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투쟁해요!”

2023-01-31     아니 에르노 l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대규모 사회 투쟁은 결코 어떤 요구사항을 목소리 높여 요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삶을 변화시키기를 바라는 집단의 열망을 세상에 드러낸다. 사회 투쟁 참여자를 사로잡아 변화시킨다. 작가 에르노도 1995년 11~12월 시위 때 똑같은 경험을 했다.

 

여느 때처럼 우리는 어떤 일이 다가오는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자크 시라크가 ‘사회 격차’를 정조준하며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는 서민 우파를 구현했다. 적어도 자신을 지지하는 서민 유권자층에 관심을 기울였으니까. 현 정권이 추진 중인 연금개혁과 달리, 공공부문·민간부문 간 연금제도 단일화 등 다양한 개혁 내용이 담긴 1995년 사회보장 개혁은 사전 발표나 공론 과정이 생략됐었다. 1995년 11월, 정부의 개혁안이 별안간 날벼락처럼 날아들었고, 우리가 사태를 파악하기까지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분명했던 것은 당시 개혁안의 설계자인 알랭 쥐페 총리의 거만함이었다. 모든 것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보이는 교만함, 그래서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마치 우리 모두가 어리석은 민중이 된 듯한 수치심에 잠기게 되는 그런 교만함 말이다. 당시 우리가 가장 용납하기 어려웠던 점이 바로 그 교만함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무엇보다 일단 당당하게 고개를 들 필요가 있었다.

 

대규모 파업, 새로운 역사를 쓴 진귀한 순간

1995년 11월 24일, 쥐페의 개혁안에 맞선 모든 공공부문이 결집한 대규모 파업이 시작됐다. 철도도, 지하철도, 우체국도, 학교도, 모두 문을 닫았다. 매서운 추위가 맹위를 떨쳤다. 당시 나는 새로운 역사가 쓰이는 매우 진귀한 순간을 함께 하고 있다는 막연한 흥분에 사로잡혔던 기억이 난다. 이번만은 노동자가 역사의 주역이었다. 한 주 동안 우리가 마침내 혁명 전야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한 이가, 나 혼자는 아니었으리라. 1968년 5월 혁명과 달리, 이번에는 모든 시민이 한마음으로 파업을 지지했다. 파업을 하지 않는 민간부문의 노동자들은 공공부문의 노동자들에게 “당신들은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파업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돌연 우리는 1983년(1983년 6월 유럽 이사회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유럽정치협력을 통해 유럽공동체를 유럽연합으로 변환시키는 등의 내용이 담긴 성명서를 발표했다-역주) 이후의 시대, 곳곳에서 정치의 종언이 선언된 그때부터 끝이 보이지 않고 이어지던 저 어두운 터널 속을 벗어났다. 철도원과 프랑스전력공사(EDF) 직원, 우체부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경제의 지배에 마침내 반기를 들었고, 세계 질서에 도전했다. 

얼마 뒤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세계화를 지향하는 선진국 중심의 세계 경제 포럼에 맞서, 2001년 출범한 반세계화를 기치로 내건 국제회의-역주)이나 시애틀, 제네바의 거리에 울리던 구호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가 당시에도 역시 우리의 귓전을 울렸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95년 12월의 그 날에 이르러 마침내 프랑스인들이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장이, 교역의 세계화가, 자유주의를 표방한 유럽 통합이 시민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프랑스인들은 비로소 유럽통합과 사회권의 해체의 연관성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유럽연합집행위원회에 대한 양보로 이뤄진 수많은 개혁 조치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992년, 나도 다른 많은 이들처럼 마스트리히트 조약(유럽공동체(EC)가 시장 통합을 넘어 정치·경제적 통합체로 발전하기 위한 기반을 제공한 유럽통합조약-역주) 비준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반대표를 행사했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옹호한 유럽통합은 그것이 초래할 모든 결과들(경쟁, 공공서비스 해체)과 마찬가지로 거의 무용한 것에 불과했다.

처음에 시민들은 정권을 잡은 사회주의 세력이 앞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들이 약속한 것처럼 말이다. 1981년, 연 5주 유급휴가 도입, 퇴직 연령 60세 감축 등 수많은 중대한 사회정책이 추진됐다. 하지만 이어 사실상 신자유주의 전환을 의미하는 ‘긴축체제로의 전환’과 함께, 사회주의 세력은 시민들이 기대한 저 1936년 인민전선(급진당, 사회당, 공산당 등 광범위한 좌파 정당들 간 연합-역주)의 모습으로부터 철저히 멀어져갔다. 

