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확고한 선택 ‘차이완’
지난 1월 14일에 열린 대만 총통 및 입법위원 선거 결과가 나오자 타이베이와 베이징, 워싱턴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중국과 꾸준히 관계 개선을 추진해온 마잉주는 지역 안정을 위해 요구되는 과반수 득표율을 얻고서 재선에 성공했다. 반면 당선이 유력시되던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차이잉원 후보는 대만 독립을 주장해온 인물이다.
2011년 11월, 사회계층을 연구하는 샤오신황 마이클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민진당(대만 독립 주장) 지지자다. 하지만 한창 달아오른 선거 열풍에 휩쓸리는 대신 외교적·학술적 면에서 대만의 국제적 위상을 세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는 오전 학회 일정이 끝나고 점심시간에 ‘아카데미아 시니카’(프랑스의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에 해당) 교정 안에 있는 고급 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은 자동차와 오토바이로 가득 찬 타이베이 시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하다. 아시아 중산층에 대한 비교연구(1)로 유명해진 이 사회학자는 이곳이 연구 환경도 좋고, 정치·경제 권력의 간섭에서도 자유롭다고 했다.
‘중국 공포’ 먹히지 않은 총통 선거
3만6천m²의 작은 섬 대만에서는 다른 아시아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중산층이 확대돼왔다. 샤오신황은 “오늘날 대만의 중산층은 두 세대로 구분된다”고 말한다. 우선 1970~80년대 중산층으로 자리잡은 소규모 기업 경영인과 수공업자로, 지금은 노인 세대를 이룬다. 대만을 이른바 ‘아시아의 용’(2) 반열에 올려놓은 이들이다. 두 번째 세대는 1990년대 형성된 중산층으로 주로 기업 중역, 엔지니어, 공기업과 민영기업 중간관리자, 자영업자로 일한다. 수적으로 앞세대보다 3배가 많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자신의 부모 세대에 해당하는 앞세대 중산층의 자리를 빼앗지 않았다. 중소기업 경영자 혹은 부유한 수공업자의 자식들은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서 학업을 마친 뒤 자유주의 신봉자가 되거나, 그중 일부는 중국 투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중산층이 정치 무대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중산층의 여론이 대외관계와 국내 문제라는 두 요소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형성된다. 가족이 핵심적 역할을 하는 대만에서 후자는 여전히 중요성을 갖는다. 지난 시절 중산층은 민진당에 투표했다. 개혁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위기가 불어닥치자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예전보다 더 보수적 성향을 보인다.” 샤오신황의 분석은 두 달 뒤 총통과 입법위원을 뽑는 선거에서 사실로 증명됐다.
일본 지배 이어 국민당의 공포정치
1월 14일 선거에서 대만의 중산층은 국민당 후보 마잉주의 재선을 선택했다. 재벌들 역시 같은 선택을 했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마잉주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그중에는 대기업 파이스턴 그룹의 더글러스 통 쉬 회장, 중국에서 애플 제품을 생산하는 폭스콘의 창업자 테리 구 회장도 끼어 있었다. 마잉주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신문 지면 몇 쪽을 통째로 산 경우도 있었다. 상대 후보 차이잉원에 대한 지지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산업·금융 그룹과 권력에 의해 장악된 대부분의 언론 역시 그의 편이 아니었다.
