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탈리아공산당은 해체됐는가

2023-01-31     앙투안 슈와르트 l 정치학자, 작가

이탈리아공산당(PCI)은 한때 서유럽 최강 정당의 위세를 누렸다. 당원은 300만 명에 달했으며, 위세는 미국도 두렵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1991년 4월 정치적 정체성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해체됐다.

 

극좌주의는 공산주의의 소아병이고, 순응주의는 노년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유럽 최강의 정당이 1991년 2월 해체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무려 70년이나 건재했던 이탈리아 공산당(PCI,  Parti Communiste Italien)의 창립자인 철학자 안토니오 그람시와 영예로운 당원들은 당명을 변경함으로써 당의 정체성과 역사를 버렸다. 게다가 당명 변경은 자발적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결정 과정에서 비통함은 있었겠지만 말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정확히 알려면, 2차 세계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역사학자 페리 안테르슨은 당시 이탈리아 좌파는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사회 변화를 촉구하면서 민중운동을 주도했다고 설명한다.(1) 해방 직후 팔미오 톨리아티가 PCI의 서기장을 맡으면서 당의 기조가 바뀌었다. 혁명을 선동하는 대신 국가의 단합을 도모하기로 한 것이다. 단합을 위해, 노동자 계층이 정치에 참여하고 경제적·사회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PCI는 서민친화적이고, 지성과 문화 확산에 기여하는 ‘대중의 당’으로 인식됐다.

그럼에도 반대 진영에서는 여전히 PCI를 견제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1947년 동서대립 초기부터 자본주의 진영의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이 이탈리아에서 집권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2) 그래서 후견주의 정치를 펼치고 심지어 마피아 조직까지 정치에 끌어들이면서 정부의 분열을 철저히 차단했던 기독교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PCI는 제2당으로 머무르며 이탈리아 연립정부에서 배제됐다.

 

경제위기와 함께 당의 위기도 시작돼

1960년대 말부터 이탈리아 국가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이탈리아의 만성적인 분쟁이 본격적으로 사회 곳곳에 확산된 것이다. 파업, 점거, 경찰과의 대치가 10년 동안 이어지면서 이탈리아는 붉게 물드는 듯했다. 로타 콘티나, 포테레 오페라이오 등 새로운 극좌조직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국가 전복에 나섰다. 일부 극좌파는 무장공격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무분별한 탄압을 자행했다. 당시 대중의 관심은 붉은 여단 등 일부 조직이 벌인 테러 소행에 그쳤지만, 실상 여러 폭력사건이 극좌조직과 연루되어 있음이 드러났다.(3) 1969년 밀라노 폰타나 광장의 테러와 1980년 볼로냐 폭파 테러 등 폭력적인 정치 분쟁을 일으켜 공포 분위기를 조장하는 ‘긴장 전략’은 이탈리아가 권위주의 체제로 변모할 것이라는 우려를 낳았다.

1973년 칠레 쿠데타 이후, PCI의 서기장 엔리코 베를링구에르는 그간 적대시했던 기독교민주당과 ‘역사적 타협’을 제안해 민주적 제도를 유지하면서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반공주의가 정치권에 확산되는 가운데, PCI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PCI는 1976년 의회 선거에서 1,261만 4,650표를 얻어 역대 최고 득표율 34.37%를 달성했고 당원 수도 185만 명에 달했다. 그럼에도 ‘진취적이지 못한 관료적 조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으며, 점차 좌파 내 주도권이 약해지고 저항을 받기 시작했다.

게다가 유럽에 닥친 경제위기는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전역에 보수주의로 전향하려는 분위기를 강화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80년 가을 피아트(Fiat) 공장의 대규모 파업은 35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또한 유럽통화제도의 수립과 경제정책 재정립, 실업률 증가 속에서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임금인상 요구를 자중하면서 ‘인플레이션과의 투쟁’에 동원됐다.(4) 1984년 베티노 크락시 총리는 임금 물가연동 제를 폐지했다. PCI는 국민투표를 요구했으나, 결국 물가연동 제를 지키지 못했고 큰 타격을 받았다. 1984년은 베를링구에르 장례식에 애도를 표하는 인파가 보여주듯, PCI의 절정기이자 쇠퇴기가 시작되는 해였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PCI도 시나브로 변모하고 있었다. 간부와 당원의 세대교체 속에 당의 역사도 희미해졌다. 또한 행정구역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새로운 정책 전문가들을 영입하면서, PCI는 노동자들과 거리가 멀어졌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인물들이 PCI 지도부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당은 모든 사회계층의 지지를 받기 위해, ‘포괄정당’의 비전을 추종하기 시작했다.(5) 또한 산업과 노동시장이 변하면서 노동자의 영향력과 입지도 약해졌다.(6)

TV 보급률의 폭발적인 증가와 대중매체의 발전 속에, PCI가 공고히 다졌던 정치, 문화의 영향력이 취약해졌다. 이런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에이나우디 출판사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주장했던 그람시를 비롯한 대문호의 저서를 출간했던 이 대형 출판사가 기업가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에이나우디를 인수한 인물은, 바로 이탈리아 최초 민영방송 <카날 5(Canale 5)>를 설립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였다.

 

쇄신인가, 변질인가?

1980년대 말, PCI 내부에서도 당의 쇠퇴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세력이 동요하고 환멸감이 커졌던 것이다. 1987년 총선에서 PCI의 득표율은 26.5%다. 낮은 것은 아니었으나, 전성기에 비하면 충격적인 결과였다. 지지율은 하락하고, 이탈리아 사회당(PSI)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PCI로서는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바로 이때 등장한 구원투수가 아킬레 오케토다. 1988년, 52세의 나이로 PCI의 서기장에 임명된 오케토는 당을 현대적으로 변모시키려는 개혁가들과 함께 당의 쇄신을 주도했다.