내가 이런 좌파 진영과 결국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 계기는 바로 1991년 걸프전이었다. “무기가 말을 할 것”이라고 선언하던 미테랑의 냉랭한 말투와 미국과 한 편에 서서 군사 개입에 나선 프랑스군, 바그다드 공습이 낳은 수천 명의 사상자, 그리고 ‘사막의 폭풍’ 작전을 향한 미디어의 열광 같은 것들 말이다. 변심한 좌파 세력과 논객, 전문가들. 1995년, 그들 모두가 쥐페를 위해 동원됐다. 쥐페의 개혁안을 위해 지원사격에 나선 인물 중에는, 전 보건장관 클로드 에뱅처럼 미셸 로카르를 지지하던 세력들도 끼어 있었다. 니콜 노타도 정부의 편에 섰는데, 그녀는 파업 시 최소한의 서비스 유지 조항을 교통 부문에도 도입해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했다(11월 24일 시위 도중 그녀는 CFDT 조합원들로부터 야유를 당했다). 또한 공영 라디오 방송 <프랑스 앵테르>를 포함한 모든 유력 매체들이 정부의 개혁안을 지지했다.

 

작가가 되는 데 영향을 준 사회투쟁

그 무렵 좌파 지식인들은 분열하기 시작했다. 일부 좌파 지식인은 정부 개혁을 지지하는 청원서에 서명을 했다. 서명자 중에는 철학자 폴 리쾨르와 사회학자 알랭 투렌, 피에르 로장발롱은 물론, 유력 매체 <에스프리>의 편집진으로 활동하는 조엘 로망과 올리비에 몽쟁도 있었다. 평소 리쾨르의 작품을 경애하던 나는 ‘세상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력’을 갖춘 엘리트층과 자신의 열정, 분노, 욕망 따위에 충실한 대중으로 세상을 가르는 그의 글을 읽고는 큰 충격에 빠져 격분했다. 

잠시 피에르 부르디외가 리옹역에서 철도 노동자들을 향해 했던 훌륭한 연설의 한 구절을 떠올려보자. 사실상 2023년의 현실과도 별반 다를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이처럼 양식 있는 ‘엘리트층’의 장기적 비전과 민중 혹은 그 대변자들의 근시안적인 충동을 서로 대비하려는 태도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반동적 사상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이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당시 파업 지지 서명 운동을 벌인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나도 서명에 동참했다. 당연히 그들의 진영을 지지했기 때문이었다.(1) 파업 지지 운동은 내가 지적인 해방을 이루고, 작가가 되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누군가의 곁에서 사회투쟁에 참여할 기회를 의미했다. 

나는 1971년 『상속자들』을 읽고 난 뒤, 비로소 1974년 출간된 작품 『빈 옷장』을 쓸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이어 『구별 짓기』, 『국가 귀족』, 그리고 쥐페의 개혁안 추진 2년 전에 출간된 프랑스 사회에 대한 묘사이자 분석인 『세계의 비참』같은 책들을 줄줄이 섭렵했다. 부르디외는 파업 지지 운동 같은 정치 참여를 통해, 결코 공적인 삶의 방관자가 돼서는 안 되는 작가의 책무를 몸소 보여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사회학자가 사회투쟁에 참여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그의 목소리를 곁에서 듣는다는 것은 내게 무한한 기쁨과 해방감을 선사했다. 쥐페가 우리에게 허리를 굽히기를 원했다면, 부르디외는 우리에게 당당하게 고개를 들도록 했다.

대개 장기간의 혹독한 파업은 일상의 흐름을 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1995년 파업의 특이한 점은, 일부 시민이 자가용 외에 다른 교통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일터로 출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서로 연대하고, 각종 기발한 묘수를 생각해냈다. 즉흥적으로 카풀을 조직했고, 자전거 판매율도 급증했다. 당시 파리에 살던 내 아들도 도시 외곽의 일터로 출근하기 위해 산악자전거를 사려고 했다. 아들이 자전거를 사러 대형마트에 갔을 때 유명 사이클 선수 풀리도르가 직접 제품을 홍보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우리 모두는 특히 무수히 걸어 다녔다. 라데팡스 지구와 그랑드 아르메 거리 사이, 뇌이 다리 위처럼, 평소 인적이 드문 인도 위를 많은 사람들이 촘촘히 줄지어 걸었다. 매서운 추위가 살을 에고, 눈이 내렸다. 나는 작품 『세월』 속에서 그 겨울의 행진을, 마치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일종의 기억 행위(Act of memory)처럼 묘사했다. 군중이 버스도, 지하철도 없는 도시를 힘겹게 행군하는 동안, 그들의 육체 속에는 일종의 신화가 깃들었다. 이전에는 경험한 적이 없는 길이 구전될 위대한 파업의 신화 같은 것이 말이다.

 

우리의 실존을 뒤흔드는 연금개혁안

나는 저녁에 <르몽드>지를 읽으면서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마치 기사의 내용이 현실이나 현재의 수준에 차마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것은 특히 모든 사회적 변혁이 일으키는 감정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모든 신문과 라디오는 논증적인 칼럼이나 투쟁 노동자들에 대한 혐오로 넘쳐흘렀다. 몇 년 뒤 ‘물어뜯고 달아나는 신문’이라는 별명을 가진 언론매체, <PLPL>(2)이 창간됐을 때 나는 얼마나 기뻐했던지.