마잉주는 51.6%를 득표해 총통에 당선됐다. 국민당은 입법위원 선거에서도 과반수를 얻었다. 2008년 선거와 비교하면 6%포인트 낮은 득표율이지만 여전히 민진당과 중요한 표차를 기록했다. 저임금 노동자와 농민 일부도 마잉주에게 표를 던졌다. 사실상 대외관계(양안관계, 기타 지역과의 외교관계)와 국내 문제(임금, 고용, 노동조건)의 교차점이 마잉주에게 유리한 지점에서 형성된 것이다. “마잉주가 대만을 중국에 팔아넘긴다”고 주장한 민진당의 전략은 실패했다. 유권자들은 대만이 중국에 먹혀버릴지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쨌든 이번 선거에서도 중심 주제가 양안관계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대만해협을 사이에 둔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이해하려면 이들의 집단의식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역사를 되짚어봐야 한다. 대만 제2의 도시 가오슝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우치마오는 “내 할아버지는 일본 이름을 썼다. 그러나 나는 중국 이름을 쓴다”고 말한다. 가오슝 시가지에는 지금도 일본 식민지 시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할아버지도 손자도 스스로 그런 이름을 선택한 건 아니다. 대만의 많은 가족들이 이런 기묘한 정체성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1895년 일본은 중국과 충돌 과정에서 대만을 점령한다. 일본은 대륙에서 소외된 대만의 근대화에 기여했지만, 주민들은 그 대가로 철권통치에 시달려야 했다. 대만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지식인 펑밍민은 “일본 식민 정부는 당시 ‘포모사인’으로 불리던 대만인들을 이등 시민으로 취급했다”고 말한다.(3)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이번엔 중국인들이 대만을 점령하기 위해 미국에서 제공한 비행기와 배를 타고 몰려왔다. 대만인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에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뿐이었다. 1947년 2월 28일, 백색테러의 공포가 타이베이와 가오슝 등 대만 전역을 뒤덮었다. 당시 중국을 지배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국민당은 민간인 수천 명을 학살했다. 펑밍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나의 아버지는 중국인의 피를 타고난 게 부끄럽다고 하셨다. 당신 자손들이 모두 외국인과 결혼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워버리길 바라셨다.” 국민당을 이끌던 장제스- 1949년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군에게 패해 대만으로 피신했다- 와 그의 후임자들은 1986년까지 대만을 계엄령으로 다스렸다. 반대파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군국주의적 일본화 대신 전체주의적 중국화가 시작된 것이다. 대만 고유의 문화적 전통과 언어는 무시되고, 중국의 전통적 표준어가 강요됐으며, 역사는 재해석됐다. 오래전부터 섬에서 살아온 이들(내성인·內省人)의 마음속에 어떤 감정이 숨어 있을지 짐작할 만하다. 더욱이 대만의 민주화 투쟁은 항상 국민당 내 중국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투쟁과 쉽게 구분되지 않았다.
대륙 탈환의 꿈, 그러나 외교적 고립
중국에서 넘어온 이들은 대륙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1950년 대만해협에 제7함대를 파견하고 해군기지를 설치하는 등 대만 독재정권에 대한 경제·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국민당은 대만이 유엔에 의해, 즉 국제 무대에서 ‘중국의 본국’으로 인정받던 24년 동안 대륙 탈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1971년 10월 중국이 유엔안보리 이사국이 되자 대만은 불확실한 운명으로 빠져들었다.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결국 ‘단 하나의 중국’만을 인정했다.(4) 대만은 국제 무대에서 퇴장했고 대만 독립을 강하게 주장할 때나 주목받는 신세가 됐다. 그리고 ‘대륙의 용’이 발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만에서 최초로 총통 직접선거가 열리기 전날, 중국은 탄도미사일(탄두 장착 안 됨)을 발사했다.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천수이볜이 집권한 2000~2008년(5) 중국은 대만해협을 향해 몇 차례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대만해협 양쪽에서 권력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대륙의 공산주의자들은 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조그만 섬나라를 힘으로 병합하고 싶어 했고, 섬의 민족주의자들은 빼앗긴 대륙을 되찾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양쪽 모두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꿈임을 깨달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반공을 내세우던 대만의 민족주의자들은 이제 중국 공산당의 지지를 받고 있다. 참으로 독특한 역사의 반전이다.
그렇다고 베이징 당국이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단일성과 통일성이라는 원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우선은 중국 국민과 군대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베이징에서 만난 한 외교관은 “우리는 즉각적인 통일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대만의 즉각적인 독립을 용납하지도 않는다”(6)고 했다. 대만 정부는 ‘평화협정 체결’을 근본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현상유지가 양쪽 모두에 유리한 상황이다. 중국은 여전히 ‘하나의 중국, 두 개의 체제’, 대만은 ‘하나의 중국, 두 가지 해석’(92共識·하나의 중국이라는 의미를 양쪽이 각자 알아서 해석한다는 입장)을 주장하고 있다. 체면을 잃지 않으면서도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셈이다.
중국과 관세 철폐, 외교적 휴전
중국과 대만 사이의 전략 게임에서 어부지리를 얻는 쪽은 미국이다. 미국은 중국 앞에서 단 한 발짝도 물러설 마음이 없다. 이번 선거 기간 중 분석가들은 중국의 압력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마잉주 총통에 대한 워싱턴의 지원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2011년 9월, 오바마 정부는 몇 해 전부터 대만이 요구해온 미국산 F16기 현대화 계획을 발표했다. 이어서 12월에는 미국 영토를 방문하는 대만인들에 대한 비자가 면제됐다. 이런 조처에 안심한 국민당 지도부는 국민에게 미국이 대만의 제1동맹국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마잉주 총통의 처지에서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편이 유리하다.
중국과 대만은 2010년 양안경제협력기초협의(ECFA)에 서명했다. 쌍방 간 관세 철폐를 골자로 하는 일종의 자유무역협정이다. 중국 처지에서 보면 대만은 국가가 아니지만 어쨌든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엄연히 관세를 받는 영토다. 유엔은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세계무역기구(WTO)는 “타이완섬, 펑후제도, 진먼현, 마쭈열도를 독립관세지역으로 인정”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한 대신 경제적 지위는 확보한 셈이다.
