력 사태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윌라야(‘도’에 해당하는 모로코 행정단위)가 서둘러 잔해를 치우고 현장을 말끔히 청소했다”고 40대 사라위족 남성 시디(1)가 귀띔했다. 지역 당국은 ‘정상화’ 전략에 따라 공식 발표 때마다 “마을이 평온하고 조용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에 바쁘다. 하지만 당시 충돌 사태는 여전히 주민들의 뇌리에서 잊히지 않은 채 수없이 회자되고 있다고 시디는 확신한다.

2011년 9월 25일 일요일 모로코와 서사하라 간 축구 경기가 끝난 직후 양 응원단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다고 모로코 주간지 <텔켈>이 보도했다. “사라위족 청년 한 명이 북부 출신 주민들의 집단 공격을 받았다. (중략) 이를 본 사라위족 청년 여럿이 재빨리 지원군을 데리러 도심으로 돌아갔다. 청년들은 4륜구동 차량에 10명씩 올라타고는 와칼라 지구로 돌진했다.”(2) 지난해 12월 초 인터뷰를 위해 사건 현장에서 만난 모하메드는 <텔켈>의 보도가 모두 사실이라고 확인해주었다. 그는 전쟁을 방불케 한 당시 상황을 좀더 생생히 증언했다. “모로코인들이 바글바글거렸다. 족히 수백 명은 돼 보였다. 그 많은 모로코인이 떼거지로 내게 다가오는데도, 경찰은 그저 팔짱만 낀 채 지켜볼 뿐이었다.” 모하메드가 주변의 눈과 귀를 피해가며 조심스럽게 당시 상황을 털어놓았다. 그는 땅바닥에 앉아 사건 진행 과정을 세세한 부분까지 되짚었다. “고릿적 전쟁을 방불케 한 사건이었다. 검이 오고 갔다.” 모하메드는 자기도 검을 소유하고 있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 검을 사용한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한편 검보다 더 가공할 무기는 4륜구동 차량이었다. 4륜구동 차량이 거침없이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모하메드는 “모로코인의 허를 찌른 사라위족의 비밀병기였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 사건으로 경찰 2명을 포함해 모두 7명이 사망했다. 시디는 한 30대 이웃 남자를 떠올렸다. 남자는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 경찰에 연행됐다. 다른 많은 이들처럼 4륜구동 차량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시디는 “여전히 그는 엘아윤 감옥에 갇혀 있다”고 말했다.(3)

당시 충돌 사태는 다클라시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다. 폭력 사태는 와칼라와 그 일원인 공항 인근의 넓은 지대에 집중됐다. 와칼라는 모로코인(사라위족은 ‘북부 모로코인’이란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한다)과 사라위족(모로코인과 취재차 만난 많은 사라위족은 이들을 ‘사하라 지역 출신민’, ‘사하라인’, ‘토착민’ 등으로 불렀다) 간 뿌리 깊은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동네였다. <텔켈>의 칼럼니스트 카림 부크하리는 이런 두 공동체 간 갈등을 ‘사하라 시한폭탄’이라고 표현했다.(4)
 
두 공동체, 사하라의 시한폭탄

와칼라 주택가에는 빈민촌 출신들이 모여 살고 있다. 폴리사리오전선과 휴전협정을 체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90년대 초반, 빈민촌에 살던 주민들이 와칼라 지구로 이주해왔다. 당시 자결권을 묻는 주민투표가 한창 준비 중이었다. 모로코 정부는 지역을 안전하게 통제하고, 선거를 승리로 이끌기에 충분한 선거인단을 확보하기 위해 빈민층 주민을 와칼라 주택가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이주민에게 돈과 토지, 1층 집을 짓는 데 필요한 건축자재 등을 제공했다. 한 유럽인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불과 몇 주 만에 빈민촌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모로코 정부의 후견주의 정책은 오늘날 사라위족과 모로코 이주민의 갈등에 어느 정도 불씨로 작용하고 있다. 모로코 정부는 36년째 거주 중이던 알제리 틴두프시 인근의 난민촌을 떠나 모로코 정부가 말하는 ‘모국’으로 가는 사라위족 ‘동맹’에 금전적 지원을 제공했다. 또 수많은 사라위족에게 온갖 ‘근로봉사활동’을 명분으로 ‘국가 생활개선카드’(본 카드를 소지한 사람에게 거주지, 최저임금에 상당하는 월급, 무료 교통 이용 등의 혜택을 제공하는 국가 구호정책)를 발급했다. 한마디로 모로코 정부가 사라위족을 하나둘 매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잡한 꼼수는 정부가 애초 표방한 사회 통합 효과를 불러오기보다는, 오히려 타 주민의 시기심을 조장하는 역효과만 낳았다.