당시 정부의 개혁안에 그처럼 신속하고 강력한 투쟁으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전부 FO(노동자의 힘)의 마르크 블롱델과 CGT(프랑스노동총연맹)의 베르나르 티보 같은 두 노조 지도자의 역할 덕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훗날 SUD(민주단일연대)(1995년 이후 중요한 투쟁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를 창설하게 될 CFDT(프랑스민주노동연맹)의 이탈 세력 역시 중대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쥐페의 개혁안이 프랑스 사회에 미친 큰 충격파가 없었다면 이와 같은 투쟁 운동은 결코 널리 이해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쥐페의 개혁안은 나치 해방 이후 프랑스 사회가 쟁취한 사회보장제도, 연금제도, 한 마디로 매우 근본적이면서도 심지어 우리의 실존과도 깊이 연관된 것들을 마구잡이로 뒤흔들었다. 쥐페의 개혁은 공무원과 공기업의 노동자를 겨냥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사람들은 국가가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겨누며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실은 모든 시민의 삶의 방식이라는 점을 잘 알았다(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지난 20년에 걸쳐 벌어진 일이라는 것도 잘 안다). 

1995년의 시위대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 그들은 ‘사회적 기득권’(모든 노동자가 쟁취한 집단적 권리를 지칭하는 표현-역주)을 수호하기 위해 ‘모두가 다 함께!’라는 노래를 연호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런 표현을 더 이상 듣기 힘들다. 수십 년에 걸친 경제 자유주의가 이것을 수치스럽고 비난받을 만한 표현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것이 우리의 목숨과 삶이 걸린 개념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잊히고, 대신 부유층의 기득권만 합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법적 연금 개시 연령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조절해야 할 변수로 이해된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다. 

이제는 국가가 시민의 삶에 대해 모든 권리를 누린다는 사실, 심지어 국가가 우리가 마침내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시점까지 마음대로 미룰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마크롱이 추진 중인 개혁이 공격하려는 것은 다름 아닌, 휴식과 자유, 즐거움을 즐길 수 있는 희망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나이와 무관하게 모든 활동인구가 마크롱의 개혁에 함께 반기를 드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확실히 부유층의 지지만은 기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대통령의 탄탄한 지지층이었던 부유층은 이번 개혁으로 인해 조금도 삶에 타격을 입을 일이 없으니 말이다.

1995년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마지막 노동운동에 대한 승리의 기억을 남겨줬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절반의 승리에 불과하다. 당시 쥐페 정부는 공공부문 연금제도를 단일화하려던 계획을 포기했지만, 사회보장제도를 재장악하기 위한 다른 정책들을 통과시켰다. 게다가 결국 우리는 미래를 변화시키는 데 실패했다. 병원, 학교, 대학에서 벌인 숱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25년에 걸친 맹렬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학교, 대학, 병원 등 수많은 공공서비스가 해체된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더 이상 고개 숙이지 말아요” 

오늘날 우리는 불안정한 노동계약과 어처구니없는 노동조건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의 분노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이제는 그 누구도 과거 교육의 상업화에 반대해 고등학교나 대학을 봉쇄했던 청년들, 오늘날 곳곳에서 불필요한 정부의 대규모 계획을 규탄하거나 기후변화 대책을 요구하며 투쟁을 벌이는 청년들에게 실망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 

2017년 ‘미투 운동’ 이후, 페미니즘도 놀라운 동력을 되찾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날 서민층에 대한 괄시가 극에 달했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 대신 원수를 갚아주려 한다고 비난하는, 내가 동족이라고 부르는 서민층이 푸대접받고 있다. 그러니 지금의 투쟁이 어떻게 끝나든지 간에, 또 다른 분노의 바람이 반드시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지난 1월 19일 우리는 놀라운 투쟁의 현장을 목도했다. 그날 아침 라디오를 켰을 때, 아침 방송 진행자들이 주고받는 다소 간사한 질문 대신 파업으로 인해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각종 재난을 알리는 보도 대신 아름다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듣고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그리고 그날 저녁 프랑스 전역에서 정부의 연금개혁에 맞서 거리 행진에 나선 사람이 무려 2백만 명에 달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이지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1995년 겨울, 그 추운 밤에 대한 기억이 종종 너무나도 오래된 꿈처럼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2023년 레퓌블리크 광장에 미처 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운집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다시 한번 폴 엘뤼아르의 시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들은 불과 몇 명뿐이었네

전 지구상에 그들은 각자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군중이 됐네.” 

 

잠시 이 자리를 빌려, 모든 시위 참가자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 더 이상 고개 숙이지 말기로 해요. 

 

 

글·아니 에르노 Annie Ernaux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Pierre Bourdieu, 『Contre-feux 맞불』, Raisons d’agir, Paris, 1998년. Frédéric Lebaron, Dominique Marchetti, Julien Duval, Christophe Gaubert, Fabienne Pavis, Le 『Le “Décembre” des intellectuels français 프랑스 지식인들의 ‘12월’』, 1998년도 참조.
(2) 편집자주. ‘물어뜯고 달아나는 신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PLPL>은 프랑스어로 ‘읽히지 않은 것을 읽기 위해’라는 뜻을 지닌 ‘Pour lire pas lu’라는 표현의 약자다. 2000년 6월 창간된 미디어 비평 신문으로, 2006년 <Le Plan B>로 이름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