중국 대륙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원 대륙위원회 부주임을 맡고 있는 창가오는 대만 정부의 원칙을 이론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상당히 격식을 갖춰(사진 촬영, 선물 교환 등) 우리를 맞아준 창가오 부주임은 신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그는 완전한 영어를 구사하며 직설적으로 말한다. “일하는 방식이오? 정치는 옆으로 제쳐놓고 경제를 중심으로 사고하지요. 우리의 원칙은 ‘삼불(三不)정책’이라는 말로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즉 중국과 통일하지 않고(不統), 독립하지 않고(不獨),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不武)는 원칙입니다. 본래 정치적 문제들이 해결하기 가장 어렵습니다. 거기에 매달리면 대화가 더 어려워질 뿐입니다. 그래서 외교적으로 휴전을 선언한 것이죠.”
대만의 경영자들은 1980년대 개혁이 시작되자 정부의 허가가 떨어지기도 전에 서둘러 대륙에 진출했다. 현재 대만의 중국 투자액은 1천억 달러에 이른다. 홍콩을 경유하는 투자까지 계산한다면 2천억 달러에 달한다. 기업 이전도 활발해, 대륙에서 일하는 대만인이 200만 명(대만의 경제활동인구는 1100만 명)을 헤아린다.
산업시설 중국으로 대거 이전
대만에서 전자제품 제조업 혹은 기업서비스 업체(회계·전산 소프트웨어 등)에서 일하는 관리자들에게 중국으로의-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 출장은 일상이 되었다. 한 유명 전자회사 간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떠나야 한다. 몇 달씩 출장을 갈 때도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대륙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게 그에겐 곤욕이다. “출장을 가기 전에 ‘중국의 엔지니어와 관리자들을 믿지 말라’는 회사의 지침을 받는다. 그들 중 상당수는 능력 있는 사원임에도 우리는 그들을 멸시하는 태도로 대한다. 그들 중에는 힘든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도 많다. 노동자들은 좁은 기숙사에서 뒤엉켜 잔다. 우리는 노동자를 그런 식으로 대우하는 것에 부끄러워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선전의 폭스콘 공장이다.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노동자들이 줄줄이 자살을 하고 급기야 파업이 벌어졌다.(7) 이곳 상황이 전세계로 알려지자 대만인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대만인들이 가난한 사람을 깔보는 부자의 시선으로 중국인들을 바라보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대만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중국의 2배가 넘는다(대만은 1만9500달러, 중국은 7680달러).
가혹하든 어떻든, 경제 통합은 계속 진행 중이다. 과연 ‘차이완’(Chiwan)의 시대는 올 것인가? 그러나 대만인들은 중국에 대한 태도와 무관하게 한국 언론이 만들어낸 이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경제학자 스테판 시에니프스키와 피에르 무시는 “중국의 상위 15개 수출 기업 중 7개가 대만 기업 계열사”라고 말한다.(8) 대만인 처지에서 보면 중국에 대한 투자 열기는 산업시설의 대규모 이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남부 지역이 특히 그렇다.
항구도시 가오슝이 한 예다. 첸추 시장의 강력한 개발 의지와 건설 붐에도 불구하고 도시 곳곳에 많은 땅이 방치돼 있다. 국민당 정권 밑에서 투옥을 불사하며 싸워온 민진당의 첸추는 1996년부터 가오슝 시장을 맡고 있다. 첸 시장이 지난 몇 년간의 변화를 설명한다. “가오슝에는 저임금에 의존하는 중공업(화학·제철 등)과 제조업(기계·섬유·장난감 등)이 발달했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사회정의, 즉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잔업수당 등을 요구하자 기업들은 중국이나 동남아시아(베트남 등)로 공장을 이전하기 시작했다.” 첸 시장은 중국 정부에만 책임을 돌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장 이전을 결정하는 것은 금융자본이다. 한탄해봐야 소용없다. 어쨌든 우리는 그처럼 환경을 극심하게 오염시키는 공장들을 유지할 마음이 없다.” 가오슝은 이제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제1의 컨테이너항이던 가오슝은 이제 9번째로 밀려나고 말았다.
타이베이의 창가오 부주임도 이런 현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어차피 제로섬게임이기 때문에 중국과의 경제관계가 균형을 찾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대만 전자산업 생산이 2배로 늘었다. 핵심 부품은 대만에서 생산하고 조립은 중국에서 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농업·수산업·관광산업 등 성공 사례를 얼마든지 들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제시한 통계 수치는 믿을 만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갈수록 늘어만 가는 실업자 수도 포함돼 있었다.