수천 명의 모로코인이 신천지를 찾아 서사하라로 몰려들었다(지금도 많은 모로코인이 이 신천지를 찾아 몰려들고 있다). 서사하라는 문어잡이, 생선 가공 공장, 정어리 통조림 공장, 채소 재배, 부크라아 인광산 등 각종 기회의 땅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주민들 간 갈등을 부추기는 화근으로 작용했다. 먼저 모로코인의 경제 이주는 대개 실망스러운 결과만 가져왔다. 이를테면 최근 생선 가공 냉동 공장들은 대량해고 바람에 휩싸였다. 대체 이유가 뭘까? 바로 어족자원이 풍부하기로 소문난 서사하라 해역을 유럽과 러시아의 대형 원양어선에 개방했지만, 이것이 막상 서사하라의 지역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5) 대다수 어선들은 하루에도 수천t씩 생선을 낚아올리지만, 지역산업으로 흘러 들어가지 못한다. 어업협정에 따라 의무적으로 서사하라에 양륙된 어류는 대체로 별 가치가 없는 것들뿐이다. 많은 어선들이 어류자원을 무차별적으로 포획한 뒤 대부분 동물 사료를 만드는 데 사용한다.
 
모로코 정부, 사라위 분열하려고 돈질

모로코인 이주 정책도 주민 간 갈등을 부추기는 또 다른 원인이 되고 있다. 모로코 정부는 수만 명의 모로코인을 대대적으로 서사하라 지역에 정착시켰다. 그 결과 엘아윤이나 부즈두르 인근에는 신흥지구 건설이 한창이다. 하지만 이것이 모로코 이주민과 사라위족 공동체 사이에 첨예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바시르는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리타니로 이주해야 했다. 서사하라에는 본토박이 원주민과 북부에서 이주해온 모로코인이 있는데, 대개 기업을 소유한 쪽은 후자다”라고 말했다. 시디는 이렇게 자문했다. “사라위족은 왜 매월 2천 디르함(약 120유로)을 받고 하루 12시간씩 일해야 하는 단순 노동직에만 만족해야 하는가? 이 지역 토박이인 사라위족이 바라는 것은 그저 지역자원을 개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북부 모로코인은 대형 어선을 가지고 일할 수 있으면서 사라위족은 왜 그럴 수 없는가?” 시디의 결론은 이러했다. “모로코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우리 사라위족을 과격세력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정부에 해명이나 조금의 권리라도 요구하는 순간 곧바로 분리주의자나 폴리사리오 취급을 한다.”

사회·경제적 소외에 분노 폭발

북쪽으로 600km쯤 떨어진 엘아윤의 상황은 최근 몇 년 들어 더욱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여기서도 원인은 시디가 말한, 흔히 ‘중앙선’ 침범이라고 불리는 그 현상 때문이다. 사회·경제적 소외에 항거한 시위는 사라위족의 위상을 ‘선민’에서 위험인물로 추락시켰다. 은하부하도 2005년 12월 15일 두 남자형제가 실종된 뒤 두 번째 부류로 전락했다. 두 남자형제는 친구 13명과 사라위족 평화시위에 참여한 뒤 체포 위협과 끝없는 압박에 시달렸다. 결국 그들은 지역을 떠나기로 했다. 갈리아 지미 사라위족 인권운동협회 부회장은 “모로코 정부는 사라위족 청년들을 북부 지역으로 이주시키려고 그런 술책을 부린다. 북부 지역 이주를 거부하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카나리아제도로 떠나도록 압박한다. 그런 식으로 2005~2010년 서사하라를 떠난 사라위족은 600여 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2010년 10월 10일 엘아윤에서 동쪽으로 15km쯤 떨어진 그데임이지크의 사막 한복판에 ‘카이마스’(Khaimas·유목민의 전통 천막) 시위 천막촌이 형성됐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소식을 접한 은하부하와 카디자, 하디아를 비롯한 여성들은 그 길로 곧장 시위운동에 합류했다. 그데임이지크 시위는 서사하라의 모로코 병합을 이끌어낸 ‘녹색행진’(Green March·1975년 11월 6일 모로코 국왕이 스페인령 서사하라를 자국 땅으로 병합하기 위해 벌인 평화적 시위행진을 의미한다. 이 운동을 계기로 마드리드 협정이 체결되면서 서사하라 지역이 모로코와 모리타니에 분할 병합된다) 이래 최대 규모의 사라위족 운동이었다. 실종된 남자형제나 아들의 행방을 알고 싶어 하는 바람이 여성들을 ‘인간 존엄성 쟁취’라는 좀더 폭넓은 사회운동으로 이끌었다. 실제로도 그데임이지크 천막촌은 ‘존엄성 캠프’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일각에서는 ‘아랍의 봄’의 참된 진원지로 인식하기도 한다. 2010년 10월 10일~11월 8일, 그데임이지크 평화시위에 무려 7천여 동의 카이마스 천막이 설치됐다. 시위 참가자도 2만여 명이나 됐다. 사라위족의 불만 요소인 사회·경제적 소외가 시위의 배경이 됐다. 하지만 단 며칠 만에 천막촌에 대규모 경찰력이 투입됐다. 경찰은 효과적인 출입 통제를 위해 한 곳만 빼고 전 진입로를 차단했다. 그뿐 아니라 언론과 구호단체의 입에도 재갈을 물렸다. 10월 24일, 14살 소년이 바리케이드 근처에서 모로코 군인들에 의해 사망했다. 11월 8일 새벽녘 마침내 모로코의 기습공격이 시작됐다. 레일리아는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아이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곤봉, 최루탄, 온수대포 세례를 받으며 시위대가 천막촌에서 쫓겨났다. 얼마 뒤 엘아윤에 도착한 나는 그 길로 경찰에 체포됐다. 흠씬 두들겨 맞고 심문을 받았다. 억지로 ‘국왕 폐하 만세, 모로코 만세’를 외친 뒤 화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풀려났다”고 말했다.