오케토는 당에 자유주의의 새바람을 일으키고자 했다. 그는 1789년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맞이해 “우리는 자랑스러운 89년 혁명의 후손들”이라고 칭했다. 사회분쟁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오케토는 기득권층과 충돌을 최소화하고 점진적으로 민주적 진보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전진을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버렸다. 정치 개혁을 열망했던 오케토는 중도좌파 국제 연맹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PCI의 가입을 추진했다. PCI는 위대한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통일 유럽을 지향하며 주창했던 ‘유럽합중국’과 유럽통합을 주도했던 경제학자 자크 들로르가 닦아놓은 ‘사회주의를 향한 유럽의 길’을 추종했다. ‘현대적’으로 보이려면 정부의 역할도 재정립해야 했다. 오케토는 “정부는 간섭을 최소화하고, 다양한 프로젝트를 제공하며 민, 관의 다양성을 고려해 규칙을 정립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7) 

개혁가들은 이런 변화를 통해 당의 쇠퇴를 막고 더 많은 유권자들을 확보하며 지지세력을 결집하려 했다. 또한 신뢰감을 높여 이탈리아 연립정부의 구성원이 되고자 했다. 그러나 변화를 시도하면서 공산주의를 지표로 삼는 것은, 부르주아 언론이 종종 지적했듯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후 소비에트 체제의 붕괴로 인해 개혁가들은 조급해졌고, 급기야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 즉 해체의 길을 선택한다. 

1989년, 오케토는 갑자기 당명 변경을 제안했다. 내부적으로 어떤 논의도 없었기에 당원들은 당황했다. 지도부는 강경했고 치열한 논쟁이 시작됐다. 나니 모레티 감독의 <라 카사(La casa)>(1990) 등 여러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찬반 논의 풍경을 보여준다. 언성을 높이거나 흐느끼는 이들에게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공산주의는 이제 폐기해야 하는 고물에 불과한가? 아니면 자랑스럽게 계승해야 할 유산인가? 당명을 교체한다는 것은 당의 정체성과 역사를 버린다는 것이 아닌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투쟁가들은 두려웠다. 이들에게 공산주의는 그들의 삶이었으며, 공산주의자는 그들의 정체성이었기 때문이다. 

1990년 3월 볼로냐 의회에서 당 지도부는 새로운 조직 창립에 대해 다수 의원들의 동의를 받았다. 역사학자 귀도 리구오리는 조직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정통성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8) 분열을 막기 위한 결속력과 지도부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PCI 개혁가들의 계획은 ‘순응주의’ 덕택에 일단 실행됐다. 당명 교체를 반대했던 투쟁가 수천 명이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탈당한 것이다. 

이듬해, 떡갈나무를 상징으로 하는 좌파민주당(PDS, le Parti Démocrate de la Gauche)이 창립됐다. 일부 당원들이 PDS에서 나와 공산주의재건당(PRC, le Parti de la Refondation Communiste)을 창설했으나, PDS에 비하면 규모가 너무 작았다. 하지만 당이 재탄생하는 순간, 서민 지지층은 사라졌다. PDS는 중도좌파와 연합해 로마노 프로디(1996~1998), 마시모 달레마(1998~2000) 총리를 배출하면서 권력을 행사했다. 이는 당 존립의 근간을 포기한 대가였다. PCI가 해체되면서 이탈리아 좌파의 저항력이 많이 약해졌다. 결국 1994년 전진이탈리아당을 창당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전면에 나서면서, 이탈리아 좌파는 급부상한 우파에 판세를 빼앗겼다.

정치철학자 랄프 밀리밴드는 보수주의 사상이 노동자 계급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이유는,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의 언행으로 인해 정치의식이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9) 당명과 당의 상징을 바꿈으로써 정당의 근간을 포기하고, 이로 인해 정치, 노조, 지성의 영향력이 취약해졌다. 과거 고유의 세계관을 제시하고, 사회에 문화를 전파하며 열정적으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투쟁했던 공산주의 생태계는 이렇게 무너진 것이다. 

 

 

글·앙투안 슈와르트 Antoine Schwartz
정치학자, 작가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Perry Anderson ‘An invertebrate Left’, <London Review of Books>, vol.31, n°51, 런던, 2009년 3월 12일. 
(2) Eric Hobsbawm, 『Interesting Times, A twentieth Century Life』, Pantheon Books, 뉴욕, 2003년. 
(3) Frédéric Attal, 『Histoire de l’Italie depuis 1943 à nos jours 1943년부터 오늘까지 이탈리아의 역사』, Armand Colin, 파리, 2003년. 
(4) David Broder, ‘The Italian Left’s Long Divorce from the Working Class, <Jacobin>, 뉴욕, 2021년 2월 14일, http://jabocinmag.com
(5) Piero Ignazi, 『Dal PCI al PDS PCI에서 PDS로』, Il Mulino, 볼로냐, 1992년.
(6) Julian Mischi, ‘Comment un appareil s’éloigne de sa base 조직은 어떻게 그의 지지층에서 멀어지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1월. 
(7) Achille Occhetto, 『un indimenticabile ‘89 잊지못할 89년』,Feltrinelli, 밀라노, 1990년. 
(8) Guido Liguori, 『Qui a tué le PCI? 누가 PCI를 죽였는가?』,Editions Delga, 파리, 2011년. 
(9) Ralph Miliband, 『L’Etat dans la société capitaliste 자본주의 사회의 정부』(1969), Maspero, 파리, 1973년.