반대 입장에서 보면, 중국으로의 산업 이전은 저임금에 의존하는 경제모델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경제 시스템이다 보니- 특히 정보기술(IT) 산업- 투자 촉진을 위한 감세 혜택이 많고 외국(미국·일본 등) 주문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줄어드는 일자리, 젊은이들 직격탄
대만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연구자 탕기 르프장에 따르면, 이 시스템의 가장 큰 피해자는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대학에서 4년간 공부하고 사회에 나오면 금방- 일주일에서 한 달 안에- 일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월급은 고작 2만2천~2만5천 신대만달러(NTD)(84만~95만 원)에 불과하다. 공식 최저임금은 한화로 약 67만원이다. 그들의 희망은 대륙으로 건너가서 일하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중간관리자로 일하며 조금 더 많이 월급을 받을 수 있다. 자연히 이들 사이에 중국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형성되고 있다(상자 기사 참조).
대만노동조합연맹의 비좁은 사무실 안에서 시차오시엔 위원장과 시에찬치 사무총장은 젊은 대졸자에게도 예외가 아닌 저임금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설명한다.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다.” 넥타이도 양복도 입지 않은 두 사람은 노조 활동이 합법화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라 했다. 전체 임금노동자의 78%가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대만이 현재 겪는 어려움에 대해 과장 없이 말했다. “법정 노동시간은 40시간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45~48시간을 일한다. 중국과 다를 바 없다. 잔업수당도 나오지 않는다.” 휴가는 어떨까? 입사 1년째는 7일, 3년째부터는 10일, 5년째부터는 14일을 받는다. 실제로 그런지는 확인해봐야 한다.
중국 사회 동요, 대만에 영향 미칠까
며칠 뒤 우리는 친구 집에 들렀다가 만난 핑판이라는 여성을 통해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그녀는 조그만 회사에서 동료 2명과 함께 산업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노동시간을 물어보자 곧바로 ‘8시간’이라고 대답한다. 아마 8시간 근무에 대해서만 임금을 받는다는 말일 게다. 그녀는 자신이 매일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하다가 결국 먼저 한 말을 수정했다. “하루에 최소한 10~12시간을 일해요. 주어진 일을 모두 마치고 퇴근하는 게 규칙이기 때문이죠.” 사장이 부르면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회사로 달려가야 한다. 야근도 한다. 회사 관행을 존중해야 하고, 위계질서에 복종해야 한다. 튀는 행동은 금물이다. 앞에서 인터뷰한 간부의 말에 따르면, 유명 대기업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본 기업의 피라미드식 위계구조와 비슷해 보인다. IT 기업에서는 상사보다 동료들로부터 받는 압박이 더 크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창의적으로 일한다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노동조합연맹 사무실에서 임금 인상과 해고 반대를 외치는 시위대의 사진을 보긴 했지만 연맹의 위상은 아직 주변부에 머물고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타이베이101’ 빌딩 앞에서 ‘타이베이를 점령하라’ 시위가 며칠 동안 이어졌지만 별 성과가 없었다. 대만 젊은이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르프장은 말한다. “독재시대의 무게가 여전히 대만 시민사회를 짓누르고 있다. 좌파적인 비판은 아카데믹한 동아리나 활동가들 사이에서나 들을 수 있다. 과거에는 반공주의를 내세운 정권에 의해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현 교육제도와 유교적 가치들이 여전히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에 기존 질서에 대한 문제제기가 쉽지 않다.”
현 정부는 이런 순응적 분위기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동요가 대만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 그렇게 되면 적으로 등 돌린 두 형제 사이에 새로운- 이번엔 즐겁게- 반전의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
글 / 마르틴 뷜라르 Martine Bulard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자.
번역 / 정기헌 jinougy@naver.com
(1) Hsiao Hsin-Huang Michael, ‘East Asian middle class in comparative perspective’, Institute of Ethnology, Academia Sinica, 타이베이, 중화민국.
(2) 당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홍콩·싱가포르·대만이 ‘네 마리의 용’이라고 불렸다.
(3) Peng Ming-min, <자유의 맛>, Editions René Viénet, 블레이, 2011.
(4) 대만(중화민국) 독립을 인정하는 국가는 23개국뿐이다.
(5) François Godement, ‘베이징 지도자들에 대한 대만의 도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0년 4월호.
(6) Martine Bulard & Jack Dion, <중국-인도: 용과 코끼리의 경주>, Fayard, 파리, 2010 참조.
(7) 이자벨 티로, ‘무구하던 농민공 분노의 대장정에 나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9월호.
(8) 베이징 주재 프랑스 대사관 상무부 간행물, <Ch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