천막농성, 민간인 동원한 유혈 진압

모로코 쪽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천막촌 퇴거 작전으로 경찰 11명과 사라위족 2명이 사망했다. 모로코 인권단체도 그 발표가 진실임을 확인해주었다. 하지만 좀더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작전 당일과 이후 며칠 동안 경찰에 연행된 시위자 수는 무려 168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체포된 시위대는 심한 구타와 고문을 받은 뒤 풀려났다. 재판도, 분명한 죄목도 없었다. 유엔감시단도 이 사태에 속수무책이었다. 감시단의 임무가 휴전 체제가 잘 준수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것에 국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최근 몇 년째 일부 유엔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은 유엔감시단의 임무를 ‘인권 감시’로 확대하는 방안을 거부하고 있다. 2010년 11월 8일 천막촌 철거 작전 때 체포된 사라위족 운동가 22명은 민간인 신분임에도 지난 1월 초에 여전히 살레 군사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들은 부당한 투옥 조건(변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 고문을 당했고, 강간당한 사람도 여럿 있었다. 16명은 독방에 감금됐다)에 항의하며 2011년 10월 31일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모로코 정부가 조속히 재판을 진행하겠다고 약속하면서 38일 만에 투쟁을 해제했다.

은하부하는 “그데임이지크 천막촌 철거 사건 이후 상황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고 말했다. 모로코 민간인이 사라위족 진압에 처음 투입된 것은 1999년이었다. 부크라아 인광석 노동자 발의로 사라위족 노동자조정위원회(Workers Coordinating Committee)가 창설됐다. “시위를 조직하자 경찰이 과잉 진압에 나섰다. 화물차에서 모로코 민간인들이 우르르 뛰어내리더니 사라위족의 집이며 가게를 닥치는 대로 때려부쉈다. 하지만 그데임이지크 작전 이후 상황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한 인광산 퇴직 노동자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많은 증언자들이 민간인, 특히 모로코 청년들이 진압 작전에 동원된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리고 2010년 11월 모로코 만간인이 얼마나 끔직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증언했다. 한 여성 인권운동가는 “1년 전부터 두 공동체 사이에 새로운 복수심이 끓어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4년여 동안 ‘실종자’ 신세로 지냈다. “우리 세대는 평화적이고 관대하다. 우리는 모로코 정부를 증오했지만, 모로코 민족은 항상 용서해왔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국제사회가 다른 지역에는 개입하면서 서사하라 문제에는 무관심한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봤다. 그들은 국제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믿을 것은 오로지 폭력뿐이라고 생각한다."


/ 올리비에 카랑트 Olivier Quarante 언론인

번역 / 허보미 jinougy@naver.com


(1) 기사에 나오는 이름 대부분이 가명이다.
(2) ‘다클라가 불타오를 때’, <텔켈>, 카사블랑카, 2011년 10월 7일.
(3) 가엘 롱바르·줄리 피쇼, ‘공포와 침묵의 엘아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1월.
(4) ‘사하라 시한폭탄’, <텔켈>, 2011년 10월 2일.
(5) 2007년 2월 서사하라를 포함한 모로코가 유럽연합과 어업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르면, 유럽 어선은 일정한 입어료를 내고 모로코 해역에서 어업활동을 할 수 있고, 어획한 수산물 일부를 의무적으로 모로코 쪽에 양륙해야 한다. 처음 4년 동안 입어료는 1억4400만 유로 이상에 달했다. 애초 모로코-유럽연합 간 어업협정은 유럽 7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2년 2월까지 기간을 연장하기로 돼 있었다. 하지만 2011년 12월 14일 유럽의회는 협정 연장을 부결했다. 협정 연장에 반대한 사람들은 서사하라 분쟁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이 협정으로 사라위족이 혜택을 받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기에 이 협정은 불법이라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